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을 무시하는 시를 지은 권필을 국문하다
이에 앞서 임숙영(任叔英)의 대책(對策)이 임금의 뜻을 거스렸었는데, 유사(儒士) 권필(權韠)이 한탄하여 시를 짓기를,
대궐의 푸른 버드나무 버들개지 흩날리는데
도성의 명사님들 잘보이려 아첨하는구나
조정에선 온통 태평 성대라고 즐거워 하례하는데
바른말이 포의에게서 나올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하였다. 숙영의 대책 내용은 오로지 외척들이 교만하게 멋대로 구는 것과 궁위(宮闈)에서 정사에 간여하는 것을 공박하는 것이었다. 권필의 시에 있는 ‘궁류(宮柳)’라는 두 글자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유가(柳家)를 지척한 것으로 여겼다. 유희발(柳希發)이 이때 대간으로 있으면서 말을 퍼뜨리기를 "권필의 시에서 이른바 ‘궁류’라는 두 글자는 실상 중전을 지척한 것이다." 하면서 발론하려 하였으나 불응하는 동료가 많았기 때문에 그 의논이 결국 정지되었다. 조국필(趙國弼)은 외척인데 일찍이 권필에게 말하기를 "상이 궁류시(宮柳詩)를 듣고 매우 노하였으니, 그대는 조만간 큰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대가 한 장의 상소를 지어 스스로 변명한다면 내가 중간에서 노여움을 풀도록 해보겠다." 하였으나, 권필은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조수륜(趙守倫)의 문서 가운데 수륜이 직접 써 놓은 이 시를 보고 수륜에게 누가 지은 것이냐고 물으니, 수륜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왕이 권필을 잡아다가 신문하라 명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권필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시를 지어 멋대로 비난한단 말인가. 임금을 무시하는 부도(不道)한 죄가 매우 크다. 일일이 추문해야 한다."
하였다. 권필이 공초하기를,
"임숙영이 전시(殿試)의 대책(對策)에서 미치광이 같은 말을 많이 했으므로 신이 이 시를 지은 것인데, 대의(大意)는 ‘좋은 경치가 이와 같고 사람마다 뜻을 얻어 잘 노닐고 있는데 숙영이 포의(布衣)로서 어찌하여 이런 위험한 말을 한단 말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의 시인들은 흥(興)의 시체(詩體)를 가탁하여 풍자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신이 이를 모방하여 지으려 한 것입니다. 숙영이 포의로서 이처럼 과감하게 말하는데 조정에서는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시를 지어 제공(諸公)들을 풍자함으로써 면려되는 것이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궁류(宮柳)’ 두 글자는 당초 왕원지(王元之)가 전시 때 지은 시인 ‘대궐 버들이 봄아지랭이 속에 휘휘 늘어졌네.[宮柳低垂三月烟]’라는 한 글귀를 취한 것인데, 시를 보는 사람들은 시에 들어 있는 유(柳) 자를 가지고 고의로 외척을 가리킨 것이라고 합니다만, 신의 본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은 어려서부터 다른 것은 배운 것이 없고 단지 시를 짓는 것만을 터득했기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면 번번이 시를 지어 왔습니다. 설혹 어리석고 망령되어 잘못 말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어찌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겠으며 부도한 말을 멋대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궁류가 외척에 관계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바른 대로 고해야 한다."
하자, 권필이 공초하기를,
"신은 단지 경치에 대해 말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혹 외척을 가리킨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였다. 왕이 형신을 가하라고 명하였다. 이덕형·이항복이 아뢰기를,
"역적의 옥사는 끝에 가서 반드시 만연되기 마련인데 이는 실로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잡아다가 국문하는 사람들은 그 죄명이 역적의 유와는 매우 다르고 단지 경박한 무리들이 시사에 대해 비난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아직 역적의 옥사에 연루된 일이 없으니, 상규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의당 금부에서 추문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궐정(闕庭)으로 데려다가 친국하는 것도 이미 미안한 일인데 형추까지 하는 것은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교관을 지낸 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실상은 유사(儒士)이니, 성명께서 헤아리시어 우선 묻지 말고 버려두었다가 역적의 옥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서서히 처치하소서."
