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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2월 1일 경술 4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전 인성 부원군 정철의 졸기

전(前)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하였다.

과거에 정철이 부사(副使) 유근(柳根)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경사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동로군문(東路軍門)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왜적이 이미 군사를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다.’고 속여 말했으므로, 본국의 주문(奏文)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정철(鄭澈) 등이 돌아온 뒤에 병부(兵部)가 주문(奏文)하기를,

"전에 온 사신에게 물었더니 역시 ‘왜적이 이미 철수해 돌아갔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유근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것은 실로 병부에서 속임수로 꾸며낸 말입니다. 사신 일행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이미 변하여 먼저 정철을 제거하려고 하여 대간(臺諫)이 이를 인해 정철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상은 다만 체직시키고 추고하도록 명하였는데, 유근 및 서장관(書狀官) 이민각(李民覺)과 역관(譯官) 등은 모두 연루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유언 비어가 비등하여,

"정철이 북경에 가서 오로지 성궁(聖躬)의 과실만을 은밀히 중국 조정에 전파시켰다. 그러므로 황제 칙서 속의 추사(醜詞)들은 모두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였다. 정철강화(江華)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 향년은 59세였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젊어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다. 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에게 종학(從學)하였는데, 기대승은 자주 그의 결백한 지조를 칭찬하였다. 그의 누나는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되고, 누이동생은 계림군(桂林君)의 아내가 되었다. 을사년013) 의 화에 부형(父兄)이 관여되었으나 정철은 어리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 때 동궁(東宮)을 드나들었는데, 명종이 대군으로 있을 때 정철과 유희(遊戲)하면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정철이 장원에 등제한 방목(榜目)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액문(掖門) 안에서 특별히 주찬(酒饌)을 내리라고 명하니, 정철이 사양하기를,

"이미 출신(出身)한 이상 남의 신하된 입장에서 감히 이런 사례(私禮)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명종(明宗)이 주찬을 내릴 것을 중지시키고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나가도록 명한 뒤 누대 위에서 그가 가는 것을 바라보았으니, 은권(恩眷)이 특별하였다. 얼마 후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대중(臺中)에서는 바야흐로 경양군(景陽君)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사건을 논하면서 법대로 처벌할 것을 청하고 있었다. 명종(明宗)이 친속으로 하여금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정지하도록 하였는데, 정철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정철은 파면되어 광주(光州)에 돌아가 있게 되었는데, 여러 번 청망(淸望)에 주의(注擬)되었으나 3년 동안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

선조 초년에 전랑(銓郞)으로 기용되었는데, 오로지 격탁 양청(激濁揚淸)만을 힘썼으므로 명망은 높았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당론이 갈라지자 그는 한쪽만을 극력 주장하다가 시론(時論)에 원수시 되었는데, 상의 권애(眷愛)를 힙입어 구제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신묘년014) 에 이르러서는 상의 권애도 식어서 거의 죽음을 당할 뻔했는데 이덕형(李德馨)이 구제해 준 덕분에 조금 완화되었다. 그 뒤 변란을 인하여 폐고(廢錮) 중에서 기용되었으나 또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는 처신을 너무나도 모가 나게 하였으므로 유성룡(柳成龍)이 평소에 그를 미워하였다. 정유년015)유성룡이 탄핵을 받았는데, 논자(論者)들이 뇌물을 탐했다고 무고하면서 미오(郿塢)016) 에 비유하자, 유성룡이 탄식하기를,

"지난번에 논자들이 계함(季涵)을 가차없이 공격하면서도 탐비(貪鄙)로는 지목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의 처신이 저 계함에 미치지 못했단 말인가."

