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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3월 1일 정유 7번째기사 1591년 명 만력(萬曆) 19년

옥천에 있던 조헌이 일본의 서계에 분개하여 침략에 대비할 것을 아뢴 소장과 첩황

전 교수(敎授) 조헌(趙憲)이 소장(疏章)을 올렸으나 답이 없었다. 조헌이 일본(日本)의 서계(書契)가 패역스럽고 왜사(倭使)도 함께 나왔다는 말을 듣고서 옥천(沃川)에서 백의(白衣)로 걸어와서 예궐(詣闕)하여 소장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신은 생각건대, 선비는 자신의 말의 쓰여지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질 지경이면 혹 분연히 일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옛날 노중련(魯仲連)이 포위된 한단(邯鄲)으로 들어가서002) 진(秦)나라 임금을 황제(皇帝)로 높이자는 의논을 극력 저지시키자 진군(秦軍)이 그 때문에 50리를 물러갔습니다. 한단은 견고한 성이고 삼진(三晉)003) 은 강한 나라였습니다. 전국(戰國) 시대에 임금과 장수가 국가의 수비에 전력을 다 기울였기 때문에 수개월 동안 성벽을 굳게 지키면서 노중련의 분의(奮義)를 기다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가 바다를 건너온 이후 삼국(三國)004)전조(前朝)005) 가 망하기까지 전혀 성을 등지고 일전(一戰)을 했던 때가 없었습니다. 신의 우견(愚見)에는 귤광련(橘光連)현소(玄蘇)가 우리 나라로 건너온 날은 실로 우리의 입장이 한단이 포위당했던 경우에 견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많은 말을 아뢰었습니다만 군상(君相)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행신(行身)이 무상(無狀)함을 슬퍼하고 옛날 노중련에게도 매우 부끄러워 영원히 입을 다물고 구학(溝壑)에서 목숨을 마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일본에 갔던 사신(使臣)이 돌아오자 적선(賊船)이 해변에 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우리 나라를 함몰시키고 중국을 침범할 경우에는 중국에 대해 변명할 길이 없고 이들이 기회를 포착하여 갑자기 쳐들어올 경우에는 해변의 방어가 너무도 허술합니다. 반드시 전쟁이 있을 지역인데도 아직까지 조충국(趙充國)006) 과 같은 경략(經略)이 없었고 원(元)나라의 사신을 영접하지 말라고 항의한 정몽주(鄭夢周) 같은 이도 없었습니다. 진회(秦檜)왕윤(王倫)이 나라를 그르치자 변주(汴州)·항주(杭州)가 함몰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필부(匹夫)가 군왕을 현혹시키자 수욕(羞辱)이 자심하여 강상이 날로 실추되고 군부의 화(禍)가 급박하여졌으므로 간담이 찢어지는 듯한 분노로 머리털이 곤두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역경(易經)》 복괘(復卦)의 초구(初九)에 ‘머지 않아 회복될 것이어서 뉘우침이 없게 될 것이니 크게 길하리라.’ 하였는데, 정전(程傳)에 ‘양(陽)은 군자의 도이기 때문에 복(復)은 선(善)으로 회복되는 뜻이 된다. 초효(初爻)는 양의 시작으로 복이 괘의 처음에 있어 제일 먼저 회복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는 머지 않아 회복한다는 뜻이다. 잘못을 머지 않아 회복한다면 후회에 이르지 않게 되어 크게 좋고 길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비괘(比卦)의 괘사(卦辭)에 ‘불녕(不寧)이 바야흐로 오고 있으니 시기가 늦으면 강부(强夫)라도 흉하리라.’ 하였는데, 정전(程傳)에 ‘사람이 스스로 안녕(安寧)을 보전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오면 친히 하고 도와줄 사람을 구하게 된다. 도와줄 사람을 구하게 되면 안녕을 보존시킬 수 있다. 불녕한 때에는 당연히 서둘러 도와줄 사람을 구해야 되는데 만약 혼자서 자신만을 믿고 도와줄 사람을 구하는 뜻이 늦추어진다면 강부라도 흉한데 더구나 유약(柔弱)한 사람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오늘날의 사세를 헤아려 보건대, 국가의 안위와 성패가 매우 긴박한 상태에 있으니 참으로 불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히 왜사(倭使)의 목을 베고 중국에 주문(奏聞)한 다음 그의 사지를 유구(琉球) 등 제국(諸國)에 나누어 보내어 온 천하로 하여금 다 함께 분노하게 하여 이 왜적을 대비하도록 하는 한 가지 일만이 전의 잘못을 보완하고 때늦은 데서 오는 흉함을 면할 수 있음은 물론 만에 하나 이미 쇠망한 끝에 다시 흥복시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가 성주(聖主)께서는 속히 잘 생각하시어 사람이 못났더라도 말만은 버리지 말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지체하지 말았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만주(李滿住)에게 자급(資給)을 준 한 장의 종이로 중국에 실수를 저질러 장영(張寧)이 나와서 책할 때 광묘(光廟)007) 께서 대답할 말이 없어 무안해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馬)을 공납(貢納)하고 사죄하였지만 이만주를 토벌하는 거사가 있을 적에 무과(武科)에 1천 8백 명을 시험보여 일국의 병력을 다 보내기에 이르렀는데 병마의 사상도 대략 그 숫자와 맞먹었습니다. 더구나 수길(秀吉)이 우리에게 길을 빌어 중국을 침범하려는 악랄함은 이만주에게 견줄 정도가 아니고 글을 보내어 우리를 무함하는 방술이 중추(中樞)의 자급에 그칠 정도가 아닙니다. 만약 중국에서 그들의 간계(姦計)를 깨닫지 못하고 당(唐)나라 때처럼 성대한 노여움을 발하게 될 경우에는 당연히 이적(李勣)·소정방(蘇定方)의 군대가 나와서 고구려·백제의 죄를 물은 것과 같은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주(聖主)께서는 어떻게 사과하시겠으며 신민(臣民)들은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간교한 오랑캐의 말이 매우 어리석고 교만하므로 지사(智士)들은 흔히 그가 반드시 패망할 것을 예견하고, 그가 제도(諸島)를 궤멸하고 사람을 무수이 죽였으므로 군하(群下)들은 많이 그 해독을 원망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계모가 있다면 성토(聲討)하여 절교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꺾어 우리의 사민(士民)으로 하여금 미리 토적(討賊)의 의리를 깨우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마다 분발할 마음을 먹게 되어 그들을 제재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공손술(公孫沭)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和親)을 약속하였으나 외효(隗囂)가 그 사신을 베자 공손술이 감히 농서(隴西)를 엿보지 못하였으며008) , 살리갈(撒離喝)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항복하게 하였으나 유자우(劉子羽)가 베니 살리갈이 감히 추격하여 오지 못하였습니다009) 대방(大邦)에서 군대를 양성하여온 것이 어찌 유자우의 군대가 패전한 끝에 겨우 살아남은 1백 10명보다야 작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스스로 의의(意義)를 진기시키지 못한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수길이 이미 종성장(宗盛長)의 족속을 궤멸시키고 자신의 심복인 평의지(平義智)로 하여금 대신하게 한 다음 대마도(對馬島)에다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몰래 습격할 음모를 축적하고 있으니, 우리를 버리고 먼저 중국을 공격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 따라서 늦추어 주문(奏聞)해도 허물될 것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너무도 생각이 모자란 것입니다.

