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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왜적이 진주를 함락시키자 김천일·최경회 등이 전사하다

왜적이 진주를 함락시켰다. 김천일·최경회 등이 전사하였다.

당시 진주에서 급변을 보고하니, 이여송이 경성에서 열둔(列屯)의 제장(諸將)인 유정(劉綎)·오유충(吳惟忠)·낙상지(駱尙志) 등에게 전령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구원하게 하였으나, 제장들은 적의 형세가 막강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적은 여러 둔병(屯兵)을 다 동원하여 30만이라 호칭하며 곧장 진주로 향했는데, 의령(宜寧) 등 여러 고을을 분탕하고 노략질하니 화염이 충천하였다. 권율이빈(李薲)과 함께 함양(咸陽)으로 물러가 주둔했다가 이어 남원(南原)으로 들어가고, 곽재우정진(鼎津)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이달 21일에 적병이 비로소 진성(晉城)을 범하면서 곁에 있는 고을에 군사를 나눠 배치하여 밖의 원조를 막는 한편 본성을 백 겹으로 에워싸고 주둔하니, 사면 수백 리가 그들 군사로 가득하였다. 홍계남 등이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깃발이 하늘을 가리고 함성이 땅을 진동하였으며, 포위 속에 있는 진주성이 마치 큰 바다에 뜬 외로운 배와 같았으므로 두려워서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달 22일에 적이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성안에서 사격하여 1진(陣)을 물리쳤으나 초혼(初昏)에 다시 쳐들어와 한참 동안 크게 싸웠다. 밤새도록 전진 후퇴를 되풀이하다가 5경(更)이 되어서야 그쳤다.

이에 앞서 성안에서는 성 남쪽에 있는 촉석루(矗石樓)는 강물과 잇닿아 있는 험절(險絶)한 곳이니만큼 적이 필시 범하지 못할 것이고, 서쪽과 북쪽은 참호(塹壕)를 파서 물을 채웠으니, 동쪽 한 곳으로만 적의 공격을 받게 되리라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적은 참호의 물을 빼내고 흙으로 메워 큰 길을 만들었는가 하면 곧장 성 밑을 파서 장대(墻臺)의 큰 돌을 운반해 내갔다. 성 위에서 시석(矢石)이 어지럽게 떨어졌으나 적은 죽음을 무릅쓰고 모여들어 꼭 허문 뒤에야 그만두려 하였다.

그 다음날은 세 차례 전투에서 세 번 모두 물리쳤으며, 그날 밤에는 네 차례 접전하여 모두 물리쳤다. 그 다음날도 그러하였는데, 탄환과 화살이 서로 빗발치듯 하여 성 안팎에 죽은 자의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 이튿날에는 적이 동문(東門) 밖에 토산옥(土山屋)을 짓고 그 위에서 성을 굽어보며 총탄을 발사하였다. 성안에서도 이미 마주 대하여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황진(黃進)이 직접 흙을 져 나르고 성안의 사녀(士女)들이 힘을 다해 쌓는 일을 도왔으므로 하룻밤에 끝마쳤다. 그리하여 드디어 마주 바라보고 현자총(玄字銃)을 쏘아 토옥(土屋)을 파괴하니 이에 적이 물러갔다.

그 이튿날 밤에는 밀고 당기며 크게 싸우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그쳤다. 그런데 적은 또 나무궤를 만들어 쇠가죽을 입힌 뒤 각자 짊어지기도 하고 이기도 하면서 탄환과 화살을 막으며 성을 무너뜨리려고 전력을 기울였다. 이에 성 위에서는 비오듯이 활을 쏘고 큰 돌을 연달아 굴러내려서 격퇴시켰다. 그러자 적은 큰 나무 두 개를 동문 밖에 세우고 그 위에 판옥(板屋)을 만든 뒤 성안으로 화전(火箭)을 쏘아 보내니 성안의 초옥(草屋)에 일시에 불이 번졌는데, 황진이 또 마주 대하여 나무를 세우고 판자를 설치하여 총을 쏘니 적이 곧 중지하였다.

서예원(徐禮元)이 겁을 먹고 허둥거리며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자, 김천일(金千鎰)장윤(張潤)을 임시로 목사(牧使)에 임명하여 진정시켰다. 이때 큰 비가 내려 활의 아교가 모두 풀리고 군사들은 먹고 잠잘 겨를도 없어 점점 피로의 기색이 짙어져 갔다. 이에 반해 적은 많은 군대로 교대하며 나아왔기 때문에 병사들이 생기가 돌고 용맹스러워 지르는 함성이 우레와 같았다. 왜적이 성안에 글을 보내기를,

"대국의 군사도 이미 투항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겠는가."