하였다. 언젠가 정철최영경(崔永慶)을 죽인 일에 대해 말하자 종사관(從事官) 서성(徐渻)이 그렇지 않다고 극력 변론하니, 유성룡이 말하기를,

"계함이 항상 떳떳하게 스스로 이 일을 해명하였으나, 나는 최영경의 죽음이 정철 때문이었다고 마음속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귀로 그 말을 듣고도 답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그 사람은 입이 곧아 자기가 한 일은 반드시 숨기지 않았을 인물이다. 그러니 그대의 말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흠(申欽)은 논하기를,

"정철은 평소 지닌 풍조(風調)가 쇄락(灑落)하고 자성(資性)이 청랑(淸朗)하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였다. 한때 정철을 논한 자가 간적(奸賊)으로 칭하자, 풍문이 퍼져 모든 사람이 뇌동하여 정철을 정말 소인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평소 정철을 아는 자들도 여론에 현혹되어 그가 정말 소인인가 하고 의심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자고로 소인이라 칭할 때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고총(固寵)이요, 둘째는 첨미(諂媚)요, 셋째는 부회(附會)인 것이다.

정철이 적소(謫所)로부터 소환되어 언젠가 빈청(賓廳)에 앉아 있을 때 참판(參判) 구사맹(具思孟)과 지중추(知中樞) 신잡(申磼)이 동좌했었는데, 별감(別監) 한 사람이 안에서 주찬(酒饌)을 가지고 나와 말을 꾸며 이야기하기를,

"안에서 모든 재상들이 함께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기실은 구사맹신잡이 모두 궁금(宮禁)과 인척관계에 있기 때문에 귀인(貴人)이 다른 손님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사로이 보내온 것이었다. 이성중(李誠中)이 그 자리에 있다가 소반과 젓가락을 가져와 음식을 정승 앞에 나눠 드리도록 하자, 정철이 말하기를,

"이 음식은 구 참판과 신 지사가 먹어야 마땅하니, 대신이 참여해선 안 된다."

하고는 곧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 말이 대내에 들리자 정철이 그 이튿날 체찰사(體察使)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는 그가 첨미·고총을 하지 않았다는 밝은 증거라 하겠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는 한때 권세를 장악했던 자들로서 정철은 그들의 친구였으니, 정철의 재주로서 조금만 비위를 맞추었더라면 어찌 낭패를 당하여 곤고하게 되어 종신토록 굶주린 신세가 되기까지야 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기꺼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가 부회(附會)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결백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적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혜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 단점이었다.

만일 그를 강호 산림의 사이에 두었더라면 잘 처신했을 것인데, 지위가 삼사(三司)의 끝까지 오르고 몸이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그에 맞는 벼슬이 아니었다. 정철은 중년 이후로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탐사(貪邪)한 사람을 미워하여 술이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았다.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戚里)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그러나 권간(權奸)과 적신(賊臣)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철은 조정에서 앉은 자리가 미처 따스해질 겨를도 없이 정승이 된 지는 겨우 1년 남짓하였다. 밝은 임금이 스스로 팔병(八柄)017) 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산해·유성룡과 세 사람이 아울러 정승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산해가 특히 임금의 은총을 입고 있었으니, 정철이 어떻게 권세를 부릴 여지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변론할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4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013]
    을사년 : 1545 인종 1년.
  • [註 014]
    신묘년 : 1591 선조 24년.
  • [註 015]
    정유년 : 1597 선조 30년.
  • [註 016]
    미오(郿塢) : 후한(後漢) 말기 음란 흉포하기로 유명한 동탁(董卓)을 가리킴. 동탁이 미(郿)땅에 오(塢)를 쌓아 이름을 만세오(萬歲塢)라 하고 그 속에 금은 보화를 저장한 데서 연유한 말이다.
  • [註 017]
    팔병(八柄) :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는 여덟 가지의 권병(權柄). 곧 작(爵)·녹(祿)·여(予)·치(置)·생(生)·탈(奪)·폐(廢)·주(誅)이다.《주례(周禮)》 천관(天官) 태재(大宰).

