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유생 최희남이 정철 등에 대한 처벌이 가벼움을 아뢰다
성균관 유생 최희남(崔喜男)이 상소하기를,
"지난 기축년001) 에 국가가 불행하여 극히 흉악한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한 세상을 속여 명류(名流)들과 두루 사귀더니, 실직(失職)함을 원망하여 문득 불궤(不軌)를 도모해 몰래 군도(群盜)와 결탁했다가 일이 발각되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온 집안이 주륙(誅戮)되자 귀신이나 사람이나 모두 쾌하게 여겼는데, 다만 평소 조정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우(士友)들이야 그의 뜻을 알았을 리 만무한데도, 분노를 품고 있던 한쪽 사람들이 보복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 겉으로는 역적을 토멸한다는 명분을 핑계로 해서 몰래 일망타진할 계책으로 거짓을 꾸며 죄에 얽어들이기에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 물여우같은 정상을 신들이 번거롭게 아뢰지 않더라도 성명께서 통촉하신 것은, 이미 최영경(崔永慶)을 포증(褒贈)하신 데서도 나타났습니다.
간당의 괴수 정철(鄭澈)은 사류에게 버림을 받고는 이발(李潑) 등에게 이를 갈고 있다가 역변(逆變)을 듣자마자 그의 도당과 함께 기뻐 날뛰며 서로 경하하면서 기어이 이발 등을 멸족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몰래 백유함(白惟咸)·양천경(梁千頃) 같은 괴상한 무리들을 사주하여 연속 글을 올려 화(禍)를 엮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도 안옥(按獄)이 소루하여 이발 등이 요행히 면할까 염려하여 추관(推官)을 제거했습니다. 그래도 이발 등의 죄상이 끝내 드러나지 않자 몰래 문객(門客)을 보내 옥에 갇힌 죄수를 협박해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고 꾀어 그로 하여금 거짓말로 이발 등을 이끌어 대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국문할 즈음에는 내응(內應)했다는 말을 지어내어 공초의 말을 만들도록 하여, 끝내 무고한 사람들이 엄한 형장 아래에서 모조리 죽게 하였고 또 늙은 어미와 어린 아이로 하여금 모두 형신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때의 위관(委官)들은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위축되어, 간사한 무리들에게 순순히 따르면서 일찍이 형옥(刑獄)의 잘못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나라를 그르친 죄를 유독 정철에게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삼봉(三峯)이란 이름을 가탁하여 임하(林下)의 선비를 죽이고, 옥사를 번복시킨다는 말을 만들어 무죄한 추관을 모함하고, 조야에 조금이라도 명성이 있는 자로서 자기들에게 붙지 않는 자는 끝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아, 천리와 공론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신원하려는 의논이 발단되었습니다. 그러나 화를 두려워하는 습성이 다 제거되지 않아, 대신은 머뭇거리며 제지하여 미봉(彌縫)할 터전으로 삼고 삼사(三司)는 침묵을 지키고 나서지 않아 보신(保身)할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신은 통분스럽고 민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최영경(崔永慶) 등을 신원(伸冤)하고 불쌍히 여겨 포상한 것은 유감이 없게 하였는데, 그 나머지 정개청(鄭介淸) 등의 원통함을 품은 무리에게는 원통함을 분명하게 씻어주는 은전을 입지 못하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이발(李潑)의 아들 이명철(李明哲)이 형벌을 참으며 아비를 구한 것과, 백진민(白振民)002) 형제가 바름을 지켜 스스로 죽은 것은, 전하께서 불쌍하게 여기시는 바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의 말은 지나치다."
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의 기축 기사(己丑記事)를 상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항복이 그때 문사 낭청(問事郞廳)이었고, 철이 위관(委官)이었는데, 하루는 철이 항복을 불러서 최영경의 옥사에 대해 물으니, 항복이 말하기를,
"옥사가 일어난 지 이미 해를 넘겼는데, 한 사람이라도 누가 영경을 가리켜 삼봉(三峯)이라 한 자가 있었습니까. 지금 아무런 단서도 없이 소문만 듣고 처사(處士)를 잡아가두었다가 불행하게도 죽는다면 반드시 공론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상공(相公)은 어떻게 그 책임을 면하겠습니까."
하였다. 철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내가 영경과 평소 논의가 서로 다르기는 하였지만 어찌 서로 해치려고까지야 하겠소. 이는 본도에서 와전된 데서 나온 것이니, 나와 무슨 상관이겠소."
