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신의 뇌물 요구에 대해 대신과 의논하여 주기로 하다
【전교하기를,】
"원접사의 장계를 가지고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라."
하니, 영상 이덕형은 의논드리기를,
"사신 유용(劉用)이 데리고 왔던 은을 계산하는 사람이 지금 다시 상공(相公)으로서 나왔으니, 그 당시 선사한 수량을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그가 평안도에 들어왔을 때 전보다 많이 감하여 주었으니, 부족하게 여겨 원망을 한 것은 당연합니다. 더구나 개독례(開讀禮)에서 뇌물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항으로서 사신 유용이 이것을 핑계하여 전후로 은 5천 냥, 파삼(把蔘) 4백 근을 받았습니다. 욕심이 한이 없는 자들이 이것을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이 상황에서는 사리로 설명하기 어려울 테니, 속히 그의 말에 따라 은과 삼을 더 보내고 좋은 말로 회답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차비 역관(差備譯官)은 애당초 노련한 인물로 보내는 것이 옳았습니다. 다시 임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좌상 이항복은 의논드리기를,
"이 상황에서는 옛날의 사례니 의리니 예절이니 하는 것은 하나도 필요없고 오직 그의 말대로 채워 보내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갖다 바칠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주지시키기를 ‘사신 유용이 왔을 때에는 3천 냥이었는데 노야(老爺)께서 이렇게 말하였기 때문에 노야의 말에 따라 보냅니다.’ 운운해야 됩니다. 통사를 다시 임명하여 보내는 것은 무방합니다."
하고, 우상 심희수는 의논드리기를,
"근자의 행위를 보니,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그와 더불어 논란하겠습니까. 서울에 들어오는 것을 조종하는 게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니, 그의 말에 따라 골짜기와 같은 욕심을 채워주어야 하겠습니다. 다만 서울에 들어온 뒤에 온갖 구실로 뇌물을 요구하여 그 수량이 5만 냥을 갖추어야 할 정도가 되면 비록 빈약한 재정 상태를 넉넉하게 만들고자 해도 형세상 어려우니, 이런 판국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지금에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보충액 수천 냥을 열거하고, 완곡한 말로 고하기를 ‘이 물품은 본래 토산물이 아니어서 모으기가 어렵기에 단지 지금 올리는 수량밖에 없다. 서울에 도착해서 원근의 민간에서 수색하여 2천 냥 정도를 더 보충할 수 있겠으며, 털끝만큼도 속이려 하는 것은 아니다.’ 한다면 저들이 혹시 흉측한 노여움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일에 있어서 결단코 이러한 사례가 없었다는 뜻과 ‘천교(天橋)라는 설은 더욱이 이치가 없는데, 어떤 사람이 만들어냈는지 모르겠다. 다만 노야(老爺)가 시종 굳이 요구하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의 뜻이 순종하는 것만을 급선무로 여겨 전례가 없는 일을 새로이 만들 수밖에 없었다.’ 운운하여 질책을 피하지 않고 반복하여 논변하여,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조금이라도 막는 방법으로 삼는다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통사(通事)를 다시 뽑아 보내는 것은 무방할 듯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영상의 논의에 따라 시행하라. 통관(通官)은 품계가 높고 노련한 인물을 정밀하게 가려서 임명하여 보내라."
하였다. 【당시에 조사 태감(太監) 염등(冉登)이 갖은 구실로 뇌물을 요구하였는데, 심지어는 은으로 된 사다리를 만들어 서울 남대문을 넘어가 칙서를 받들게 하고는 이것을 천교(天橋)라 하면서, 은을 거두어들이는 최후의 기회로 삼았다. 】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70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547면
- 【분류】외교-명(明) / 무역(貿易) / 인사(人事)
○庚戌七月初一日 朔甲辰, 傳曰: "因 以遠接使狀啓。 問于大臣以處之。" 領相李德馨議: "劉使時所帶算銀人, 今復以相公出來, 則其時贈賂之數, 宜無不知。 其入平安道也, 得比前頗減, 則歉然而懷怨者, 勢固然哉? 況開讀索賂, 係是大段, 劉使之以此爲名, 而前後受銀五千兩、把蔘四百斤。 無厭之人, 其放過乎? 到此難以事理相講, 速依其言, 添送銀蔘, 善辭回答, 似不得已。 差備譯官, 初宜以老實人, 答送改差爲當。" 左相李恒福議: "到此則舊例義理, 禮節都沒了唯, 有依所言充送。 然不可徒然納之, 當明白曉之曰: ‘劉使時則三千兩矣, 老爺如是爲言, 從老爺之言送之。’ 云云。 通事改送, 亦無妨。" 右相沈喜壽議: "觀近日所爲, 則非人類也, 何足與較? 且入京操縱, 爲今日第一機關, 固當依其所言, 以充溪壑之慾。 但旣入京城之後, 要索百端, 期備五萬兩之數, 則雖欲撥貧爲富, 勢所難辦, 到此地頭, 亦復奈何? 爲今之計, 當開具補數千兩, 婉辭告之曰: ‘此物本非土産, 艱難湊合者, 只有此進呈之數, 待到王京, 謹當搜送。 遠近民間, 可補二千兩之數, 不欲一毫相欺也。’ 云, 則彼或有小解兇怒之理也。 於此斷無此例之意, 及天橋一說, 尤極無理, 未知何人, 做出此意, 十分怪愕。 只以老爺終始强責之故, 一國人情, 徒以承順爲急, 不得不創開無前之例云云, 不避訶責, 反覆陳辨, 以爲日後一分搪塞之地, 則未知如何也。 通官則改送無妨。" 傳曰: "依領相議施行。 通官以秩高老實人, 極擇差送。" 【時詔使太監冉登, 需索百端, 至使造銀橋, 跨越京城南大門, 以迎詔勅, 謂之天橋, 以爲捧銀停止之計。】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70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547면
- 【분류】외교-명(明) / 무역(貿易)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