신이 삼가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왜적들이 우리 나라 사람을 서남만(西南蠻)의 제도(諸島)와 양절(兩浙)에다 팔면 그들이 다시 전매(轉賣)되어 일본으로 되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객상(客商)들의 왕래가 베짜는 북처럼 누비고 다닌다는 증험인 것입니다. 간교한 오랑캐가 우리에게 답한 글에 이미 자신들의 성세(聲勢)에 대해 극도로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데 더구나 남양(南洋)의 제도에야 그들의 위무(威武)를 자랑하여 겁에 질리게 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은 황윤길(黃允吉)의 배가 처음 대마도에 정박했을 때 저들이 먼저 이 사실을 남양의 제도에 전파시켜 조선(朝鮮)과 통빙(通聘)했다고 하면서 제도를 제재하여 복속시키려 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양절(兩浙) 지방의 장리(將吏)들이 듣지 못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황제에게 주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국에서 의심하고 있은지 이미 오래입니다. 더구나 이 교사스런 오랑캐는 항상 상대가 방비하지 않고 있을 적에 엄습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있으니, 우리의 변장(邊將)이 얼마쯤 수비할 태세를 갖추어 전연 침범하기 어렵게 되면 저들이 반드시 중국을 침범하는 것이 이롭다고 여길 것입니다. 따라서 소주(蘇州)·항주(杭州)에 말을 퍼뜨려 자신들이 이미 조선을 복속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왔다고 할 경우 노포(露布)를 급급히 전한다면 반개월이면 경사(京師)에 도달될 것입니다.