하고, 최유원(崔有源)은 아뢰기를,
"권필의 이 시는 여염에 널리 전파되어 있습니다. 소신도 그것이 망령되이 지은 것인 줄 압니다만, 역적과 동시에 아울러 국문하는 것은 옥사의 체통에 방해되는 점이 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아뢴 내용은 다 알았다. 단 그가 바른 대로 공초하지 않고 있으니 묻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권필은 형신을 받더라도 반드시 진달할 만한 다른 정상이 없을 것입니다. 역옥의 만연된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상께서도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이 사람의 행실이 괴이한 데 가깝지만 시 때문에 형신을 가하는 것은 사체에 있어 미안합니다."
하고, 최유원은 아뢰기를,
"선왕조 때 한인(韓戭)이 임금을 무시한 부도죄로 금부에 내려져 국문을 받았었습니다. 이제 권필이 이 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금부에 내려야지 역옥의 죄수들과 아울러 국문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들이 아뢴 것에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단지 그의 정상이 가증스러워 기필코 국문하려는 것이다."
하고, 왕이 형신할 것을 재촉하였다. 이덕형·이항복·최유원 등이 재삼 논하여 구원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준장(准杖)을 치고 가두었다. 이날 밤에 전교하기를,
"권필의 부도죄는 엄한 형신을 가하여 철저히 신문해야 하겠으나 대신과 대간의 말을 힘써 따라서 형벌을 면제하고 먼 곳으로 귀양보낸다."
하고, 경원부(慶源府)에 귀양보냈다. 권필은 본디 몸이 허약했는데다 매우 혹독한 곤장을 맞았기 때문에 들것에 실려 도성문을 나갔는데 장독(杖毒)이 위로 치받쳐 죽었다. 권필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논의와 풍도가 당시에 으뜸이었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당시의 인걸들을 다 사귀었으므로 명성이 대단하였다. 신묘년058) 당사(黨事)가 있은 뒤부터 세상일에 뜻이 없어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채 산과 바다를 떠돌면서 시와 술로 즐겼다. 원접사(遠接使) 이정귀(李廷龜)가 그의 시재(詩才)를 천거하여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에 차출되었다. 선조(宣祖)가 시신(侍臣)에게 명하여 그의 시 수십 편을 가져오게 하여 열람하고 나서는 가상히 여겨 관직을 제수하라고 명하여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동몽 교관에 제수하니 잠시 취임했다가 곧바로 버리고 갔다. 스스로 성질이 강건하고 입발라서 화를 당할까 깊이 두려워하여 힘써 숨어지내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시를 지어 시인(時人)을 풍자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한 편의 시가 나올 적마다 도성 안이 떠들썩하게 외어 전하였다.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게 되었고 끝내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권필의 아버지 권벽(權擘) 때부터 신광한(申光漢)에게 사사(師事)하여 시로 이름을 드날렸는데 권필이 그 서업(緖業)을 이어 전력을 다하여 시를 공부하였고 제자(諸子)의 장점을 다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논자들은 그를 국조(國朝)의 정종(正宗)으로 떠받들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자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63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1면
- 【분류】어문학-문학(文學) / 인물(人物) /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註 058]신묘년 : 1591 선조 24년.