하였는데, 성안에서 글로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더구나 명나라 군사 30만이 지금 진격 중이니, 너희들은 섬멸되고 말 것이다."

하니, 적이 아랫도리를 벗어붙이고 야유를 하기를,

"중국 군사는 벌써 물러갔다."

하였다. 김천일이 매양 높은 데 올라가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모방(某方)에 병기(兵氣)가 있으니, 명나라 군사가 곧 와서 구원할 것이다."

하면, 군인들이 크게 기뻐들 하였으나, 조금 있다가는 조용해지곤 하였다. 김천일최경회 등에게 말하기를,

"언제나 이 적을 물리치고 하란 진명(賀蘭進明)009) 의 살점을 씹을 것인가."

하였다. 이날 밤에 또 밀고 당기며 크게 싸우다가 5경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적이 언덕 다섯을 동·서 두 문 위에 한꺼번에 쌓고 대나무를 엮어 책(柵)을 만든 뒤 비오듯 총을 쏘아대니, 성안에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또 큰 궤를 만들어 그 속에 병사를 엄폐시키고 네 바퀴 달린 수레에 실은 다음, 적 수십 인이 철갑(鐵甲)을 입고 철순(鐵楯)으로 가리고서 수레를 밀어 성에 대고는 큰 철추(鐵錐)로 성을 팠다. 이종인(李宗仁)이 단독으로 활을 쏘니, 화살마다 첩갑을 뚫었으므로 적병이 많이 죽었다. 성 위에서 솜을 묶어 기름을 적신 다음 불을 붙여 던져 그 궤를 태우니 궤 속의 적들이 모두 섬멸되었다.

이날 밤 적이 다시 북문을 침범하자 이종인이 구원하러 그곳으로 달려가 힘껏 싸워 물리치고는 자기가 지키던 서성(西城)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곳은 그동안 서예원이 대신 지키고 있었는데, 적이 몰래 와서 성을 뚫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므로 성이 장차 무너지려 하였다. 적이 바야흐로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왔는데, 종인(宗仁)이 힘껏 싸워 물리치는 동시에 적장 한 명을 사살하니, 적은 시체를 끌고 물러갔다.

다음날 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종인이 다시 크게 싸워 물리쳤다. 황진(黃進)이 순행차 이곳에 이르렀다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鐵丸)을 쏘았는데, 판순(板盾)을 뚫고 의 이마에 맞아 이 즉사하였다. 황진은 용략(勇略)이 여러 장수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안에서 그를 의지하였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두려워하였다. 이에 서예원이 그를 대신하여 무리를 이끌었는데,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혼이 빠져 갓을 벗은 채 말을 타고 울면서 돌아다녔다. 최경회(崔慶會)가 군정(軍情)을 경동(驚動)시켰다 하여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는 장윤(張潤)에게 대신 맡겼다. 장윤은 명망이 황진 다음가는 인물이었는데, 그도 탄환에 맞아 죽었으므로 종인 혼자서 동서로 뛰어다니며 적을 응수하였다.

29일 동문의 성이 비로 인해 무너지자 적의 무리가 개미떼처럼 기어올랐다. 종인이 친병(親兵)과 더불어 활과 화살은 놓아두고 칼과 창을 가지고 육박전을 벌여 죽인 적의 시체가 구릉(丘陵)처럼 쌓이니 적이 이에 물러갔다. 적이 창의사(倡義使)가 지키는 서쪽과 북쪽 성문은 병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알고 이에 대군을 모아 힘을 다해 공격해 올가가니, 창의군(倡義軍)이 제대로 버텨내지 못하였다. 적이 드디어 성에 올라와 병기를 휘두르니, 성벽을 지키던 군사들이 흩어져 촉석루로 들어갔는데, 서예원은 먼저 달아나 숨어버렸다.

김천일최경회·고종후 등과 청당(聽堂)에 나란히 앉아서 말하기를,

"여기를 우리들이 죽을 장소로 합시다."

