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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39권, 광해 3년 3월 29일 기사 4번째기사 1611년 명 만력(萬曆) 39년

부사용 한교의 서북 변경의 방비에 대한 상소문

이에 앞서 조정에서 부사용(副司勇) 한교(韓嶠)가 병사(兵事)를 잘 안다는 이유로 그로 하여금 서변(西邊)에 가서 조련에 대한 일을 함께 논의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도성으로 돌아와 상소하기를,

"수레·기마병·보병으로 오랑캐를 방어하는 법은 본래 중국 사람 척계광(戚繼光)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대개 계광이 남쪽에 있으면서 왜(倭)를 정벌할 때는 《기효신서(紀效新書)》의 포살법(砲殺法)을 썼고, 북쪽에 있으면서 오랑캐를 막을 때는 《연병실기(練兵實紀)》의 거기보(車騎步)의 법을 썼는데, 적의 형세에 따라 승리를 제압하는 묘리가 이만저만 비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서》의 포살법은 모두 보병이라 만약 서북의 달리고 돌격하는 철기병을 상대로 이용한다면 반드시 짓밟혀서 발도 댈 수 없을 것이고, 《실기》의 거기보의 법은 또한 남쪽의 에게도 통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거리가 멀면 총을 쏘고, 가까우면 검을 들고 돌진하는 것이 의 장기입니다. 우리의 군사는 에 대하여 원거리에서는 총을 막아내지 못하고 근거리에서는 검을 제어하지 못하는데, 이 때문에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하는 것입니다. 만약 포거(砲車)와 전거(戰車)를 사이사이에 도열시킨 다음 포살수를 끼고 기병을 날개로 삼되, 적이 멀리 있는 경우에는 수레 가운데의 대포와 수레 아래의 소포가 번갈아 발사하면 우리편 전거의 차판(遮板)이 의 총을 막아 낼 수 있으며, 적이 가까이 있는 경우에는 전거에 배치한 창파(鎗鈀)가 검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다 살수 기병까지 힘을 합한다면 적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실기》의 법을 강구하여 시행하되 기병·보병·거병을 모두 훈련시킨다면 북으로는 오랑캐를 막을 수 있고 남으로는 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지위는 낮고 재주는 못나서 오래도록 도내에 있었으나, 그 조련에 있어서 달리 약간의 효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국경을 방어하는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보고 들은 것으로 전하를 위하여 아뢰겠습니다.〉

대저 압록강 일대는 중국과 오랑캐의 지역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의주(義州)로 부터 강계(江界)에 이르기까지 읍들이 강을 따라 벌려 있어 모두 일위 독진(一衛獨陣)이 되어 있고 크고 작은 진보(鎭堡)가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데, 본도의 내지와 황해도의 군사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윤번제로 들어가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또 평양(平壤)·성천(成川)·영변(寧邊)·안주(安州)·구성(龜城) 등에 오진관(五鎭管)을 설치하여 오위연진(五衛連陣)의 제도를 만들어 만일 변방의 경보가 있게 되면 안팎에서 서로 구원하여 성세를 서로 의지하고, 혹시라도 변성(邊城)이 수비를 못하게 되면 주현의 군민이 각각 소속으로써 차례차례 진관에 들어가 죽음으로 지켰습니다.

조종의 군제(軍制)가 이처럼 상밀하였는데 2백 년을 지내면서 점차 느슨해지고 폐지되더니 난리 후에 이르러서는 극에 달했습니다. 백성이 난리 속에 죽어 거의 얼마 안 남았는데 황해도 군병을 수자리에 첨가하는 법마저 따라서 폐지되었으니, 이 도의 국경 수비가 어떻게 허술한 지경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전 병사 유형(柳珩)이 변성을 수축하고자 창성(昌城)삭주(朔州)에서 시작하였는데 역사를 일으킨 지 3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끝내지를 못했습니다. 옛날에 김종서(金宗瑞)육진(六鎭)을 설치할 때 반드시 먼저 남쪽 백성 수만을 이주시켜 거주하게 한 뒤에 비로소 성을 쌓아 결국 지키고 막는 것을 잘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형은 군사도 없이 이렇게 큰 역사를 하고 있으니, 비단 공역을 성취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성이 비록 완성된다 하더라도 군병·기계·군량은 모두 밀가루 없는 국수인 셈이니024) 무엇으로 지키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비국과 체부(體府)로 하여금 때에 마땅한 조처를 상의하여 조종조의 황해도 군병이 윤수(輪戍)하던 법을 거듭 밝히게 하고, 혹 다른 도의 군사로써 별도로 수자리에 첨가시키소서. 그러면 이 도의 국경 수비가 모두 폐지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관서관북은 그 방비가 마찬가지인데 근자에 묘당의 계책이 매번 북쪽을 긴요하게 여기고 서쪽은 느슨하게 여기는데, 이는 어쩌면 이 도가 중국과 서로 접해 있어서 우환이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북쪽은 경비해야 할 일이 있고 서쪽은 경비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적의 계책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동쪽을 공격하는 체하다가 서쪽을 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늘상 쓰는 수법이니, 한때 경계할 일이 없었다는 이유로 느슨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한갓 대국의 구원을 믿고서 싸워 지킬 방도를 갖추지 않는다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으로 《춘추》에서 기록한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깊이 마음을 쓰소서.〉

