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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월 1일 병진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제독 이여송이 평양에 진군하여 싸워 이긴 뒤 승첩을 상주하게 하다

다음날 【6일.】 진군하여 평양(平壤)에 접근하였다. 제독이 대군을 서둘러 행군시키자 도원수(都元帥)도 제진(諸陣)의 군사를 합쳐 거느리고 그 뒤를 따랐다. 군사를 나누어 에워싸니 적은 성에 올라가 굳게 지키면서 모란봉(牧丹峯)을 거점으로 높은 위치에서 총을 쏘아댔다. 제독이 진정병(眞定兵)으로 하여금 올라다보며 공격하다가 못 이겨 퇴각하는 것처럼 하게 하자 적이 성을 넘어 쫓아왔는데, 명나라 군사가 다시 반격하니 적이 패하여 성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 적이 유격 오유충(吳惟忠)의 진영을 침범하였는데, 오유충은 군사를 단속하여 조용히 있다가 일제히 화전(火箭)을 발사하니, 불빛이 대낮처럼 밝았다. 적이 도망하자 추격하여 10여 급(級)을 베었다.

7일 사시(巳時)에 3영(營)이 모두 군사를 내어 보통문(普通門)을 공격하니, 적이 성문을 열고 맞아 싸웠으나 명나라 군사가 30여 급을 베자 적은 도망하여 문안으로 들어갔다.

8일 제독이 3영에 명령을 전하여 일시에 군사를 전진시키고 성을 둘러 진을 치게 하였다. 우리 군사는 남쪽 성에 육박하고 절강(浙江)의 군사는 서쪽 성을 공격하였는데, 제독은 말을 달려 오가며 전투를 독려하였다. 온갖 포를 일제히 발사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대낮인데도 캄캄하였다. 이때 동풍이 갑자기 서풍으로 변하면서 불길이 번져 밀덕(密德) 토굴(土窟)을 태웠다. 적이 성가퀴 사이로 좇아 나와 포석(炮石)을 사용하여 항거하였는데, 제독이 겁을 먹고 후퇴하는 한 사람을 손수 베어 돌려 보이고 크게 소리치기를 ‘먼저 성에 오르는 자는 은(銀) 50냥을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낙상지(駱尙志)가 긴 창을 휘두르며 먼저 오르고 절강의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 올라가 적의 기를 뽑아 버리고 명나라 기를 세웠다. 적이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자 후퇴하여 토굴로 들어갔다. 우리 군사도 잇따라 올라갔다.

제독이 장세작(張世爵) 등과 함께 칠성문(七星門)을 공격, 대포로 문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갔다. 이에 이여백(李如栢)함구문(含毬門)을, 양원(楊元)보통문(普通門)을 통해 승세를 타고 앞을 다투어 들어갔다. 그리하여 1천 2백 80여 명을 참획(斬獲)하고 불태워 죽인 수도 절반이 넘었는데, 이와 함께 왜적에게 투항했던 절강인(浙江人) 장대선(張大膳)을 사로잡고, 포로가 되었던 우리 나라 사람 남녀 1천 2백여 인을 구출하였으며, 노획한 마필(馬匹)과 기계(器械)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행장(行長)이 도망해 연광정(練光亭) 토굴로 들어가 의거하였는데, 여러 왜추가 연달아 여러 굴에 의거하여 모두 비오듯 탄환을 발사하니 명나라 군사가 공격하다가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제독이 진영에 머물면서 장대선을 시켜 행장에게 회유하기를,

"차마 인명을 다 죽일 수 없어 너희의 살길을 열어주니, 속히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와서 약속을 들어라."

하니, 행장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퇴군할 것이니, 뒷길을 차단하지 말아달라."

하였다. 제독이 궁지에 빠진 적이 결사 항전할까 염려하였고, 휘하의 측근에서도 설득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이에 행장의 청을 허락하고는 우리 군사에게 영을 전하여 일로의 복병(伏兵)을 철수하게 하였다. 밤중에 행장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얼음이 언 강을 건너 탈출했는데, 중화(中和)황주(黃州)에 주둔해 있던 적은 먼저 이미 철수한 뒤였다.