하고는 술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술을 지니고 있던 자도 이미 달아난 뒤였다. 이에 불을 지르도록 명하고는 스스로 타 죽으려 하였는데 적이 바로 촉석루에 올라오자, 김천일이 그 아들 김상건(金象乾)최경회·고종후·양산숙(梁山璹)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종인은 이곳저곳에서 싸우다가 남강(南江)에 이르렀는데, 양팔로 두 명의 적을 끼고는 크게 소리치기를,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

하며, 강에 몸을 던졌다. 진사(進士) 문홍헌(文弘獻), 정자(正字) 오차(吳玼), 참봉(參奉) 고경형(高敬兄) 등이 모두 따라 죽었다. 성이 일단 함락되자 적이 대대적으로 도륙을 자행하였다. 서예원 및 판관(判官) 성여해(成汝楷)도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여러 장령(將領)들도 다 죽었다. 김준민(金俊民)은 단독으로 말을 달리며 거리에서 싸웠는데, 좌우로 돌격할 때마다 적의 무리가 물 갈라지듯 흩어졌다. 왜적이 종일 그를 추축(追逐)하였으나 탄환과 칼이 모두 명중되지 않았는데, 끝내 그가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성안의 사녀(士女)들도 앞을 다튀 강에 이르러 투신 자살하여 흐르는 시체가 강을 메웠다. 대략 죽은 자가 6, 7만이나 되었는데, 장사(壯士)로서 벗어난 자는 수삼 인에 불과했다. 적이 성곽을 헐고 가옥을 불태웠으므로 성이 온통 폐허가 되었다. 성이 포위를 당한 9일 동안은 주야로 벌인 크고 작은 전투가 1백여 차례나 되었으며, 적의 죽은 자도 상당하였다. 그러나 중과 부적인 데다가 외부에서 원조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힘이 다하여 죽었다. 왜변(倭變)이 있은 이래 참혹하게 무너지고 의열(義烈)이 장엄하게 드러난 것으로 진주성 같은 예가 없었다.

유격(遊擊) 오종도(吳宗道)가 경성에서 변을 듣고 달려 내려가다가 죽산(竹山)에 이르러 풍우(風雨)의 이변을 만나고는 접반관(接伴官)에게 말하기를,

