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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12월 1일 정해 8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우참찬 성혼이 편의 시무를 올리다

우참찬 성혼(成渾)이 편의 시무(便宜時務)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큰 도적이 우리 나라를 침입하여 잇따라 삼경(三京)을 함락시켜 심장부를 차지하고 요해처를 장악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평양의 적이 더욱 해를 끼치는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이 적을 먼저 토벌한 뒤에야 평안도가 바야흐로 행재의 근본 지역이 되어 점차로 양경(兩京)의 모든 적을 진격하여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은 장수를 선발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양식을 모으는 세 가지 일을 급선무로 삼아야 합니다.

장수의 선발은 전투를 잘하는 무장을 불러모아 작질(爵秩)의 고하(高下)나 문지(門地)의 귀천을 막론하고 기용할 만한 인물이면 즉시 군사를 나누어 예속시키고 그로 하여금 전면(前面)에 두어 번갈아가며 진격시켜 전투하게 해야 합니다. 군사의 훈련은 사졸을 훈련시키되 씩씩하고 용감한 자를 가려 정예를 위주로 해야지 숫자만 많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주현(州縣)에서 누락된 장정을 끌어내어 재주를 시험한 뒤 모두 부오(部伍)에 예속시키고 먹을 것을 넉넉하게 주어 평소부터 배부르게 해야 합니다. 양식을 모으는 것은 상공(常貢)과 상세(常稅)를 나이(那移)054) 하여 미리 장만하고, 또 여러 도에 모속관(募粟官)을 많이 내보내어 상을 주는 규정을 명백히 제시해서 곡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기꺼이 모집에 응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일을 밤낮으로 도모하고 계획하여 방략(方略)을 극진히 한다면 회복하는 근본이 서게 될 것입니다.

1. 신이 의병과 관군을 살펴보건대 각자가 군대를 형성해야지 합쳐서 하나로 만들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당초 승여가 서쪽으로 떠나자 조정의 명령이 여러 도에 미치지 못하고, 적병이 사방에서 모여들자 수령이 모두 도망한 상태에서 난민(亂民)이 벌떼처럼 일어나 관고(官庫)를 때려부셨습니다. 그리하여 호령하며 군사를 징발하면 활을 당겨 관사(官使)를 쏘려고 했던 반면, 왜적이 사람을 시켜 부르면 머리를 숙여 명령을 들으며 군량과 응자(鷹子), 술과 꿀 등 진미(珍味)를 곳곳에서 바쳤는데 그것을 진상(進上)이라고 불렀습니다.

