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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32권, 선조 31년 9월 1일 계미 1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우리 나라에서 양호를 변호하자 정응태가 서운하게 여겨 황제에게 무고하다

이보다 앞서 찬획 주사(賛畫主事) 정응태(丁應泰)양호와 사이가 나빠 주문을 올려 탄핵하니, 우리 나라에서는 연달아 최천건(崔天健)이원익(李元翼) 등을 보내 주문을 올려 변호하고, 그대로 머물러 일을 주관하게 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응태가 이를 서운하게 여겨 마침내 치주(馳奏)하기를,

"신(臣)이 협강(夾江)의 섬에 가서 콩과 기장이 무성하게 잘 자란 것을 보고는 길가던 요동(遼東) 사람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곳은 땅이 기름져 수확이 서토(西土)보다 몇 배나 된다. 지난해에 조선(朝鮮)과 요동(遼東) 사람이 다투어 송사하였는데 도사(都事)가 여러 차례 단안(斷案)하여 조선(朝鮮) 사람들이 불평하였다. 그래서 만력(萬曆)006) 20년007) 에 마침내 그들 나라에 세거(世居)하고 있던 왜호(倭戶)로 하여금 여러 섬의 왜노(倭奴)를 불러들여 군사를 일으켜 함께 중국을 침범하여 요하(遼河) 이동 지방을 탈취해 고구려(高句麗) 옛 강토를 회복하여 하였다.’ 하여 신은 놀라고 괴이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정주(定州)에 머물렀는데 신의 부하가 몇 자의 베로 조선 사람이 음식물을 싸서 파는 구서(舊書)를 바꾸었는데 책 이름이 《해동기략(海東紀略)》이었으며, 바로 조선과 왜가 우호적으로 교제한 사실을 적은 책이었습니다. 병술년부터 수린(壽藺)에게 서신과 예단을 갖추어 일본의 살마(薩摩) 제주(諸州) 및 대마도(對馬島) 제군(諸郡)·제포(諸浦)에 보냈고 혹 도서(圖書)를 받기도 하였으며, 해마다 왜선(倭船)과 통하여 무역할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고, 혹은 조선의 미두(米豆)를 받기도 했으며 명주베 1천 필과 쌀 1백 석(石)을 이세수(伊勢守)에게 바쳐 일본에 전달(轉達)한 것 등이 모두 헌납(獻納)하고 무역한 실적(實迹)이었습니다.

또 국왕(國王)과 제추(諸酋)간의 왕래한 사신 선박에 일정한 숫자가 있고, 여러 사신을 접대하는 데 일정한 예(例)가 있으며 왜관(倭館)과 사신선(使臣船)의 대소와 선부(船夫)의 일정한 정원이 있고, 도서를 주는 데 직장(職掌)이 있으며, 맞아들이고 연회를 베푸는 데 정해진 의식(儀式)이 있습니다. 또 그들의 천황세계(天皇世系)와 국왕세계(國王世系), 정령(政令)과 풍속이 손바닥을 보듯 자세하고, 일본의 사신을 빌어 유구(琉球)와도 통하였습니다.

또 그 도설(圖說)을 상고해 보면 웅천(熊川)·동래(東萊)·울산(蔚山)에는 항상 왜호(倭戶) 2천 남짓이 살고 있으며, 전산전(畠山殿) 부관(副官)의 서계(書契)에는 국왕과 화친하는 것을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명주와 쌀을 바쳤다는 설이 근거가 있고, 왜인을 불러들여 땅을 회복하려 한다는 말이 헛말이 아닙니다. 관백(關白)이 걸출한 우두머리인 줄을 모르고서 조선이 불러들이자 피폐한 것을 틈타 마침내 단번에 조선을 습격해 격파했으니, 이는 조선의 군신이 자초한 화입니다.

조선에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삼경(三經)》을 배워 이미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알 것이니 삼가 천조(天朝)의 정삭(正朔)을 받들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또 일본의 강정(康正)·관정(寬正)·문명(文明) 등의 연호를 따라 크게 쓰고, 또 작은 글씨로 영락(永樂)·선덕(宣德)·경태(景泰)·성화(成化)의 기년(紀年)을 일본 기년 아래에 나누어 썼겠습니까. 이는 일본을 높이 받드는 것이 천조보다 월등히 더한 것입니다. 또 참람하게 태조(太祖)·세조(世祖)·열조(列祖)·성상(聖上)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감히 천조에서 조(祖)를 칭하는 것과 같이 하였으니 저들이 2백 년 동안 공순한 뜻이 무엇입니까. 황상께서 시험삼아 이로써 조선을 문책하면 저들 임금과 신하가 장차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글을 함부로 휘둘러 써서 중국의 선대(先代) 제왕(帝王)을 모욕한 것이 이 책머리 한 장 서문에서 볼 수 있으니 대개 조선의 군신들이 중국을 경시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왜를 불러들여 흔단을 구성하여 스스로 전쟁의 화를 열어놓고서도 강분(剛憤)하여 원조를 구하면서 걸핏하면 사절(死節)을 일컬으니, 우리 황상(皇上)께서 은혜를 부지런히 베풀어 소국을 돌보아 내탕(內帑)을 보내고 군사를 파견하여 이미 국경 전부를 회복해주었습니다. 이에 또 예문(禮文)을 다투어 재차 황상께서 동쪽을 돌아보는 염려를 하시게 하고, 또 자신들은 안일(安逸)에 빠져 있으면서 중국에 화를 떠넘기니, 앞으로 어디까지에 이를지 모를 일입니다.