바야흐로 지금 황해도에 또한 성을 쌓아 방비할 계책을 하고 있으니 다른 도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으나 신이 강변을 윤번으로 지켰던 옛날의 규칙을 회복할 것을 청하는 것은, 대개 나라의 변성은 곤충이나 물고기에 비유하자면 비늘이나 껍질인 셈이니 비늘과 껍질이 부숴지고 나면 그 살을 잘 보전할 수 있는 것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을 쌓아 방비하고 지키는 것에 대해, 만약 양도를 통괄해서 말할 경우 관서를 먼저 한 다음에 해서를 해야 하고, 한 도로 말할 경우 변상(邊上)을 먼저 한 다음에 내지(內地)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일에 선후가 있는데 만약 그 순서를 잃어 버린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조종께서 해서가 중한 줄을 모른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황해도 군사를 강변에 들여보낸 것은 어찌 선후를 알아서가 아니겠습니까.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회복하려면 마땅히 애민(愛民)을 먼저 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만약 백성을 사랑하여 길러서 나라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지 않는다면 군사를 훈련하고 성을 쌓아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보건대 강을 따라 있는 열읍의 백성들이 조석으로 난리를 대비하느라 생활이 형편없는데, 진상 공물에 고통을 당하고 또 중국에 가는 사신과 서울 각 아문의 요구에 곤욕을 치른 바람에 피부가 깎이고 뼈가 깎이어 고혈(膏血)이 이미 다해, 노약자는 구렁에서 뒹굴고 젊은이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강변의 열읍이 거의 다 텅텅 비어 민호가 백가가 되는 곳도 드뭅니다. 내노(內奴)와 사노(寺奴)가 내지에 살면서 삼수군이 되어 방수(防戍)에 들어간 자에게는 혹 그 공물을 면제해 주기도 하는데 원래 변상에서 살면서 오랫동안 딱따기를 치며 방수의 고역을 해 온 자에게는 도리어 공물을 징수하고 있으므로 원성이 대단하며 그 참혹함은 차마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의주부의 형세는 중국과 경계를 접하고 있어 사명(使命)이 잇따라 머무르고 사신이 왕래하므로 소용되는 비용을 마련하라고 다그치는 정도가 다른 고을보다 더 심합니다. 그러므로 조종조 이래로 진상하는 공물은 특별히 그 수를 감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민호가 강변의 열읍보다 조금 나은 것은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임진난 때에 임금의 행차가 이곳에 머물러 마침내 회복하는 기반이 되었으니, 세금을 거두는 것을 위주로 하느냐 민심을 결속시켜 요새지로 만드느냐의 의논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더 증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해부터 본 고을의 진상이 전일의 수효보다 다섯 배나 되니, 이대로 가다가는 의주의 백성 역시 뿔뿔이 흩어지고 죽어서 열읍과 다를 바 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은 삼가 듣건대 본도의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임진년에 의주에 임금의 행차가 머무를 적에 여러 도의 진상이 모두 막히고 끊어졌기 때문에 그 당시의 감사가 부득이 우선 경기의 삭선(朔膳)의 예에 의하여 열읍에 나누어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환도한 후에도 5,6년 동안 양남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에 이 도에 임시로 설치했던 물선(物膳)을 갑자기 없앨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그대로 해와서 마침내 구례가 되었다.’ 합니다. 신이 듣고나서 놀라고 탄식하며 사사로이 마음속으로 여기기를 ‘멀리 떨어져 있는 백성들의 원통과 고통이 이와 같은데 조정은 어찌하여 그 당시의 감사와 난리 전에 이 도의 수령을 지냈던 사람들에게 물어서 평시에 삭선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분변하지 않았을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조정이 막 이 일로 대신에게 의논한다는 말을 듣고 서변 백성들의 서운함을 풀어줄 기회가 아니겠느냐고 여겼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태시고 혹은 혁파하고 혹은 감하여 백성을 끔찍이 보살피는 정치를 행하신다면 백성에게도 매우 다행이며, 변방의 일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또한 왕자의 정치는 비록 애민을 우선으로 하지만 그 근본을 논한다면 반드시 인망이 있는 사람을 수습하여 존중해 주고, 생사에 관계없이 억울한 일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풀어주는 것이 제일의 도리입니다. 대저 현자는 만민의 소망이며 국가의 원기(元氣)이니, 《중용》의 구경(九經)에 반드시 존현(尊賢)을 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의 위에 둔 것은 원기를 부지하고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어진이를 존중하지 않아 만민의 소망이 쓸쓸해지게 한다면 경대신·체군신·자서민에 이미 근본이 없어져 원기가 소연해지고 난리가 뒤따르게 되니, 이것은 역대에 이미 그러했던 증험입니다. 《주역》 곤괘(坤卦)의 문언(文言)에 ‘천지가 막히면 현인이 숨는다.’고 하였으니, 위에 있는 사람이 어진이가 있는데 존중하지 않아 그로 하여금 은둔하게 한다면 이는 바로 난을 만드는 조짐이며, 이미 존중하지도 않고 또 덩달아 물리쳐 화의 그물에 버려서 그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면 세도(世道)에 있어서 어떠하겠습니까.