이보다 며칠 전에 유성룡이 황해도 방어사(黃海道防禦使) 이시언(李時言)김경로(金敬老)에게 비밀히 통보하여 적의 퇴로를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이때 황해도 순찰사(黃海道巡察使) 유영경(柳永慶)해주(海州)에서 군사로 자신을 호위시키면서 또 김경로를 부르니, 김경로는 적과 더불어 교전하기를 꺼려 하여 바로 유영경에게 갔다. 행장 등이 밤새도록 도망쳐 군사가 피곤하여 부오(部伍)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시언은 군사가 얼마 안 되어 감히 접전하지는 못하고 단지 굶주리고 병든 낙오병 60급만을 베었으며, 황주 판관(黃州判官) 정엽(鄭燁)은 90여 급을 베었다.

제독이 평양에 주둔한 지 8일 만에 체찰사 유성룡,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으로 하여금 먼저 가서 서둘러 꼴과 양식을 마련하고 부교(浮橋)를 조성케 하는 한편 장세작으로 하여금 선봉(先鋒)을 거느리고 먼저 출발하도록 하였는데, 청석곡(靑石谷)에 이르러 적 수백 명을 만나 공격하여 30급을 베었다. 개성(開城)에 있던 적도 경성으로 돌아갔다.

유성룡김경로를 베도록 청하니, 상이 선전관을 보내어 장차 형을 집행하려 하였는데,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 말리므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도록 명하였다.

적의 대장 중에는 행장청정(淸正)이 인물이었는데, 이때 청정은 북쪽에 있었다. 따라서 수가(秀嘉)는 직위가 높기는 하였지만 나이가 어려 제대로 일을 주관하지 못하였으니, 만일 행장조신(調信)을 제거하고 진격하여 경성에 들이닥쳤다면 수가의 형세가 고단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제독이 이미 기회를 잃은 데다가 김경로마저 절도(節度)를 어기고 말았으므로 유성룡이 매양 이것으로 유영경을 허물하였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체직시키고 다시 이빈(李薲)으로 대신하였다. 평양 전투에서 이일이 제독의 밀령(密令)에 따라 복병을 철수하여 길을 열어주자 용장(勇將) 김응서(金應瑞)박명현(朴名賢) 등은 팔을 걷어붙이며 분격해 하였다. 그런데 적이 도망가고 나자 명나라 장수가 도리어 퇴로를 차단하지 못하였다고 우리 군사를 공공연히 꾸짖었다. 상이 윤두수(尹斗壽)평양에 보내 조사 신문하여 장차 군법을 시행하려 하다가 그를 놓아주었으니, 이는 그의 죄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장수가 ‘이일은 장수의 재목이 못 되니 이빈으로 대신하기를 청한다.’고 말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이빈을 순변사로 삼고 군사 3천 명을 뽑아 제독을 따라가게 하였다. 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우의정 유홍(兪泓)에게 명하여 따르도록 하고 역(驛)을 통하여 승첩을 상주하되 독부(督府)와 함께 상주하게 하였다. 주문(奏文)에,