6월 이후에 이르러 남방에서 의병이 처음으로 일어나 군사를 이끌고 근왕(勤王)하였으므로, 도로에 말이 전해지고 그 성세(聲勢)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그런 뒤에야 이민(吏民)들이 바야흐로 국가를 향하는 마음이 있게 되었으며, 수령도 그 호령이 조금 행해져 군사를 징발하면 주민들도 점점 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조금이라도 백성의 뜻을 돌리어 우리 국가가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한 것은 남방 의병의 공로입니다. 이로부터 불러 모집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생겨 났는데, 의병을 거두어 모아 각자 군대를 만들고 주현(州縣)의 호령이나 부름을 받지 않은 경우를 의병이라고 불렀고, 수령이 군민(軍民)을 조발하여 원수(元帥)의 절제(節制)를 받는 경우를 관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의병은 대부분 향리(鄕里)의 친구들이 개인적으로 약속을 맺은 것이기 때문에 적을 만날 경우 반드시 싸우면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데 반해, 관군은 평소 과중한 세금을 무리하게 거둬 괴로움을 당한 나머지 윗사람들을 깊이 원망하였기 때문에 적을 보기만 하면 먼저 도망하여 교전하는 자가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의병 중에도 횡포를 부리고 노략질하며 마음대로 편히 지내기만 하고 힘써 싸우려 하지 않는 자도 있으며, 또 수령의 지배도 받지 않습니다. 수령이 매번 원수로부터 군사를 증강하라는 명령을 받고서 조달할 군사가 없으면 의병을 미워하게 마련인데, 우리 백성으로서 다른 사람의 수하로 들어갔다고 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침해함으로써 사람들이 두려워 편히 살 수 없게 합니다. 그러니 의병의 장수도 마음에 불평을 품게 되어 주현과 서로 불화만 깊어지게 되니 형세상 끝내 관군과 합쳐 하나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의병을 일으켜 불러 모으는 이는 대부분 유사(儒士)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고 자임하고 있어, 방백(方伯) 연수(連帥)가 제대로 근왕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심히 분노하고 미워하여 큰소리로 꾸짖으며 서로 한스럽게 여기고 노여워하니, 그 형세 또한 합쳐 하나로 만들어 절제를 받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조정에서 전라 감사 권율로 하여금 의병과 관군을 통합하게 하였다 하는데, 신은 의병이 의구심을 품은 나머지 해산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차라리 다른 장수 중에 성망(聲望)이 있고 도략(韜略)을 알며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는 사람을 의병 대장으로 삼는 것만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혹 의병의 여러 둔 가운데서 훌륭한 이를 가려 한 도를 담당하게 하거나 혹 두 사람 내지 세 사람을 두어 관군과 좌우에서 형세를 합쳐 적을 협공하게 한다면 의병과 관군이 각기 적당하게 활용될 수 있어 서로 시기하는 걱정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의병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여 서로 통속(統屬)되지 않고 남의 절제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 세력이 영세하여 끝내 적을 제어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소소하게 수급을 베는 일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떠도는 기병이나 흩어진 병졸은 적들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여러 번 작상(爵賞)을 내렸습니다만 적의 형세는 여전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데에는 아무 보탬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장수에게 모든 의병을 합해서 대진(大陣)으로 만들어 통솔하게 한 뒤에야 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장수를 선발하는 법은 비변사에 내려 각기 한 사람씩 추천하도록 하는 것이 적합할 듯합니다. 또 팔도의 방백에게 하서(下書)하여 수령과 여러 장수 중에 사졸(士卒)을 아끼고 기르며 힘써 싸워 공이 있는 자를 상세히 살펴 그의 공로와 능력을 열거해서 올리도록 한 뒤, 그 가운데에서 더욱 신중하게 가려 기용한다면 명실상부하게 되어 헐뜯거나 칭찬하는데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가 수십 년 이래로 장수를 뽑는 데에 마음을 기울여 높은 작위와 후한 녹봉을 아끼지 않아 금장(金章)055) 이 즐비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공로를 세워 보답하려는 생각은 없이 부귀나 실컷 누리면서 자기 몸만 아끼고 개인적인 일만을 도모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변고를 만나자 거의 대부분 전진에서 사졸들보다도 먼저 달아남으로써 종묘 사직을 폐허가 되게 하였으니, 어찌 통탄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이미 귀하게 된 사람은 풍성(風聲)과 기습(氣習)에 빠져버린 지 이미 오래되어 의지하기가 어려우니, 차라리 초야의 한미한 인사로서 강개하고 분발하며 용기를 내어 공격에 앞장서는 자를 기용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들을 조정에서 발탁하여 그릇에 맞춰 쓰고 장려하며 위임(委任)한다면 명장(名將)이 그 가운데에서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우리 국가가 2백 년 간의 태평 세월에 안이하게 지내오면서 이토록 형세가 쇠미해졌는데, 지금 전쟁하는 때를 당하여 이제부터라도 장수를 가려 뽑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오늘날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왜변이 일어난 초기에 병조가 무과 출신(武科出身)을 먼저 보내지 않고 동당시(東堂試)의 시수군(矢數軍)056) 을 전장에 보냈기 때문에 무사들이 모두 난리를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지금까지 잠복하고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각도의 제색군사(諸色軍士)의 경우는 색리(色吏)에게 뇌물을 바치고 집안에서 여유있게 지내는 자가 또한 많이 있는데, 오늘날 수색하여 모으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과거(科擧)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니 각도에 무과(武科)를 특별히 실시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방어가 가장 긴요한 곳의 경우는 2∼3장(塲)을 나눠 실시해서 평안도(平安道)의 사례처럼 대거 시취(試取)한다면 잠복한 자들이 모두 나와 응시할 터이니 합격하면 정병(精兵)을 삼고 그 나머지 시수(矢數)는 각기 그 이름 아래에 거주하는 향리를 기재하여 그전처럼 누락되지 못하게 하여 이들도 모두 조발하는 군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출신(出身)한 사람의 경우는 각도로 하여금 쇄출(刷出)하게 하고 여전히 숨어 있는 자는 군법(軍法)으로 처단해야 합니다. 또 제색군사를 만약 다시 색리에게 위임시켜 단속하게 한다면 뇌물을 소중하게 여기고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니 여전히 은폐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마을에서 사족(士族)이나 토호(土豪)로 지식이 있는 자를 한 마을에 각각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을 차출하여 감관(監官)으로 삼고 사실대로 초발(抄發)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밀고하는 길을 열어 누락된 장정을 알아 고하는 자에게 논상(論賞)하는 동시에 군법으로 그 감관을 논한다면 누락된 장정이 모두 나오게 될 것입니다.

