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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34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전 장령 정인홍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

전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인홍은 평소 시골의 선비와 주민들로부터 외경의 대상이었다. 좌랑 김면(金沔), 전 현감 박성(朴惺), 유생 곽준(郭䞭)·곽율(郭𧺝) 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했는데,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얻어 중군(中軍)을 삼았다. 인갑은 무용(武勇)이 절륜했는데 군진(軍陣)을 달리하면서도 인홍의 명령을 받았다. 인갑이 먼저 무계(茂溪)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군량을 태우고 돌아왔다.

중국 조정에서 호군(犒軍)034) 할 비용으로 은(銀) 2만 냥을 내렸다. 당시 요동 사람이 유언 비어를 퍼뜨리면서 전하기를 ‘조선왜국과 함께 반역하여 거짓으로 가짜 왕을 삼아 인도하여 온다.’고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먼저 임세록(林世祿) 등을 파견하여 평양에 와서 탐지하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상이 평양을 떠남에 미쳐 연달아 요동 진(鎭)에 자문을 보내 비빈(妃嬪)·자녀·배신(陪臣)을 이끌고 내부(內附)하기를 청하니, 요동 순무 어사학걸(郝杰)이 주본(奏本)을 올리기를,

"총병 동양정(佟養正)의 품보(稟報)를 받았습니다. 조선이 대국(大國)이라고 일컬으면서 대대로 동번국(東藩國) 노릇을 하여 왔는데 한 번 왜적의 침입을 받자 소식만 듣고서 도망쳤습니다. 혹시라도 그 나라가 사직을 보전하지 못하고 갑자기 달려올 경우, 수신(守臣)의 입장에서 거절하자니 그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속국의 신뢰하는 마음을 잃게 될 것이고, 받아들이자니 사체가 가볍지 않아 신자(臣子)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왜노(倭奴)들은 간사한 꾀가 비상하여 중국 사람도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가 많습니다. 만약 간사한 생각을 품고 마구 들어온다면 해를 끼치는 것이 보통이 아닐텐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복제(覆題)하기를,

"해진(該鎭)에서 사람을 차출하여 조선으로 보내서 조정의 지극한 뜻을 선유(宣諭)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조선이 도망해 오면 나라를 회복할 기약이 없게 되어 왜적이 마침내 조선을 점거하게 될 것이고, 굳게 지키면 구원병도 기대할 수 있어 왜적이 자연 패하여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 지역의 요해처에서 머물며 천병(天兵)의 구원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고 본국에 유시하여 배신(陪臣)들을 많이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모아 옛 강토를 회복할 계책를 삼아 패몰(敗沒)하지 않도록 하고 만일 해국(該國)이 위급해서 도망해 오기를 청한다면 전적으로 거절하기는 어려우니 마땅히 칙령(勅令)을 내려 받아들이되 인원이 1백 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황지(皇旨)를 받드니, 황지에,

"왜적이 조선을 함몰(陷沒)시켜 국왕이 도피하였으니, 짐(朕)은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구원병을 일단 파견하고 사람을 차견하여 그 나라 대신들에게 선유(宣諭)하되,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수호하고 각처의 병마(兵馬)를 속히 결집하여 성지(城池)를 굳게 지키며 요해처에 웅거하여 힘껏 회복을 도모하도록 하라. 어떻게 앉아서 망하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지(聖旨)가 특별히 내렸는데도 요진(遼鎭)에서는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아 송국신(宋國臣)을 보내 국왕의 진위(眞僞)를 실제로 알아보게 하였다. 국신이 돌아가 확실히 진짜 임금이고 가짜 임금이 아니라고 보고하자 요진에서 비로소 믿게 되었다.

중국 조정의 의논 역시 구구했는데 석성(石星)은 구원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 나라의 사신 신점(申點)이 당시 회동관(會同館)에 있었는데, 석성이 뜰로 불러서 요동에서 변고를 보고한 문서를 꺼내어 보여주자 신점이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며 아침저녁으로 찾아가 병부(兵部)에 정문(呈文)하여 먼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유몽정(柳夢鼎)도 그 뒤를 이어 도착했는데 통곡을 하며 병부에 호소하여 구원병을 속히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석성이 그 뜻에 감동하여 모두에게 답서를 보내 위유(慰諭)하면서 그들을 신포서(申包胥)에 비유035) 하였다.