돌아간 신의 스승 고 신 성혼(成渾)은 유명한 아비의 자식으로 대대로 시골에 살면서 가학(家學)을 전해 받았습니다. 효제와 충신으로 유년 교육을 단정히 닦았고 독서하고 이치를 궁구하여 몸에 돌이켜 실천하였으며, 또 이이(李珥)와 더불어 도의의 사귐을 맺어 절차강마하였으니, 그의 조예가 더욱 깊어져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습니다. 후학을 인도하고 윤리를 강하여 밝혔으니, 국가의 풍화에 어찌 보탬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덕이 높음에 훼방이 오고 몸이 죽음에 비방이 모여 삭탈의 화가 무덤에까지 미쳤으니 유림이 통탄스럽게 여김이 오래될수록 더욱 깊어졌습니다.

안으로는 관학에 있는 많은 선비와 밖으로는 초야에 있는 제생들이 해를 가리는 구름을 밀치고 대궐에 상소하여 그 원통함을 호소한 자가 부지기수이며, 또한 대신이 탑전에 진달한 일이 있는데도 성상께서는 막연히 들어주시지 않으셨는데, 이 또한 아랫사람들이 성혼이 무함을 입은 곡절을 상세히 아뢰지 못하여서 성상의 해와 달 같은 밝으심으로 하여금 억울함을 통촉하게 하지 못해서입니다. 아, 성혼이 젊어서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병환 중에 모실 때나 상중에 거할 때 모두 상도에 지나치게 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고질병이 들어 산야에서 요양하여 벼슬에 나아갈 의사가 없습니다.

비록 부르고 임명하고 발탁하심이 거의 한 해도 거른 적이 없었으나 애써 반열에 나아가 직에 이바지하고 녹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혹 부름을 받들어 서울에 갔더라도 한 차례 은명(恩命)을 사례하고는 즉시 문을 닫고 병을 이유로 사양하여 끝내 체직을 구하고 돌아갔으니, 한 번도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간 적이 없었으며, 한번도 체직되지 않았는데 곧장 집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계미년025) 의 경우는 병조 참지로서 서울에 들어가 은명을 사례하다가 마침 이이가 병조 판서로 삼사의 탄핵을 받는 것을 보고 상소하여 논구하였고, 이이가 죽은 뒤에는 세상을 피해 산골에서 살면서 더욱 영원히 벼슬하지 않을 뜻을 굳혔습니다.

