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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66권, 광해 5년 5월 17일 갑술 10번째기사 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신흠·서성의 공초를 받다

신흠(申欽) 【전 예조 판서. 】 ·서성(徐渻) 【전 개성 유수. 】 ·이정귀(李廷龜) 【예조 판서. 】 ·김상용(金尙容) 【지돈녕부사. 】 ·황신(黃愼) 【전 호조 판서. 】 공초를 받았다. 신흠이 공초하기를,

"신이 김제남과는 과연 같은 해에 조정에 진출하여 서로 알게 된 연분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올랐고 신은 이른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였기 때문에 친구 간의 의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서로들 빈번하게 왕래하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부귀하게 된 이후로는 신이 접촉을 하지 않으면서 조정의 반열에서나 서로 만나 보았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가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행동을 하는 데 대해서는 신이 일찍부터 분개하며 미워해 왔습니다. 신의 아우 신감(申鑑)이 봉산 군수(鳳山郡守)로 있을 때 그가 백성의 전지(田地)를 점유하여 자기의 전장(田庄)으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감히 허락해주지 않았었고, 선왕조 때 그가 신의 집과 혼인 관계를 맺으려 했을 때도 신이 허락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흉악한 행동에 신이 어찌 참여했겠습니까.

무신년 2월에 신이 경기 감사가 되어 국상(國喪)을 주관하느라 뛰어다니며 겨를이 없었으므로 유교(遺敎)가 내려졌다는 것조차도 처음에 얻어 듣지 못했다가 한참 지난 뒤에야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전해 주기에 혼자서 놀라워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당초 받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마치 받아들인 것이 있는 것처럼 감히 앞서서 자기 변명을 할 수는 없었는데, 이것이 신 자신이 직접 범한 죄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전하께서 통촉해 주시리라고만 믿어 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은 집이라고는 하나 궁금(宮禁)과 종적을 소원히 해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20년 동안 근신해 온 사람으로서 이런 악명(惡名)을 입게 되었으니 차라리 혹형(酷刑)을 받고서 죽고 싶은 심정밖에는 없습니다."

하였다. 서성이 공초하기를,

"무신년 국상 초에 신은 벼슬을 그만두고 한산한 상태에 있었는데 송순(宋諄) 등 10여 인과 함께 궐문 밖에 모여 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정원의 사령이 조그만 종이 하나를 가지고 와 보여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른바 유교(遺敎)를 등서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한번 열람한 뒤에 같이 있던 사람들도 돌려가며 보고 나자 곧바로 가지고 갔는데, 비록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긴 하였지만 형세상 미처 변명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도록 멍청하게 그 일을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었으니 만 번 죽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과연 제남과 서로 알고 지내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국구(國舅)가 되고부터는 마음에 불편한 점이 있어 경조(慶弔)하는 일 이외에는 한번도 찾아가 본 적이 없었고, 서찰을 보내어 연회에 초청을 해도 모두 사양하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제남 역시 요청해 오지 않았습니다.

