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조헌이 청주성을 회복하다
의병장 조헌(趙憲)이 청주성(淸州城)을 회복하였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공주(公州)와 청주(淸州) 사이에 가서 장정을 불러 모으니 응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었다. 그러자 순찰사와 수령이 관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갖가지 방법으로 저지하고 방해하였다. 이에 조헌이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을 찾아가 거사에 협력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 말하자 순찰사가 그대로 따랐다. 청양 현감(靑陽縣監) 임순(任純)이 백여 명의 군사로 조헌을 돕자 국형이 그가 절도(節度)를 어겼다고 하여 잡아 옥에 가두고 죄를 다스리니, 조헌이 또 편지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고 바로 우도(右道)로 가서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 공주 목사 허욱(許頊)이 의승(義僧) 영규(靈圭)를 얻어 그로 하여금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조헌을 돕게 하니, 조헌이 군사를 합쳐 곧장 청주 서문에 육박하였다. 적이 나와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로 들어가니, 조헌이 군사를 지휘하여 성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서북쪽에서부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 천지가 캄캄해지고 사졸들이 추워서 떨자 조헌이 탄식하기를 ‘옛사람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 하고 마침내 맞은편 산봉으로 진(陣)을 퇴각시켜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 조헌이 성에 들어가니 창고의 곡식이 그대로 있었다. 방어사 이옥(李沃)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것을 남겨두어 적이 다시 점거하게 할 수 없다.’ 하고 모두 태워버렸다. 조헌은 군사를 먹일 양식이 없었으므로 여러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각기 흩어져 취식(就食)한 뒤 의장(衣裝)을 갖춰 다시 모여 북상하도록 하고는, 인하여 상소하기를,
"국가가 화패(禍敗)를 당한 것은 계미년040) 이후로 이 도에 신임을 잃었기 때문으로 용사들은 원한을 품고 남방의 부유한 백성들은 생업을 잃게 되었습니다. 정언신(鄭彦信)은 대궐에서 내려준 물품을 사사로이 허비하면서 간민(姦民)에게 은혜를 베풀어 환심을 샀으며 문인(文人)으로 임금의 이목(耳目)이 된 자는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비호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김수(金睟)·이광(李洸)이 자급을 뛰어넘어 승진하는가 하면, 무리(武吏)로서 일을 만들어 공을 바란 자들이 재물을 모아 적의 머리를 사들여 중죄를 면하고 있습니다.
김수는 영남에서 잔학한 행동을 하다가 적이 이르자 겁을 먹고 물러났으며, 이광은 호남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公州)에 이르렀다가 먼저 퇴각하였는데, 이어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진위(振威)에 도착하여서는 어물거리며 나가지 않아 삼도(三道)의 군사를 흩어지게 하여 다시 수습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모두가 간당(姦黨)들이 흔히 하는 짓이지만 국란(國亂)을 아랑곳하지 않고 군대를 패배시킨 큰 죄를 짓고도 아직 목숨을 보존하고 있는데, 근왕하던 신각(申恪)은 홀로 주륙을 당하였습니다.
국가가 빛나는 업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상과 벌을 분명히 하는 데 있는 것인데 지금은 상과 벌이 이토록 어긋나고 있습니다. 국가가 망하려 하는데도 의리를 다하는 자가 없게 된 것은 진실로 소인을 신용한 화(禍)가 이토록 극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이제 옛날의 기업을 회복시키려고 하면서 상벌을 분명히 하는 방법을 버리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당 현종(唐玄宗)이 거의 천하를 잃을 뻔하였으나 진현례(陳玄禮)의 계책을 잘 활용하여 은정을 끊고 법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민심이 모두 당나라를 생각하게 되어 이광필(李光弼)과 곽자의(郭子儀)가 공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송 고종(宋高宗)은 이강(李綱)과 장준(張浚)의 말을 듣지 않고 언제나 왕백언(汪伯彦)·황잠선(黃潛善)과 진회(秦檜)의 무리를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택(宗澤)과 악비(岳飛)가 장차 강북(江北)을 평정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갖가지 방법으로 방해하였으며, 심지어는 조서(詔書)를 위조하여 살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효종(孝宗) 같은 현명한 임금도 통일하는 공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유성룡(柳成龍)이 화친을 주장하여 도적을 불러들인 것은 진회보다도 심하고, 이산해(李山海)가 현인을 죽이고 나라를 그르친 죄는 이임보(李林甫)와 다름이 없으며, 김공량(金公諒)이 원한을 쌓고 환심을 산 것은 양국충(楊國忠)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민심을 위로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겠습니까. 바라건대 이 세 사람의 머리를 베어 의순문(義順門)밖에 매어달고, 이어 김수와 이광의 머리도 베어 한강의 남쪽 언덕에 매어다소서. 그렇게 하면 화이(華夷)의 사람들의 이목을 용동(聳動)시켜 영명한 군주가 진작함이 있다고 하여 지사(志士)와 유인(幽人)이 분발하여 기운을 내어 이 적들을 몰아 없앨 것입니다.