기축년026) 역변에 부르는 명이 재차 내려와 입경하여 사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문을 닫아걸고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몇 개월 동안 사직을 아뢰다가 비로소 체직을 받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임진년027) 난리에 이르러서는 서쪽으로 행차하는 일이 매우 비밀리 진행되었으나 민간에 혹 말이 전해져 성혼이 그 소식을 듣고 놀라고 의심하여 노비를 경성에 보내어 탐문하게 하였는데, 성혼의 친구가 그 당시 궐문에 내걸린 ‘친히 육사(六師)를 출동한다.’는 교서를 베껴 써서 보내왔습니다. 성혼이 그 편지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성상께서 굳게 지켜 떠나지 않을 뜻이 이만큼이나 되니 국가의 다행이다.’ 하고는 더 이상 서쪽으로 피난하시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날에 이르러 임금의 행차가 아침에 도성문을 나와 저녁에 임진강을 건넜는데 이 살고 있는 곳은 매우 외져 임진강과의 거리가 거의 20리나 되었으니 어떻게 미처 알아서 맞이하여 배알할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의 행차가 막 임진의 행전(行殿)으로 거둥하셨을 때 묻기를 ‘성혼의 집이 어느 곳에 있는가.’ 하자 이홍로(李弘老)가 상의 앞에 있다가 손으로 임진강 상류의 남쪽 언덕에 있는 시골집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성혼의 집이 저기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그런데 어찌하여 와서 배알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이홍로가 말하기를 ‘이때를 당하여 어찌 와서 배알하고 싶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장단 품관(長湍品官)인 남응시(南應時)가 그 당시에 수라 감관(水剌監官)으로 행전(行殿)의 앞에 엎드려 있다가 직접 그 말을 듣고 신을 위하여 낱낱이 말해준 것입니다.

아, 간악한 사람이 어진이를 무함하고 임금을 속이는 것이 급한 난리를 당하여 더욱 심하였으니 너무도 참혹하지 않습니까. 아, 선왕께서 성혼을 예우하신 것은 실로 천 년에도 드문 성대한 은전이었습니다. 임금의 행차가 서로(西路)로 간 것은 이미 처음의 계획을 끝까지 지속하지 못했다는 탄식이 있었는데, 환도하신 뒤에 엄한 하교를 여러번 내리면서 매우 진노하셨습니다. 이에 성혼이 걸핏하면 죄를 더 짓게 되어 운신할 수가 없어서 향리에서 죄를 기다리다가 외롭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임금을 팽개치고 간사한 무리와 파당을 지었다는 것으로 그의 죄안을 만들었으니 어찌 참소하는 자들이 꾸며낸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참소하는 사람은 못하는 짓이 없고, 교묘한 말은 끝없이 불어났으니 만약 우리 하늘 같은 선왕의 큰덕이 아니었다면 성혼이 입은 화는 반드시 이 정도에서 그치고 말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신년028) 가을에 신이 파평(坡平)의 집으로 성혼을 찾아갔었는데 성혼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임금에게 죄를 얻었는데 아직까지 벌을 받지 못하고 버젓이 세월을 보내면서 마치 죄가 없는 자처럼 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사서(史書)를 읽다가 한(漢)나라 신하가 북궐 아래에서 자결한 대목에 이르러서 무리하다고 여겨 강구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군신의 의리는 천지간에 도망칠 곳이 없으므로 만약 임금에게 죄를 얻고서 책망과 벌을 받지 않았다면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슬펐습니다.

임종할 때 자기 아들에게 유서를 남겨 장례를 박하게 치르도록 하였으니, 이는 비록 지하에 들어가서라도 임금에게 대죄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헤아려 본다면, 죽은 뒤에라도 죄를 받는 것이 바로 그의 바라던 바였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은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 법이니 어찌 마음에 기꺼워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유현(儒賢)이 무함을 당함에 세도가 점차 어그러져 식자가 놀라고 사론(士論)이 더욱 울적하니 삼가 바라건대 명철하신 성상께서는 살펴주소서.

혹자가 말하기를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가셨을 때 성혼이 사는 곳을 지났는데 성혼이 맞이하여 배알하지 않았고, 또 행재(行在)로 달려가지 않았으니, 임금을 팽개친 죄는 바로 그가 스스로 취한 것이다. 그의 벗인 정철기축년029) 역변에 추관으로서 무겁게 죄를 얻어 먼저 유배되고 나중에 관작을 삭탈당하여 간흉으로 지목되었지만 이 절교하지 않았으니, 간흉과 파당을 지은 죄를 더욱 면할 수 없다.’라고 하니, 어찌 참소하는 자들이 꾸며낸 결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이점에 대해 논변하겠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으로 말한다면 지위에 있고 없고는 진실로 차이가 없으나, 만일 난리가 일어났을 때 임금을 따라가지 못한 사람을 모두 임금을 팽개쳤다는 죄로 다스린다면 마땅히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위(魏)나라가 둘로 갈라질 때 동에는 고환(高歡)이 있었고, 서에는 우문태(宇文泰)가 있었다. 이때를 당하여 부름을 받은 선비는 물론 이미 그 지위에 있지 않았지만 불행히 그 지위에 있는 경우, 좌우의 근신은 임금을 따라 서쪽으로 갔고 사직의 대신은 동쪽에서 나라를 지켰다.’ 하였습니다.