대저 군사는 정예를 위주로 해야지 숫자만 많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수령이 군사를 조발하면서 노약자를 구분하지 않고 전진으로 몰아내어 항오(行伍)에 있어서는 양식이 먼저 떨어지고 전진에 나가서는 적의 기세에 먼저 도망하여 날랜 군사들도 따라서 무너지게 하니, 작전에 가장 해로운 요소가 됩니다. 진실로 사졸을 선발하고 기계(器械)을 준비하며 먹이는 것을 풍부하게 하여 날마다 훈련을 가하여 활용한다면, 가는 곳마다 공이 있어 구적(寇賊)을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팔도가 모두 난리 통에 농사를 짓지 못해 군량(軍粮)이 너무 부족하니 정말 곡식 모으는 것을 서둘러 군흥(軍興)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여러 도에 모속관(募粟官)이 있기는 하나 적임자가 많지 않아 두루 한 도의 곡식을 모으기에는 부족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비변사에 하교하여 여러 도에 있는 모속관을 자세히 살펴 적당히 더 정하도록 하고 공명첩(空名帖)·고신첩(告身帖)·면역첩(免役帖)·면천첩(免賤帖)을 많이 지급하여 모집하게 하소서. 그리고 사람이 원방에서 상소하러 행재에 오거든 그로 하여금 자진하여 모속관에 응모하게 하여 직명(職名)을 내려주어 보내면 거의 사람들이 각각 마음을 다하게 되어 군흥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달부터 내년 2월까지는 모속할 수 있습니다만 이 시기를 지나면 착수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평안도 바닷가 주현(州縣)의 해택(海澤)과 제언(堤堰)에는 귀척과 세력가의 토지가 많아 세금도 안 내고 지내 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대, 이제는 당연히 세금을 거두어 군자(軍資)에 보충해야 할 것입니다.

1. 우리 나라는 군법이 서지 않아 패전한 장수에게 털끝만큼의 책벌(責罰)도 없이 예전대로 군사를 거느리며 직책을 수행케 하고 있습니다. 진격하여 싸우면 반드시 죽을 걱정이 있고 퇴각하여 피하면 그렇게 안전할 수가 없는데, 그 누가 힘껏 싸우면서 위태로운 지경에 들어가려 하겠습니까. 이것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구적(寇賊)이 무인지경처럼 치닫게 된 이유입니다. 이제부터 여러 장수들 중에서 드러나게 싸우지 않고 먼저 도망한 정상이 있는 자는 즉시 군법을 시행하여 군율(軍律)을 밝혀야 합니다.