○先是, 任叔英之對策忤旨也, 儒士權鞸惋而作詩曰: "宮柳靑靑花亂飛, 滿城冠蓋媚春輝。 朝家共賀昇平樂, 誰遣危言出布衣?" 叔英策中, 專攻椒戚驕橫, 宮闈干政, 而(鞸)[韠] 詩有"宮柳"二字, 人皆以爲指斥柳家。 柳希發 時爲臺諫, 揚言: "(鞸)[韠] 詩所云‘宮柳’字, 實指斥中宮也。" 欲擧發之, 同僚多不肯者, 故其論竟寢。 趙國弼, 戚里人也。 嘗語(鞸)[韠] 曰: "上聞宮柳詩大怒, 君早晩恐不免大罪案。 君若構一疏自辨, 則我當從中圖解。" (鞸)[韠] 笑不答。 至是, 王見趙守倫文書中, 有守倫親寫此詩, 問守倫誰所作也, 守倫以實對。 王命拿鞫(鞸)[韠] , 仍傳曰: "(鞸)[韠] 是何人也, 乃敢作詩, 恣其譏刺? 其無君不道之罪極矣。 宜一一推問。" (鞸)[韠] 供云: "任叔英殿策, 多發狂言, 身 臣作此詩, 大意‘好景如此, 而人人得意而行, 叔英以布衣, 何爲如此危言乎?’ 大抵古之詩人, 有托興規諷之事, 故臣欲倣此爲之, 以爲: ‘叔英以布衣, 敢言如此, 而朝廷無有直言者’, 故作此詩, 規諷諸公, 冀有所勉勵矣。 ‘宮柳’二字, 初取王元之殿試詩‘宮柳低垂三月煙’之句, 而見詩者以詩中有柳字, 故直謂指斥戚里云, 身 臣本情則不然。 身 臣自少無他所學, 只解作小詩, 故遇某事, 輒作小詩而已。 設或愚妄, 誤爲措語, 豈有無君之心, 恣爲不道之語乎?" 王曰: "宮柳不干於戚里, 宜直告。" (鞸)[韠] 供云: "身 臣只言景色而已。 他人則或以爲指戚里, 其實不然也。" 王命刑訊。 李德馨、李恒福啓曰: "逆獄之末, 必至蔓延, 此實可慮。 今諸拿鞫人等罪名, 與逆類頗異, 不過輕薄輩譏議時事。 而時無連累逆獄之事, 以常規言之, 則當自禁府推問。 入庭親鞫, 已爲未安, 至於刑推, 未知何如? 渠雖曾經敎官, 其實則儒也。 願加聖量, 姑置勿問, 以待逆獄之畢, 徐爲處置。" 崔有源曰: "權鞸此詩, 播在閭閻。 小臣亦知其妄作, 但與逆獄一時竝鞫, 有妨獄體。" 王曰: "啓意具悉。 但渠不直招, 不可不問。" 李恒福曰: "權鞸雖被刑訊, 必無他情可達。 逆獄枝節, 蔓延至此, 自上亦必有後悔。" 李德馨曰: "大槪此人行己, 雖近於詭怪, 以詩受刑, 事體未安。" 崔有源曰: "先王朝韓戭以無君不道, 下禁府鞫問。 今(鞸)[韠] 雖蒙此律, 亦當下禁府, 不宜與逆獄諸囚竝鞫。" 王曰: "卿等之啓, 豈有他意? 但渠之情狀可惡, 必欲鞫問。" 王促刑訊, 李德馨、李恒福、崔有源等再三論救, 王不廳, 准杖而囚之。 是夜, 傳曰: "權鞸不道之罪, 所當嚴刑窮問, 勉從大臣、臺諫之言, 除加刑遠竄。" 配慶源府。 (鞸)[韠] 素羸, 受杖極酷, 舁出國門, 杖毒上衝而死。 (鞸)[韠] 倜儻有氣節, 論議風度, 卓冠一時。 弱冠盡交當世英俊, 聲譽藉甚。 自辛卯黨事之後, 無意世事, 不赴科擧, 落拓山海間, 以詩酒自娛。 遠接使李廷龜啓薦其詩才, 以白衣充製述官。 宣祖命侍臣, 取其詩數十篇, 覽之嘉尙, 命除職除參奉, 不拜。 再除童蒙敎官, 暫就卽棄去。 自以性剛口快, 深懼禍及, 務欲韜藏, 顧好作詩譏諷時人, 每一篇出, 都下喧然傳誦。 由是不悅者衆, 卒不免於禍云。 然自(鞸)[韠] 父擘, 師事申光漢, 以詩擅名, (鞸)[韠] 承其緖, 專力爲詩, 盡集諸子之長, 而自成一家。 論者推爲國朝正宗, 聞其死, 遠近沮喪。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63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1면
- 【분류】어문학-문학(文學) / 인물(人物) /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