"황제의 위엄에 힘입어 평양을 수복한 승첩을 급히 보고드리는 일입니다. 만력(萬曆)002) 21년003) 1월 9일에 배신(陪臣) 제도 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치계(馳啓)하기를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정문(呈文)과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신보(申報)를 받았다. 이에 의하면 「이달 6일에 흠차 제독 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 어왜 군무 총병관 도독 동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總兵官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이 세력이 막강한 관군을 거느리고 곧장 평양성 밖에 도달하여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본성(本城)을 포위하였다. 왜적 2천여 명이 성 북쪽의 모란봉(牧丹峯)에 올라가 청·백기(靑白旗)을 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총포를 쏘았다. 또 왜적 1만여 명이 성 위에 벌여 서서 앞에 녹각책자(鹿角柵子)를 세우고는 방패로 가리고 칼을 휘둘렀는데, 그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또 왜적 4, 5천 명이 대장기를 앞세워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성안을 순시하여 여러 적들을 지휘하였다. 본성 안팎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형세상 갑자기 공격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총병은 군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날 한밤중에 왜적 3천여 명이 함매(銜枚)004) 하고 몰래 나와 도독(都督) 양원(楊元), 도독 이여백(李如栢), 도지휘(都指揮) 장세작(張世爵) 등의 진영을 습격하였다가 본관들이 거느린 군사들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7일 밤에도 왜적 약 8백여 명이 다시 도독 이여백의 진영을 습격했다가 또 본관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8일 동틀 무렵에 총병이 향을 피우고 날을 점쳐서 길조(吉兆)를 얻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3영의 장관들과 더불어 각 해당 장령(將領) 및 관군(官軍)을 나누어 거느리고 칠성문(七星門)·함구문(含毬門)·보통문(普通門) 밖에 진을 친 다음, 총병이 친병(親兵) 2백여 기(騎)를 거느리고 왔다갔다 하면서 지휘하니, 장수와 사졸들은 사기가 올라 모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다. 진시(辰時)에 모든 군사가 차례로 전진하며, 각종 화기를 일시에 발사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온 들판이 캄캄하였다. 화전(火箭) 하나가 밀덕(密德) 토굴에 떨어지자 조금 뒤에 붉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불길이 번져 거의 다 태웠다. 성 위에서 왜적이 총을 난사하고 끓는 물과 돌덩이를 사용하여 죽기로써 항거하며 긴 창과 큰 칼을 밖으로 일제히 내미니, 마치 고슴도치의 털처럼 빽빽하였다. 총병이 겁내는 자 한 명을 손수 베어서 호령하며 진중에 보이니, 모든 군사가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성에 접근하였다. 등에는 마패(麻牌)를 지고 손에는 창을 가지고서 일제히 돌진하며 활과 대포를 쏘기도 하고 성을 지키는 적을 올려 찌르기도 하니,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조금 물러났다. 총병이 몸을 솟구쳐 먼저 올라가서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진입하였다. 명나라 군사의 1진은 본국의 관군과 더불어 함구문으로 들어가고, 1진은 보통문으로 들어가고, 1진은 밀덕(密德)의 동쪽 성에 올라갔다. 기병과 보병이 구름처럼 모여서 사면으로 공격하여 쳐죽이니 적들이 무너졌다. 명나라 군사가 당시 전투에서 참획한 수급(首級)이 1천 2백 85과(顆)였는데, 조사해 보니 그 속에는 적추(賊酋) 평수충(平秀忠)·평진신(平鎭信)·종일(宗逸) 등 25인의 수급도 들어 있었다. 왜적 2명과 통사(通事) 장대선(張大膳)을 사로잡고, 말 2천 9백 85필과 왜적의 기물 4백 52건을 노획하였으며, 본국에서 사로잡혀간 남녀 1천 15명을 구출하였다.

명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불을 놓아 건물을 모두 불태우니, 많은 왜적이 숨어 들었다가 타 죽은 자가 약 1만여 명이나 되어 그 냄새가 10여 리에 풍겼다. 잔적이 풍월루(風月樓)의 작은 성으로 숨어 들어갔는데, 총병이 시초(柴草)를 가져오게 해서 사면에 쌓아놓고 화전(火箭)을 쏘니, 일시에 타버려 모두 재가 되었다. 또 남은 적이 성을 뛰어넘어 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꺼져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칠성문·보통문·모란봉 등지에 있던 여러 왜적들은 그대로 토굴에 의거하고 있었으므로 견고하여 공략할 수 없었다. 총병은 군사를 철수하여 밥을 먹이면서 말하기를 『적은 필시 밤에 도망할 것이다.』 하고 즉시 부총병(副總兵)·참장(參將) 등의 관원을 보냈다. 이영(李寧)·조승훈(祖承訓)·갈봉하(葛逢夏)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매복하였고, 총병은 양원(楊元)·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 등 세 부장(副將)과 함께 큰 길로 추격해 갔는데, 왜적들은 사방으로 도망하다가 이영 등의 매복에 걸려 요격을 당하였다. 이때 수급 3백 59과를 참획하고, 왜적 3명을 생포하였다. 남은 적들은 병기를 버리고 황급히 도망하였으니, 절령(岊嶺)005) 이서(以西)가 모두 평정되었다.」 하였다.