임진난은 우문태·고환의 난보다 더 심하지만, 성혼의 지위로 말하면 이미 대신도 아니고 또 근신도 아닌데다가 그 지위에 있지도 않고 물러나 전야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 대신·근신 중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쳐 임금을 따라가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만 다급한 바람에 상하가 서로 잃어 흑 본심이 아니기도 하기 때문에 오직 우리 선왕께서 흡족한 덕으로 살리기를 좋아하고 넓은 도량으로 거친 것을 포용하여 불문에 부치고 모두 함께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만약 참소하는 자들이 꾸며낸 결과가 아니라면 어찌 유독 성혼에게만 엄격하였겠습니까. 또한 정철성혼·이이와 더불어 어려서부터 서로 친하여 시종 사이가 변하지 않았던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비록 온 나라가 그르다 하고 온 조정이 버리더라도 남의 말로 경솔하게 옛 친구를 끊어버리지 않는 것이 이이성혼의 뜻입니다. 만일 정철과 절교하지 못한 것을 성혼의 죄라고 한다면, 신묘년030) 정철의 죄를 재론할 때에 어찌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10년이 지난 임인년에야 비로소 이미 죽은 사람에게 연좌율을 적용하였으니, 참소하는 자들이 꾸며낸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갑오년과 을미년031) 사이에 조정에서 혹 상의 하교로 인하여 성혼에게 벌을 주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의 영상 유성룡(柳成龍)이 극력 저지하였고, 임인년에 이르러 유영경(柳永慶)이 정권을 잡은 후에 영남 유생 문경호(文景虎) 등이 서울에 와서 상소하여 성혼최영경(崔永慶)을 무함하여 죽였다고 하자, 이에 시론이 다투어 일어나고 안팎에서 부화뇌동하여 거의 깨뜨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영경의 옥사는 성혼이 파주로 돌아간 지 한참 뒤에 일어났고 또 종종 엄폐하기 어려운 다소의 명백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에, 선왕께서 그것이 무함이었다는 것을 살피어 관작을 삭탈하고 단지 옆에서 나온 얘기에 근거하여 성혼의 죄를 정했는데, 유성룡이 극력 저지하였던 말과 유영경이 부화뇌동한 자취는 모두 신이 듣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홍로가 처음 그 말을 지어냈고 영경이 마침내 그 죄를 만들었으니 어찌 유림의 통탄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성혼의 원통함을 씻어주소서. 그러면 유독 사문의 다행일 뿐만이 아니요, 경대신·체군신·자서민의 도리에 있어서도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의 내용은 모두 살펴보았다.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성혼의 일은 사람마다 쉽게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한교의 이 상소는 논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성혼의 원통함을 호소한 한 대목이 가장 상세하였다. 대개 한교는 일찍이 성혼의 문하에서 유학하였기 때문에 성혼의 일에 대해 매우 자세히 알고 있었다. 아, 성혼은 세상에 흔하지 않은 명유로 학문에는 연원이 있고 행실은 순정하여 학자들의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히 불우한 때를 만나 살아서는 배운 것을 펴서 이 세상을 윤택하게 하지 못하였고 화망의 더함이 지하에까지 미쳤으니, 성혼이 수립한 바에 있어서 비록 해될 것은 없다고 하나 세도로 논한다면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한교와 같은 하류는 세상에서 본디 사군자로 대해 준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였는데 묘당과 대각에서는 적적하게 말 한마디 하는 자가 없었다. 말하는 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떠들어대어 음흉하고 교활한 자들을 돕는 자들이 빈번하게 있었으니, 진실로 분통이 터질 만하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73장 B면【국편영인본】 31책 61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재정-공물(貢物) / 재정-진상(進上)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호구-이동(移動)

  • [註 024]
    밀가루 없는 국수인 셈이니 : 기본이 없이 일을 이루려 하는 것과 같아 결국 할 수 없다는 말임. 송(宋) 진량(陳亮)의 《용천집(龍川集)》 권22 답주원회비서(答朱元晦秘書)에 "이제 다시 비가 오지 않으면 아마도 솜씨 좋은 신부가 밀가루 없는 국수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 [註 025]
    계미년 : 1583 선조 16년.
  • [註 026]
    기축년 : 1589 선조 22년.
  • [註 027]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 [註 028]
    병신년 : 1596 선조 29년.
  • [註 029]
    기축년 : 1589 선조 22년.
  • [註 030]
    신묘년 : 1591 선조 24년.
  • [註 031]
    을미년 : 1595 선조 28년.

