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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9일 을유 5번째기사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윤방을 경기 감사로, 이호신을 집의로, 윤양을 보덕으로 삼다

윤방(尹昉)을 경기 감사로, 〈윤선(尹銑)을 종부시 정으로,〉 이호신(李好信)을 집의로, 윤양(尹讓)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윤양과 김대래(金大來)는 모두 유영경(柳永慶) 시절의 명사(名士)였다. 윤양이 일찍이 대래더러 부황하고 행검(行檢)이 없다고 탄핵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대래가 다시 청반(淸班)에 오르자 시론(時論)은 둘 다 그대로 두었고 윤양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래가 영경을 위하여 허준(許浚)에 대한 일로 피혐하자, 윤양이 여기에서는 이론을 제기하였다. 이 때문에 대래는 죽게 되었으나 윤양의 청망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당초 유영경의 당(黨)을 소북(小北)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소북 중에 또 청북(淸北)과 탁북(濁北)이 있었다. 대개 그 중에서 다소 강직하여 스스로 염치가 있다고 하는 자를 사람들이 청북이라고 칭하니 윤양과 같은 무리였고, 그 나머지를 탁북이라고 이르니 대래와 같은 무리였다. 유영경이 국가의 일을 담당하였을 때에는 형적(形跡)이 서로 다르지 않았었는데, 그가 패하고 나자 그의 죄를 논핵하였으니 그 계책이 치밀하다 하겠다. 지금 나와서 조정의 권력을 잡은 자들은 대개 이른바 청북이고 그 중에 혹은 탁북으로서 청북에 간 자가 있으니, 의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영경의 잔당이라고 한다. 】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31책 506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以尹昉京畿監司, (尹銑爲宗簿寺正,) 李好信爲執義, 尹讓爲輔德。 【大來俱爲永慶時名士。 嘗劾大來爲浮誕無行檢, 未幾大來復據淸班, 時論兩存之, 亦不相異。 及大來永慶避嫌, 於許浚事, 乃與之立異。 以故大來至於死, 而之淸望依舊。 初永慶之黨, 號爲小北, 而小北中, 又有淸北、濁北。 蓋厥中之稍錚錚, 自謂有廉隅者, 人稱淸北, 如之類, 其餘謂之濁北, 如大來之類也。 方永慶當國時, 形不甚相異, 及其敗也, 倡論其罪, 其爲計密矣。 今之出執朝權者, 大槪所謂淸北也, 其中或有以濁而之淸者, 人之好議論者, 俱指爲永慶餘人云。】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31책 506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