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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70권, 광해 5년 9월 25일 경진 4번째기사 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김지남·임취정·정인홍의 관직 제수와 임취정에 대한 평가

김지남(金止男)을 사간으로, 임취정(任就正)을 형조 참의로, 【임취정은 임국로(任國老)의 아들로 거칠고 비루한 무뢰배이다. 임진년에 주서로서 한림 김선여(金善餘)·조존세(趙存世), 주서 박정현(朴鼎賢) 등과 어가를 호종하여 영유현(永柔縣)에 이르렀을 때, 왜적의 선봉이 가깝게 닥쳐오는 것을 보고는 도주하자는 의논을 앞장서 내어, 세 사람과 함께 사초(史草)를 태우고 밤에 도망쳤다. 선조(宣朝)가 조정에 돌아온 뒤에 김선여는 수치스럽게 여겨 벼슬을 하려 하지 않았으나, 임취정 등은 힘을 다해 출세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서관(庶官)에 제수하는 것만을 허락하고, 청현직(淸顯職)에 의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취정은 여러 차례 외직에만 보임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이첨의 세력이 융성하자, 드디어 조존세와 아울러 현직에 등용되었다. 조존세는 여러 차례 삼사의 장관에 의망되었으나 왕이 임명하지 않았는데, 임취정은 자기 형인 임수정(任守正)의 첩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소용(昭容)이 되었다. 소용은 용모가 뛰어나고 약아서 일에 익숙했으므로 왕이 총애하였다. 이로써 임취정이 오래지 않아 승지가 되었다. 왕이 여악(女樂)과 나희(儺戲)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매번 큰 거둥이 있을 때면 반드시 그것을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문에 총애가 나날이 높아가 10년 안에 이이첨과 거의 비슷하게 귀해져서, 심지어는 서로 알력이 있기까지 하였다. 】 정인홍을 다시 우의정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78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250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以金止男爲司諫, 任就正爲刑曹參議【任就正國老之子, 麤鄙無賴。 壬辰年爲注書, 與翰林金善餘趙存世、注書朴鼎賢等, 扈駕至永柔, 見賊鋒逼近, 首倡逃走之議, 與三人焚史草夜逃。 宣廟還朝, 金善餘恥不求仕, 就正等極力干進。 宣廟許除庶官, 而不許擬淸顯, 故就正屢補外。 至是爾瞻勢盛, 遂倂存世顯用。 存世屢擬三司長官, 王不授。 就正仍以其兄守正妾女, 納後宮爲昭容。 昭容有殊色, 慧黠習事, 王嬖之。 就正未久爲承旨。 知王好女樂、儺戲, 每遇大擧動, 必請行之。 由此, 寵任日隆, 十年之內, 與爾瞻埒貴, 至於相軋矣。】, 復以鄭仁弘爲右議政。


  •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78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250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