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3일 왜적이 경성에 침입하자 이양원·김명원이 퇴주하다
이달 3일에 왜적이 경성에 침입하자 이양원(李陽元)·김명원(金命元)이 퇴주(退走)하였다. 당초 적은 동래(東萊)에서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 길은 중도(中道)로 양산(梁山)·밀양(密陽)·청도(淸道)·대구(大丘)·인동(仁同)·선산(善山)을 경유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일(李鎰)의 군사를 패배시켰고, 한 길은 좌도(左道)로 장기(長鬐)·기장(機張)을 거쳐 좌병영(左兵營)인 울산(蔚山)을 함락시키고 경주(慶州)·영천(永川)·신령(新寧)·의흥(義興)·군위(軍威)·비안(比安)을 지나 용궁(龍宮)의 하풍진(河豊津)을 건너 문경(聞慶)으로 진출해서 중로의 군사와 합류,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침입하였다. 이들은 다시 충주에서 두 갈래의 길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여주(驪州)로 가서 강을 건너 양근(楊根)을 경유하여 용진(龍津)을 건너 경성의 동로(東路)로 진출하였고, 하나는 죽산(竹山)과 용인(龍仁) 쪽으로 나아가 한강(漢江)에 이르렀다. 또 한 길은 김해(金海)를 경유하여 우도(右道)로 진출, 성주(星州) 무계현(茂溪縣)을 따라 강을 건너 지례(知禮)·금산(金山)을 거쳐 추풍령(秋風嶺)을 넘어서 충청도 영동현(永同縣)으로 진출, 청주(淸州)로 침입하였다가 방향을 바꾸어 경기로 향했다.
왜적의 정기(旌旗)와 검극(劒戟)은 천리에 끊이지 않고 포성(砲聲)이 여기 저기서 들렸다. 그들은 10리를 가거나 50∼60리를 갈 때마다 험한 곳을 점령하여 진영을 설치하고 밤이면 횃불로 서로 응하였다. 적이 한강 남쪽에 이르자 도원수 김명원이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제천정(濟川亭)에 주둔하였는데 적이 쏜 포환(砲丸)이 정자 위에 어지러이 떨어지자, 명원은 감히 적에게 항거하지 못하고 군기(軍器)를 모두 강에다 넣어버린 뒤에 행재소로 후퇴하여 도망하였다. 적이 마침내 강을 건너니 이양원은 성 안에서 관동을 향하여 도망하였다. 적은 성 안에 복병(伏兵)이 있는가 의심하여 처음에는 감히 들어오지 못하다가 몰래 사람을 시켜 들어가 정탐하여 남산(南山)에 올라가 봉화불을 들게 한 연후에야 먼저 흥인문(興仁門)014) 을 통해 입성하였다. 【이에 앞서 술사(術士)가 전한 말에 ‘임진년에 검은 옷을 입은 적이 동문(東門)으로 들어올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왜인들도 방위(方位)에 대한 술법을 조심스럽게 따라 매번 대성(大城)을 침범할 적이면 반드시 점을 쳐서 들어갈 곳을 가렸는데, 때로는 끝내 들어가지 않은 곳도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8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14면
- 【분류】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註 014]흥인문(興仁門) : 동대문.
○是月初三日, 倭入京城, 李陽元、金命元退走。 初, 賊自東萊分三路以進, 一路由中道梁山、密陽、淸道、大丘、仁同、善山, 至尙州, 敗李鎰軍。 一路由左道長鬐、機長〔機張〕 , 陷左兵營, 蔚山、慶州、永川、新寧、義興、軍威、比安, 渡龍宮、河豐津, 出聞慶, 與中路兵合, 踰島嶺, 入忠州。 又自忠州分兩路, 一趨驪州渡江, 由楊根渡龍津, 出京城東路, 一趨竹山、龍仁至漢江。 又一路由金海出右道, 從星州、茂溪縣渡江, 歷知禮、金山, 踰秋風嶺, 出忠淸道 永同縣, 入淸州, 轉向京畿。 旌旗、劍戟千里不絶, 砲聲相聞。 所過或十里, 五、六十里, 據險設營, 夜則擧火相應。 賊至漢江南, 都元帥金命元率兵千餘, 屯濟川亭, 賊發砲飛丸, 亂落亭上, 命元不敢拒敵, 悉沈軍器于江中, 退赴行在。 賊遂渡江, 李陽元自城內, 向關東走。 賊疑城中有伏, 初不敢入, 潛令人入探, 上南山擧燧, 然後先從興仁門入。 【是, 術士傳言, 壬辰之歲, 黑衣之賊, 從東門入。 倭人亦謹方位之術, 每犯大城, 必卜擇所從入, 或終不入焉。】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8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14면
- 【분류】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