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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9월 1일 정사 20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을 수복하다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鄭文孚)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였다.

당시 북계(北界)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토인(土人)에게 잡혀 왜장에게 넘겨졌는데, 도망하여 나온 자는 10명에 1∼2명도 안 되었다. 평사 정문부는 막관(幕官)으로서 난전 무사했을 때 형장(刑杖)을 쓰지 않았고 또 항상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변란이 일어난 뒤에 제자 몇 사람이 비호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난민들이 오히려 평사라고 하여 숨은 것을 끝까지 찾으려 하므로 춘림(春林)과 폐야(蔽野)에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교생 지달원(池達源)은 집이 경성의 해변가 가장 외진 곳에 있었는데 정문부가 오래도록 그 집에 숨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서북보(西北堡) 만호 고경민(高敬民)이 행조에서 와서 소식을 전하면서 ‘중국 군사가 곧 오게 되는데, 조정에서는 이미 북계(北界)를 역적의 소굴로 판단하고 있으니, 왜적을 평정한 뒤에는 맨 먼저 토벌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민(士民)들이 서로 전하며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였다. 지달원이 동지 최배천(崔配天) 등과 함께 몰래 교생들과 식견이 있는 무사를 서로 불러 모으니 그들이 정문부가 있는 곳을 알고 모두 그에게 나아가 마침내 정문부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토병과 장사 수백 명을 모았는데, 경성 사람인 전 만호 강문우(姜文佑)가 선두에서 거느리고 즉시 부성(府城)에 이르렀다.

이때 국세필(鞠世弼)이 예백(禮伯)이라고 일컬으며 병사(兵使)의 인(印)을 기지고 일을 보면서 태연히 부(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사가 이르른 소식을 듣고는 성문을 닫고 성에 올라 항거하였다. 이에 강문우 등이 화복(禍福)을 들어 위협하니 국세필이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성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병사의 인을 반납하였다. 정문부가 명령을 내리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이 예전에 범한 죄는 문책하지 말라.’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남북의 주보(州堡)에 격문을 전하니 종성(鍾城) 무사 김사주(金嗣朱)와 경성인 오박(吳璞) 등이 정병을 거느리고 모집에 응하였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경원 부사(鏡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군관 오대남(吳大男) 역시 당초에 포로됨을 모면하고 산외(山外)에 숨어 있다가 소문을 듣고 와서 모였다. 정문부정현룡에게 대장되는 것을 사양하였으나 정현룡이 두려워하며 감히 맡지 못하고, 유생들도 말하기를 ‘본래 의병으로 이름을 삼은 이상 평사의 벼슬이 낮다고는 해도 병사의 아관(亞官)으로 많은 사람이 마음 속으로 따르고 있으니, 의병 대장이라고 칭하여 통솔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정문부가 애써 따랐다.

그리하여 군사가 도합 3천 명인데 그중에서 날래고 용맹스런 돌기(突騎)를 뽑아 선봉으로 삼아 유경천이 거느렸다. 길주(吉州)의 왜적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 백여 명을 보내어 성 서쪽에 와서 탐지하게 하였는데, 강문우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의 머리를 베니 남은 적들이 도망갔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29면
  •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咸鏡北道評事鄭文孚起兵, 復鏡城。 時, 北界守將皆被土人執與將, 逃出者十無一二。 評事鄭文孚以幕官, 無事不用刑杖, 又常授書校生, 故變作之後, 弟子數人庇護得脫。 亂民尙以評事窮搜, 竄伏春林、蔽野, 屢濱危死。 校生池達源家在鏡城海曲最僻, 文孚久匿其家。 至是, 西北堡萬戶高敬民自行朝來, 傳消息言: " 天兵將至, 朝廷已判北界爲逆窟, 平後當首見討伐。" 因此, 士民相傳內懼。 池達源與同志崔配天等, 潛相呼召校生及武士有識者, 聞文孚所在, 皆就之, 遂推文孚爲義兵將, 團集土兵、壯士數百人。 鏡城人前萬戶姜文佑領率居前, 卽抵府城。 鞫世弼方稱禮伯, 莅兵使印, 治府自若, 猝聞兵至, 閉門乘城拒之。 文佑等脅以禍福, 世弼知不敵, 開門迎入納印。 文孚下令曰: "大小兵民, 勿問舊犯。" 仍令世弼領兵如故。 遂傳檄南北州堡, 鏡城武士金嗣朱鏡城吳璞等, 領精兵應募。 鍾城府使鄭見龍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彦高嶺僉使柳擎天、軍官吳大男, 亦免當初俘執, 竄匿山外, 聞之來會。 文孚見龍爲大將, 見龍懼不敢, 儒生等亦言: "本以義兵爲名, 評事雖官卑, 乃兵使亞官, 衆心所屬, 宜稱義兵大將, 而統領之。" 文孚勉從。 合兵三千人, 又抄精猛突騎爲先鋒, 擎天領之。 吉州 倭賊聞之, 遣兵百餘人, 哨探至城西, 姜文祐等開門出擊, 斬數十人, 餘賊遁。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29면
  •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