대체로 방군(邦君)이 무도하면 육사(六師)008) 를 출동하는 것이 삼대(三代)의 바꿀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조선 국왕은 【성 휘(姓諱).】 백성들에게 포학하고 주색에 빠져 감히 왜를 유인하여 침범해 오게 함으로써 천조를 우롱하고, 다시 양호(楊鎬)와 당을 맺어 천자를 속이는데, 우리 황상께서는 관대하고 인자하시어 차마 서둘러 주토(誅討)를 가하지 못하지만, 하늘과 조종(祖宗)의 영령은 반드시 그 혼을 빼앗고, 그 후손을 참(斬)하고 말 것입니다.

독신(督臣) 형개(邢玠), 안신(按臣) 진효(陳效)와 제독(提督) 마귀(麻貴)에서 사도(司道)·장령(將領) 등의 관원에 이르기까지 어찌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한 소(疏)를 계획하여 함께 부추겨 기망(欺罔)하고, 그 다음 사람을 시켜 보류하게 하여 사를 따르고 그릇되이 비호하는 것입니까. 이미 몰래 국왕을 꾀어 시켜 배신(陪臣) 이원익(李元翼)을 차송하여 보류할 것을 상소하여 양호의 공덕(功德)을 칭송하게 하였습니다. 매우 교활한 허국위(許國威)풍지(風旨)009) 를 받들어 함부로 붓을 들어 억지로 여러 장수들의 연명(連名)을 받아 주소(奏疏)하여 양호를 칭송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진무(鎭撫)에게 명하여 당적(黨賊) 허국위팽우덕(彭友德) 및 배신(陪臣) 이원익 등을 율에 의하여 국문(鞫問)하여 그 분명한 내력을 끝까지 추궁하소서. 그러면 여러 간사한 자들이 나라의 권병(權柄)을 농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지금 조선에 있으면서 간기(奸欺)를 적발했으니, 여러 간사한 자들이 또 조선의 군신을 유혹하여, 산에 오르고 바다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할까 싶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갖고 있는 벼슬과 땅, 대대로 지키던 나라를 차마 버리고 망명(亡命)의 길을 밟는다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것에 지혜 있는 자는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신이 주문과 함께 바친 《해동기략》을 정신(廷臣)에게 내려 공정하게 평의(評議)하게 하소서. 그러면 조선 군신들이 왜(倭)와 끊었다면서 천조(天朝)를 우롱했는지 안 했는지, 형개(邢玠)·진효·마귀 등이 사정(私情)에 따라 부동(扶同)하고 기망했는지 안 했는지, 사를 따라 그릇되이 비호했는지 안 했는지, 제당(諸黨)의 간사한 모의가 자연 여러 사람의 눈을 가리고 공론에서 도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황제(皇帝)가 답하기를,

"여기에 아뢴 조선에서 은폐(隱蔽)한 사정은 차출되어 가는 과신(科臣)에게 부쳐 긴히 아울러 조사하여 올리라고 전에 여러 차례 엄지(嚴旨)가 있었다. 동쪽의 일은 마감하고 돌아오는 날에 공과 죄가 저절로 밝혀질 것이니, 정응태는 재차 번거롭게 아뢸 것이 없다. 그 주문 가운데 왜의 일에 대한 옳고 그름과 진위(眞僞)는 일체 전수 기의(戰守機宜)이니, 형개·진효·정응태·서관란(徐觀瀾) 등에게 혐의(嫌疑)를 모두 버리고 허심(虛心)하게 회의하고 거행하여 국사(國事)를 중하게 하고, 피차가 이처럼 어긋나게 하지 말라. 지금은 추방(秋防)010) 이 긴급하여, 부칙(部飭)이 번중(繁重)하니, 소대형(蕭大亨)은 안심하고 공직(供職)할 것이며, 모두 분분하게 말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는 인하여 만세덕(萬世德)을 독촉하여 일정(日程)을 배로 단축하여 가서 경리(經理)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32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67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註 006]
    만력(萬曆) :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 [註 007]
    20년 : 1592 선조 25년.
  • [註 008]
    육사(六師) : 천자(天子)의 군대.
  • [註 009]
    풍지(風旨) : 넌지시 지시함.
  • [註 010]
    추방(秋防) : 오랑캐를 막는 것.