1. 신라(新羅)는 풍속이 가장 아름다워 충의(忠義)에 죽은 인사가 전후(前後)로 많은데 그 임금 또한 높은 관작과 중한 상을 아끼지 않고 포장하여 드러내며 높이고 영화롭게 하였기 때문에 그런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어 그 나라가 그 덕으로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국가에서도 충절을 포장하는 전례를 서둘러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극량(劉克良)·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변응정(邊應井)처럼 힘껏 싸우다 진상(陣上)에서 전사한 사람이나 송상현(宋象賢)·김연광(金鍊光)처럼 성을 지키다 굴하지 않고 전사한 사람들은 모두 충의가 뛰어난 자들입니다. 기타 각처에서 절개를 지키다 죽은 자도 반드시 많이 있을 것이니 진실로 찾아내어 일일이 포장 추증하고 그들의 처자를 보살펴서 저 충성스런 영혼을 위로하고 공렬(功烈)을 분명하게 보답하여 한 시대 충의의 기상을 격려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평안도는 10년 동안 흉년이 든 나머지 백성들이 떠돌아 다니며 죽고 피곤하여 그 힘이 다 고갈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안으로는 만승(萬乘)057) 을 받들어야 하고 밖으로는 군려(軍旅)의 양식을 공급해야 하니 백성들이 감당치 못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주(定州)안주(安州)에서는 겨울철에 성참(城塹)을 파도록 명령하니 주민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습니다. 정주는 전에 세 어전(漁箭)을 설치하여 주민으로 하여금 윤번제로 고기를 잡아 날마다 주(州)로 보내도록 하였는데, 주민들이 유망(流亡)한 것은 실로 여기에 말마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가산(嘉山)은 조그마한 고을로서 사명(使命)을 공봉(供奉)하는 것이 정주와 다름이 없는데도 능히 유지해가고 있습니다. 어찌 꼭 어전을 설치해야만 사객(使客)을 공급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도에 피난해 들어온 사대부들이 처자를 태우느라 주현의 쇄마(刷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혹 가마까지도 주민들을 징발해서 메게 하는 자가 있습니다. 진실로 전교를 내려 이 세 가지 폐단을 금지시켜 이 도의 주민들을 우휼(優恤)하는 성상의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1. 오늘날의 화란은 적국에서 발생시킨 외환(外患)인데, 어떤 사람은 운수[氣數]에다 미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은 전적으로 하늘에만 돌리고 인사(人事)를 반성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대체로 사람의 혈기(血氣)가 허약하지 않으면 외부의 사기(邪氣)가 침입할 수 없으며, 큰 나무의 속을 좀벌레가 파먹지 않으면 바람이 넘어뜨릴 수 없는 법입니다. 국가의 원기(元氣)가 쇠약하지 않으면 외침이 있더라도 어찌 성문을 열고 사졸이 싸우지 않는 근심이 있겠습니까.

사리가 그러하다면 오늘날 자신을 반성하며 닦는 도리를 하루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옛날의 제왕(帝王)은 이와 같은 변고를 만났을 때 통렬하게 자신을 책망하며 자기를 허물하는 조서를 내리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존호(尊號)를 없애기도 하고 나라를 그르친 신하를 처벌하기도 하며 지난번의 실수를 힘써 반성하여 행사(行事)에 나타내어 백성으로 하여금 우리 임금이 개과 천선하는 실상을 환하게 알도록 하여 성실한 감화가 사방으로 통하게 해서 보고 듣는 것이 날마다 새로워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장수와 사나운 병졸이라도 마음 속으로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지성(至誠)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어 말하지 않아도 깨우침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은 근심으로 멀리 생각하시며 먼 훗날을 염려하시면서 다시 반성하시고 분발하시어 크게 성취할 뜻을 가지시고 용맹스럽게 전진하소서. 지난 일을 생각하여 병을 살펴 약을 쓰시고, 자신을 허물하는 조서를 내리시되 빈 말로만 해명할 것이 아니라 오직 실질적인 일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거친 의복과 박한 음식으로 와신상담하며 자신을 통렬하게 책망하면서 칠묘(七廟)에 사죄하소서. 그리고 여러 귀척과 세력가에서 백성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고 이익을 망라하며 뇌물을 받아 백성들에게 깊은 원한을 맺는 일은 일체 금단하소서. 또 근신(近臣)이 교통(交通)하는 조짐을 끊고 궁위(宮闈)가 정사에 참여하는 단서를 막으시어 후궁을 총애하는 문을 열지 말고 근신을 위하는 조목을 세우지 말 것이며 한결같이 정직한 인사를 심복(心腹)과 이목(耳目)으로 삼아 맡기소서.