시장에 사나운 호랑이가 날뛰고 있다는 말도 세 번 잇따라 들으면 의심을 갖게 되는 것이고, 사람을 죽였다는 말도 세 번 잇따라 듣게 되면 증자(曾子)의 어머니도 베짜던 북을 던지고 달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호랑이와 승냥이 같은 사나운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고 성상의 학문이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지경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황제가 증자의 어머니와 같이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중국에서 북쪽으로는 달로(㺚虜)의 공격을 받고 남쪽으로는 일본의 침구를 받아 소정방이적 같은 군대를 동쪽으로 파견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가 오랑캐로 빠져들어 갔다고 여겨 허겸(許謙)이 후회하듯 하고010) 사가(史家)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다면 당당한 예의(禮義)의 나라로서 또한 너무도 수치스럽고 오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종(祖宗)의 2백 년간 수치스러운 종계(宗系)의 일을 겨우 정성을 다하여 소설(昭雪)하였는데 전하에게 끼쳐질 천만세의 오욕을 제때에 씻어버리지 못하신다면 삼강 오륜이 장차 이로부터 땅에 떨어지고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께서도 반드시 제향(祭享)이 끊기는 슬픔이 있게 될까 염려스러울 뿐더러 배우지 못한 신민(臣民)들에게 윗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는 도리를 책임지우기가 어렵습니다.

한 번 사신을 늦게 출발시키게 되면 만사가 와해되는 걱정이 있게 되는데도 이끗을 생각하고 잘못을 감추려는 신하들은 손을 잡고 화(禍)를 부르고 있으면서도 중국이 격노할 것이 걱정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시(城市)와 촌야(村野)의 백성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왜사를 베지 않으면 의리를 진기시킬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찌 이치가 없기에 공자(孔子)가 임금을 현혹시키는 자를 베자고 청했겠으며011) , 여기에 어찌 이치가 없기에 호전(胡銓)이 싸우지 않아도 사기가 배로 진작될 것이다012) 고 했겠습니까.