○朔癸未/先是, 贊畫主事丁應泰楊鎬有隙, 奏劾之, 我國連遣崔天健李元翼等, 上奏陳辨, 乞令仍留管事, 應泰嗛之, 遂馳奏曰: "臣行次夾江中洲, 見豆忝豐茂, 詢之人在途者, 曰: ‘此膏腴地, 收穫數倍西土。 先年, 朝鮮民爭訟之, 都司屢經斷案, 鮮人不平。 萬曆二十年, 遂令彼國世居戶, 往招諸島奴, 起兵同犯天朝, 奪取遼河以東, 恢復高麗舊土。’ 等語, 臣不勝駭異。 臣行次定州, 而臣從役, 以布數尺, 換民舊書包裹食物, 書名《海東紀略》, 乃朝鮮交好事實也。 自丙戌年遣壽藺, 齎書禮, 達日本 薩摩諸州及對馬島諸郡諸浦, 或受圖書, 約歲通船互市, 或受朝鮮米豆, 至納細布千匹、米五百石于伊勢守, 轉達日本, 皆獻納互市之實跡也。 且國王諸酋使舡有定數, 接待諸使有定例, 館使舡大小船夫有定額, 給圖書有職掌, 迎候供宴, 有定儀。 復詳其天皇世系、國王世係, 與夫政令、風俗歷歷指掌, 且假日本之使, 而通給琉球。 又按其圖說, 而熊川東萊蔚山其恒居戶二千有奇, 畠山殿副官書契中, 明言國王和親。 由是觀之, 紬米之說有據, 而招復地之說非虛語也。 不謂關白雄酋, 乃因其招, 而乘其敝, 遂一擧而襲破其國, 則君臣之自貽戚也。 朝鮮應科人習三經, 則旣知《春秋》大義, 當謹奉天朝正朔, 何爲又從日本 康正寬正文明等年號, 而大書之, 且小字分書永樂宣德景泰成化紀年于日本紀年之下則是尊奉日本, 加于天朝, 甚遠, 而書又僭稱太祖世祖, 列祖、聖上, 敢與天朝之稱祖、尊上等, 彼二百年恭順之義謂何, 而皇上試以此責問朝鮮, 彼君臣將何說之辭? 況其舞文, 訾辱中國先代帝王, 卽其一序, 已自槪見, 朝鮮君臣輕藐中國, 已非一日。 招搆釁, 自啓禍戎, 而剛憤求援, 動稱死節。 我皇上恩勤字小, 發帑遣師, 已復還全土界矣。 乃又固爭禮文, 再勤皇上東顧之憂, 且自偸安逸, 移禍天朝, 不知何所底極。 夫邦君無道, 六師移之, 三代不易之大法也。 今朝鮮國王 【姓諱。】 暴虐臣民, 沈湎酒色, 乃敢誘入犯, 愚弄天朝, 復與楊鎬結黨, 朋欺天子, 卽我皇上寬仁, 不忍遽加誅討, 而天鑑祖靈, 必奪其魄, 而斬其後矣。 督臣邢玠、按臣陳效與提督麻貴, 以及(自)〔司〕 道、將領等官, 何乃未勘之先, 今自商計一疏, 扶同欺罔, 明日令人保留, 循私曲庇? 旣陰誘, 【姓諱】 差陪臣李元翼, 上疏保留, 頌功德。 大猾許國威承望風旨, 恣逞刀筆, 强寫諸將連名奏疏, 稱訟楊鎬。 乞勑鎭撫, 自將黨賊許國威彭友德及陪臣李元翼等, 依律鞫問窮究, 來歷明白, 則群奸不得倒持國柄矣。 臣今居, 發奸欺, 恐諸奸又將惑君臣, 爲登山入海之語, 駭人耳目然後, 彼有爵有土, 忍棄世守之國, 蹈亡命之流, 則將奚往? 此, 智者所不能惑也。 伏望皇上, 將臣所奏, 倂進呈《海東紀略》, 勑下廷臣, 秉公評議。 朝鮮君臣是否, 絶愚弄中國是否, 絶愚弄天朝, 邢玠陳效麻貴等是否, 循情扶同欺罔是否, 循私曲庇, 而諸黨奸謀, 自不能掩衆目, 而逃公論也。" 帝報曰: "這所奏朝鮮隱蔽事情, 著差去科臣, 上緊倂勘, 前屢有嚴旨。 東事候勘回之日, 功罪自明, 丁應泰不必再有陳瀆。 其奏內事是否, 眞僞一切, 戰守機宜, 著邢玠陳效丁應泰徐觀瀾等, 盡去嫌疑, 虛心會議行擧, 飭以國事爲重, 毋得彼此參差。 見今秋防緊急, 部飭繁重, 蕭大亨安心供職, 俱不許紛紛瀆辭。" 仍催萬世德兼程前去經理。


  • 【태백산사고본】 7책 32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67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