그러면 거의 인심이 열복하고 하늘의 뜻도 거듭 새로워져 본원(本原)이 깊이 배양되고 기강이 진작되어 장사들이 목숨을 바쳐 구적(仇敵)이 섬멸될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를 회복시키는 큰 계책이며 전쟁을 수행하는 깊은 모책입니다. 삼가 성명(聖明)께서는 대체적인 것을 먼저 하시되 평이하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힘을 쓰소서. 그러면 국가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3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王室)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법(兵法)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군사-특수군(特殊軍) / 인사(人事) / 재정(財政) / 외교-왜(倭) / 사법(司法)

  • [註 054]
    나이(那移) : 전용(轉用).
  • [註 055]
    금장(金章) : 고관을 가리킴.
  • [註 056]
    시수군(矢數軍) : 관시(官試)에서 화살 50개 중 25개 이상을 맞춘 사람.
  • [註 057]
    만승(萬乘) : 군주.

○右參贊成渾上便宜時務。

一, 大盜入國, 連陷三京, 橫貫腹心, 扼塞咽喉, 而平壤之賊, 尤爲切害之患。 要須先討此賊, 然後平安一道, 方爲行在根本之地, 庶可漸次進討兩京諸賊矣。 今日當以選將、鍊兵、聚糧三事爲先務。 選將則招集武將之善戰者, 勿論爵秩高下、門地貴賤, 知其可用, 則卽分兵隷之, 俾在前面, 更迭進戰。 鍊兵則訓鍊士卒, 揀擇壯勇, 務精而不務多, 又括出州縣漏丁, 試才而盡隷部伍, 豐其餽餉, 使其宿飽。 聚糧則常貢、常稅那移豫辦, 又多出募粟官于諸道, 明示賞格, 使有粟者樂於應募。 以此三事, 晝夜謀畫, 備盡方略, 則恢復之本立矣。

