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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5월 1일 을축 2번째기사 1591년 명 만력(萬曆) 19년

복건 사람 허의후가 왜국이 명을 칠 것이라는 소식을 절성에 투서하다

허의후는 복건(福建) 사람이다. 포로가 되어 왜국 살마주(薩摩州)에 끌려 갔다가 수장(守將)의 총애를 받고 국중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때 그는 관백이 장차 입구(入寇)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와 친분이 있는 주균왕(朱均旺)을 은밀히 보내어 절성(浙省)에 투서하기를,

"관백 평수길이 여러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관동(關東)만을 아직 차지하지 못하고 있던 차 경인년 정월에 여러 장수를 소집해 놓고 10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명하는 한편 그들을 주의시키기를 ‘성을 쌓아 사면을 막아놓고 지키도록 하라. 나는 바다를 건너 대명(大明)을 습격하겠다.’ 하고, 이어 비전주 태수(肥前州太守)에게 배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그후 10일이 지난 다음 유구국에서 승려를 보내어 조공을 바쳐왔는데 관백이 금(金) 1백 냥을 하사하고 부탁하기를 ‘내가 중국을 원정하려 하는데 너의 유구국으로 안내를 맡도록 할 것이다.’ 하더니, 이윽고 그전에 왕오봉(汪五峰)의 패거리였던 자들을 불러다가 물었는데 왕오봉은 중국 사람으로 왜인을 인도하여 강절(江浙)을 침범케 했던 자입니다. 그들이 답하기를 ‘우리는 처음에 3백여 명으로 남경(南京) 지방에서부터 겁탈과 노략질을 일삼으면서 복건으로 내려왔었는데 그후 1년 만에 병력의 손실이 없이 고스란히 그대로 돌아왔다. 중국이 일본을 마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고 있으니, 중국을 쳐부수기는 아주 쉬울 것이다.’ 하자, 관백이 ‘나의 지혜로 나의 병사를 이끌고 가게 되면 마치 거센 물결이 모래톱을 무너뜨리듯 예리한 칼로 대나무를 쪼개듯 할 터이니 어느 성인들 무너뜨리지 못하겠으며, 어느 나라인들 멸망시키지 못하겠는가. 나는 중국의 황제가 되고 말 것이다. 다만 수병(水兵)이 빈틈이 없어서 중국 땅을 한 발자국도 밟을 수 없을까 염려된다.’ 하였습니다.

5월에 고려가 노새를 바쳐오자 관백이 유국국에 부탁했던 말로 다시 부탁하면서 금 1백 냥을 주었는데 고려왜국에 조공을 바친 것은 지난 해부터였습니다. 7월에 광동(廣東) 호경(壕境) 사람이 대명(大明)의 지도를 바쳐왔습니다. 관백이 열국에 명하여 비전(肥前)·일기(一岐)·대마도(對馬島) 이 세 곳에 성을 쌓아서 관역(官驛)을 마련토록 하라고 하고 또 대마 태수에게 명하여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바다를 건너 고려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돌아와서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10월에 고려 왕이 군대를 20일 거리로 퇴진하여 관백을 기다리고 있다 하였습니다. 금년 신묘년 7월에는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볼모를 잡히면서 관백에게 속히 결행할 것을 촉구하였다고 합니다. 11월에 관백이 문서를 열국에 두루 돌려 내년 봄 고려로 건너가 일본 백성을 모두 그곳으로 이주시켜 농사를 경작하게 하여서 대명을 대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 하고, 살마주에 명하여 정병 2만, 대장 2인으로 고려에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66국에서 모은 병사 50여 만에다 관백이 직접 통솔하는 병사 50여 만 도합 1백만, 대장 1백 50명, 전마 5만 필, 대서도(大鋤刀) 5만 자루, 참도(斬刀) 10만 자루, 장창(長槍) 10만 자루, 파시도(坡柴刀) 10만 자루, 조총 30만, 장도(長刀) 50만이고 삼척검(三尺劒)은 사람마다 갖게 했습니다.

내년 임진년에 일을 일으켜 3월 1일에 출범, 해서(海西) 9국을 선봉으로 삼고 남해도(南海道) 6국과 산양도(山陽道) 8국으로 응원토록 하였으며, 온 나라 사람을 다 데리고 가게 하여 부자 형제 중 한 사람도 남겨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영을 내리기를 ‘열국의 병사가 고려의 해안에 도착하여서는 배를 태워버리고 취사도구도 없애버리고 전투에 임한 병사는 조금도 멈추어 서지 못하게 하고 진지에 임하여는 지푸라기 하나라도 주워들지 못하게 하고 한 사람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하며, 산을 만나면 산, 물을 만나면 물, 함정을 만나면 함정, 오로지 전진만 있을 뿐 소리치거나 멈추어 서지 못하게 하고 전진하다가 죽은 자는 뒤에다 놓아두고 후퇴하여 달아나는 자는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막론하고 참수하여 대중의 본보기로 삼고 그의 친족까지 모조리 없애버린다.’ 하였으니 법령을 이렇게 엄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방비의 편의(便宜)에 대해 말하기를,