항적(項籍)은 싸움을 잘 하였기 때문에 진실로 한왕(漢王)013) 으로서는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만 동공(董公)이 한번 명분(名分)을 바루어야 된다는 의논을 진술014) 한 뒤에는 광무(廣武)에서 항적의 열 가지 잘못을 수죄(數罪)할 적에 항적이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음은 물론 한군(漢軍)에 초가(楚歌)가 비등하게 되었습니다. 석늑(石勒)은 강포하여 스스로 약한 진(晉)나라를 능가(凌駕)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015) 진나라에서 한번 서폐(書幣)를 불태우자 조적(祖逖)이 없었어도 감히 강회(江淮)를 한번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말이 정직하고 의리가 확고하면 사리에 어긋나는 기운은 저절로 꺾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스스로 반성하여 보아도 늘 정직했고 전하께서 사대(事大)하는 정성은 신명(神明)에 질정할 수 있고 전하께서 이웃나라를 돌보는 의리는 먼 데 사람을 회유시켜 오게 한다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고 전하께서 백성을 보호하시는 인자함은 늘 필부(匹夫)라도 손상이 있을까 염려하였고 전하께서 변방을 공고히 하는 모유(謀猷)는 늘 스스로 잘 지켜 침략받는 일이 없게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증자(曾子)가 이른바 ‘상대가 부(富)를 들고 나오면 나는 인(仁)으로 맞서고 상대가 벼슬을 들고 나오면 나는 의(義)를 가지고 맞선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대해 나간다면 진(晉)나라 초(楚)나라 같은 부강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데 더구나 수길(秀吉) 같은 필부의 용맹이겠습니까. 그가 칼을 품고 임금을 시해(弑害)할 적에는 사람마다 드러내어 죽일 것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가 사람을 삼대를 베듯이 했을 때에는 귀신도 은밀히 벨 것을 모의했을 것입니다. 그가 죄없는 이들을 해친 것이 삼묘(三苗)016) 정도뿐이 아니며 우리 대방(大邦)을 엿보니 귀방(鬼方)017) 이야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온 천하가 다같이 분노한다면 수고롭게 전쟁을 할 것도 없이 흉역 완안양(完顔亮)처럼 저절로 죽을 것이나 간서(簡書)를 빨리 보내지 않는다면 왜적이 뜻밖에 출동하여 중국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자사(子思)가 ‘모든 일에 있어 미리 준비를 하면 그 일이 잘 되고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잘못되는 것이므로, 사전에 일에 대한 계획을 확정해야 잘못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예비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람의 머리에 목줄을 감고 꼬챙이처럼 꿰는 로 (히데요시의) 악행이 유구(琉球)·점성(占城)에까지 미쳐 급기야는 중국에까지 도달하게 되면 천하 후세에서 전하를 어떠한 분이라고 여기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변란을 알리고 토벌할 것을 청하는 주문(奏聞)을 하루 늦게 보내면 결단코 백년의 걱정이 있게 될 것이고 열흘 늦게 보내면 결단코 천년의 화(禍)가 있게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아, 정강(靖康)018) ·건염(建炎)019) 연간에 금(金)나라와 화친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 한 사람들은 양시(楊時)·이강(李綱)·장준(張浚)·호안국(胡安國)이었는데 이들을 모두 붕당(朋黨)으로 지목하여 배척하고 기용하지 않았습니다. 간신(奸臣)들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은 예부터 이러하였습니다. 성주께서 역사를 읽으실 적에 또한 반드시 송나라 임금에 대해 개연(慨然)한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지금 화란(禍亂)의 급박함도 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마식(馬植)이 돌아오자마자 금나라의 군대가 하수(河水)를 건넜고 왕윤(王倫)이 양자강을 건너자 올출(兀朮)이 남쪽으로 달려왔습니다. 남의 다리를 베고 자면서 해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오랑캐의 마음을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눈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미성(尾星)과 기성(箕星)의 분야(分野)에 형혹성(熒惑星)이 바야흐로 나타나 있으니 이것이 실로 우리 나라에 먼저 침구(侵寇)할 조짐이며 동남 지방에 지진이 없는 달이 없었으니 이것은 영남(嶺南)·호남(湖南)이 전화(戰火)를 당할 징후인 것입니다. 남쪽 도서(島嶼)의 항로(航路)를 쟁취하지 않고 먼저 기전(畿甸)·해서(海西)로 달려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신의 우견(愚見)으로는 일찍이 일대(一代)의 명장(名將)을 선발해서 주아부(周亞夫)에게처럼 곤임(閫任)을 위임시킨 다음 군사들을 선발하여 가볍게 무장시켜 무관(武關)을 거쳐 곧바로 내려가서 적이 침구해올 때 반드시 쟁취하려 할 지역에다 은밀히 선척을 소각시킬 도구를 준비하게 하소서. 그리고 깨끗한 희생(犧牲)과 정한 폐백(幣帛)으로 은밀히 두류(頭流)·창해(蒼海)의 수신(水神)에게 바람을 돌려 불게 해줄 것을 빌게 하고 적과 대적하여 교전할 때 황개(黃蓋) 같은 장수 하나를 구해서 거짓 양선(糧船)을 탈취하여 항복을 청하는 것처럼 하면서 마른 갈대를 가득 적재하고 그 사이에 화약(火藥)을 비치한 다음 수미(首尾)가 거의 접근될 적에 불을 붙이고 달아난다면, 저들이 믿고 있는 정선된 군병이 틀림없이 뜨거운 불꽃으로 산화되고 말 것입니다. 일개 서생(書生)이 군대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참람하고도 가소로운 것이기는 합니다만, 성패는 지장(智將)이 기미에 따라 변에 대응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대소 장사(將士)들로 하여금 다 함께 수길(秀吉)의 죄를 성토하게 하여, 종행(從行)하는 군졸들도 그가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자임을 알게 하고 그들 중에서 지혜로운 자가 계모(計謀)를 베풀거나 용사(勇士)가 뉘우치고서 기회를 포착하여 목을 베어 바치는 자가 있으면 중국에 주문(奏聞)하여 땅을 나누어 봉하고 국상(國相)으로 삼도록 할 것이며, 도주(島主)로서 한결같이 원씨(源氏)의 구제(舊制)를 따라서 우공(禹貢)의 훼복(卉服)020) 의 조공을 폐하지 않게 한다면, 완안양(完顔亮)팽총(彭寵)021) 처럼 사악(邪惡)한 자들을 응징하는 칼과 화살이 수길에게 집중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남은 병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김히 서쪽으로 건너오지 못할 것이어서 기전·해서가 절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그들이 멋대로 왕래하게 하여 태평에 젖어 있는 곳을 진동시키게 한다면 보따리를 싸놓고 있는 백성들은 흩어지기가 쉽고 굶주림에 지친 군졸들은 소문만 듣고도 흩어질 것이며, 따라서 한수(漢水)·패수(浿水) 사이가 모두 유린당하는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아, 금나라가 송나라에 대해 날마다 침삭(侵削)시킬 계책을 세우고 있는데도 진회(秦檜)의 무리는 오랑캐들의 실정을 철저히 숨긴 채 당시의 임금과 장수가 혹시라도 깨우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회유(回諭)하는 조서(詔書)의 글자가 손바닥만큼씩 컸습니다만, 진회는 이를 급히 열어보였다가는 서둘러 거두어버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땅을 떼어주자는 한 마디 말만을 다행으로 여긴 채 공전(攻戰)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장준(張浚)·한세충(韓世忠)·악비(岳飛)·유기(劉錡)022) 등의 제장(諸將)이 사력을 다하지 않았다면 귀자(龜玆) 지역도 보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수길이 우리 나라에 대해 병탄할 계책을 세우고서 대마 도주(對馬島主)를 살해, 은밀히 자신의 복심인 평의지(平義智)를 보내어 대신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왼손을 빼앗아 첩보(諜報)할 길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또 신장(信長)을 사신으로 보내어 엿보아 회사(回謝)를 처치하는 한 가지 일을 살피게 하여 갑자기 출병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달에 대마도에 군대를 숨기더라도 상하가 말하기를 꺼리고 있으므로 대대적인 거사가 있을 것을 모르게 한 것이니, 그들이 품고 있는 화심(禍心)이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억(供億)을 중국 사신과 다름없이 하고 있습니다. 적사(賊使)가 두 길로 나누어 올라올 적에 영남·호남의 각 고을에서 이민(吏民)을 모두 거느리고 원역(院驛)에 나가 기다리느라고 여러 날 지체하면서 한 번도 방비에 대한 일을 돌보지 않고 있으니, 안진경(顔眞卿)과 같은 선각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참호를 파고 성을 완벽하게 할 계책을 세울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 사신을 대우한 것은 매우 박하게 하였는데도 우리는 먼저 기운을 잃은 기색을 보여 왜노(倭奴)로 하여금 우리의 장리(將吏)들에게 교만을 부리기를 천례(賤隷)들에게 하는 것같이 해도 감히 한 마디 예의(禮義)로써 책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른바 후대하라는 분부는 실로 우리의 국명(國命)을 위축시켜 영원히 스스로 진기할 수가 없게 하고 우리의 민력(民力)을 손상시켜 감히 적을 물리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니, 어찌 통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가운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선래 역관(先來譯官)이 수길의 패만스런 내용의 글을 가지고 와서 일도(一道)에 전파시켰고 이것이 호서(湖西)·호남(湖南)에까지 퍼져갔으므로 사류들은 말하지 않는 이가 없고 백성들도 듣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이 말이 널리 퍼질 것만을 두려워하고 일에 앞서 모의하는 계책에 대해서는 하나도 거론하여 진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023) 의 상소가 혹시라도 초택(草澤)에서 나올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어찌 성주(聖主)까지도 왕(汪)·황(黃)·회(檜)·윤(倫)024) 의 술책에 빠뜨리려 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주서(周書)》에 ‘덕을 쌓으면 마음이 편안하여 날마다 즐겁고 거짓된 일을 하면 마음이 수고로와 날로 졸렬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저들이 중국을 공격하겠다고 하는 말을 하는데도 우리들이 존경하고, 저들이 우리를 병탄할 계책을 품고 있는데도 우리가 너그럽게 대한다면 이는 성신(誠信)으로 교린(交隣)하는 도리가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끝내는 내정(內政)·외비(外備)가 날로 졸렬해져가는 것을 숨길 수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추로(醜虜)에게 수모를 받게 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진회·왕윤 같은 무리를 베지 않고서는 중국에 치사(致謝)할 수 없게 될 것은 물론 삼군(三軍)에 명령을 신칙시킬 수 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아, 육가(陸賈)가 정색(正色)하고서 거만스럽게 걸터앉았던 위타(尉佗)를 굴복시켰고025) , 범중엄(范仲淹)은 글을 불태워 조원호(趙元昊)의 패만스러운 마음을 꺾었는데026) , 이들은 모두 수행원이 없이 혼자서 자신들의 왕기(王氣)를 장엄하게 한 사람들이고, 의리가 담긴 말 한 마디로 흉봉(凶鋒)을 꺾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어찌 김성일(金誠一)의 무리가 1천 석의 곡식을 적재하고 국악(國樂)을 가지고 가서 적을 즐겁게 하면서 헌원씨(軒轅氏)치우(蚩尤)를 격파한 도구를 모두 오랑캐들의 소득이 되게 한 것과 같은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