一, 臣竊見, 義兵、官軍各自爲軍, 不可合而爲一者。 當初乘輿西行, 朝廷命令不及於諸道, 賊兵四合, 守令盡逃, 亂民蜂起, 打破官庫。 若有號令發軍, 則引弓持滿, 欲射官使, 倭賊使人招之, 則俯首聽命, 以軍糧、鷹子、酒蜜、珍味, 處處投獻, 名之曰進上。 至六月以後, 南方義兵初起, 引軍勤王, 道路傳說, 大張其聲勢, 然後吏民方有向國之心, 守令粗行其號令, 發軍而民亦稍稍應之。 當此之時, 少回民志, 知有我國者, 南方義兵之功也。 自是之後, 召募之人處處有之, 收集義旅, 各自爲軍, 不受州縣號召者, 名之曰義兵; 守令調發軍民, 受元帥節制者, 名之曰官軍。 義兵則多是鄕里親舊, 私相結約, 故遇賊必戰, 而不易於潰散, 官軍則平日困於暴斂重征, 深怨其上, 故望敵先走, 鮮有交鋒者矣。 然義兵或有暴橫剽掠, 任便自逸, 不肯力戰者, 又不管於守令。 守令每被元帥添兵之令, 無軍可調, 則必憎視義兵以爲: "吾民入於他手。" 多般侵擾, 使人惴恐, 不得自安。 義兵之將, 心懷不平, 與州縣積不相能, 其勢終不能與官軍, 合而爲一矣。 又倡義召募, 多是儒士, 自以爲忘身殉國, 視方伯、連(師)〔帥〕 不能勤王者, 深加憤嫉, 大言詬罵, 互相恨怒, 其勢又不得合爲一體, 受其節制矣。 臣伏聞, 朝廷使全羅監司權慄, 統合義兵、官軍, 臣恐義兵有所疑懼, 而或至於潰散也。 不如命他將有聲望、識韜略, 爲衆情所向者, 爲義兵大將, 或就義兵中諸屯將, 擇賢爲之一道, 或設兩人, 或三人, 與官軍左右合勢, 掎角此賊, 則義兵、官軍各得其用, 而無相猜之患矣。 且義兵或多或少, 不相統屬, 不受人節制, 故其勢零碎, 終不足以制敵。 小小斬級, 雖或有之, 游騎散卒, 賊亦不惜。 朝廷屢加爵賞, 而賊勢自若, 無益勝敗之數, 必須命將, 總領合成大陣, 然後可以討賊矣。

一, 選將之法, 似宜下備邊司, 使各薦一人。 又下書八道方伯, 審察守令、諸將, 愛養士卒, 力戰有功者, 列其功能而上之, 就其中, 加愼擇而用之, 則庶幾名實相符, 不眩於毁譽矣。 國家自數十年來, 注意擇將, 不愛高爵厚祿, 金章相望, 而不思報效, 唯以酣飫富貴, 愛身自私爲事。 卒遇變故, 率皆臨陣先走, 爲士卒倡, 以至於宗社丘墟, 可勝痛哉? 大抵已貴之人, 風聲、氣習汨沒已久, 難以倚靠, 不如草萊寒士, 慷慨奮厲, 皷勇先登者之可用。 朝廷拔擢而器使之, 奬勵而委任之, 則名將必出於其中矣。 我國家昇平二百年, 恬嬉之勢, 衰微至此, 當今戰爭, 方始選將擇帥, 最是急務, 不可不盡心於今日也。

一, 變之初, 兵曹不先送武科出身, 東堂矢數赴戰, 故武士皆避亂, 而散之四方, 至今潛伏不出。 各道諸色軍士, 則納賕色吏, 在家優閑者, 亦多有之, 今日誠難於搜括。 然我國之人, 最重科擧, 似宜於各道特設武科。 防禦最緊處, 則分設二三場, 大擧廣取, 如平安道例, 則潛伏者盡出而赴之, 入格則爲精兵, 其餘矢數, 則各於名下, 具鄕里居住, 故不得如前漏落, 亦皆爲調發之兵矣。 至如已出身人, 則令各道刷出, 如前隱伏者, 斷以軍法。 諸色軍士, 若復委色吏括出, 則重賂而輕生, 依前隱沒而已。 就其里中士族、土豪有知識者, 一里各差一人, 或二人爲監官, 從實抄發, 又令開告密之門, 得漏丁而來告者論賞, 而以軍法論其監官, 則漏丁盡出矣。 大扺, 兵務精而不務多。 守令發軍, 不分老弱, 驅出赴戰, 在行伍則糧食先匱; 臨戰陣則望風先走, 精兵亦隨而潰, 最爲用兵之害。 誠宜選士卒, 備器械、豊饋餉, 日加訓鍊而用之, 則所向有功, 寇賊可平矣。