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상공께서 모함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좌시하고 구하지 않는 것이 어찌 추관(推官)의 체모라 하겠습니까. 역적을 국문하다는 명목하에 죄수가 옥에 가득하니, 추관이 감히 하나하나 심리하지는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영경은 죄수 중에서도 더욱 죄명을 삼을 만한 근거가 없고, 또 이 사람은 효우(孝友)하는 처사니 어찌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철이 말하기를,
"내가 극력 구원해야겠다."
하였다. 그 후 재차 국문할 때 영경이 당시의 일에 대해 대략 진술하고 또 성혼(成渾)과 논의가 다른 이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국문을 마치고 철이 물러나와 항복을 불러 발끈 성내며 말하기를,
"그대도 그 공사(供辭)를 보았겠지만 그게 무슨 말이오."
하니, 항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상공께서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시사(時事)에 대해 언급한 것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상공은 당초 영경을 잘 모른 것입니다. 영경이 시배(時輩)들과 다른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의 논의가 다르다는 것은 재차 국문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엄히 국문하는 마당에서 구차스레 자신의 전일 소견을 모조리 버리고 좀스럽게 억지로 듣기 좋은 말을 꾸며대어 요행히 면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참된 영경이라 하겠습니까. 영경으로 논할 것 같으면 이번 공사에서도 처음 마음을 변치 않았으니 이것이 그의 고상한 점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논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국문하는 것은 단지 삼봉인지의 여부만을 따질 뿐이니, 논의의 이동(異同)은 이 옥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였다. 철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그 점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소."
하니, 수일 후에 철이 또 묻기를,
"어느날 갑자기 형추(刑推)하라는 명이 있게 되면 미처 구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나는 옥사에 골몰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차자를 초하여 대기해 주시오."
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이런 일을 어찌 남을 시켜 대신 초하라 하십니까. 상공이 직접 초해야 합니다."
하였다. 또 수일 후에 항복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구해낼 계책을 마련하여 차자의 초를 잡아 놓았고, 또 유 정승과도 약속이 되어 있소."
하였다. 항복이 말하기를,
"어떻게 약속하였습니까?"
하니, 철이 말하기를,
"만약 형추하라는 명이 있게 되면 내가 급히 유상에게 알리어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려 구하면 일이 잘 될 것이오."
하였다. 항복이 말하기를,
"유상과 과연 그렇게 약속하였습니까?"
하니, 철이 말하기를,
"이미 굳게 약속이 되어 있소."
하였다. 그 후 공사(公事) 관계로 항복이 유성룡(柳成龍)의 집에 가게 되어 그 자리에서 최영경의 억울함을 극론하였는데, 성룡이 단지 몇 마디 말로 대답하므로, 항복이 인하여 말하기를,
"대신이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성룡이 말하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감히 구원하겠소."