군졸에게 옷을 바꾸어 입혀 순환(循環)시킨 것은 바로 이광필(李光弼)이 적장(賊將)을 속인 술책인데도 저들은 모두 깨닫지 못하였고027) , 선척을 진설하고 병위(兵威)를 자랑한 것은 바로 이희열(李希烈)이 중사(中使)를 속인 계책인데도 저들은 실로 두려워했습니다028) . 5개월 동안 접견하지 않은 것은 바로 구금시킨 것이고, 음식의 진설을 몸소 살핀 것은 바로 마음을 꾄 것이고, 질그릇 술잔으로 마시다가 깨뜨린 것은 끝내는 맹약을 파기한다는 것을 보인 것이고, 아이를 안고 상대했다는 것은 우리를 어린 아이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적추(賊酋)의 간휼(奸譎)스러움은 이토록 헤아릴 수 없이 단서가 많은데도 저들은 돌아와서 아뢰기를 ‘적은 오지 않을 것이다.’고 아뢰어 결국 장사(將士)들의 마음을 해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소위 일덕대신(一德大臣)들은 왕윤(王倫)처럼 봉사(奉使)를 잘했다고 성대하게 칭송함으로써 금장(金章)의 총애를 받게 하였으니, 나라를 욕되게 한 무상(無狀)한 자일지라도 권간(權奸)에게 빌붙으면 순차에 따라 높은 직위에 함께 오를 수가 있습니다. 이러고서야 어떻게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들의 기세가 날로 치성하여 백주에 위를 속이고서는 혹시 공론(公論)이 격발될까 두려워하여 이에 ‘수길(秀吉)이 진짜 반역한 자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한착(寒浞)을 순신(純臣)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통신사(通信使) 일행이 저들의 실정을 깊이 깨닫고 미리 방비하는 조처를 했으니 도움이 작지 않을 것이다.’ 했는데, 영남(嶺南)을 버려두고 방비하지 않았으니 이는 양주(梁州)를 버려 오(吳)나라에 주려는 처사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앞서 호남의 중망(重望)에 세 사람의 패장(敗將)으로 삼망(三望)을 갖추었는데 이들 가운데 하나는 이발(李潑)정여립(鄭汝立)을 잘 섬긴 자이고 또 하나는 최영경(崔永慶)을 노예처럼 섬긴 자였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약사(藥師)범경(范瓊)연주(燕州)·변주(汴州)를 보전할 수 있고029) , 송(宋)나라를 그르친 장수 진의중(陳宜中)030) 이 앉아서 책략을 정할 수 있다고 한 것과 같은데, 이른바 예비책(豫備策)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술책입니까. 호서(湖西)·영남(嶺南)을 보면 명령을 봉행하기에 지쳐 읍리(邑里)가 쓸쓸한 지경에 이르렀고 호남(湖南) 지방을 보면 이진(梨津)의 군량이 불타버리자 다른 진보(鎭堡)도 굶주리게 되었으니, 이때는 바로 주야로 걱정해야 할 급박한 시기입니다.