"대병을 먼저 출동시켜 조선을 습격하여 관장을 모두 죽인 다음 화병(火兵)을 좌우 사면에다 매복시켜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사면에서 공격하도록 하고 산동(山東)·산서(山西)에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의 뒤를 공격하는 등 바다와 육지에서 공격하여 밤낮없이 살육하면 관백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수길은 탐심이 많고 포학하기가 걸주(桀紂)보다 더하며 속임수가 출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합니다. 몇 나라가 은밀히 모반을 꾀하고 있는데 만일 그 일이 성사되면 관백이 처들어오려는 계획이 성사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의후가 한 말은 대부분 뒤에 맞았다. 다만 우리 나라 정형을 말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엉터리였다. 그러나 이미 통신을 하였고 왜인들이 여러 나라에다 과장을 하였으므로 의후가 들은 말은 와전된 말이 있었다. 또 객상(客商) 진갑(陳甲)이란 자가 왜국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수길이 장차 쳐들어오려는데 조선을 선봉으로 삼으려 한다.’ 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 조정이 의심을 갖게 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06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許儀後者, 福建人也。 被擄入倭國 薩摩州, 爲守將所愛, 久留國中。 熟聞關白將入寇, 潛遣所親(米均旺)〔朱均旺〕 , 投書于浙省曰:

關白平秀吉幷呑諸國, 惟關東未下。 庚寅正月, 集諸將命率兵十萬征之。 且戒曰: "築城圍其四面而守之。 吾則欲渡海, 侵大明。" 遂命肥前州太守造船。 越十日, 琉球國遣僧入貢, 關白賜金百兩囑之曰: "吾欲遠征大, 當以汝琉球爲引導。" 旣而, 召曩時汪五峯之黨問之, 汪五峯者以中原人, 嘗導江浙者也。 對曰: "吾等曾以三百餘人, 自南京地, 刼掠橫行, 下福建過一年, 全甲而還。 日本如虎, 滅大如反掌也。" 關白曰: "以吾之智, 行吾之兵, 如大水崩沙, 利刀破竹, 何城不摧, 何國不亡? 吾帝大矣。 但恐水兵嚴密, 不能跼履地耳。" 五月, 高麗貢驢, 亦以囑琉球之言囑之, 贈以百金, 高麗貢于, 自上年始也。 七月, 廣東 壕境人進大明地圖。 關白命列國築城於肥前一歧對馬三處, 以爲館驛。 又命對馬太守, 扮作(七司)〔商〕 人渡海, 觀高麗相地勢還報。 十月, 王退兵二十日之程, 以竣關白。 今辛卯七月, 遣使入貢爲質, 催關白速行。 十一月, 文書遍行列國, 欲於來年春渡高麗, 盡移日本之民於其地, 耕種以爲敵大明之基, 命薩摩州, 整兵二萬、大將二人渡高麗。 會聚六十六國兵, 共五十餘萬, 關白親率兵五十餘萬, 共計百萬。 大將一百五十員, 戰馬五萬匹, 大鋤刀五萬柄, 斬刀十萬, 長槍十萬, 破柴刀十萬, 鳥銃三十萬, 長刀五十萬, 三尺劎人人在身。 來年壬辰起事, 三月初一日開船, 以海西九國爲先鋒, 以南海道六國、山陽道八國應之, 傾國而行, 父子兄弟不許一人留家。 又令曰: "列國之兵到岸, 焚舟破釜及征戰之士不許少停, 臨陣不許一芥拾取, 不許一人回頭。 遇山則山, 遇水則水, 遇陷穽則陷穽, 不許開口、停足, 進戰, 死者留其後, 退走者不論王侯將相, 斬首示衆, 盡赤其族。" 法令之嚴如此云。

仍言備禦便宜云:

先發大兵, 襲據朝鮮, 盡殺其官長, 伏火兵於左右四畔, 竢其來, 重圍四面, 攻而殺之。 山東山西各出兵, 以擊其後, 水、陸互攻, 日夜竝殺, 則關白可以生擒矣。

又言:

秀吉貪淫暴虐浮於, 詭謀百出, 莫測其由。 數國密議謀叛, 儻謀反之事諧, 則關白入寇之計不成矣。

【儀後所言, 大抵後皆符合, 惟說我國情形甚誣。 然旣通信, 而倭乃夸張於諸國, 故儀後聞之, 訛誤則有之矣。 又有客商陳甲者, 回自倭中言: "秀吉將入寇, 以朝鮮爲先鋒。" 由是中朝不能無疑。】


  • 【태백산사고본】 6책 2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06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