一, 八道皆遭亂失農, 軍糧最(匵)〔匱〕 , 誠宜急急募粟, 以供軍興。 諸道雖有募粟官, 其人不多, 不足以遍募一道之粟。 伏願下備邊司, 商察募粟官之在諸道者, 量宜加定, 多給空名、告身、免役、免賤帖而募之。 或有遠方上疏人, 來詣行在者, 令其自募募粟, 授職名而遣之, 庶幾人各盡心, 軍興無乏矣。 自今月至明年二月, 可以募粟, 過此則無着手處矣。 且平安道濱海州縣, 海澤、堤堰多是貴勢之田, 無稅而食者已久。 今當收稅, 以補軍資, 可矣。

一, 我國軍法不立, 敗軍之將, 無毫髮責罰, 而領職如故。 進戰則有必死之憂; 退避則有萬全之安, 其誰肯力戰而蹈危哉? 此所以每戰輒敗, 而寇賊長驅, 如入無人之境者也。 自今諸將顯有不戰先走之狀者, 卽行軍法, 以明軍律可矣。

一, 新羅風俗最美, 士死於忠義者, 前後相望, 其君又不愛高爵、重賞, 褒表而尊榮之, 所以成此美俗, 其國賴之, 歷年過千矣。 今日我國家褒忠之典, 不可不汲汲擧行。 如劉克良高敬命趙憲邊應井之力戰死於陣上, 宋象賢金鍊光之守城不屈而死者, 皆忠義之傑然者也。 其餘所在伏節而死者, 必多有之, 誠宜采訪, 一一褒贈, 恤其妻子, 慰彼忠魂, 昭報功烈, 以激一代忠義之氣可矣。

一, 平安道以十年凶饉之餘, 流亡困竭之民, 內奉萬乘, 外供軍旅, 民力之不給可知矣。 定州安州冬月有浚城塹之令, 民皆驚散。 定州舊設三漁箭, 使民輪日捕魚, 日送于州, 民之流亡, 實由於此。 嘉山小縣, 供奉使命, 與定州無異, 而亦能支吾, 豈必設漁箭, 而後給使客哉? 又士大夫避亂入此道者, 妻子駄載, 多用州縣刷馬, 或有乘轎, 發民以舁者。 誠宜下敎, 禁止此三弊, 以示聖主優恤此道之民之意。

一, 今日之禍, 生於敵國外患, 或者推之於氣數, 臣則以爲 "未可專歸之天, 而不反之人事也。" 夫人血氣不虛, 則外邪不得而入, 大木腹心不蠧, 則震風不得而擊。 國家之元氣不衰, 則雖有外侮, 豈有城門不閉, 士卒不戰之患哉? 夫如是則今日反躬修省, 不可一日而或弛也。 在昔帝王遇如此之變, 莫不痛自責躬, 下詔罪己。 或去尊號, 或罪誤國之臣, 力反前失, 見諸行事, 使民心曉然知吾君改過遷善之實, 孚感旁達, 觀聽日新。 雖驕將、悍卒, 莫不隱痛而揮泣, 誠以至誠感物, 有不言而喩者矣。 伏願殿下, 憂深思遠, 長慮却顧, 赫然奮興, 大有爲之志, 勇猛前進。 深惟旣往, 察病加藥, 下罪己之詔, 不但見誚空言, 唯當施之實事。 惡衣菲食, 臥薪嘗膽, 痛自克責, 以謝七廟。 凡諸貴、勢豪奪民産, 罔利受賂, 結民深怨之事, 一切禁斷。 又以絶近習交通之漸, 杜宮闈與政之端, 勿開嬖倖之門, 勿立私人之目, 一以正直之士, 爲腹心耳目之寄, 則庶幾人心悅服, 天意重新, 本原深培, 而綱紀張; 將士效命, 而仇敵滅。 此爲恢復之大計, 戰伐之深謀。 伏惟聖明, 先其大者, 而用力於平易切近之地, 國家幸甚。

宣祖大王修正實錄卷之二十六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3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王室)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법(兵法)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군사-특수군(特殊軍) / 인사(人事) / 재정(財政) / 외교-왜(倭)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