○先是, 朝廷以"副司勇韓嶠, 習知兵事", 令往西邊, 與議操鍊一事。 至是還京師, 上疏曰: 車騎步防之法, 本出於中朝 戚將軍繼光。 蓋繼光在南征, 則用《新書》砲殺之法, 至於在北防, 則用《實紀》車騎步之法, 其因敵制勝之妙, 出尋常萬萬。 然《新書》砲殺則皆是步兵也, 若用之西北鐵騎馳突, 則必見蹂躪, 無以住足矣。 至如《實紀》車騎步之法, 則亦可以通用於南。 蓋遠則放銃, 近則持劍突進, 之長技也。 我軍之於, 在遠不能防其銃, 在近不能制其劍, 此所以每戰必敗也。 若以砲車、戰車, 相間列陣, 夾以砲殺用騎爲翼, 賊遠則車中大砲, 車下小砲, 更迭放打, 而我之戰車遮板, 可防銃, 賊近則戰車所排鎗鈀, 可以制劍, 殺手騎兵, 又從而竝力, 則彼惡敢當我乎? 誠能講行《實紀》之法, 而若騎若步若車, 皆得以練習, 則北可以禦, 南可以禦矣。 臣地賤才劣, 雖久在道內, 其於操練, 別無寸效。 而至於關防一事, 則請以臣之聞見爲殿下一陳之。鴨綠一帶, 限隔夷, 義州江界等邑, 沿江布列, 皆爲一衛獨陣, 而大小鎭堡, 相錯於其間矣, 以本道內地及黃海道之軍, 合而爲一, 輪番入戍。 又設平壤成川寧邊安州龜城等五鎭管, 爲五衛連陣之制, 如遇邊警, 則內外相救, 聲勢相倚, 儻或邊城失守, 則州縣軍民, 各以所屬, 疊入於鎭管, 而以死守之。 祖宗軍制, 如此其詳密, 而年逾二百, 漸至弛廢, 至於亂後而極矣。 民物之經亂凋弊, 近於靡孑, 而軍添戍之法, 又從而廢焉, 此道關防, 如何其不至於疎脫乎? 前兵使柳珩, 將欲修築邊城, 始於, 而起役三年, 時未告畢。 昔金宗瑞之設六鎭也, 必先得南民數萬之入居然後, 始能董築, 終能守禦。 玆者柳珩則無軍而爲此大役, 非但功役之難就, 城役雖完, 軍兵、器械、糧餉, 皆是無麪之不托, 何以爲守乎? 伏願殿下, 特令備局、體府商確時措之宜, 申明祖宗朝軍輪戍之法, 或以他道軍, 別樣添戍, 則此道關防, 庶不至於盡廢矣。 西北防備一也, 而近日廟謨, 每每以北爲緊, 以西爲緩者, 豈以此道與中國相接, 可保其無虞, 抑北則有警, 而西則無警故耶? 賊謀叵測, 衝東擊西, 乃其常事, 則不可以一時無警而有所緩也。 況徒恃大國之援, 而不爲戰守之備, 自取滅亡, 春秋所譏。 (伏惟聖明深軫焉。) 方今黃海道, 亦爲築城防備之策, 不可遑念他道, 而臣之請復輪戍江邊之舊規者, 蓋國之有邊城, 譬之蟲魚, 則鱗介也, 鱗介旣破, 而能保其肌肉者鮮矣。 然則其所以築城防戍, 若通兩道而言之, 則當先關西而後海西, 以一道言之, 則先邊上而後內地可也。 事有先後, 若失其序, 則何以爲國乎? 祖宗非不知海西之爲重, 而必以軍入於江邊者, 豈非知所先後者歟? 先儒曰: "恢復, 當以愛民爲先。" 蓋民惟邦本, 若不愛養其民, 以固邦本, 則練兵、築城, 無所下落矣。 伏見今日沿江列邑之民, 朝夕待變, 生理蕭條, 而困於進上貢物, 又困於赴京使臣及京中各衙門求請, 剝膚椎髓, 膏血已盡, 老弱塡壑, 壯者流散。 以此江邊列邑, 幾盡空虛, 民戶之滿百者鮮矣。 內奴、寺奴之居於內地, 爲三手而入防者, 或除其貢, 而若原居邊上, 長爲擊柝防守之苦者, 則反徵其貢, 怨聲嗷嗷, 慘不忍聞。 且義州爲府, 接壤上國, 使命留連, 差往來, 糜費責辦, 甚於他州。 故祖宗朝以來進上之物, 特減其數, 至今民戶之稍勝於江邊列邑, 專由於此矣。 壬辰之變, 大駕駐此, 終爲恢復之根基, 繭絲保障之論, 尤可以驗其不誣也。 