신은 생각하건대, 평양부(平壤府)는 실로 본국의 옛 도읍으로서 성지(城池)가 험고한데 흉악한 적이 저돌적으로 침입하여 점거하고는 소굴로 만들었다. 즉일로 천병(天兵)이 진격하여 북소리 한 번에 소탕하니, 흉악한 잔적은 도망갈 곳이 없게 되었다. 본국이 재조(再造)되는 기미가 실로 여기에 있었다. 신은 이원익 등과 각처의 마초 및 군량을 독려 운반하여 본성에 들여보내어 독부에서 쓰도록 하였다. 승첩의 사유를 이렇게 갖추 아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치계를 받고 자세히 살펴보건대, 소방(小邦)은 군병이 약하여 날이 갈수록 국토가 깎이고 평양은 성이 험고하여 쉽게 수복할 수 없었으므로 밤낮 근심하며 죽을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성명(聖明)의 천지 부모와 같은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선왕조의 옛일을 곡진히 생각하시어 신의 잘못을 죄주지 않고 남북의 정병(精兵)을 동원하여 도탄에 빠진 소방을 구제하도록 명하시었습니다. 군량이 부족할까 염려하시어 먼저 은냥(銀兩)을 하사하시고, 군량과 마초가 모자랄까 걱정하시어 계속해서 군수품을 수송해 주셨습니다. 사졸들이 들판에서 노숙하고 노새와 나귀가 길에서 나뒹구는 등 신의 허물로 말미암아 이토록까지 천조(天朝)에 근심을 끼쳐드렸으니 신은 감격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왕사(王師)가 정벌함에 천리(天吏) 앞에는 대적할 자가 없는 법입니다. 금년 정월 8일 평양에 진공하여 하루아침에 성을 깨뜨렸는데, 타 죽고 빠져 죽고 참살당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적들도 혼이 빠져 도망갔으니, 그 군위(軍威)의 성대함과 전승(戰勝)의 신속함은 옛 역사에 없었던 일입니다. 신과 대소 배신(陪臣)들은 처음 첩보(捷報)를 듣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구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는 대개 성천자(聖天子)의 성덕(盛德)이 널리 퍼지고 신무(神武)가 멀리 뻗친 데다 명공(名公)들이 계책을 잘 돕고, 병부(兵部)에서 전략을 잘 세웠기 때문입니다.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은 기무(機務)에 전심하여 방략을 지시함에 있어 계책이 부합하여 특별한 공을 이루었습니다. 총병(總兵) 이여송(李如松)은 군사들에 대한 맹세가 강개하고 그 의기(義氣)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군사들이 지나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침범하는 일이 없었고 전장(戰場)에 임해선 독전하여 여러 장교에 솔선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말이 총탄에 맞고 불길이 몸을 에워싸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더욱 기운을 가다듬었습니다. 성을 함락시키던 날 기자(箕子)에게 제사를 지내고 먼저 그 무덤을 봉(封)했으며, 부상자를 어루만지고 전사자의 영혼을 두루 위로하는 한편,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환과고독(鱞寡孤獨)들을 위문했으니, 비록 배도(裵度)회서(淮西)를 평정했던 일이나 조빈(曹彬)이 강남(江南)을 함락시켰을 때의 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006)

