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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65권, 광해 5년 4월 15일 계묘 1번째기사 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예조가 증광 별시의 합격자 처리 문제에 대한 대신들의 의논을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파방(罷榜)하는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였습니다. 영의정 이덕형은 의논드리기를 ‘사체를 참작하고 폐단을 헤아린 뒤 여러 의견들을 절충해서 처리해야 할 것인데, 오직 상께서 재결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좌의정 이항복은 의논드리기를 ‘중국 조정이나 우리 나라를 보아도 고금 이래로 파방과 관련된 주장은 본래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세 이후로 무슨 이유 때문에 이런 일이 있게 되어 일상적인 일로 굳어지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매번 합격자 명단을 발표할 때마다 낙방한 연소배들이 꼭 트집거리를 찾아내어 민간에서 사적으로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처음에는 하찮기 그지없는 것들도 점점 눈덩이처럼 크게 불어나 조정의 의논으로 비화되곤 합니다. 나라의 체통이 깎이는 일이 어찌 이 한 가지 일뿐이겠습니까마는, 선조(先朝) 때 이 폐단을 깊이 통촉하시고 정식(定式)을 마련하시어 뒷날 전범(典範)으로 삼도록 하셨으니, 지금 어찌 감히 밝은 명을 위배하고 이루어진 법규를 동요시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 책임져야 할 대상이 사관(四館)인지 시관(試官)인지 아니면 사자(士子)인지를 따져 규정대로 법을 행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심희수는 의논드리기를 ‘이는 과거에 있어서 더없는 잘못된 관례입니다. 태평한 시대에 과거 시험을 보일 때에도 그러한데, 더구나 난리를 겪어 결딴이 난 뒤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갖가지 폐단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직접 확인한 바에 의하면, 40, 50년 동안 파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파방하고 나서는 다시 과거를 보이곤 하였는데, 그때 바로 전의 과거 시험보다도 오히려 더 심하게 많은 잘못이 발생해도 매번 파방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그대로 인정하곤 하였으니 이는 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파방하는 하나의 일만은 결코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낙방한 응시자 가운데 부박한 연소배들이 파방시키려고 선동한 경우가 계속 줄을 이었는데 선조(先朝) 때 금법(禁法)을 다시 밝혀 승전(承傳)을 받들기까지 한 것은 대체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지난 해 의논드릴 때에도 파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금년에 실시한 감시(監試)의 경우 지방 시험의 결과를 전면 무효화시킨 곳이 두세 군데나 되어 이미 흠이 생겼는데, 심지어 서울에서조차 불공정한 일이 시험장에서 발생했다는 소문이 여러 가지로 파다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말세에 들어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들을 다 믿을 수야 없겠지만 혹시 조금이라도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그것은 여러 사람들이 직접 본 일일테니 또한 두려워해야 할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찌 이 모두를 낙방한 응시생들이 지어낸 말이라고 핑계만 대고 고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또 문(文)·무(武)는 일체(一體)이니 어찌 차이를 둘 수 있겠습니까. 초시(初試)에서는 평상시 숫자대로 인재를 뽑았다 하더라도 복시(覆試)에서 넉넉하게 뽑는 것이 본래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증광시(增廣試)를 보이는 본래의 뜻에 비추어 본다면 실로 어긋난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무 초시에서도 별도의 조치를 취해 넉넉히 뽑은 다음에 복시에서 뽑는 숫자를 늘려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외방에서 해조(該曹)의 공사(公事)를 기다리지도 않고 제멋대로 무과의 합격자 수를 늘려 많고 적은 차이가 나게 했는가 하면, 호서(湖西) 등 서울과 가까운 지역에서는 과거 시험 기일을 미리 예정되었던 월식(月食) 날로 그냥 채택하기도 하였으니, 이 모두가 놀랄 만한 일들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해랑(該郞)만 파직시킨 것은 그 일을 중대하게 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대간이 모두 이를 발론한 것이었습니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고 보면 어쩔 수 없이 파격적으로 파방하여 한번 경계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만 나라의 기강이 해이되고 사습(士習)이 전도되어 응시자와 시관이 서로들 개인적인 이익만 추구하려 하는 것이 이미 고치기 어려울 정도로 고질화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파방하고 다시 시험을 치르게 한다 하더라도 문·무과의 인원 수를 조정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 어떻게 공평하게 인재를 뽑아 다시 사람들의 말이 없게끔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백 번 파방하고 백 번 다시 시험을 치르게 하더라도 실제로 보탬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니, 어쩌면 지금 이후로는 장차 과거를 보여 인재를 뽑는 법이 영원히 없어지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이모저모로 생각해 보아도 이 폐단을 고칠 계책이 전혀 없고 다만 지공거(知貢擧)009) 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를 충분히 신중하게 고려하여 뽑는다면 근사하게 될 듯도 합니다만, 신의 이 말도 매우 비현실적이라서 쓸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떤 나라도 시관을 잘 고르려고 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모두 오늘날과 같은 폐단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94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162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註 009]
    지공거(知貢擧) : 고시관(考試官).