실제로 행진(行陣)의 경험이 있는 사람을 얻더라도 사세가 제때에 조처하기 어려운 실정인데 아첨하는 신하들은 스스로 나라를 그르치는 대죄(大罪)를 저지르며 오직 임금이 깨우칠까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변고를 주문(奏聞)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여국(與國)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도 않으면서 평안히 앉아서 교사스런 오랑캐의 명령만 따릅니다. 그들로 하여금 계모(計謀)를 완성시켜 앉아서 만전책을 다지게 한 다음에 성식(聲息)이 있기를 기다려 장수를 파견하고 백성을 몰아다가 싸움을 한다면 적들이 장구(長驅)하여 쳐들어오는 형세를 실제로 막을 수 없는데다가 군사들도 연습을 시키지 않았으므로 그저 적에게 념겨주는 격이 될 것입니다. 고려 말엽에 왜적이 진강(鎭江)을 거쳐 영남(嶺南)·호남(湖南) 사이로 돌입하여 이때 영동(永同)·화령(化寧)이 모두 병선(兵燹)의 화(禍)를 당했었는데, 더구나 이 강적은 발도(拔都)의 세력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데이겠습니까. 그렇게 될 경우 신처럼 노둔한 사람은 어디로 달아나 죽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한번 죽기는 마찬가지인 바에야 차라리 자공(子貢)이 연(燕)·초(岧)로 돌아다니며 유세(遊說)하여 제후(諸侯)들의 군대로 하여금 오(吳)나라를 쳐부수어 노(魯)나라를 보존시킨 것031) 처럼 한다면 성주(聖主)께서 신을 살려준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고 하늘이 남아(男兒)로 태어나게 한 뜻에도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남(海南)의 만리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면 신에게 절월(節鉞)을 빌려주어 사행(使行)의 말단에 충당시켜 주소서. 그러면 주야로 서쪽으로 달려가 현소·평의지의 머리를 중국 조정에 바치고서 삼가 신포서(申包胥)의 통곡을 본받아 우리 임금의 심사(心事)를 밝히겠습니다. 다행히 황제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아 호소가 이루어지면 남쪽 국경으로 말을 달려 적의 사지(四肢)를 남양(南洋)의 제국(諸國)에 나누어 보내고 나서 ‘군대를 정돈하고 편리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가 수길(秀吉)이 서쪽으로 침구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선척을 출동시켜 공격하고 일본에다 격문(檄文)을 전하라.’고 효유(曉諭)한다면, 훼복(卉服)032) 에서도 무기를 되돌려 수길을 공격할 사람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소원(疏遠)한 천신(賤臣)이 감히 분수에 넘친 일을 청하였습니다만 시사(時事)가 매우 급박한데 미리 대비하지 않음으로써 패망당할까 두려웠습니다. 이에 중국 조정에 변란을 주문(奏聞)하는 소장을 초잡았고 유구 국왕(琉球國王)과 일본·대마도에 있는 유민(遺民) 중 호걸들에게 적사(賊使)를 체포하게 할 격문(檄文)을 초안(草案)하였으며, 영남·호남의 비왜책(備倭策)에 대해서도 모두 일에 따라 차기(箚記)하여 삼가 별지(別紙) 7폭(幅)에 갖추 기록해서 소매 속에 품고 있습니다. 사대(事大)·교린(交隣)에 대한 법규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사리가 정직하지 못하면 도(道)를 드러낼 수 없다고 한 맹자(孟子)의 훈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건대 이렇게 한다면 사리가 절로 밝아지고 말도 정직하고 의도 장엄하게 되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소원한 몸으로 참람스러워 감히 바로 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혹 성주(聖主)께서 보잘것 없는 말을 곡진히 채납(採納)하여 주시어 즉시 세숙(世叔)자산(子産) 같은 사람을 시켜 토론하고 윤색하게 하여 괴원(槐院)으로 하여금 아침에 전사(轉寫)하여 점심 때 봉하게 한 다음 특별히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치주(馳奏)하게 하되 행장을 꾸리는 일순(一旬) 안에 먼저 1본(本)을 등사해서 역관(譯官) 1인을 붙여주어 천신으로 하여금 먼저 요계(遼薊)에 알리고 나아가 연경(燕京)에 알리게 한다면, 중국 조정의 군신(君臣)들이 우리가 주야로 달려와 제때에 고하는 정성에 감동되어 두루 제진(諸鎭)·제국(諸國)에 효유하여 미리 방비하여 은밀히 조처하도록 하고 천하가 다같이 분노하여 기어코 이 왜적을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게 하소서. 그러면 신은 도로(道路)에서 죽더라도 노모(老母)는 강회(江淮)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수욕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완악한 기운이 풀어지지 않아 천일(天日)이 항상 음산하므로 신은 국가를 위한 걱정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통분을 견딜 수가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받들어 올립니다."