부장(副將)·참장(參將)·유격(遊擊)·도사(都司) 이하 각 장령(將領)들도 용감하기가 마치 범이 포효하는 듯 신(神)이 도와주는 듯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큰 돌이 쏟아져 내려오는데도 이를 무릅쓰고 성 위로 올가간 자도 있고, 가슴에 탄환을 맞고서도 계속 왜적을 죽인 자도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장졸(將卒)들은 팔짱만 끼고 놀라 움츠린 채 감히 그 사이에 돕지도 못하고 그저 철기(鐵騎)의 발굽에 들판 가득 먼지가 날리고 화전(火箭)에 맞아 붉은 불꽃이 하늘을 찌르는 것만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포로 방책을 쏘아 맞히니 깃털이 날리듯 산산조각이 났고 창으로 적을 찌르는데 민첩하기가 마치 나는 송골매와 같았습니다. 비린내나는 연기는 공중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는 강물을 이루었으며, 천지는 갈라지고 산과 물이 뒤바뀌었습니다. 조총을 쏘고 끓는 물을 퍼부으며 돌멩이를 날리는 적들은 정말 버마재비가 수레바퀴를 막는 것과 같아서 감히 상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평양성은 실로 정예로운 군사와 기계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도의 힘을 다 기울였으나 해가 지나도록 도모하지도 못했었는데, 승전하여 수복한 뒤에 그들의 수비 시설에 대해 들어보니 소방의 병력으로는 결코 쳐서 함락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천자의 위엄이 한 번 떨쳐지자 여러 적들이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이미 파죽지세가 되었으므로 황해도 동쪽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으니, 구도(舊都)를 머지않아 수복하여 종묘 사직을 차례로 청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선조의 영혼이 지하에서 감격할 것과 남은 백성들이 소생될 희망을 생각하니 슬픔과 기쁨이 가슴에 교차하여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비록 되살려 주신 은혜를 보답하려 해도 실로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신은 정말 통쾌합니다. 저 조무라기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게딱지만한 섬나라에서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늘의 위력을 모른 채 여러 번 미친 소리를 지껄였으므로 신은 가슴이 아팠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추악한 무리들이 본색을 드러내다가 천벌을 자초하여 온 섬나라가 공포에 질린 채 벌벌 떨며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거의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소방의 수치만 씻는 것이겠습니까. 실로 역대 제왕들의 공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소원이 있을 때 곡진하게 이루어주는 것이 천지의 큰 덕이고 호소할 것이 있을 때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신자(臣子)된 사람의 지극한 정이라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지금 흉악한 적이 소탕된 것은 오로지 왕사(王師)가 출동했기 때문으로서 소방은 털끝만큼도 한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천장(天將)이 회군(回軍)하여 소방이 외롭고 미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재차 침략할 흉계를 꾸며낼텐데 그때에 가서는 재난이 더욱 심해져 막기가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성상께서 동방을 돌보는 걱정을 하시게 하고 미신(微臣)은 왜적 방어를 잘못한 죄를 거듭 지게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비옵건대 성상께서는 해동의 잔약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천조(天朝)의 은혜로운 인정을 끝까지 베풀어 주소서. 제독부(提督府)에 명을 내리셔서 강서(江西)절강(浙江)의 포수 5천 명을 적당히 뽑은 뒤 한두 장수에게 소속시켜 연해의 요해처인 부산 등지에 몇 달 동안 나누어 주둔케 하면서 한편으로는 소방의 군민(軍民)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흉악한 적들의 음모를 소멸시키게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신은 길이 하늘의 위엄에 의지하여 마무리 수습을 해서 후일을 대비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이미 국토를 수복하고서도 또 마무리를 잘해주시도록 바라기까지 하니 지극히 참람하여 죄를 용서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조(天朝)에서 소방을 구휼하심이 이미 내국보다 더함이 있는데, 소방이 천조에 하소연하는 일을 어찌 감히 외국으로 자처하겠습니까. 신은 더욱 황공스럽습니다.

신은 인력과 가축을 징발하여 군량과 마초의 운반을 독려하는 한편, 병사와 말을 조달하여 왕사와 협동해서 경성을 탈환할 계획인데, 이와 함께 함경도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적에도 대비할 것입니다. 신은 수복이 끝나는 대로 경성에 돌아가서 관군(官軍)을 위로한 다음 곧이어 전후로 은혜받은 사실을 갖춰 별도로 사은을 행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러러 황제의 위엄에 의지하여 평양을 수복한 승첩의 사유를 속히 보고드려야 하겠기에 삼가 갖추 적어서 주문(奏聞)합니다."

하였다. 제독(提督)이 거느린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이 공을 다투었는데, 제독은 북군을 편들면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잘못되지 않게 주문(奏文)하도록 하였다. 상이 이호민(李好閔)에게 주문을 짓게 하니 이호민이 야간에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양편 군사의 공로에 대하여 골고루 빠짐없이 기술하였으므로 남·북군의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35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왕실(王室)

