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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22권, 광해 1년 11월 30일 정미 7번째기사 1609년 명 만력(萬曆) 37년

사학의 재건립 및 노산군·연산군 등의 분묘에 대한 정리 등을 예조에서 건의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날 동지경연사 본조 판서 신 이정귀(李廷龜)가 경연하는 가운데 아뢰기를 ‘옛날에는 가(家)마다 숙(塾)이 있고 당(黨)마다 서(序)가 있었으니, 상·서(庠序)에서의 교육은 제왕이 정치하는 큰 근본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태평시에 사학(四學)이 있었지만, 난리를 겪은 뒤에는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느라 단지 중학(中學)과 서학(西學) 두 곳만 설립하고 동학(東學)과 남학(南學)은 아직 설립할 겨를이 없었으니, 조종조(祖宗朝) 사학의 제도가 하루아침에 폐지된 것으로 매우 미안합니다. 중앙이나 지방의 사자(士子)가 아무리 기거하면서 학업에 접하려고 하더라도 진실로 그렇게 할 장소가 없으니, 점차로 다시 설립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전대(前代) 충현(忠賢)의 분묘를 봉식(封植)하고 치제(致祭)할 일로 일찍이 전교하셨으니, 보거나 듣는 사람치고 누군들 감격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노산군(魯山君)의 분묘도 허물어진 채 폐기된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조정에서 치제하는 일이 없으니 몹시 미안(未安)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연산(燕山)의 분묘 또한 일체로 시행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하였습니다. 신 이정귀가 아뢰기를 ‘연산노산은 일이 다르기는 하지만 똑같이 여러 해 동안 군림한 군주이니 조정의 체모로는 진실로 동일하게 대우하여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수총인(守塚人)을 더 배치하며 관에서 제수(祭需)를 마련하는 등의 일을 각별히 거행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울러 예관으로 하여금 의계(議啓)하여 시행하라.’ 하면서 〈그 일을 전교하였습니다.〉

국가가 사학을 건립하여 상·서(庠序)와 당·숙(黨塾)의 제도를 모방하였으니 교육을 베풀려는 의도가 실로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태학은 건립되었으나 사학은 갖춰지지 않아 학문을 학습하려 해도 이미 그럴 장소가 없어, 다시는 학문에 힘쓰는 융성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 궁궐을 짓고 남은 재목으로서 각도에 흩어져 있는 것이 매우 많으니, 해조로 하여금 성균관과 회동하여 요리하고 조치함으로써 점차 다시 설립하게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노산군의 분묘가 먼 영외(嶺外)에 있는데 본군이 사명일(四名日)에 품관(品官)으로 하여금 간략하게 제사를 지내게는 하지만, 제사 의식이 조촐하여 제대로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인(夫人)의 묘소에 이르러서는 양주(楊州)풍양(豊壤)에 있지만 초동과 목수를 금지시키지 않고 제사가 단절되어, 도리어 자손이 있는 우의(牛醫)나 마졸(馬卒)에게도 미치지 못하니 생각하면 측은하여 저희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립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혁명으로 쫓겨난 전대의 군주라 하더라도 모두 받들어 제사하는 전례(典禮)가 있었으니, 우리 조정의 숭의전(崇義殿)도 그런 것의 하나입니다. 그러니 따로 몇 칸의 사우(祀宇)를 건립하여 두 분의 신주를 받들어 해마다 한식 및 양 기일에는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소서. 분묘가 있는 곳에는 별도로 봉식하고 수총인을 더 정하여 항상 수호하도록 하며, 사명일과 양 기일에는 본 고을의 수령이 제수를 깨끗하게 준비하여 직접 가서 제사를 지내되, 조정에서 해마다 향(香)을 내리고 축문(祝文)은 조정의 명을 공경히 받들어 지낸다는 뜻으로 지어 항상 사용한다면, 정례(情禮)와 사체(事體)에 있어 거의 중도(中道)를 씀을 수 있을 것이며 성상의 예의를 소중히 여기고 조상을 추모하는 뜻이 만세토록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의 체모가 중대하여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연산군을 일체로 시행하는 일의 당부(當否)와 아울러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탈(定奪)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대신이 모두 그 의논을 옳게 여겼는데, 심희수(沈喜壽)가 ‘연대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따로 사우(祀宇)를 건립하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고 하자, 그대로 따랐다. 〈이때부터 비로소 향과 축문을 내려주고 본 고을의 수령이 명을 받들어 제사를 지냈으며, 부인의 묘소는 그전에는 있는 곳을 몰랐지만 이때부터 향과 축문을 내려주고 제사를 지내기를 한결같이 능소(陵所)처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33장 B면【국편영인본】 31책 472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禮曹啓曰:前日同知經筵事本曹判書臣李廷龜筵中啓辭: "古者家有塾, 黨有序, 庠、序之敎, 帝王爲治之大本也。 我國平時有四學, 亂後庶事草創, 只設中、西兩學, 東、南學則尙未遑焉, 祖宗朝四學之制, 一朝廢之, 甚爲未安。 中外士子, 雖欲屈居接學業, 固無其所, 漸次復設宜當。 且前代忠墳墓封植致祭事, 曾有傳敎, 凡在瞻聆, 孰不感激? 魯山君墳墓, 頹廢多年, 朝廷無致祭之事, 極爲未安。" 曰: "然矣。 燕山墳墓, 亦一體施行爲當。" 臣廷龜曰: "燕山魯山, 事雖不同, 而同是累年君臨之主, 朝家事體, 固宜一樣待之, 遣官致祭, 增置守塚人, 官備祭需等事, 各別擧行爲當。" 曰: "竝令禮官議啓施行。" (事, 傳敎矣。) 國家建立四學, 以倣庠、序、黨、塾之制, 設敎之意, 實非偶然。 今者太學雖建, 四學未備, 藏修學習, 旣無其所, 無復有誦洋洋之盛。 目今宮闕餘材, 散在各道者甚多, 令該曹會同成均館, 料理措, 漸次復設, 似不可已。 魯山君墳墓在嶺外荒遠之地, 本郡雖於四名日, 令其品官略爲設祭, 而祭式草草, 不成模樣。 至於夫人之墓, 則在楊州 豐壤, 而樵、牧不禁, 香火斷絶, 反不及牛醫、馬卒之有子孫者, 思之惻然, 不覺淚下。 自古帝王, 雖於前代革世之君, 皆有崇奉享祀之典, 我朝之崇義殿, 亦其一也。 別建數間祠宇, 以奉兩位神主, 每年寒食及兩忌日, 遣官設祭。 墳墓所在處, 另爲封植, 增定守塚人, 常加守護, 四名日、兩忌日, 本官守令精備祭物, 親往設祭, 自朝廷每年降香, 祝文則以欽承朝命之意, 撰述常用, 則情禮、事體, 庶可得中, 而聖上重禮、追遠之意, 可以有辭於萬世。 然事體重大, 臣等不敢擅便, 燕山君一體施行當否, 竝議大臣定奪何如? 大臣皆是其議, 沈喜壽以爲: "年代已遠, 別建祠宇, 則似難矣。" 從之。 (自此始降香、祝, 本官守令承命設祭, 夫人墓則自前不知所在, 而自此降香、祝, 設祭一依陵所。)光海君日記卷第二十二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33장 B면【국편영인본】 31책 472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