하였다.

또 첩황(貼黃)이 있었는데 그 대략에,

"기밀(機密)스러운 일은 비밀히 하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에 능란한 적사(賊使)가 동평관(東平館)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으니 신의 봉장(封章)이 또한 늦은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의 상소문을 머물러 두시고 기책(機策)을 은밀히 조처하시되 동평관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득(購得)할 수 없게 할 것은 물론 신의 이름을 조보(朝報)에 싣지 않게 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갔으나 비답(批答)이 내리지 않았다. 또 소장을 올리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번후(藩侯)로서 경급(警急)한 일이 있으면 빨리 간서(簡書)를 보내지 않을 수 없고 필부(匹夫)로서 임금을 현혹시키는 일이 있으면 목을 베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멀리서 중국을 삼키려는 근심스런 소식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분노를 견딜 수 없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달려와서 품은 마음을 피눈물을 흘리며 아룀으로써 성주(聖主)께서 머지 않아 깨우칠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위로 중국 조정에 죄책을 받지 않고 안으로는 종묘(宗廟)에 수치스러움을 끼치지 않고 밖으로는 추로(醜虜)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고 아래로는 생령(生靈)들에게 화(禍)를 끼치게 하지 않는다면 평생 글을 읽은 힘으로 한 번 중대한 강상을 부지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임금이 고구려·백제가 당한 걱정을 면할 수 있게 되고 신의 노모가 강회(江淮)의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겠습니다. 진실로 이렇게만 된다면 어떠한 혹독한 형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만 봉장(封章)을 올린 지 3일이 되었어도 아직껏 분부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성주께서 관용(寬容)하는 마음에서 신을 죄주려 하지 않으시는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나라를 구원하고 노모를 살리는 계책이 쓰여지는 것은 단지 오늘날에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방에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멀리서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중국의 죄책(罪責)이 일단 있게 되면 아무리 걱정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신은 7폭의 소장을 머물러 둠으로써 명주(明主)께서 한번 살펴 뉘우칠 때가 있기를 바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교사스런 오랑캐는 반복이 무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것인데 금(金)과 원(元)의 사신 같은 자들을 후대하면서 남쪽에서 침구를 당하는 수모가 없게 되리라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송(宋)나라 때 진회(秦檜)·가사도(賈似道)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인 것입니다. 수길은 자기의 임금을 주저없이 풀베듯 하였는데 이웃 나라라 하여 엿보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금을 살펴보아도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신이 기필코 명장(名將)을 시켜 은밀히 동남쪽을 방비하게 하라고 청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유구국(琉球國)이 보내온 글에 우리 때문에 일본을 섬긴다고 했다는데 이 말이 발설된 지가 오래이니, 중국 조정에서 듣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정방이적(李勣)의 군대가 동방으로 출동한 것은 단지 백제·고구려가 신라의 입공로(入貢路)를 단절시키려 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교사스런 오랑캐가 이런 소문을 천하에 퍼뜨릴 적에 반드시 우리 나라가 빈복(賓服)하였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중국에 대해 받은 은혜가 작지 않으니 저들의 패만스런 글을 보았으면 의리상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주문하는 것이 당연한 조처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일을 지연시키면서 절사(節使)의 행차에 순부(順付)하려 한다면 인마(人馬)가 너무 번잡스러운 것은 물론 봄 전에 부경(赴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교사스런 오랑캐가 강절(江浙) 지방에 보낸 격문(檄文)은 반드시 반개월도 못되어 북쪽으로 보고될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씨(史氏)의 기록을 어떻게 씻어내어 밝힐 수 있겠으며, 장영(張寧)033) 의 문책을 어떻게 모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중국 조정의 은애(恩愛)가 바야흐로 깊기는 하지만 중국 황제의 한번의 노여움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건주위(建州衛)를 토멸시키게 한 것도 바로 황조(皇朝)의 가법(家法)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힘을 알지 못하고서 기필코 우리에게 일본을 토멸시키라고 한다면 우리의 잔약한 병력으로는 스스로의 수비에도 겨를이 없는데 무슨 남은 힘이 있어 동정(東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홍다구(洪茶丘)의 8만 병력과 김방경(金方慶)이 규합한 병력으로도 동쪽 바다에서 뜻을 얻지 못하여 사상자(死傷者)가 반절이 넘었었습니다. 더구나 중국에서 홍다구와 같은 병력을 출동시키지도 않고 우리 나라에서는 또 김방경에 버금갈 만한 장수가 없다면 감히 동정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중국 조정의 노여움은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평소 사랑하던 아들도 조금만 아비의 뜻을 거스르면 아비의 노여움이 반드시 깊은 것입니다. 이럴 시기에 소정방·이적과 같은 문책의 군대가 나온다면 일본을 의지해서 물리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소정방·이적의 군대가 백제·고구려를 다 소탕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10만여 호(戶)를 강회(江淮)로 옮길 수가 있었으니, 수륙(水陸) 머나먼 길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어찌 다 살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신에게는 연로하고 병이 극심한 계모(繼母) 한 분이 계시는데 이 분을 업고 피해갈 땅이 없습니다. 적사(賊使)가 좋은 말을 할 때에는 성주(聖主)께서 스스로 태연하게 걱정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계십니다만, 기회를 포착하여 돌발하게 되면 그때는 온 나라의 국력을 다 동원하여 동쪽으로 나아가야 할 터인데 서방에서 밀려오는 문죄의 군사를 다시 무슨 힘으로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성역(聖域)에서 농사지으며 병든 노모를 봉양하면서 강회를 옮겨가는 고통스런 행렬에서 면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미 한번 아뢰었습니다만 재삼 번독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주께서는 신의 상소 1통을 보관하고 계시다가 일이 닥쳐왔을 때에 다시 살펴주신다면 신이 노모를 위하고 국가를 위한 간절한 마음이 농사를 그만두더라도 오활하게 되지 않겠습니다.