粵自前歲, 本州進上, 五倍於前數, 長此不已, 則臣恐義州之民, 亦將流散死亡, 無異列邑也。 一州如此, 則他邑可以類推矣。臣竊聞本道之民, 皆言: "壬辰龍灣駐駕之時, 諸道進上, 盡爲阻絶, 故其時監司, 不得已姑依京畿朔膳例, 分定於列邑。 而還都後五六年間, 兩南皆爲賊窟, 故此道權設物膳, 不能遽罷, 因仍到今遂成規例"云。 臣聞來驚, 私自語心曰: "遐遠之民, 怨苦若此, 朝廷何不詢問於其時監司及亂前曾爲此道守令之人, 以辨平時朔膳之有無乎?" 側聞"朝廷方以此事, 議于大臣"云, 此非西民解慍之機會乎? (伏願聖上, 損上益下, 或罷或減, 急行如傷之政, 則邦本幸甚, 邊務幸甚。) 且王者之政, 雖以愛民爲先, 而若論其本, 則必收拾人望之所在者, 而尊重之, 無間存, 有冤必釋, 爲第一義。 夫賢者, 萬民之所望, 而國家之元氣也, 《中庸》九經, 必以尊賢, 置於敬大臣、體群臣、子庶民之上者, 所以扶植元氣也。 若不尊賢, 而使萬民之望, 歸於落莫, 則其於敬大臣、體群臣、子庶民, 已無其本, 不能推元氣蕭然, 亂亡隨之, 此歷代已然之驗也。 《大易》坤之《文言》曰: "天地閉, 賢人隱", 爲人上者, 有賢而不能尊之, 使之隱遯, 此正生亂之兆, 旣不能尊之。 又從而擯棄於禍網, 使之抱痛, 則其於世道, 何如也? 臣之亡師故臣成渾, 以名父之子, 世居林泉, 而傳其家學。 孝悌、忠信, 蒙養旣端, 讀書窮理, 反躬踐履, 又與李珥, 結爲道義之交, 切磋講劘, 所造益深, 爲世儒宗。 開導後學、講明倫理, 其於國家之風化, 豈曰小補之哉? 德高毁來, 身亡謗集, 而削奪之禍, 及於泉壤, 儒林抱痛, 愈久愈深。 內之館學多士, 外之草野諸生, 排雲叫闔, 以訟其冤者, 不知其幾, 亦有大臣陳達於榻前, 而天聽邈然, 是必群下不能詳陳成渾被誣曲折, 使聖上日月之明, 遺照於覆盆耳。 噫! 成渾之少也, 事親極孝, 侍疾居喪, 皆過常度。 仍成沈痼之病, 養病山野, 無意仕進。 雖徵召除擢, 殆無虛歲, 而曾不陳力就列, 供職食祿。 或承召至京, 而一謝恩命, 旋卽杜門謝病, 終必乞遞而歸, 未嘗不待其召而自至, 亦未嘗不遞其職而徑歸其家。 至於癸未, 以兵曹參知, 入京謝恩, 適見李珥以兵曹判書爲三司所劾, 上書論救, 自 後, 棲遲丘壑, 益堅長往之志。 己丑逆變, 召命再下, 不得不入京謝恩, 杜門臥病, 呈告數月, 始遞其職, 得還其家。 至於壬辰之變, 西幸一事, 極是祕密, 而民間或有傳說, 聞之驚訝, 送奴京城, 爲之探問, 之知舊, 有以其時闕門所揭"親動六師"之敎, 謄書送之。 執之而泣曰: "聖上固守勿去之意, 至於如此, 國家之幸也", 更不以西幸爲意。 至於其日, 大駕朝出都門, 夕渡臨津, 而居深僻, 去臨津幾二十里, 何能及知而迎謁乎? 大駕方御臨津行殿, 問"成渾之家, 在於何處?" 李弘老在於上前, 手指臨津上流南岸村舍曰: "成渾之家在此矣。" 上曰: "然則何不來謁?" 李弘老曰: "當此時, 何肯來謁?" 此則長湍品官南應時, 以其時水刺監官, 伏於行殿之前, 親聞其言, 而爲臣歷陳者也。 噫! 奸人之誣賢、欺君, 當急難而益甚, 不亦慘乎? 噫! 先王之禮遇成渾, 實是千載之曠典。 而大駕之在西路, 已有不承權輿之嘆, 至於還都, 嚴敎屢下, 天威震動。 於是成渾動輒添罪, 無所措躬, 待罪田間, 枯槁以死。 而竟以遺君黨奸, 爲其罪案, 豈非讒者之效乎? 讒人罔極, 巧言如簧, 若非我先王如天之大德, 則成渾之禍, 必不止此而已也。 