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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69권, 광해 5년 8월 11일 병신 11번째기사 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이이첨과 김상궁 개시에 관한 비교 평가

이이첨(李爾瞻)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녹훈(錄勳)한 이래로 이이첨이 이미 높은 품계에 올랐기 때문에 삼사의 장관이 될 수 없었으며 또 판서의 직임은 대임할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단지 훈봉(勳封)만으로 관각을 겸대하여 비록 권력 있는 직위에 있지는 않았지만 항상 조정의 논의를 주도하여, 한때의 청현직에 있던 자들의 전후의 논핵을 모두 자신이 재단하여 처리하였다. 그래서 사대부들의 거마가 골목이 차고 넘치도록 찾아와서 밤낮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두려워하여 빌붙는 사류들도 또한 많았다. 이때 이르러 비로소 이정귀를 대신하여 예조 판서가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하여 오로지 과거에 합격시켜주는 것으로써 후진들을 낚자, 이익을 탐하고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그의 문에 모여들었는데, 이이첨은 곡진하게 예로 그들을 접대하며 사림이라고 불렀다. 대각이 먼저 발론하기 불편한 큰 의논이 있을 때마다 모두 스스로 소장의 초안을 잡아 그의 추종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올리게 하고는 초야의 공론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심각하고 음험한 함정에 관련된 것은 모두 밀계(密啓)를 사용하였는데, 가장 은밀한 것은 언문으로 자세하게 말을 만들어 김상궁으로 하여금 완곡히 개진하게 하여 반드시 재가를 얻어내고서야 그만두었다. 그가 항상 하는 말이 "사대부로서 서인이니 남인이니 소북이니 이름하는 자들은 모두 역적 이의에게 마음을 두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을 꾀하는 자들이므로 장차 화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신들처럼 대북이라고 이름하는 자들만이 오로지 주상을 위하여 충성을 바치길 원하므로 주상께서 오직 의지하고 기대야 할 대상입니다." 하였다. 상이 일찍이 은밀히 묻기를 "폐모론이 발론되었다가 중지되었으니 어쩌면 천명이 이의에게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대비가 복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하자, 이이첨이 아부하여 아뢰기를 "박승종(朴承宗)유영경(柳永慶)의 족당으로서 거의 무신년에 죄를 얻을 뻔하였는데 신과 사돈간인 데 힘입어 풀려나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총애를 입게 되어서는 은혜를 배반하고 혐의를 낚아 오로지 신이 하는 것들을 파괴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습니다. 무릇 큰 논의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모두 이 사람이 저지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은밀히 그 글을 박승종에게 보이자, 박승종은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변명하였으나 오히려 큰 논의를 그르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상 또한 삼창(三昌)을 일체로 인척이라고 하여 박승종을 총애하고 대우하는 것이 이이첨의 버금이었는데, 다만 그의 당파들만 소외시켰다. 이로부터 이이첨이 비록 힘을 다하여 폐모론을 담당했다 하더라도 매번 유희분박승종이 저지한다고 해명했는데, 상은 끝내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폐모론이 완수되기를 기대하면서, 그가 건의한 바를 들어주고 그가 천거하여 등용한 자들을 믿어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요로에 배치한 자들은 모두 그의 당파였는데, 박자흥(朴自興)유충립(柳忠立) 등 몇 사람만이 겨우 그 사이에서 용납되었지만 권력은 약하였다.

김상궁은 이름이 개시(介屎)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가 많았다. 춘궁의 옛 시녀로서 왕비를 통하여 나아가 잠자리를 모실 수 있었는데, 인하여 비방(祕方)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으므로 후궁들도 더불어 무리가 되는 이가 없었으며, 드디어 왕비와 틈이 생겼다. 세자빈 박씨가 들어올 때 이이첨조국필(趙國弼)과 은밀히 왕에게 아뢰어 선발했다. 빈으로 들어오게 되자 박승종박자흥이 친정아비와 친정할아비로서 왕에게 총애를 받아 유희분(柳希奮)과 더불어 세력을 끼고 이이첨을 견제하였는데, 이이첨이 크게 한을 품고는 두터운 예로써 상궁의 아비와 관계를 맺어 상궁과 통하였다. 상궁이 인하여 이이첨 및 여러 권행가(權倖家)를 출입하였는데, 매우 추잡한 말들이 있었다. 그의 지기(志氣)와 언론(言論)은 이이첨과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니, 항상 의분에 북받쳐 역적을 토벌하는 것으로 자임한 것이 비슷한 첫째이다. 그리고 상궁이 되어서도 호를 올려달라고 요구하지 않은 채 편의대로 출입하면서 밖으로 겸손을 보인 것과, 이이첨이 항상 조정의 논의를 주도하면서도 전조의 장이나 영상의 자리에 거하지 아니하여 밖으로 염정(廉靜)을 보인 것이, 비슷한 둘째이다. 뜻을 굽혀 중전을 섬기면서도 내면의 실지에 있어서는 헐뜯은 것과, 이이첨이 저주하고 패역한 일들을 모두 스스로 했으면서 남에게 밀어넘겨 도리어 토벌했다는 것으로 공을 내세운 것이, 비슷한 셋째이다.

