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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23일 기해 2번째기사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예조가 생모 추숭에 대해 반대를 건의하였으나 불허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이 일은 본래 마땅히 의논 처리해야 할 일이고 신들도 또한 일찍이 사적으로 강구하였으나 감히 여쭙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성교(聖敎)는 실로 정(情)과 예(禮)에 말 수 없는 바입니다. 다만 그 위호(位號)의 절목은 합당함을 참작하여 중도(中道)를 얻는 것이 매우 용이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높이면 제도에 넘게 되니, 아마도 《춘추》에 왕후와 똑같이 했다는 비방을 면하지 못할 것이고, 너무 가볍게 하면 사은(私恩)에 소략하여 성상의 추효(追孝)하는 정(情)을 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고례(古禮)를 따르려고 하니, 중자(仲子)의 사당033) 을 이룬 것과 성풍(成風)의 수의(隧衣)034) 를 보낸 일이 모두 《춘추》에서도 비방을 받았고 선유(先儒)들도 실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고사(古事)를 따르려고 하니, 한(漢)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의 여러 임금들이 모두 각각 추숭한 일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귀하게 되었다는 말에 구애되어 성인이 예를 제정한 본뜻에 위배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강목(綱目)》에 쓸 때에 모두 폄하하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삼대의 정치를 본받으려는 훌륭한 마음으로 장차 위로 성인의 예법을 따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아래로 한나라당나라의 잘못된 규정을 따르시겠습니까? 신들이 예를 집행하는 관직에 있으니, 삼대의 법이 아니면 본받지 않는 것은 실로 평일에 배운 바이니, 감히 다시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의인 왕후께서 아들이 없으시므로 선왕(先王)께 건의하여 여러 아들 중에 전하를 택하여 사왕(嗣王)으로 삼아 세자로 세웠으니, 의인 왕후는 이미 전하의 어머니이십니다. 전하께서 사친(私親)에게는 자연 복(服)을 강등하는 예가 있으니, 일체(一體)로 높일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공빈(恭嬪)이 선조(先朝)에게는 이미 맨 앞의 후궁이고 또 성상을 탄생시킨 덕이 있으니, 그 사체(事體)가 실로 송(宋)나라이 신비(李宸妃)035) 와 서로 같으나 다만 유 황후(劉皇后)가 몰래 인종(仁宗)을 기른 것은 또 의인 왕후가 전하에게 있어 위로 천자에게 고하여 광명 정대한 종통(宗統)의 세자로 정한 것만 못합니다. 그러나 신들이 또 상고해 보건대, 명나라 효종 황제가 생모인 귀비(貴妃) 기씨(紀氏)를 추존하여 효목 황후(孝穆皇后)로 삼고 조서하기를 ‘효목 황후는 나를 낳은 생모이나, 황태후라 칭하는 데 그치고 봉자전(奉慈殿)에 별도로 제사지내라.’ 하고는, 인하여 여러 신하들과 그 가부를 의논하니, 예부 상서(禮部尙書) 오관(吳寬)이 아뢰기를 ‘노송(魯頌)에 강원(姜嫄)036) 의 깊숙한 사당[閟宮]이라 한 것은 예에 별도로 사당을 세운 제도이고 한나라, 당나라도 또한 그러하였는데, 송나라에 이르러 병부(竝祔)한 자가 있었으니, 그 예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여러 임금의 계실(繼室)로서 살아서 배위가 된 자이니, 후일 자손들이 추숭하는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이 신비가 별세하자 인종이 몹시 애통하여 이에 추존하고 부제(祔祭)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후세에 본받을 만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효종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비답하기를 ‘배향(配享)하는 중대한 일은 예에 마땅히 상세히 하고 삼가야 한다. 경들이 고전(古典)과 조종(祖宗)의 묘제(廟制)를 이미 명백하게 상고하였으니, 모두 의논에 준하여 사당을 세워 봉향하고 인하여 황태후라 칭하여 어버이 존숭하는 뜻을 펴게 하고 후세 자손들은 준수하고 숭봉하여 영구한 제도로 삼으라.’ 하니, 이에 중외(中外)가 화합하여 예에 맞는다고 하였습니다.

명나라에 서 올바른 가법(家法)을 시행한 자는 효종이 제일이고 홍치(弘治)037) 연간의 훌륭한 정치와 교화는 한나라당나라 때보다 월등하였으니, 이는 바로 시왕(時王)의 제도이고 사례(事例)도 동일하니, 이를 근거로 의논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다만 위호(位號)는 사적으로 국중(國中)에서만 칭하고 국경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한다는 고인(古人)의 말이 있으나, 우리 나라는 위로 천자가 있어 형세가 명나라와 는 다릅니다. 신들의 뜻은 본래의 위호(位號)를 그대로 둔다면 추숭하는 실상이 없을 듯하고, 위로 왕후와 똑같이 한다면 반드시 둘을 높였다는 혐의를 끼칠 것입니다. 따라서 강등(降等)하는 의의가 없을 듯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생존하였을 때에는 비(妃)라 칭하고 별세하면 왕후라 칭하는 것은 이미 조종조에서 이루어 놓은 준례입니다만,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건대 왕비를 왕후로 올렸다고 하였으니, 왕후와 왕비는 등급이 다소 다릅니다. 지금 마땅히 추존하여 왕비를 삼아 다소 높이는 분별을 보여 주고 휘호를 더하여 별묘(別廟)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지극히 높이는 것입니다.