"진성이 포위를 당한 지 지금 8일째인데, 오늘과 내일 사이에 함락되지 않으면 적이 반드시 물러갈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날 함락이 되었다. 오종도가 글을 지어 김천일을 제사지냈는데 내용이 매우 슬펐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글을 전송(傳誦)하였다.【우리 나라는 전대(前代)부터 큰 적을 겪지 못했으므로 국내의 큰 성이라야 높이가 3장(丈)에 불과했으며, 위로는 누로(樓櫓)가 없고 아래로 갱참(坑塹)이 있다 해도 대부분 얕고 좁아 뛰어 넘어올 수 있었다. 진주성은 본래 누석(壘石)으로 얕게 축조한 것인데, 성안에 비치된 식량이 충분했다 해도 전사(戰士)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적이 10배의 병력으로 번갈아 휴식시켜가면서 계속 들이닥쳤으니 이는 김시민(金時敏)이 당하던 적과는 중과(衆寡)가 현격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김시민도 지킨 지 7개월 만에 성안이 이미 곤핍해졌고 보면 곧 그 형세를 알 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김천일 등이 충의(忠義)만을 가지고도 사중(士衆)을 격려하였던 것인데 황진·이종인·장윤·김준민 등이 모두 군사 중에 으뜸가는 용무(勇武)를 가졌던 관계로 왜적을 꺾어 상당수를 살상하면서 9일이 지나서야 힘이 다하였으니, 전수(戰守)를 잘못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서예원은 처음부터 성을 버리려고 하였으나 원수(元帥)에게 눌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고, 밖의 장수들도 모두 군문(軍門)의 명을 받고 반드시 패할 땅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때 나가서 피해야 한다는 의논이 갑자기 일어났던 것인데, 김천일이 항언(抗言)하여 그 의논을 중지시켰으니, 세상에서 이 점을 들어 김천일을 허물하는 것은 그럴 듯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자고로 충의(忠義)의 선비로서 성을 지키다가 죽게 되어 심지어는 백골이 천리에 드러나기까지 하되 마침내 그런 경우를 면하지 못한 이들은 모두 김천일의 유라고 하겠는데, 그들을 비난하며 죄를 준 경우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이는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런데 김천일 등이 불과 수천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죽인 적의 수효가 수천 인에 그치지 않았었고 보면 또한 그의 죽음이 헛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때에 김천일 등이 아니었더라면 겁많고 미련한 서예원으로서는 필시 하루이틀도 막아내지 못하였을 것이니, 따라서 성안의 사민 남녀 6, 7만 명이 모두 죽게 되고 허다한 식량과 기계가 죄다 적에게 넘겨졌을 것인데, 무슨 이익이 있었겠는가. 서예원의 형 서인원(徐仁元)은 의논을 좋아하는 것으로 명사가 되었으나 궤휼(詭譎)하고 기기(忮忌)하였다. 일찍이 김천일을 교묘하게 비방하면서 예원을 신원하려고 하였던 까닭에 사대부들 사이에 간혹 이론(異論)이 있게 되었고, 심지어는 상의 앞에서 무훼(誣毁)하여 ‘천일의 뜻은 숭상할 만하나, 재주가 졸렬하여 일을 그르쳤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천일이 국사를 그르친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진주의 유민(遺民)들은 천일 등과 더불어 같은 도의 사람으로 본디 서로 친신(親信)한 경우가 아닌데도 그를 숭앙하여 제사까지 지내면서 오래갈수록 더욱 독실하게 하는 데 반해, 예원에 대해서는 타매(唾罵)하면서 심지어는 ‘예원은 온 집안이 적에게 투항했다.’고 하여 한마디도 애석해 하는 말이 없었으니, 공리(公理)가 인심에 있어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애통하게 여길 만한 것은, 행장(行長)이 청정(淸正)과 혐의가 있는 것처럼 거짓 드러내 보이면서 우리 나라가 필시 진주성을 버리지 않을 것을 알고는 거짓으로 버리고 피하기를 청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더욱 진주성을 보전하려고 충신(忠臣)과 용장(勇將)을 증파(增派)하여 한성에서 함께 죽게 하였으니, 이는 본시 수길(秀吉)의 계략이었다. 왜인 중에서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소문만 듣고도 먼저 달아나 한 번도 정식으로 대적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건장한 군사들이 모두 죽지 않고 흩어졌다가 다시 합하여 곳곳에서 왜중(倭衆)을 초살(勦殺)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행장이 반드시 진주성을 버리라고 한 것은 일부러 그들을 완전히 집결하게 하여 섬멸시키려 한 것이다.’ 하였다. 왜인이 강항(姜沆)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장사들이 진주성에서 다 죽었으니, 이후로는 우리를 괴롭힐 자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이간질을 하여 이순신(李舜臣)을 떠나게 만들고 원균(元均)을 패하게 만든 것도 모두 깊은 기모(機謀)에서 나온 것이다. 대저 진주성은 이미 누차 승전하여 홀로 온전하게 지켜 냈고 곡식 10만 석을 비축하여 일면의 보장지(保障地)가 되었으니, 반드시 지키고 떠나지 않을 것을 행장은 본래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 용병(用兵)을 잘하는 자는 장차 취하려 할 때 먼저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이 성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 어찌 김명원(金命元) 등이 능히 판단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조정에서 문법(文法)010) 을 가지고 장수들을 휘어잡아 항시 동서로 진퇴하는 일에 대한 통제가 중앙에서 나옴에 있어서랴. 김명원 등이 만일 행장의 말에 따라 진주성을 버리게 했더라면 필시 군법에 의해 죄를 얻을 것인데, 김명원이 어찌 감히 스스로 독단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곽재우(郭再祐)의 의논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이유이다. 진주의 패망된 상황은 여러 장상(將相)들이 조사하여 갖추 주문하였고, 또 기록한 자가 많으므로 사실을 참험(參驗)하여 대략 여기에 적는 바이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0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역사-사학(史學)

  • [註 009]
    하란 진명(賀蘭進明) : 당 숙종(唐肅宗) 때 하남 절도사(河南節度使)로 임회(臨淮)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때 윤자기(尹子奇)가 회양(淮陽)을 포위하자 장순(張巡)이 구원을 청하였으나 하란 진명은 장순의 명성과 공적이 자기보다 높은 것을 질투하여 구원하지 않아 회양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당서(唐書)》 권5. 여기서는 구원하지 않는 장수들을 하란 진명으로 비유하였다.
  • [註 010]
    문법(文法) : 문서와 법령.