이충(李沖)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충은 아우 이명(李溟)과 더불어 이량(李樑)의 손자였기 때문에 청망(淸望)에 조용될 수 없었는데, 모두 이이첨에게 빌붙어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현달하게 되자 스스로 궁궐에 내통하면서 다시는 이이첨만을 섬기지는 않았다.

유숙(柳潚)을 대사간으로, 김치(金緻)를 예조 참의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238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

○以李爾瞻爲禮曹判書。 自錄勳以來, 爾瞻已陞崇品, 故不得爲三司長官, 又判書無窠可代。 只以勳封, 兼帶館閣, 雖不處權位, 常主朝論, 一時淸顯, 前後論劾, 皆自裁處。 搢紳車馬, 充溢門巷, 日夜噂沓, 士類之畏怵投附者亦衆。 至是, 始代李廷龜爲禮判, 未幾兼大提學。 專以鬻科餌後進, 嗜利無恥之輩, 坌集其門, 爾瞻曲爲禮接, 號爲士林。 每有大議論, 臺閣之不便於先發者, 皆自草疏章, 分授其徒上之, 名曰草野公論。 其間深機險穽, 皆用密啓, 最祕者, 以諺書曲爲之說, 使金尙宮宛轉開陳, 必得旨而後已。 其言皆以爲: "搢紳之士, 號爲西人、南人、小北者, 皆屬心逆 , 謀危國家, 禍將不測。 獨臣等號爲大北者, 專爲主上願忠, 惟主上所倚仗耳。" 王嘗密問曰: "廢論垂發而中止, 豈天命在而然耶? 大妃有福而然耶?" 爾瞻附啓曰: "朴承宗柳永慶徒黨, 幾得罪於戊申, 賴臣與爲婚家, 救解得全。 今復得寵任, 背恩修嫌, 專以破壞臣所爲爲務。 凡大論之不得行, 皆此人所沮。" 王密以其書, 示承宗, 承宗惶懼自辨, 猶不以大論爲非。 王亦以三昌, 一體姻戚, 寵待亞於爾瞻, 而只疎斥其黨。 自是, 爾瞻雖極力擔當廢論, 而每以沮止爲解, 王終不悟, 猶冀其廢論之完, 其所建請薦用, 無不聽從信愛焉。 其布置要津, 大抵皆其黨與, 而朴自興柳忠立等數人, 僅容於其間, 然權力替矣。 金尙宮介屎, 年壯而貌不揚, 兇黠多巧計。 以春宮舊侍女, 因王妃得進御, 仍以祕方驟幸, 後宮無與爲伍, 遂與王妃却矣。 世子嬪朴氏之入也, 爾瞻趙國弼, 密白王選之。 及嬪入而承宗自興, 以親父、祖, 得寵於王與柳希奮, 挾勢傾爾瞻, 爾瞻大恨, 乃以厚禮, 交結尙宮之父, 通于尙宮。 尙宮仍出入爾瞻及諸權家, 頗有醜語。 其志氣、言論, 與爾瞻略相似, 常慷慨以討逆自任, 一也。 爲尙宮不求進號, 以便出入而外示退讓, 與爾瞻常主朝論, 而不居銓台, 外示廉靜者, 二也。 曲意事中殿, 而內實傾毁, 凡咀呪悖逆之事, 皆自爲而推於異己, 反以誅討爲功, 三也。 李沖爲吏曹參判。 與弟, 以李樑之孫, 不得調淸望, 而皆附爾瞻得進。 及其貴顯, 自通宮禁, 不復專事爾瞻矣。 柳潚爲大司諫, 金緻爲禮曹參議。


  •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238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