癸丑四月十五日癸卯禮曹曰: "罷榜事, 議于大臣, 則領議政李德馨以爲: ‘酌事體、量弊端, 折衷群議處之, 惟在上裁。’ 左議政李恒福以爲: ‘中朝及我國, 古今原無罷榜之說。 不知中世以後, 緣何以有此, 因以爲常。 每一出榜, 落榜年少, 必先尋摘瑕釁, 巷議于私, 初甚微微, 皷以致大, 轉成朝議。 國體膚淺, 何獨此一事? 先朝深燭此弊, 着爲定式, 以垂後典, 今何敢背明命、撓成法? 今之所責, 在四館乎, 在試官乎, 在士子乎? 按式行法則可矣。’ 右議政沈喜壽議以爲: ‘科擧莫大之謬例也。 在平時猶然, 況此經亂板蕩之後, 種種弊端, 有難悉陳者乎? 臣嘗目覩, 四五十年來, 罷榜之擧比比有之。 旣罷而復設, 雖有大段瑕玷, 反甚於前場。 而不可每每罷榜, 故勉强仍用, 勢有所不得已也。 以此言之, 則罷榜一事, 決不可爲。 而其間, 見屈擧子年少浮薄之徒, 皷動而欲罷之者, 踵相接。 先朝之申明禁約, 至捧承傳者, 蓋以此也。 臣於昔年獻議, 亦呈勿罷之說矣。 第念今年監試鄕擧之削去者, 兩三其處, 已爲可欠, 至於京輦之下, 試場不公事, 騰播多端。 末世囂囂之言, 雖未必盡信, 而設或有一分之實事, 則十目所視, 亦可畏也。 豈可皆諉諸落榜擧子所做出, 而不爲之改紀也? 文武一體, 豈容有異同? 初試則依常數試取, 至覆試優取, 本非難事, 而揆諸增廣本意, 實爲相戾。 若然則文武初試, 亦可別樣優數, 然後乃加覆試之數也。 況外方不待該曹公事, 擅加武榜之數, 多寡不同, 而湖西近京之地, 設科之期, 仍用前定月食之日, 皆係可駭。 只罷該郞, 不足以重其事, 此臺諫之所以竝發也。 事已至此, 不得不破格罷榜, 以爲一番警覺之地也。 但國綱解紐, 士風瀾倒, 擧子、試官交相植私, 已成難醫之痼疾。 今雖罷而復設, 不過整頓文武額數而已, 豈有公平試取, 更無人言之理哉? 百罷百設, 實無所益, 抑恐自今以往, 將不免永廢設科取士之法也。 反覆思量, 絶無革弊之策, 唯十分愼簡, 知貢擧之任, 似爲近之, 而臣之此言, 亦甚迂愚不可用。 自古國家, 何嘗不擇試官, 而致有今日之淩夷也。’" 答曰: "依議。"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94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162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