하였다. 항복은 철이 성룡과 약속했다는 말로써 묻고 싶었으나 사체에 구애되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항복은 항상 ‘철은 영경을 끝내 털끝만큼도 해칠 생각이 없었고 구원하려는 뜻을 가졌었으며, 후세 공론의 죄인이 될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얼굴과 말에 가득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 영남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최영경에게 죄를 씌워 죽인 것은 성혼(成渾)의 죄이다.’고 주장하였는데, 한준겸(韓浚謙)이 공언하기를 ‘당초에 철이 영경에게 죄를 씌워 죽였다고 하는 것도 지어낸 말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또 성혼이 죄를 만들어 죽였다고 하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준겸의 형 한백겸(韓百謙)도 이 옥사에 연루되어 형신(刑訊)을 받고 멀리 귀양을 갔으므로, 준겸은 항상 옥사에 지나침이 많다고 말하였는데도 항복의 기록이 이러한 것은 대개 준겸이 공정한 마음으로 일에 임하여 발언하면서 형이 잘못 연루되어 죄를 입은 것을 혐의하여 끝내 묵묵히 있지 않은 것을 취한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7책 3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6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成均館儒生崔喜男上疏曰:
往在己丑年, 國家不幸, 逆賊鄭汝立以窮凶極惡之物, 厚誣一世, 遍交名流, 一怨失職, 輒圖不軌, 潛結群盜, 事覺自刎, 闔門之誅, 神人共快。 第以平日朝著間, 以士友相知者, 萬無知情之理, 而一邊蓄憤之人, 自幸報復之機, 外託討逆之名, 陰濟網打之計, 搆虛羅織, 無所不至。 鬼蜮情狀, 不待臣等之煩瀆, 而 聖明之洞燭, 已著於崔永慶褒贈之擧矣。 姦魁鄭澈見棄士類, 切齒於李潑等, 一聞逆變, 與其徒黨, 抃躍相慶, 必置潑等於族滅之地, 陰嗾白惟咸、梁千頃怪鬼之輩, 連章搆禍。 猶恐潑等幸免, 以按獄踈漏, 除去推官, 潑等罪狀終不著見, 則潛遣門客, 脅諸獄囚, 誘以免死, 而使之誣引潑等。 至於鞫問之際, 倡出內應之說, 指導供辭, 竟使無辜之輩, 殲盡於嚴刑之下, 且令老母、嬰兒, 悉就刑訊。 當時委官, 顧望畏縮, 承順姦黨, 未嘗一言及於刑獄之失, 則誤國之罪, 不可獨歸於一鄭澈也。 假三峯之名, 而殺林下之處士; 造翻獄之說, 而陷無罪之推官。 朝野之稍有名字, 而不附己者, 終欲無遺。 嗚呼! 天理公論不容泯滅, 今者日月雖已久遠, 伸釋雖已發端, 怵禍之習猶未盡除, 大臣則回互沮抑, 以爲彌縫之地; 三司則循默隱忍, 以爲保身之計, 臣不勝痛悶焉。 如永慶等伸冤褒恤, 已無所憾, 而其餘鄭介淸等含冤之類, 豈可使未蒙昭雪之恩乎? 況潑子命哲之忍刑救父。 振民兄弟之以正自斃, 殿下之所可矜惻者也。 伏願殿下, 留心焉。
答曰: "爾等之言過矣。" 按李恒福己丑記事, 恒福爲其時問事郞廳, 鄭澈爲委官。 一日, 澈招恒福, 問崔永慶獄事, 恒福曰: "起獄今已閱歲, 何嘗有一人指永慶爲三峯者乎? 今無端以道聽, 拿囚處士, 不幸而死, 則必有公論, 相公何得辭其責也?" 澈大驚曰: "我與永慶, 平日雖以論議相角, 豈至於欲相害也? 此出於本道訛傳, 於我何干?" 恒福曰: "非謂相公陷之也。 知其無根, 而坐視不救, 豈推官之體? 名曰鞫逆, 囚繫滿獄, 推官固不敢一一伸理。 至於永慶, 囚中之尤無根可名者。 且是孝友處士, 何可不救?" 澈曰: "我當極力救解。" 後當再鞫, 永慶略陳時事, 且及與成渾異論之由。 鞫畢, 澈退而招恒福, 色頗怫然曰: "君觀其供辭, 是何言也?" 恒福笑曰: "相公之所不說者, 無乃以言及時事耶?" 澈曰: "然。" 恒福曰: "然則相公初不知永慶也。 永慶之所以異於時輩者何也? 其論議之不同, 已知之於未再鞫前。 若於嚴鞫之下, 苟然盡喪其前日所見, 區區强爲諂說之辭, 以冀幸免, 豈眞永慶也? 以永慶論之, 則今之所供, 不變初心, 此其所以爲高處。 然, 此則都不須論。 今之所鞫者, 只問三峯與否, 論議同異, 何干獄事耶?" 澈卽懽然曰: "公言正是, 我未及思也。" 後數日, 澈又問曰: "一朝有刑推之命, 則恐未及救之。 我汨於獄事, 意思已耗, 君爲我詳搆箚草以待之。" 恒福曰: "此事何可借人代草? 相公當自草之。" 又數日見恒福大悅曰: "我已得救之之策, 箚草已搆。 且與柳相爲約耳。" 恒福曰: "所約何如?" 澈曰: "若有刑推之命, 則我當急報於柳相, 聯名陳箚而救之, 則事可諧矣。" 恒福曰: "柳相果有是約耶?" 澈曰: "已成金石矣。" 其後因公事, 往柳相成龍家, 極論崔永慶之冤, 成龍只答以數語。 恒福因言: "大臣不可不救。" 成龍曰: "如我者, 何敢救解?" 恒福欲以澈之所約於成龍者問之, 而拘於事體, 不敢發言。 恒福常以爲: "澈於永慶, 終無一毫陷害意, 其欲救解, 而恐爲後世公論之罪人者, 溢於辭色。" 云。 其後, 嶺南儒生上疏以搆殺永慶爲成渾之罪, 韓浚謙大言曰: "當初以鄭澈爲搆殺永慶者, 已是做得說話, 今乃以成渾爲搆殺, 古今天下, 寧有是事?" 云。 浚謙之兄百謙株連於是獄, 被訊遠竄, 浚謙常稱獄事之多濫云, 而恒福之所記如此, 蓋取浚謙之秉心公正, 臨事發言, 不以兄之誤被連累之罪爲嫌, 而終默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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