丙申秋, 臣訪坡平廬舍, 則惕然語臣曰: "吾得罪君父, 而未得受罪, 偃然度日, 有若無罪者然, 於心安乎? 吾嘗讀史, 至臣自剄北闕下, 以爲無理而不爲講究, 到今思之, 似亦有以君臣之義, 無所逃於天地之間, 若獲罪於其君, 而責罰未及, 則無以爲生故也", 其言戚矣。 臨終遺書其子, 使之薄葬, 是乃雖至泉下, 亦將待罪吾君之意也。 以此忖度, 則身後受罪, 乃其所願, 不亡者存, 寧不甘心? 但儒賢被誣, 世道漸乖, 有識驚心, 士論愈鬱, 伏惟明主察焉。 或言"大駕西狩, 過其境上, 而不爲迎謁, 又不能追往行在, 遺君之罪, 乃其自取。 其友鄭澈, 以己丑逆獄推官, 重得罪戾, 前竄後削, 指爲奸兇, 而不絶交, 黨奸之罪, 尤不可免", 豈可謂讒者之效哉? 臣請辨之。 以人臣愛君之誠言之, 則在位去位, 固無間隔, 如以亂離之際, 不能從君者, 悉繩以遺君之律, 則宜有分別。 朱子曰: "兩之分, 東則高歡, 西則宇文泰。 當是時, 見徵之士, 固已不在其位, 不幸在乎其位, 則左右近臣, 從君於西, 社稷大臣, 守國於東。" 壬辰之亂, 甚於宇文高歡, 而以地位言之, 則旣非大臣, 又非近侍, 乃不在其位, 而退處田野者也。 其時大臣、近侍之奔逬逃生, 不能從君者何限? 而倉皇顚倒, 上下相失, 或非本心, 故惟我先王德洽好生, 量廓包荒, 置而不問, 咸與惟新。 若非讒者之效, 何至獨嚴於成渾乎? 且鄭澈之與成渾李珥, 自少相親, 終始不渝, 國人之所知也。 雖一國非之, 擧朝棄之, 不以人言輕絶故舊, 之志也。 如以不絶鄭澈, 爲之罪, 則庚寅 辛卯鄭澈被竄之時, 甲午年再論鄭澈之時, 何無一言相及? 至於壬寅十年之後, 連坐之律, 始及於已死之人, 非讒者之效而何哉? 甲午、乙巳年中, 朝著之間, 有或因上敎欲罪成渾, 其時首相柳成龍力止之。 至於壬寅柳永慶當路之後, 嶺南儒生文景虎等, 來京上疏, 以成渾爲構殺崔永慶。 於是時論爭起, 內外和附, 幾至於牢不可破。 然崔永慶之獄, 起於成渾還山已久之後, 又有多少明驗種種難掩, 故先王察其爲誣而削之, 只据傍出之言, 以定罪, 柳成龍力止之言、柳永慶和附之迹, 則皆臣之耳聞目覩者也。 弘老始構其說; 永慶終織其罪, 豈非儒林之所痛乎? 伏願殿下亟雪成渾之冤, 則不獨斯文之幸也, 其於敬大臣、體群臣、子庶民之道, 亦必有助矣。 答曰: "疏辭具悉。 當令廟堂議處。 成渾事, 非人人所可易言者也。"

史臣曰: "之此疏, 所論非一, 而其訟一款爲最詳。 蓋嘗遊之門下, 故其知事甚悉。 嗟呼! 以間世名儒, 學有淵源, 操履醇正, 爲學者所宗。 不幸遭之屯, 生旣不能展布所蘊, 以澤斯世, 而禍網之加, 及於泉壤, 在所樹立, 雖無所病, 而自世道論之, 寧可不爲痛心哉? 如下流, 世固未嘗以士君子待之者, 顧能爲此言, 而廟堂、臺閣之上, 闃然無吐一言者。 不特無言, 咻呶以助淫詖者, 比比有之, 良可扼腕。"

光海君日記卷第三十九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73장 B면【국편영인본】 31책 61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재정-공물(貢物) / 재정-진상(進上)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호구-이동(移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