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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14일 왜적이 군사를 일으켜 부산진을 함락시켜 부사 정발과 송상현이 전사하다

14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략해 와서 부산진(釜山鎭)을 함락시켰는데 첨사(僉使) 정발(鄭潑)이 전사하고, 이어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면서 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전사하였다. 평수길(平秀吉)이 우리 나라가 그들에게 명나라를 공격하는 길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침내 여러 섬의 군사 20만을 징발하여 직접 거느리고 일기도(一岐島)까지 이르러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장수에게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대마 도주 평의지(平義智)평조신(平調信)·행장(行長)·현소(玄蘇)를 향도로 삼아 4∼5만 척의 배로 바다를 뒤덮고 와 이 달 13일 새벽 안개를 틈타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에서 망을 보던 관리가 처음에 먼저 온 4백여 척을 보고 주진(主鎭)에 전보(轉報)하였는데, 변장(邊將)이 단지 처음 보고받은 것을 근거로 이를 실제 수효로 여겼다. 그리하여 병사(兵使)가 장계하기를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못되는데 한 척에 실은 인원이 수십 명에 불과하니 그 대략을 계산하면 약 만 명쯤 될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

부산 첨사 정발절영도(絶影島)에 사냥하러 갔다가 급히 돌아와 성에 들어갔는데 전선(戰船)은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咆)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문을 듣고 지역 안의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두 몰고 성에 들어가 나누어 지켰다. 병사 이각(李珏)도 병영(兵營)에서 달려왔으나 조금 지나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어쩔줄 모르면서 핑계대기를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시 나가서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쳐야 하겠다’고 하였다. 상현이 남아서 같이 지키자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따르지 않았다. 성이 마침내 포위를 당하자 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일(半日)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도왜(島倭) 평성관(平成寬)은 일찍이 동래에 왕래하면서 상현의 대접을 후하게 받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가 먼저 들어와 손을 들고 옷을 끌며 빈 틈을 가리키면서 피하여 숨도록 하였으나 상현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적이 마침내 모여들어 생포하려고 하자 상현이 발로 걷어차면서 항거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에 상현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부채에다 ‘포위당한 외로운 성, 달은 희미한데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가노(家奴)에게 주어 그의 아비 송복흥(宋復興)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평조신이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棺)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標]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 상현에게 천인(賤人) 출신의 첩이 있었는데, 적이 그를 더럽히려 하자, 굴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왜인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상현과 함께 매장하고 표(表)를 하였다. 또 양인(良人) 출신의 첩도 잡혔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굴하지 않자 왜인들이 공경하여 별실(別室)에 두었다가 뒤에 마침내 돌아가게 하였다.

송상현은 기국(器局)이 탁월하였으며 시(詩)를 잘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경인년004) 에 간관(諫官)이 되고, 신묘년005) 에 부사로 나갔는데, 실상은 배척당한 것이었다. 갑오년006) 에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만났을 때 청정이 그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또 집안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반장(返葬)하도록 허락하는 한편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는데, 적에게 함락된 유민들이 길에서 옹위하여 울며 전송하였다. 이조 참판에 추증하고 그의 아들 한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서인(庶人)인 신여로(申汝櫓)상현을 따랐었는데 상현이 돌려보냈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난리를 당하여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 하고 도로 성으로 들어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11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朔庚寅/十四日〔癸卯〕 , 賊大擧入寇, 陷釜山鎭, 僉使鄭潑戰死; 陷東萊府, 府使宋象賢死之。 平秀吉以我國不許借途, 遂發諸島兵二十萬, 親領至一岐島, 以平秀家等三十六將分領, 以馬島平義智平調信行長玄蘇爲導, 船四五萬艘, 蔽海而來, 是月十三日, 乘曉霧渡海。 釜山候吏, 初見先來四百餘艘, 轉報主鎭, 邊將只據初報爲實數, 兵使狀啓: "賊艘不滿四百, 一艘不過載數十人, 計其大略, 約可萬人。" 朝廷亦以爲然。 釜山僉使鄭潑出蒐絶影島, 急還入壁, 鑿沈戰船, 盡率兵民守堞。 翌曉賊圍城百匝, 乘西城外高處, 發砲如雨。 守西門, 拒戰良久, 賊衆中矢死者甚衆。 矢盡, 中丸死, 城遂陷。 東萊府使宋象賢聞賊渡海, 盡驅境內民兵及招旁縣兵, 入城分守。 兵使李珏自兵營馳入, 俄聞釜山陷, 恇撓失措, 托言我大將, 當在外掎角, 卽出陳于蘇山驛象賢苦留同守, 不從。 城遂被圍, 象賢登城南門, 督戰半日, 而城陷。 象賢甲上被朝服, 坐椅不動。 島倭 平成寬曾往來東萊, 象賢待之厚。 至是, 先入擧手牽衣指隙地, 使避匿, 象賢不從。 賊兵遂集, 欲生執之, 象賢以靴尖拒踢之, 遂遇害。 城之將陷, 象賢知不免, 手題扇面云: "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 付家奴, 歸報其父復興。 旣死, 平調信見之嘆悼, 爲棺斂埋於城外, 立標以識之。 象賢有賤妾, 賊欲汚之, 不屈而死。 倭人義之, 竝象賢埋表之。 又良女妾被執, 終始不屈, 倭人敬之, 置于別室, 後竟得歸。 象賢卓犖有器局, 以能詩名。 庚寅爲諫官, 辛卯出爲府使, 實斥之也。 甲午兵使金應瑞淸正蔚山, 淸正具述其死義狀, 且許家人收尸返葬, 衛以出境, 遺民陷賊者, 擁路哭送。 命贈吏曹參判, 官其子一人。 庶人申汝櫓象賢, 象賢遣歸。 途中聞釜山陷, 謂人曰: "吾臨亂, 不可負恩。" 還入城, 同死云。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11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