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원 부원군 유성룡의 졸기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이 졸하였다.
성룡은 안동(安東) 출신으로 호는 서애(西厓)이며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일찍부터 중망(重望)이 있었다. 병인년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경연에 출입한 지 25년 만에 드디어 상신(相臣)이 되었으며, 계사년에 수상으로서 홀로 경외(京外)의 기무(機務)를 담당하였다.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咨文)과 게첩(揭帖)이 주야로 폭주하고 제도(諸道)의 주독(奏牘)이 이곳 저곳에서 모여 들었는데도 성룡이 좌우로 수응(酬應)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 당시 신흠(申欽)이 비국(備局)의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문득 신흠으로 하여금 붓을 잡고 부르는 대로 쓰게 하였는데, 문장이 오래도록 다듬은 것과 같아 일찍이 점철(點綴)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신흠이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와 같은 재주는 쉽게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량(局量)이 협소하고 지론(持論)이 넓지 못하여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또한 감히 대항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여 대신(大臣)다운 풍절(風節)이 없었다.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懲毖錄)》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그 아들 이경전(李慶全)과 함께 오래도록 폐척(廢斥)되어 있으면서 성룡을 원망하여 제거하려고 꾀하였다. 그 결과 무술년에 주화(主和)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변무(辨誣)의 사행(使行)을 피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떠나게 되었는데, 향리에 있은 지 10년 만에 죽으니 나이가 66세였다.
성룡은 임진난이 일어난 뒤 건의하여 처음으로 훈련 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모방하여 포(砲)·사(射)·살(殺)의 삼수(三手)를 뽑아 군용을 갖추었고 외방의 산성(山城)을 수선(修繕)하였으며 진관법(鎭管法)을 손질하여 비어책(備禦策)으로 삼았다. 그러나 성룡이 자리에서 떠나자 모두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았는데, 유독 훈련 도감만은 존속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그 덕을 보고 있다.
- 【태백산사고본】 8책 4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701면
- 【분류】인물(人物)
○豐原府院君 柳成龍卒。 成龍, 安東人, 號西厓, 從學於李滉之門, 早負重望。 丙寅擢第, 敭歷華顯, 出入經幄二十五年, 遂入相。 癸巳以首相, 獨當中外機務, 天將咨揭, 日夕旁午, 諸道奏牘, 東西交集, 成龍左右酬應, 敏速如流。 時, 申欽爲備局郞, 輒使欽操筆, 口呼書之, 文如宿搆, 未嘗點綴。 欽每語人曰: "其才未易得也。" 然局量狹小, 持論不弘, 不能去朋黨之心, 稍涉異己, 則不容於朝, 君擧得失, 亦不敢抗言正告, 無大臣風節。 嘗追記壬辰事, 名曰《懲毖錄》, 行于世, 識者以其伐己而掩人譏之。 李山海與其子慶全, 久在廢斥, 銜成龍, 謀欲去之。 戊戌以主和誤國, 厭避辨誣之行, 被劾而去, 在野十年而卒, 年六十六。 成龍於壬辰亂後建議, 始置訓鍊都監, 倣戚繼光 《紀效新書》, 抄選砲、射、殺三手, 以爲軍容, 修繕外方山城, 修鎭管法, 以爲備禦之策, 成龍去位, 皆廢不行, 獨訓鍊都監仍存, 至今賴之。
- 【태백산사고본】 8책 4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701면
- 【분류】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