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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40권, 광해 3년 4월 16일 을유 1번째기사 1611년 명 만력(萬曆) 39년

예조에서 임숙영에 대한 삭과의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다

〈예조 낭청이〉 대신의 뜻으로 아뢰기를,

"국가가 사람을 취해 놓고서도 한 달이 넘도록 오래까지 방방(放榜)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예전에 없던 변고입니다. 요즈음 임숙영의 삭과에 대한 일로 삼사가 나라 전체의 공론을 가지고서 논집하며 개정을 청하는데도 상께서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으시어, 방방할 기약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백 명의 거자(擧子)들이 대부분 시골 사람들인 까닭에 여장(旅裝)을 팔아서 고생스레 유숙하다가 끝내 견딜 수가 없어 돌아가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그 나머지 남아 있으면서 답답함을 호소하는 자들의 소문도 몹시 미안한 실정입니다. 외간의 이런저런 사장(事狀)을 빠짐없이 아뢰기가 어려운 점이 있음을 상께서 어떻게 아실 수 있겠습니까.

문천상(文天祥)의 대책(對策)에 제외(題外)의 뜻이 많았는데도 제일등으로 뽑은 일039) 을 고금이 미담으로 여기고, 유분(劉蕡)이 대답한 내용이 물은 것에 대한 것이 아니자 고관(考官)이 그를 내쳤으나 오랜 후세에까지 기롱과 비웃음을 남겼습니다.040) 그러니 과제(科第)의 취사(取捨)가 정식(程式)에 구애받지 않았음은 여기에서 알 수가 있는 일입니다. 언로가 열리느냐 막히느냐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결정되는 법인데 조정의 기상이 갈수록 점점 삭막해지고 있어, 식견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고 탄식을 해온 지가 오래입니다. 지금 위포(韋布)의 광사(狂士)가 있어 소회를 남김없이 털어놓으려는 점만 알고, 과거 시험의 제술은 정해진 격식이 있어 왔다는 점을 아랑곳하지 않았는데, 이 또한 성명(聖明)을 믿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선비로 하여금 서슴없이 말하도록 하는 것은, 어찌 성세에 올곧은 선비를 좋아한다는 점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숙영의 글은 서울 안에 베껴 전파되어 사람들이 다들 보았으니 저 삼사 관원들도 눈에 익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기어코 격식을 어긴 과작(科作)을 취하고자 군부에게 굳이 쟁집하겠습니까. 다만 대체에 관계되어 부득이 그렇게 아니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이는 단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 훗날 지탄받지 않는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미 정해진 격식을 밝히어 훗날의 폐단을 경계하였으니, 뒤이어 공론을 받아들여 뭇사람들의 귀를 시원하게 하면, 어찌 양쪽 모두가 좋은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며칠 전에 어느 유생이 이 일로 인하여 항소(抗疏)하자, 칭찬하는 비답을 내리시고 관직에 제수하라고까지 명하셨습니다. 이에 조야가 귀가 솔깃하여 반갑게 서로들 경하하였는데 마치 막혔던 냇물이 트여 흐르는 것처럼 통쾌한 심정이었으니, 인심은 누구나 같은 것임을 진정 속일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신들은 이에 대해 더욱 축하하는 심정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삼사의 관원이 이미 공론을 제기하였으니 비록 여러 달이 걸리더라도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상하가 서로 버티게 되면 손상되는 바가 갈수록 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일찌감치 시원스레 따라주어 속히 방방(放榜)을 함으로써, 선비들의 사기를 신장시키고 백성들의 심정을 시원하게 해주어, 거자들의 원통하고 답답함을 위로하고 조정의 사체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신들이 구구한 충심에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황공하오나 감히 여쭙는 바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이 논한 것도 좋기는 하다마는 지금 선비들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니 나는 후일의 폐단이 걱정된다. 한 사람의 삭과(削科)가 방방(放榜)의 진퇴에 관계되지 않으니, 방방일을 정하여서 속히 거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04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624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註 039]
    문천상(文天祥)의 대책(對策)에 제외(題外)의 뜻이 많았는데도 제일등으로 뽑은 일 : 문천상은 송나라 길수(吉水) 태생으로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이다. 그가 이종(理宗) 때 집영전(集英殿)에서 지은 대책 만여 언의 글에, 제목을 벗어난 내용이 많았으나 이종은 제1등으로 발탁하였다. 이에 고관(考官) 왕응린(王應麟)이 아뢰기를 "인재를 얻은 일을 축하합니다."고 하였다. 《송사(宋史)》 권418.
  • [註 040]
    유분(劉蕡)이 대답한 내용이 물은 것에 대한 것이 아니자 고관(考官)이 그를 내쳤으나 오랜 후세에까지 기롱과 비웃음을 남겼습니다. : 유분은 당나라 창평(昌平) 태생으로 자는 거화(去華)이다. 그가 문종(文宗) 때 현량과(賢良科) 책시(策試)에서 지은 글이, 당시 득세하고 있던 환관의 비리를 공박하는 내용이었으므로 고관이 감히 뽑지 못하였다. 이에 합격이 된 이태(李邰)라는 자가 말하기를 "유분이 떨어지고 우리가 합격하다니, 낯부끄럽다." 하였다. 《구당서(舊唐書)》 권190 하(下).

辛亥四月十六日乙酉禮曹郞廳以大臣啓曰: "國家取人而不爲放榜, 至於經月之久, 乃古所未有之變也。 近以任叔英削科一事, 三司將擧國公論, 論執請改, 自上久不允許以致放榜無期。 累百擧子, 多是鄕人, 賣裝苦留, 終不能堪耐, 而發還者已多矣。 其餘留而呼悶者, 所聞亦極未安。 自上安知外間種種事狀, 有難以盡達者乎? 文天祥對策, 多題外之意, 而取爲第一, 古今以爲美談, 劉蕡所對, 非所問, 考官黜之, 而貽譏笑於千載, 科第取舍之不拘於程式, 則此可以見矣。 言路之通塞係國存亡, 朝著氣象, 日漸索莫, 有識之憂久矣。 今有韋布之狂士, 知盡所懷, 不知科自有程式, 此亦恃聖明而然矣。 夫使士不遜言, 豈非彰聖世好直之士乎? 叔英之文, 謄播於都下, 人人盡看, 彼三司之官, 亦慣見矣。 何故必欲取違格之作, 而强爭於君父乎? 顧大體所關, 有不得不已者, 只是愛君之心, 欲國家無後日之指點耳。 旣明程式, 以警後弊, 繼納公論, 以快群聽, 則豈不爲俱美乎? 日昨有儒生, 此抗疏, 下敎褒答, 至命之除職, 朝野聳動, 欣欣胥慶, 有若防川得決之爲快, 人心所同, 眞不可誣矣。 臣等於此, 尤不勝賀祝之至。 想三司之官, 旣發公論, 雖閱累月, 不得命不退, 上下相持, 所損愈甚。 曷若早賜快從, 速爲放榜, 以伸多士之氣, 以快國人之情, 以慰擧子之怨閔, 以全朝家之事體乎? 臣等區區之忠悃, 不敢容默, 惶恐敢。" 答曰: "大臣所論亦好矣。 但此時士習不美, 予懼後弊也。 一人削科, 不關於放榜進退, 放榜日推擇, 速爲擧行。"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04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624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