그 밖의 절목(節目)은 아울러 홍치 연간 봉자전(奉慈殿)의 고사대로 하면 성상께서 종통(宗統)을 중히 여기고 본생(本生)에 보답하는 도리에 양쪽 다 지극히 아름다울 것이고 정(情)과 예(禮)에도 참작한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신들은 모두 용렬한 자들로서 이 대례(大禮)를 당하여 구구한 소견이 이 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모두가 그렇다고 하므로 황공스럽게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뜻이 명백하여 내가 분명하게 알았다. 부묘에 관하여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우면 천천히 후일을 기다려 숙의해서 처리하라. 다만 왕비라는 칭호를 올리는 것은 추숭하는 법에 흠이 될 듯하고 또 명나라효종 황제도 이미 소생모인 귀비 기씨(紀氏)효목 황태후(孝穆皇太后)로 높였으니, 지금 또한 왕후의 호를 올리고 별묘(別廟)를 세워 책보(冊寶)를 올리고 의식을 갖추어 능(陵)을 봉하는 등의 절목(節目)을 다시 상세히 의논하여 속히 거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513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註 033]
    중자(仲子)의 사당 : 중자는 춘추 시대 혜공(惠公)의 부인이고 환공(桓公)의 어머니이다. 은공(隱公)이 환공을 대신하여 집정(執政)하였으므로 환공의 어머니인 중자를 존숭하기 위하여 별도로 사당을 세운 일이 있다. 《춘추(春秋)》 권1 은공(隱公) 5년.
  • [註 034]
    성풍(成風)의 수의(隧衣) : 성풍은 춘추 시대 희공(僖公)의 어머니이다. 성풍은 문공(文公) 4년에 죽었고 희공은 죽은 지 이미 10년이 되었는데, 진(秦)나라 사람이 문공(文公) 9년에 이르러 희공과 성풍의 수의를 보낸 고사가 있다. 《춘추(春秋)》 권8 문공(文公) 10년.
  • [註 035]
    이 신비(李宸妃) : 진종의 후궁이며 인종의 생모.
  • [註 036]
    강원(姜嫄) : 제곡(帝嚳)의 비(妃)이고 후직(后稷)의 모(母)이다.
  • [註 037]
    홍치(弘治) : 명 효종의 연호.

○禮曹啓曰: "臣等伏以此事, 本當有議處之擧, 臣等亦嘗私講, 而未敢仰稟。 今者聖敎實情禮之所不可已。 第其位號節目, 酌宜得中, 甚不容易。 過隆則歸於踰制, 恐不免《春秋》竝后之譏; 太輕則略於私恩, 無以伸聖上追孝之情。 今欲遵倣古禮, 則考仲子之宮, 歸成風, 皆見譏於《春秋》, 而先儒以爲越禮。 今欲遵倣古事, 則諸君, 俱各有追崇之擧, 此皆拘於‘母以子貴’之說, 而不覺有違於聖人制禮之本意。 朱子書於《綱目》, 皆著貶辭。 以聖上治法三代之盛心, 其將上遵聖人之制禮乎? 抑將下襲之謬乎? 臣等待罪執禮之官, 非三代不法, 是實平所學, 不敢更有他議也。 況懿仁王后無子, 贊議先王, 擇於諸子中, 取殿下爲嗣, 立爲儲宮, 懿仁王后旣是殿下之母。 則殿下之於私親, 自有降服之禮, 其不可尊之以一體明矣。 然而恭殯嬪 於先朝, 旣位冠後宮, 又有誕育聖躬之德, 其事體實與李宸妃相似, 而但劉皇后之潛養仁宗, 又不如懿仁王后之於殿下, 上告天子定爲宗儲之光明正大。 而臣等又考皇朝 孝宗皇帝追尊生母貴妃紀氏孝穆皇后, 詔曰: ‘孝穆, 朕身生母, 止稱爲皇太后, 而別祀於奉慈親殿 ’, 仍與群臣議其可否, 禮部尙書吳寬上奏: ‘《魯頌》 姜嫄閟宮, 於禮爲別廟之制, 亦然, 至乃有竝祔者, 其禮已謬。 然皆諸帝繼室, 生而爲配者, 非後子孫追尊之比。 惟歿, 仁宗傷痛, 乃用追尊而祔祭, 此豈後世所當法哉?’ 奏上, 孝宗嘉納, 御批曰: ‘配享重事, 禮當詳愼, 而卿等稽考古典及祖宗廟制已明白, 都准議建廟奉享, 仍稱皇太后, 以伸尊親之意, 後世子孫遵守崇奉, 永爲定制。’ 於是中外翕然稱得禮云云。 皇朝家法之正, 孝宗爲最, 弘治治化之盛, 高出, 此正時王之制, 而事例又同, 似當據此爲議。 而惟其位號, 則古人有私稱國中, 取不加境外之說, 我國上有天子, 而勢與天朝有異。 臣等之意, 只仍本位, 則似無追崇之實, 上竝母后, 則必貽貳尊之嫌, 又無降殺之。 我國生時則稱妃, 上仙則稱后, 旣有祖宗成例。 考之古典, 以妃陞后, 后之與妃, 等級稍別。 今宜追尊爲妃, 以示稍隆之別, 而加以徽號, 別廟享祀, 極其隆盛。 其他節目, 竝依弘治 奉慈殿 事, 則其於聖上重宗統、報本生之道, 兩盡其美, 而情文庶有參酌之宜矣。 臣等俱以劣, 當此大禮, 區區所見, 此外無他。 議于大臣, 則皆以爲然, 惶恐敢啓。" 答曰: "啓意明白, 予曉然具悉。 祔廟如難輕議, 則徐後日, 熟議以處。 但只上妃號, 似欠於追崇之典, 而且皇朝 孝宗皇帝, 旣以所生母貴妃紀氏, 尊爲孝穆皇太后, 今亦上以后號, 建別廟進冊寶, 備儀封陵等項節目, 更加詳議, 急速擧行。"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513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