  • [註 002]
    만력(萬曆) :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 [註 003]
    21년 : 1593 선조 26년.
  • [註 004]
    함매(銜枚) : 소리를 내지 못하게 입에 막대를 물림.
  • [註 005]
    절령(岊嶺) : 황해도 서흥군에 있는 재. 자비령(慈悲嶺).
  • [註 006]
    배도(裵度)가 회서(淮西)를 평정했던 일이나 조빈(曹彬)이 강남(江南)을 함락시켰을 때의 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평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을 비유함. 배도는 당 헌종(唐憲宗) 때의 재상. 당시 회서지방의 채주 자사(蔡州刺史) 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켜 3년이 되도록 평정되지 않자, 조정에서 배도를 회서 초토사(淮西招討使)로 삼아 토벌케 하였는데, 절도사(節度使)인 이소(李愬)가 오원제를 사로잡아 난이 평정되었다. 《신당서(新唐書)》 배도전(裵度傳). 조빈은 오대(五代) 말기 사람으로 후주(後周)에 벼슬하다가 조송(趙宋)에 귀부(歸附)하였는데, 960년(건륭 1) 강남을 토벌하여 이듬해 11월 이욱(李煜)의 오(吳)를 항복받았다. 《송사(宋史)》 조빈전(曹彬傳).

○翌日 【初六日。】 進逼平壤。 提督促大軍行, 都元帥合諸陣兵從其後, 分軍圍住。 賊乘城拒守, 又據牧丹峯, 乘高放銃。 提督令眞定兵仰攻, 不克而退, 賊踰城追趕, 天兵回擊之, 賊敗入城。 是夜, 賊犯遊擊吳惟忠營, 惟忠按兵不動, 齊發火箭, 光明如晝。 賊退走, 追斬十餘級。 初七日禺中, 三營俱出兵攻普通門, 賊開門迎戰, 天兵斬三十餘級, 賊走入門。 初八日, 提督傳令三營, 一時進兵, 環(成)〔城〕 擺陣。 我兵逼南城, 兵逼西城, 提督跑馬, 往來督戰。 萬砲齊發, 聲震天地, 白日晦冥。 東風忽變西風, 炮焰延爇密德土窟, 賊從睥睨間, 用炮石拒之。 提督手斬怯退者一人, 巡示之, 大呼曰: "先登城上者, 賞銀五十兩。" 駱尙志奮戟先登, 兵皷噪而從之, 拔賊幟, 立大兵幟。 賊不能抵當, 退入土窟, 我軍繼登。 提督與張世爵等, 攻七星門, 用大砲撞碎門板, 整軍而入。 於是, 李如栢含毬門, 楊元普通門, 乘勢爭前, 斬獲一千二百八十餘名, 燒殺亦過半, 竝擄投 張大膳救出本國被虜男婦一千二百餘人, 收獲馬匹、器械無算。 行長入據練光亭土窟, 諸酋連據諸窟, 皆從穴放丸如雨, 天兵攻之, 多中傷。 提督止營, 使張大膳, 諭行長曰: "不忍盡殺人命, 開爾生路, 可速領諸酋, 來聽約束。" 行長答曰: "俺等當退, 請無攔截後路。" 提督慮其窮寇致死麾下, 親近亦有開說, 乃許行長, 傳令我軍, 撤一路伏兵。 夜半, 行長率餘衆, 乘氷過江進去, 中和黃州屯賊先已撤去。 前數日, 柳成龍密報黃海道防禦使李時言金敬老, 邀賊歸路。 時黃海道巡察使柳永慶海州, 以兵自衛, 且招敬老, 敬老憚與賊交鋒, 卽就永慶行長等連夜行走, 軍兵疲困, 不成部伍, 李時言孤軍不敢逼, 但斬飢病落後者六十級, 黃州判官鄭燁斬九十餘級。 提督住平壤八日, 使體察使柳成龍、戶曹判書李誠中, 先行督販芻糧, 搭造浮橋。 令張世爵領先鋒先發, 至靑石谷, 遇賊數百, 擊斬三十級。 開城賊亦還京城。 成龍請誅敬老, 上遣宣傳官將行刑, 提督聞而止之, 命白衣從軍。 賊大將行長淸正爲雄, 是時淸正在北。 秀嘉位尊年幼, 不能主事, 若除行長調信, 而進逼京城, 則秀嘉勢孤, 而提督旣失事機, 敬老又違節度, 成龍每以此咎永慶。 遞巡邊使李鎰, 更以李薲代之。 平壤之戰, 從提督密令, 撤伏開路, 勇將金應瑞朴名賢等, 皆扼腕恨之。 及賊遁去, 天將反顯責我軍不遮截, 上遣尹斗壽, 至平壤査問, 將行軍法而釋之, 知非其罪也。 天將言: "不可將, 請以代之。" 從其言, 以爲巡邊使, 選兵三千, 從提督行。 又命都元帥金命元、右議政兪泓從行, 驛遞奏捷, 與督府偕奏。奏文曰:

謹奏爲仰仗皇威, 克復平壤, 飛報捷音事。 該萬曆二十一年正月初九日, 陪臣諸道都體察使柳成龍馳啓: "據諸道都巡察使金命元呈、該平安道巡察使李元翼申, 本月初六日, 有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 防海禦軍務總兵官都督同知李如松, 統率大勢官軍, 直抵平壤城外, 部分諸將, 圍抱本城。 有倭賊二千餘名登城北牧丹峯, 建靑白旗, 發喊放砲。 又有倭賊一萬餘名擺立城上, 前植鹿角柵子, 擁楯揚劍, 勢甚猖獗。 又有倭賊四五千名建大將旗, 鳴皷吹螺, 巡視城中, 指揮諸賊。 本城裏外設險, 勢難遽攻, 總兵收軍回營。 本日夤夜, 有倭賊三千餘名銜枚潛出, 襲都督楊元、都督李如栢、都指揮張世爵等營, 被本官等統兵殺退。 初七日夜, 有賊約八百餘名復斫都督李如栢營, 又被本官殺退。 初八日黎明, 總兵焚香卜日得吉, 喫飯訖, 與三營將官, 分統各該將領官軍人等, 擺陣於七星含毬普通等門外, 總兵領新兵二百餘騎, 往來指揮, 將士踊躍, 咸思盡力。 辰時分諸軍, 鱗次漸進, 各樣火器, 一時齊發, 聲震天地, 大野晦冥。 火箭一枝, 着密德土窟, 俄而赤焰亘天, 延爇殆盡。 守陴倭賊亂用鉛丸, 湯水石塊, 以死拒守, 又用長槍、大刀, 向外齊刃, 森如蝟毛。 總兵手斬畏刦者一名, 號示陣前, 諸軍皷噪薄城。 負麻牌, 持矛戟, 相雜齊進, 或發射放砲, 或仰刺守陴之賊, 賊不能支吾, 稍自引退。 總兵挺身先登, 督諸將進入。 天兵一起, 與本國官軍, 入含毬門, 一起入普通門, 一起登密德東城, 騎步雲集, 四面砍殺, 衆賊崩潰。 天兵當陣, 斬獲首級一千二百八十五顆, 內査有賊酋平秀忠平鎭信宗逸等二十五人首級。 生擒倭賊二名, 幷通事張大膳, 奪獲馬二千九百八十五疋, 得獲器四百五十二件, 救出本國被擄男婦一千一十五名口。 天兵乘勝縱火, 悉燒房屋, 衆賊投竄, 被燒死者約一萬餘名, 臭聞一十餘里, 餘賊躱以入風月樓小城。 總兵督運柴草, 四面堆積, 仍用火箭飛射, 一時焚燒, 俱成灰燼。 又有餘賊跳城過江, 氷陷溺死者不計其數。 七星普通牧丹等處諸賊, 仍據土窟, 堅固難拔。 總兵收兵傳食曰: ‘賊必夜遁。’ 就遣副總兵、參將等官。 李寧祖承訓葛逢夏等, 領兵埋伏, 總兵同三副將, 由大路追趕, 本賊四散遁去, 被李寧等伏路邀截, 斬獲首級三百五十九顆, 生擒倭賊三名, 餘賊棄甲抛戈, 驚亂遁走, 岊嶺以西, 悉底蕩平。’ 臣竊念, 平壤一府, 實本國舊都, 城池險固, 而兇賊豨突, 據爲窟穴。 卽日大兵進討, 一皷蕩破, 梟獍餘孽, 逃命無所, 本國再造之機, 實在於此。 臣與李元翼督運各處芻糧, 進入本城, 聽候督府調用外, 緣係捷音事理, 爲此具啓等因。 臣據此參詳, 小邦軍兵脆弱, 日久愈削, 兼且平壤城險, 未易收復, 日夜憂煎, 不知死所, 欽蒙聖明, 天地父母。 曲念先故, 不以臣失職而加罪, 命調南北精兵, 以拯濟小邦塗炭。 慮軍犒之乏, 則先賜銀兩; 憂糧草之缺, 則陸續飛輓。 士卒暴露於野, 驢騾顚損於道, 以臣之故, 貽戚天朝, 至於如此, 臣感激怔營, 若無所措。 