賊陷晋州, 金千鎰崔慶會等死之。 時, 晋州報急, 李如松在京城, 傳令列屯諸將劉綎吳惟忠駱尙志等, 進兵救之, 諸將畏賊勢, 大不敢進, 賊悉諸屯兵, 號三十萬, 直向晋州, 焚掠宜寧諸縣, 烟焰漲天。 權慄李薲退次咸陽, 仍入南原, 郭再祐鼎津退。 是月二十一日, 賊兵始犯城, 分兵傍縣, 以拒外援, 圍住本城百匝, 彌漫四面數百里。 洪季男等, 登高望見, 旌旗蔽天, 呼噪振地, 城在圍中, 如大海孤篷, 懼不敢進。 是月二十二日, 賊始攻城, 城中射退一陣, 初昏更進, 大戰良久, 達夜進退, 五更乃止。 先是, 城中以爲: "城南矗石樓臨江險絶, 賊必不犯, 惟於西北鑿壕儲水, 只有東邊一路, 爲受敵地。" 至是, 賊決濠塡土, 作爲大路, 又直掘城底, 運出墻臺大石。 城上矢石亂下, 賊冒死坌集, 必毁乃已。 翌日三戰三退, 其夜四戰四退。 翌日又如是, 丸矢相當, 城內外死者, 不記其數。 又翌日賊於東門外作土山, 屋其上, 俯城放丸。 城中對築高阜, 黃進親自負土, 城中士女竭力助築, 一夜而畢, 遂對放玄字銃, 以破土屋, 賊乃退。 又翌日夜, 進退大戰, 達曙乃止。 賊又作木櫃, 裹以牛皮, 各自負戴, 以防丸矢, 專力毁城。 城上射矢如雨, 滾下大石以破之。 賊又樹二大木於東門外, 上作板屋, 多放火入城內, 城內草屋一時延爇。 黃進又對建木, 設板放銃, 賊乃止。 徐禮元畏怯顚倒, 不能治事, 金千鎰張潤爲假牧使以鎭之。 時天大雨, 弓膠皆解, 軍士宿食無暇, 漸至困劣。 賊則萬衆迭進, 生兵皷勇, 呼聲如雷。 投書城中曰: "大國之兵已投降, 爾國敢拒乎?" 城中以書答之曰: "我國有死而已, 況天兵三十萬, 今方進擊, 爾等當殲盡矣。" 賊褰臀示之曰: "兵已退矣。" 千鎰每登高望之曰: "某方有兵氣, 天兵方來援矣。" 軍人大歡, 俄而寂然。 千鎰慶會等曰: "何時却此賊, 膾脯賀蘭進明耶?" 是日夜, 又進退大戰, 至五更乃休。 賊竝築五阜於東西兩門, 上結竹爲柵, 放丸如雨, 城中死者甚衆。 又作大櫃以藏兵, 下爲四輪車, 賊數十人着鐵甲, 擁鐵楯, 推車薄城, 以大鐵錐鑿城。 李宗仁獨發矢, 矢必穿甲, 賊兵多死。 城上束蘊灌油, 放火投下, 燒其櫃, 櫃中賊盡殲。 是夜更犯北門, 宗仁奔救, 力戰殺退。 還至所守西城, 則禮元代守, 不覺賊潛來掘城, 城將崩, 賊方進迫, 宗仁力戰却之, 又射殺賊將一人, 賊曳屍而退。 翌日又犯東北城大戰, 宗仁又大戰却之。 黃進巡到, 俯視城下曰: "賊屍平塹, 死殆千餘人矣。" 有一賊潛伏城下, 仰放鐵丸, 穿板盾, 中其額卽死。 勇略爲諸將首, 城中倚重, 及死, 城中洶懼。 徐禮元代領其衆, 禮元魄奪, 脫笠騎馬, 涕泣以行。 崔慶會以警動軍情, 將斬而止, 代以張潤名亞於, 而又中丸死, 惟宗仁東西應敵。 二十九日, 東門城因雨毁頹, 賊衆蟻附以上。 宗仁與親兵, 捨弓矢, 持刀槍, 搏戰格之, 賊死者堆積如丘, 賊乃退。 賊知西、北門倡義使所守處兵弱, 乃聚大兵, 一力仰攻, 倡義軍不能支。 賊遂登城耀兵, 守陴軍散入於矗石樓, 禮元先走匿。 千鎰慶會高從厚等, 列坐廳上曰: "此吾輩死所也。" 使酌酒來, 持酒者已走。 命放火欲自燒, 賊卽登樓, 千鎰與其子象乾慶會、從梁山璹等, 北向再拜, 投江以死。 