○前寅城府院君 鄭澈卒。 初, 與副使柳根, 謝恩朝京而回。 時, 東路軍門主和議, 詭言已撤屯渡海, 與本國所奏不免差互。 等還後, 兵部奏曰: "問前來使臣, 則亦言已撤回。" 上聞之大駭, 柳根上疏自辨, 此實兵部謊詞詭計, 使臣一行, 豈有是言? 是時, 朝論已變, 欲先去, 臺諫因此劾, 上只命遞職推考。 柳根與書狀官李民覺、譯官等, 皆無所坐。 自是, 飛語上騰言: "朝京, 專以聖躬過失密播于中朝, 故凡帝勑內醜詞, 皆其自出。" 云。 寓居江華, 病酒卒, 年五十九。 季涵, 號松江, 少有才名。 從學於金麟厚奇大升, 大升亟稱其淸潔之操。 其姉爲仁廟貴人, 姊爲桂林君妻。 乙巳之禍, 父兄與焉, 以幼免, 而兒時出入東宮, 明廟爲大君, 實與游戲甚昵。 見登壯元榜目甚喜, 命於掖門內, 別賜酒饌, 辭曰" "旣已出身, 人臣不敢受此私禮。" 明廟爲止賜, 而命從神武門出, 自從樓上, 望見其行, 恩眷異常矣。 俄拜正言, 臺中方論景陽君謀奪妻家財産, 誘殺妻孽娚, 請以處法。 明廟使親屬, 諷停論, 不敢。 自是, 罷免歸光州, 屬擬淸望, 不受點者三年。 宣祖初, 起爲銓郞, 專務激揚, 名望雖重, 而不悅者衆。 黨論之分, 力主一偏, 爲時論所仇, 而賴上眷, 得濟者屢。 至辛卯, 上眷亦回, 幾陷大戮, 李德馨救之, 少弛。 因變起廢, 亦不容於朝。 其持身廉劌太過, 柳成龍素惡之。 至丁酉, 成龍被劾, 論者誣以貪賄, 比之郿塢, 乃歎曰: "往時論者, 攻季涵無所不至, 猶不以貪鄙目之, 豈吾處身, 不及彼耶?" 嘗言崔永慶事, 從事徐渻力辨其不然, 成龍曰: "季涵常介介自明此事, 吾心定以爲死由於, 故耳聞其言, 而不復也。 到今思之則其人口直, 自己所爲必不自諱, 得非君言爲是耶?" 申欽, 平生風調灑落, 資性淸朗, 居家孝悌, 立朝潔白, 則當求之古人也。 一時論者, 稱以奸賊, 風聲所移, 萬口雷同, 以爲眞小人。 雖平日知者, 眩於物議, 或有疑其爲小人者矣。 然自古稱小人者有三焉, 一曰固寵也, 二曰諂媚也, 三曰附會也。 自謫召還, 嘗坐賓廳, 參判思孟知樞同座, 有一別監, 自內持酒饌出來, 借辭言, 自內宣命諸宰共啖, 而其實皆連姻宮禁, 故貴人謂無他客, 而私送也。 李誠中在座, 命取盤筯, 分進政丞前, 曰: "此乃具叅判申知事所當喫者, 大臣不可預也。" 卽起出, 其言聞于內, 翌日出爲體察使。 此其不諂媚、固寵之明驗也, 小人果如是乎? 李潑李山海一時權勢所存, 而爲故舊, 以之才, 少加桔槹, 則詎至狼狽, 困苦顑頷終身, 而不肯一詘耶? 此其不附會之明驗也, 小人果如是乎? 特其過於狷狹, 多疑小恕, 無智以濟之, 此其平生所短也。 若置之江湖林野之間, 是其所宜處, 而位極三司, 身都將相, 非其器也。 中年以後, 病于酒色, 自檢己不足, 而又憤嫉貪邪之人, 醉輒面叱, 不避權貴。 力持偏論, 而所挾者, 戚里陳人, 受命治逆, 而所逮者, 多黨色仇怨, 其爲一世射的, 無足怪者, 其處身, 誠無智矣。 若以權奸、賊臣目之, 則在朝, 席不暇暖, 爲相僅一年餘。 明主自操八柄, 山海成龍, 三人竝相, 而山海特被寵遇, 何所容而專權乎? 此則不待辨而明矣。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4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