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가 가주를 설치하지 말 것을 아뢰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나라에 대상(大喪)이 있어 천자의 명령으로 사제(賜祭)의 의식을 행하니, 이는 실로 한 나라의 무엇보다 중대한 의식입니다. 담당관이 된 자는 의당 조종이 이미 시행한 전례를 자세히 탐구하여 착실히 준수, 털끝만치라도 미진한 후회가 없게 해야 합니다.
신들이 실록에 등서되어 있는 내용의 시종을 상고한 결과, 세종 때 태종의 상에 대해서와 인묘·명묘가 중종·인종의 두 상에 대하여 모두 우주(虞主)를 사정전(思政殿)으로 옮기었는데, 그 승지를 보내 우주를 옮긴 것과 상이 공경히 맞이한 절차를 역력히 상고할 수 있고, 인묘조에 중국 사신이 사제(私祭)를 행하려 하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두목들이 난잡하게 출입하다가 만약 우주를 접근해 보고 그 실상을 알아서 천사에게 고하면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이다.’고 하여, 이에 가주(假主)를 만들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간이 의에 근거하여 쟁론하였는데, 사신(史臣)이 이 사실을 기록하기를 ‘가우주(假虞主)로 신위를 대설하려 하다가 중지하였다.’고 하였으니 사제(私祭) 때에 또한 가주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사제(賜祭) 때에 이르러는 특별히 좌부승지 송세형(宋世珩)을 보내 우주를 사정전으로 옮겼다 하였고, 가주를 설치한 것은 전연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멀리는 세종조, 가까이는 인·명 양조가 모두 우주로 행례한 것이 분명합니다. 기타 여러 대의 실록에 비록 기록된 바는 없으나 가주가 보이는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왕의 초기 무진년 중국 사신 구희직(歐希稷)이 왔을 때 가주를 썼는데, 그때의 시종신 신응시(辛應時)의 운운한 말이 있었다고 하나, 이 역시 도로의 뜬소문에서 나온 것이요, 실로 근거할 만한 곳이 없고 또 그 사제(賜祭)와 사제(私祭) 어느 때 쓰인 것인지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해조는 조종조에 본래 가주의 의논이 없었음을 살피지 못하고 또 사제(賜祭)와 사제(私祭)의 분별을 살피지 못하고서 전후 계사에 늘 선조가 이미 시행한 전례라고 지칭하며 새로운 규례를 열어 2백 년 동안 열성이 준행해 온 정례를 변개하고자 하니, 신들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당당한 성조가 역대로 계승하며 대부분 이 예를 준행했고, 중국인으로서 사제(賜祭)의 사명을 띠고 온 자가 그 몇 명인지를 알지 못하나 일찍이 의외의 변이 있지 않았습니다. 어찌 유독 오늘날에 와서 해관의 일시적 의견으로 경솔히 개정하여 훗날의 무궁한 후회를 끼치겠습니까. 더구나 대신은 모두들 불가하다 하고 성상 역시 의논에 따르라는 하교가 있었는데도 해조는 많은 말을 허비하여 허위를 꾸며 강변하면서 기필코 자신들의 의견을 실행한 연후에 그만두고자 하니 이 어찌 전도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듣건대 국시(國謚)와 사시(私謚) 중 ‘경(敬)’ 자가 중첩되어 시호를 고칠 것을 의논 중이니 장차 다시 제주(題主)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사제(賜祭) 전에 고쳐 제주하는 예를 먼저 거행한다면, 우선 종호(宗號) 두 글자를 쓰지 않고 있다가 받들어 옮겨 행제(行祭)한 연후에 사시(賜謚)와 함께 뒤미쳐 쓰는 것이 사리에 있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청컨대 이 뜻으로 다시 대신과 의논하여 즉시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가주를 설치함이 미안한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건대 천하의 사변이 무궁하니 사변에 대처하는 길은 권도에 해롭지 않다고 여겨진다. 더구나 선조가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지 않은가. 나의 소견은 이와 같다. 아뢴 뜻은 대신에게 물어 조처하겠다."
하고, 이어 정원에 전교하기를,
"헌부의 계사를 대신에게 물어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79장 B면【국편영인본】 31책 418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역사(歷史) / 외교-명(明)
○司憲府啓曰: "國有大喪, 而以天子之命, 行賜祭之禮, 此實一國莫大莫重之禮。 爲該官者, 當詳究祖宗朝已行之例, 得實遵守, 無一毫未盡之悔可也。 臣等取考實錄謄書終始, 則世宗朝之於太宗喪、仁廟·明廟之於中·仁兩喪, 皆奉移虞主於思政殿, 其遣承旨奉移及自上祗迎之節, 歷歷可考。 仁廟朝, 天使欲行私祭, 議者皆以爲: ‘頭目輩雜亂出入, 若近見虞主而揣知其實, 以告天使, 則事將不測’, 於是有假主造設之議。 其時臺諫據義爭論, 而史臣記之曰: ‘欲以假虞主代設於神位, 乃止’云, 則私祭時亦不用假主明矣。 至於賜祭時, 則特遣左副承旨宋世珩, 奉移虞主于思政殿云, 設假之事, 專不擧論。 以此觀之, 則遠而世宗朝, 近而仁、明兩朝, 皆以虞主行禮, 灼然昭載。 其他累世實錄, 雖無所載, 一無假主現出處。 至先王初戊辰年, 歐天使希稷之來, 用假主, 其時從臣辛應時 有云云之說云, 而亦出於道路傳聞, 實無可據之地。 且其用於賜祭與私祭, 尤未可辨也。 該曹不察祖宗朝本無假主之議, 又不察賜祭與私祭之分, 前後啓辭, 每指爲先朝已行之例, 創開新規, 欲變二百年列聖遵行正禮, 臣等實未曉其故也。 堂堂聖朝, 歷世相承, 率由是禮, 華人之以賜祭奉使者, 不知其幾, 而未曾有意外之變。 何獨於今日, 因該官一時之見, 率爾輕改, 以貽後日無窮之悔乎? 況大臣皆以爲不可, 自上亦有依議之敎, 而該曹多費辭說, 飾虛强辨, 必欲直行己見而後已, 豈不傎乎? 竊聞國諡與賜諡中, 敬字爲疊, 方議改諡, 將有改題主之擧。 若於賜祭前, 先擧改題之禮, 姑不書宗號二字, 奉移行祭之後, 與賜諡一時追書, 則其於事宜, 恐爲便當。 請以此意更議大臣, 趁卽施行。" 答曰: "假主之設, 非不知未安, 而第慮天下之事變無窮, 處變之道, 未害爲達權。 況有先朝已行之例乎? 予見則如此耳。 啓意當問于大臣而處之。" 仍傳于政院曰: "憲府啓辭, 問于大臣議啓。"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79장 B면【국편영인본】 31책 418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역사(歷史)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