李宗仁轉鬪至南江, 左右挾兩賊, 大呼投江曰: "金海府使李宗仁死於此。" 進士文弘獻、正字吳玼、參奉高敬兄等, 皆從死。 城旣陷, 賊大肆屠殺。 禮元及判官成汝楷亦不免, 諸將領皆死。 金俊民獨馳馬巷戰, 左右突擊, 賊衆披靡, 終日追逐, 丸劍皆不中, 竟不知死處。 城中士女奔波, 至江投死, 流屍塞江。 大約死者六七萬, 壯士得脫者數三人。 賊夷城郭, 焚家舍, 一城爲墟城。 被圍九日, 晝夜大小百餘戰, 賊死者相當, 而衆寡不敵, 外救不至, 諸將力盡而死。 自變以來, 陷敗之慘, 義烈之著, 無如城者。 游擊吳宗道自京城聞變馳下, 至竹山, 遇風雨之異, 謂接伴官曰: "城被圍今八日, 今明日不陷, 則賊必退矣。" 果以是日被陷。 宗道爲文, 祭金千鎰, 敍述悲切, 國人傳之。 【我朝自前代, 未遇大敵, 國內大城, 高不過三丈, 上無樓櫓, 下有坑塹, 率淺狹可越。 晋城本壘石淺築, 城中糧峙雖足, 鬪士不過數千人。 賊以十倍之衆, 迭休暴戰, 與金時敏所當之賊, 衆寡懸殊。 時敏守城七月, 而城中已困, 卽其形勢可知也, 而千鎰等徒以忠義, 激勵士衆。 黃進、李宗仁、張潤、金俊民等, 皆冠軍勇武, 故能摧敗賊衆, 殺傷相當, 九日而力盡, 則其非戰守之失明矣。 徐禮元初欲棄城, 而爲元帥所壓, 不敢動, 外將皆以軍門之令, 入保必敗之地。 出避之議遽起, 而千鎰抗言止之, 世以此咎千鎰, 則近之矣。 然自古忠義之士, 嬰城致死, 至於暴骨千里, 而終不免者, 皆千鎰類也, 未聞有非而罪之者何哉? 然千鎰等所將兵不過數千人, 而所殺賊, 不啻數千人, 則其死非無功也。 向微千鎰等, 則以禮元之愚怯, 必不能一二日拒守, 城中士民男女六七萬, 盡徒死, 而許多糧械, 皆與賊矣, 有何益哉? 禮元之兄仁元以好議論爲名士, 詭譎忮忌。 嘗巧詆千鎰, 欲伸禮元, 故士大夫間或有異論, 至於誣毁於上前以爲: "千鎰志雖可尙, 才拙誤事。" 不知千鎰誤國事者, 安所著也, 果如人言, 則晋州遺民, 與千鎰等, 皆非同道素相親信者, 而崇重祠祀, 久而益篤。 唾罵禮元, 至以爲: "禮元擧家降賊。" 無一言顧惜, 公理之在人心, 不可誣者有如是矣。 所可痛者, 行長與淸正佯示外嫌, 知我國必不棄晋城, 而詐請棄避。 以此, 朝廷尤欲保晋城, 益之以忠臣、勇將, 使同死於一城, 此本秀吉謀也。 倭中言: "朝鮮人望風先走, 一不肯搦鬪, 故壯軍皆免散而復合, 處處勦殺倭衆, 此固難當。 其謂必棄晋城者, 是故使之完聚, 而覆之也。" 倭人謂姜沆曰: "朝鮮壯士, 盡於晋城, 自是無毒我者矣。" 其後, 用間而去李舜臣, 敗元均, 皆其深機也。 夫晋城, 旣屢勝獨全, 蓄穀十萬石, 爲一面保障, 其必守而不去, 行長固熟知之。 古之善用兵者, 或有將取, 而姑與之城, 有所不守者, 此豈金命元等所能辦哉? 況朝廷方以文法持將閫, 常時進退東西, 制由中出, 金命元等, 若從行長言, 使棄晋城, 則必以軍法得罪, 命元又安敢自擅? 此郭再祐之論, 所不能入也。 晋州敗狀, 卽經諸將相査按具奏, 又多紀之者, 故參驗紀實, 大略盡於此矣。】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0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