석성의 뜻이 더욱 굳어져 병부가 주청하여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상이 용만관(龍灣館)에서 맞이하여 보았다. 응양이 왜의 서신을 요구하여 증험하려 하자, 이항복이 지난 신묘년036) 에 통신사(通信使)가 가지고 온 왜의 서신을 미리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꺼내어 보였다. 그 중에는 이미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으로 보냈던 내용도 들어 있었는데, 황응양이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조선이 상국(上國)을 대신하여 침략을 당하였는데도 의로운 소문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나쁜 이름만 뒤집어 썼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돌아가 병부에 보고하니, 석성이 크게 기뻐하여 조선을 구원하는 의논이 결정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20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군사-특수군(特殊軍)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물(人物) / 왕실-행행(行幸)

  • [註 034]
    호군(犒軍) :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
  • [註 035]
    신포서(申包胥)에 비유 : 오(吳)나라가 초(楚)나라를 침략하자 초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진(秦)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가 뜰에서 7일 동안 울었더니 진나라에서 그의 충성심에 감동되어 출병했던 고사. 《사기(史記)》 권66 오자서 열전(伍子胥列傳).
  • [註 036]
    신묘년 : 1591 선조 24년.

○前掌令鄭仁弘起兵討賊。 仁弘素爲鄕郡士民所畏服, 與佐郞金沔、前縣監朴惺、儒生郭䞭郭𧺝等集鄕兵。 又得前僉使孫仁甲爲中軍。 仁甲武勇絶倫, 異軍別鎭, 而稟令於仁弘仁甲先擊茂溪屯賊敗之, 燒其屯糧而還。 皇朝賜犒軍銀二萬兩。 時, 人煽動訛言, 或傳朝鮮同叛, 佯爲假王, 嚮導以來。 故先遣林世祿等, 來探于平壤。 及上去平壤, 連咨鎭, 請率妃嬪、子女、陪臣, 內附遼東。 巡撫御史郝杰奏云: "據摠兵佟養正稟報。 朝鮮號稱大國, 世作東藩, 一遇賊, 至望風而逃。 倘彼國社稷失守, 突爾來奔, 其在守臣拒之則棲依無所, 外服失仰賴之心; 納之則事體非輕, 臣子無專擅之義。 奴譎詐異常, 華人多爲嚮導。 若挾詐闌入, 貽害非常, 則作何處置。" 兵部尙書石星覆題:

請令該鎭差人, 宣諭朝廷至意, 使知來奔, 則復國無期, 遂占據固守, 則援兵可待, 自敗回, 令之住箚彼界, 險阨以待天兵之援。 仍諭本國, 多遣陪臣, 號召勤王之師, 以爲恢復舊疆之策, 不得甘心敗沒。 萬一該國危急來奔, 請難盡拒, 宜勑令容納, 亦須量名數, 毋過百人。

奉皇旨曰:

賊陷沒朝鮮, 國王逃避, 朕甚愍惻。 援兵旣遣, 差人宣諭彼國大臣, 着他盡忠護國, 督集各處兵馬, 固守城池, 控扼險隘, 力圖恢復。 豈得坐視喪亡?

聖旨特下, 而鎭猶未釋疑, 遣宋國臣來, 驗國王眞假。 國臣歸報云: "的是眞王, 非假王也。" 鎭信之。 朝論亦多異同, 石星銳意應援。 我使申點, 方在會同館, 呼至庭, 出遼東報變文書示之, 卽號慟, 朝夕大臨呈文兵部, 先請援兵。 柳夢鼎繼至, 哭訴于兵部, 請速發救兵。 感其意, 皆復帖慰諭, 比之申包胥意益堅, 兵部奏遣指揮黃應暘來覘, 上迎見于龍灣館, 應暘書驗之。 李恒福先已將辛卯通信使齎回書來, 故出以示之, 其中文字, 有已經咨奏者。 應暘叩膺出涕曰: "朝鮮替上國受兵, 而義聲不彰, 反被惡名, 天下寧有是乎?" 遂以歸報兵部, 大喜, 東援之議乃決。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20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군사-특수군(特殊軍)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물(人物) / 왕실-행행(行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