신의 이름이 7신(臣) 가운데에 들어 있긴 합니다만, 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은 신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바야흐로 옹주(翁主)023) 가 시집오려 하던 초기에 신이 극력 간절하게 혼인하는 것을 사양했습니다마는 선왕께서 굳이 정하시고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신의 아들 서경주(徐景霌)의 딸은 소시적에 이미 우인(友人) 박동열(朴東說)의 아들 모(某)와 결혼시키기로 약속했었는데, 모는 장차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 【의인 왕후(懿仁王后)의 부친이다. 】 제사를 받들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더욱 약속을 위배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인빈(仁嬪)제남의 집에 결혼시키려고 하면서 선왕에게 계청하여 제남의 집과 혼인하게 만드셨는데 신이 그 때에도 강력히 거부했으나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선왕께서 어필(御筆)로 억지로 정하셨는데 그 때 명을 전했던 내관(內官)이 아직도 있고 어필 역시 경주의 집에 있으니 상께서 가져다 보시면 환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분수에 만족하고 스스로의 위치를 지키며 감히 분외(分外)의 일을 바라지 않았던 것을 들자면 이 정도로 그치지 않지만 단지 말로 증거할 만한 것만을 가지고 진달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서성의 아들 달성위(達城尉) 경주(景霌)는 옹주에게 장가들었고 그의 딸은 김제남의 아들 김규(金珪)에게 시집갔다. 그래서 서성이 연루된 것이 상대적으로 중하게 된 것이었다. ○ 신흠의 아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유영경(柳永慶)의 아들 전창위(全昌尉) 유정량(柳廷亮)과 박동량(朴東亮)의 아들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및 경주(景霌)가 모두 임금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한응인(韓應寅)의 손녀와 허성(許筬)의 딸이 모두 왕자에게 시집갔고, 한준겸(韓浚謙)이 또 금상(今上)의 중궁(中宮)의 아비였다. 그래서 선조가 평시에 더 후하게 우대하였고 유교(遺敎)에서 특별히 언급했던 것인데, 7신(臣)이 당한 화는 모두 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179면
  • 【분류】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註 023]
    옹주(翁主) : 선조의 첫째 딸 정신 옹주(貞愼翁主)임.

○捧申欽【前禮曹判書。】、徐渻【前開城留守。】、李廷龜【禮曹判書。】、金尙容【知敦寧府事。】、黃愼【前戶曹判書。】招。 供: "臣與悌男, 果有同年上舍相識之分, 而渠則以蔭發身, 臣則早年通籍, 雖有故舊之義, 非交相往來之人。 自其富貴之後, 臣不相干涉, 不過朝班相遇。 其所爲巧邪 , 臣憤嫉。 臣弟鑑爲鳳山郡守時, 欲占民田, 以爲己庄, 而鑑不許, 在先王朝, 渠欲托昏於臣家, 臣又不許。 凡其造惡作兇, 臣豈與知? 戊申二月, 臣爲京畿監司, 以國喪營, 奔走不暇, 遺敎之下, 初不得聞知, 久後有人傳說, 私自驚。 而以初無承受之事, 故不敢徑自辨明, 有若承當者然, 此非臣親犯之罪, 只天日下燭。 雖曰國昏之家, 宮禁之間, 蹤迹疏遠, 人所共知。 臣以二十年謹愼之人, 被此惡名, 寧就湯鑊, 以滅此身耳。" 供: "戊申國喪之初, 臣在罷散, 與宋諄等十餘人, 會哭於闕門外。 一日政院使令, 持示一小紙, 乃謄書所謂遺敎也。 臣一閱之後, 同列傳觀, 旋卽取去, 雖有可疑之端, 勢未及致辨。 至于今朦不致念, 萬死無惜。 臣果與悌男相識, 自爲國舅, 心有所不便者, 慶弔之外, 未嘗往見, 折簡請宴, 皆辭不赴, 故悌男亦不要請。 臣雖名在七臣之中, 國昏非臣本心。 方翁主下嫁初, 臣力懇辭昏, 而先王堅定不許。 臣子景霌之女, 少時已許昏於友人朴東說子某, 某將奉潘城府院君祀【懿仁王后父。】, 尤不可背約, 而仁嬪昏於悌男家, 啓請先王, 使與悌男昏, 臣又力拒不得。 先王以御筆强定, 其時傳命內官尙在, 御亦在景霌家, 自上取覽, 則可以洞察。 臣安分自守, 不敢分外希賞冀者, 不止于此, 只以言之可徵者奉達矣。" 【達城尉 景霌尙翁主, 女適悌男。 故之辭連頗重。 ○申欽東陽尉 翊聖柳永慶全昌尉 廷亮朴東亮錦陽尉 景霌皆尙主。 韓應寅孫女、許筬女皆嫁王子, 韓浚謙又以今上中宮之父。 故宣祖平時, 遇之加厚, 遺敎特及焉。 七臣之禍, 皆以國昏也。】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179면
  • 【분류】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