또 신에게 독전(督戰)하는 이름을 빌려 주시어 태만한 방어사 비장(裨將)의 목을 베게 하시고, 순찰사로 하여금 한 도의 힘을 합하여 곤궁한 도적들이 날뛰는 형세를 꺾어버리게 한다면 신은 군중에서 스스로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조헌이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북쪽으로 향하여 온양(溫陽)에 이르자, 윤국형(尹國馨)이 막하(幕下)의 장사 장덕익(張德益)을 시켜 조헌을 설득하기를 ‘서원(西原)의 전투에서 이미 공의 충용함을 알았으니, 이제는 공과 사생(死生)을 함께할 것을 맹세한다. 그런데 금산(錦山)의 적이 고 초토(高招討)041) 가 전투에서 패한 뒤로 더욱 창궐하여 앞으로 호서(湖西)·호남(湖南)을 침범할 형세가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국가에서는 다시 중흥할 희망이 없어질 것이며, 공을 따르는 사졸들도 자신의 집을 생각하게 될 것이니 어떻게 안심하고 북쪽으로 갈 수 있겠는가. 차라리 작전을 변경하여 금산의 적을 토벌한 뒤에 힘을 합해 근왕(勤王)하는 것이 더 좋겠다.’ 하였다. 이에 조헌의 장사들도 조헌을 설득하기를 ‘순찰사와 조화를 이루어 먼저 금산의 적을 토벌하는 계교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고 했으므로, 조헌이 공주(公州)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순찰사의 의도는 단지 그들이 북쪽으로 가는 것을 막는 데 있었을 뿐이었고, 또 그의 군대를 저지시킴으로써 사졸심이 점차 분산될 것을 계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헌의 휘하에는 단지 7백 의사(義士)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초부터 생사를 같이하기를 맹세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떠나지 않고 마침내 영규(靈圭)와 함께 금산(錦山)으로 달려갔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24면
- 【분류】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義兵將趙憲復淸州城。 憲初與數十儒生, 結志倡義, 往公州、淸州間, 召募精壯, 應者日集。 巡察使、守令以爲, 不利於官軍, 多方沮撓, 憲往見巡察使尹國馨, 力言協擧之義, 巡察從之。 靑陽縣監任純以兵百餘人助憲, 國馨以爲, 違其節度, 囚繫治罪。 憲又移書責之, 乃往右道, 募得千六百人。 公州牧使許頊募得義僧靈圭, 使率僧軍助憲, 憲合軍, 直薄淸州西門, 賊出戰, 敗却還入。 憲將麾衆登城, 忽有驟雨從西北來, 天地晦冥, 士卒寒慄。 憲歎曰: "古人云: ‘成敗在天。’ 信然耶?" 遂退陣于對峯, 以臨城中。 是夜, 賊燎火樹旗爲疑兵, 空營而遁, 憲入城, 倉穀如故。 防禦使李沃來見曰: "不可留此, 爲賊再據也。" 悉燒之。 憲軍無所資, 乃令諸軍各散就食, 具衣裝復會北上, 仍上疏言:
國家禍敗, 由於癸未以後, 失信於此道, 勇士飮恨, 南方富民失業。 鄭彦信私費內降之物, 以市姦民之恩, 而文人之爲上耳目者, 周遮掩護, 則金睟、李洸得以超陞, 武吏之生事要功者, 聚財買馘, 則得免重罪。 金睟殘虐於嶺南, 賊至而退縮, 李洸領湖南之衆, 至公州而前却, 繼而勤王到振威而逗遛, 以致三道潰散, 更難收拾。 此皆姦黨之所寶, 而蔑視國亂, 全驅潰師。 若此巨罪, 迄保首領, 而勤王申恪, 獨被誅戮。 國家所以維持赫業者, 以其信賞必罰, 而今者賞罰, 乖舛如此。 國將危亡, 蔑有效義者, 信用小人之禍, 一至此極。 今欲恢復故業, 捨是道, 將何以哉?
又言:
唐 玄宗幾失天下, 而能用陳玄禮之謀, 割恩正法, 而民心洽然思唐, 李、郭成功。 宋 高宗不用李綱、張浚之言, 常使汪、黃、秦檜之徒, 不離左右。 宗澤、岳飛將有迭平江北之望, 而多方沮抑, 至於矯詔殺之。 故賢如孝宗, 而亦未成混一之功。 今者, 成龍之主和招寇, 甚於秦檜; 山海之戕賢誤國, 無異林甫; 公諒之積怨市恩, 無異國忠, 而迄保首領, 將何以慰民心, 而振士氣乎? 臣請斬此三人之頭, 懸之義順門外, 繼斫睟、洸之首, 懸之漢江南岸, 則華夷之人, 必有聳動觀聽以爲, 明主有作, 志士、幽人振奮出氣, 驅除此賊矣。 又請假臣以督戰之名, 斬一防禦之裨將懈緩者, 又使巡察使合一道之力, 以挫窮寇陸梁之勢, 則臣請自力於行間也。
憲復集兵北向, 行至溫陽。 尹國馨使幕下士張德益說憲曰: "西原之戰, 已知公之忠勇, 今則矢與公死生以之。 錦山之賊自高招討戰敗之後, 益復猖獗, 將有侵軼兩湖之勢。 若然則國家更無中興之望, 公從行士卒亦必內顧, 豈能安心北行乎? 不如移討錦賊之後, 幷力勤王也。" 憲將士亦說憲: "與巡察和調, 先討錦賊, 計未爲失。" 憲乃還公州。 巡察特泥其北行而已, 又沮其軍, 計士卒漸散。 憲麾下只有七百義士, 自初誓同生死, 故終始不去, 遂與靈圭, 偕赴錦山。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24면
- 【분류】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