竊照, 王師有征, 天吏無敵。 乃於本年正月初八日壬戌, 進攻平壤, 不崇朝而城破, 除焚溺斬殺之外, 餘賊喪魄逃遁, 其軍威之盛、戰勝之速, 委前史所未有。 臣與大小陪臣, 初聞捷音, 不覺涕淚之交下。 玆蓋聖天子盛德誕敷, 神武遠暢, 而名公贊謨, 本兵運籌。 侍郞宋應昌專心機務, 指授方略, 謀猷克合, 用集殊功。 總兵李如松誓師慷慨, 義氣動人, 軍行所過, 秋毫無犯, 臨陣督戰, 身先列校。 至於鉛彈擊馬, 火毒熏身, 色不怖而愈厲。 克城之日, 祭箕子而先封其墓; 恤瘡痍而遍酹陣亡, 宣布德意, 慰問孤寡。 雖裵度之平淮西; 曹彬之下江南, 無以過此。 副、參、遊擊、都司以下, 各該將領等官, 闞如虓虎, 如神助勢。 至有巨石滾下, 而拒之直上者; 丸入胸膛, 而鏖殺未已者。 小邦將士袖手駭縮, 莫敢助力於其間, 徒觀其鐵騎所蹴, 飛塵驀野; 火箭所及, 赤焰彌天。 礮觸列柵, 則決若吹毛; 槍剌守陴, 則捷若飛鶻。 腥烟漫空, 流血渾江, 天地爲之擺裂; 山淵爲之反覆。 彼賊之鳥銃、湯石, 政猶螗臂拒轍, 無敢抵敵。 臣竊念, 平壤一城, 實伊精兵器械之處, 臣竭一道之力, 經年莫規, 而克復之後, 聞其所設守備, 則決非小邦兵力所可攻陷。 天威一振, 列屯望風, 已成破竹之勢, 黃海以東, 不戰自却, 舊都指日可復, 宗社次第汛掃。 臣思先靈地下之感; 念遺黎其蘇之望, 悲哀喜幸, 惝怳難雙, 雖欲報答生成, 實難爲圖。 抑臣之所大服者, 念惟小醜跳梁, 自大於鱗介之鄕, 昧天之威, 屢肆狂言, 臣常痛之。 今者鬼啓其衷, 自取天誅, 其海讋島慄, 惴惴然不敢喘息者, 殆終其遺育, 是豈徒雪小邦之羞? 實亦彰百王之烈矣。 臣又聞之, 有願曲遂, 天地之大德, 所懷必達, 臣子之至情。 臣念, 今兇賊被勦, 全出王師, 而於小邦, 則未始有一毫創也。 渠見天將旋師, 國內孤弱, 再逞反噬之計, 則其禍益甚, 而益難防矣。 臣恐復勤聖上東顧之憂, 而重微臣失禦之罪也。 伏乞聖慈, 憐海隅孑遺之民, 終天朝子惠之仁, 着令督府, 量抽砲手五千名, 仍付一二將官, 分屯沿海要害釜山等處若干月, 一以敎訓小邦軍民; 一以消戢梟獍兇謀, 則臣庶可永仗天威, 收拾餘燼, 以備其後矣。 臣旣復疆土, 又望善後, 極知僭猥, 罪固難貰, 而天朝俯䘏, 旣有加於內服, 下邦控訴, 敢自外於一家, 臣益增隕越焉。 臣一面派發人畜, 督運糧草; 一面調集兵馬, 協同王師, 以圖進取京城, 又備咸鏡向西之賊。 臣擬待收復訖, 卽還京城, 迎勞官軍, 仍將前後受恩緣由, 另行稱謝外, 緣係仰仗皇威, 克復平壤, 飛報捷音事理, 爲此謹具奏聞。

提督所領南北軍爭功, 而提督右北, 令我國奏文勿悞。 上令李好閔製文, 好閔夜間立草, 而兩邊鋪張無欠辭, 南北將皆懽。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35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왕실(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