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 도감을 설치하고 유성룡을 도제조로 삼다
훈련 도감을 설치하고 유성룡을 도제조로 삼았다.
전에 평양(平壤)이 수복되었을 때 상이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에게 가서 사례하고 명나라 군사의 전후 승패가 다른 점을 물으니, 도독이 말하기를,
"전에 온 북방의 장수는 항상 호적(胡敵)을 방어하는 전법을 익혔기 때문에 싸움이 불리하였고, 지금 와서 사용하는 것은 바로 척 장군(戚將軍)의 《기효신서(紀效新書)》002) 인데, 곧 왜적을 방어하는 법이라서 전승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기효신서》를 보여달라고 하니, 도독은 깊이 보관하고 내놓지 않았다. 상이 비밀히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도독 휘하의 사람에게 사오게 하였다. 상이 해주(海州)에 있을 때 《기효신서》를 유성룡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내가 천하의 서책을 많이 보았지만 이 책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경은 나를 위해 강해(講解)하여 그 법을 본받게 하라."
하니, 유성룡이 종사관 이시발(李時發) 등과 토론하고, 또 유생(儒生) 한교(韓嶠)를 얻어 낭속(郞屬)을 삼아 명나라 장수의 아문(衙門)에 질문하는 일을 전담케 하였다. 상이 환도하여서 훈련 도감의 설치를 명하고, 유성룡을 도제조로, 무재신(武宰臣) 조경(趙儆)을 대장(大將)으로,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을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문신(文臣) 신경진(辛慶晉)·이홍주(李弘胄)를 낭속으로 삼았다. 기민(飢民)을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니, 응모자가 자못 모여들었으므로 조경이 법을 만들어 한정시켰는데, 큰 바위 하나를 들 수 있고 한 길 되는 담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자를 합격시켰다. 기민이 피곤하여 아무리 장사라 하더라도 무거운 것을 들거나 몸을 날래게 움직이지 못하였으며, 더러는 응모하여 사후(伺候)하다가 문밖에서 죽기도 하였는데, 입격된 자는 열에 겨우 한둘 정도였다. 10일에 걸쳐 수천 인을 뽑아 척씨(戚氏)의 삼수 연기(三手練技)의 법으로 가르치는 한편, 파총(把摠)·초관(哨官)을 두어 군사를 나눠 실제 척씨의 제도대로 연습시키니, 몇 달 만에 군용(軍容)이 갖추어졌다.
상이 습진(習陣)에 친림(親臨)한 이후로 도감군(都監軍)은 항상 숙위(宿衛)와 호종(扈從)을 하게 하였는데, 나라에서 이 군대의 힘을 많이 의지하였다. 유성룡이 인하여 청하기를,
"군량을 마련하고 군사 1만 명을 더 모집한 다음, 경성에 5영(營)을 두어 영마다 2천 명씩 배치하고 해마다 절반은 도성 안에 두어 연습을 시키고 절반은 도성 밖에 내보내 한광(閑曠)한 땅을 택하여 둔전(屯田)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대로 경작하여 군량이 나오는 근원을 풍부하게 해서 더욱 근본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으나 결국에 가서는 그 일이 행해지지 않았다. 도감의 설치에 대해서는 또한 비평이 많았지만 유성룡이 굳은 결의로 담당하였기 때문에 겨우 파하지 않을 수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6면
-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외교-명(明) / 군사-병법(兵法)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정(軍政) / 농업-전제(田制)
- [註 002]척 장군(戚將軍)의 《기효신서(紀效新書)》 : 명나라 무장(武將)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병서(兵書). 왜구가 명나라의 연해를 침범하자 척계광이 새로운 전술로 많은 성과를 올렸는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지었다. 조선에서도 왜란 후에 군제(軍制)를 개편하여 훈련 도감(訓鍊都監)을 신설하고, 명군(明軍)과 왜군(倭軍)의 무기·무술을 모방하여 훈련할 때도 이 책에 의거해서 총병(銃兵)인 포수(砲手), 궁병(弓兵)인 사수(射手), 창검병(槍劍兵)인 살수(殺手)의 3부문으로 나누어 실시하였으며, 지방에도 초관(哨官) 또는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훈련시켰다.
○設訓鍊都監, 以柳成龍爲都提調。 初, 平壤之復也, 上詣謝都督李如松, 問天兵前後勝敗之異, 都督曰: "前來北方之將, 恒習防胡戰法, 故戰不利。 今來所用, 乃戚將軍 《紀效新書》, 乃禦倭之法, 所以全勝也。" 上請見戚書, 都督秘之不出。 上密令譯官, 購得於都督麾下人。 上在海州, 以示柳成龍曰: "予觀天下書多矣, 此書實難曉。 卿爲我講解, 使可效法。" 成龍與從事官李時發等討論, 又得儒生韓嶠爲郞, 專掌質問于天將衙門。 及上還都, 命設訓鍊都監, 成龍爲都提調, 武宰臣趙儆爲大將, 兵曹判書李德馨爲有司堂上, 文臣辛慶晋、李弘冑爲郞屬。 募飢民爲兵, 應者頗集, 趙儆設法以限之, 能擧一巨石, 能超越一丈墻者入格。 飢民疲困, 雖壯士不能擧重奮身, 或應募伺候, 而死於門外, 入格者十僅一二。 旬日得數千人, 敎以戚氏三手練技之法, 置把摠、哨官, 部分演習, 實如戚制, 數月而成軍容。 上親臨習陣, 此後都監軍, 常宿衛扈從, 國家賴之。 成龍仍請: "措置糧餉, 加募兵一萬於京城, 置五營, 營置二千, 每年半留城中練習, 半出城外, 擇閑曠之地爲屯田。 輪環替代, 以厚兵食之源, 而益固根本。" 上皆從之, 事竟不行。 都監之設, 亦多譏議, 而成龍堅意擔當, 故僅得不罷。
- 【태백산사고본】 7책 2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6면
-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외교-명(明) / 군사-병법(兵法)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정(軍政) / 농업-전제(田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