신이 더욱 마음아픈 것은 이번에 올라올 적에 적사(賊使)가 경유했던 두 도(道)를 거쳐 오면서 저 왜노들이 마치 중국 사신처럼 멋대로 무시하였으므로 우리의 관리(官吏)들은 모두 기운이 저상되어 온 도내의 힘을 다 기울여 그들을 공억(供億)하느라 방비하는 일은 전연 잊었다는 말을 세세히 들은 것입니다. 이 사신의 왕래만 가지고도 뒷날 대패할 것을 점칠 수가 있는데 조정에는 호전(胡銓)과 같은 의논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고 초야에는 진동(陳東)과 같은 의논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황이옥(黃李沃)의 상소문이 서울에서 나온 일은 있습니다만, 앞으로 전패(顚沛)되어 떠돌게 될 때 분발하여 급한 일에 달려갈 사람이 없게 된다면 성명(聖明)께서 의지할 수 있는 문천상(文天祥)·육수부(陸秀夫) 같은 사람이 끝내 누구이겠습니까. 한(漢)나라 말기에 제현(諸賢)을 당고(黨錮)시켜 기필코 살해하였고 당(唐)나라가 망할 적에는 청류(淸流)들을 기필코 황하(黃河)에 던졌는데, 이는 성세(聖世)에서는 듣기를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정몽주(鄭夢周)전조(前朝)034) 가 위의(危疑)스러울 즈음에도 오히려 혐의를 피하지 않고 널리 국사(國士)를 맞아들여 담론(談論)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詩)에,

자리엔 손님 늘 가득하고

술잔에 술이 비지 않누나

라고 하였는데, 일을 맡은 신하가 문을 닫고 혼자 앉아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지 않고 국가를 부지시킨 경우는 예전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은밀히 고굉(股肱)의 신하에 대한 유무를 살피고 의심스런 단서를 물리쳐 버림으로써 참적(讒賊)의 입을 막아버린다면 사직(社稷)에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아, 종군(終軍)035) 은 약관의 나이에 적을 묶어올 포승줄을 요구했고 모수(毛遂)036) 는 자천(自薦)하여 특이한 일을 해냈으니, 이들이 어찌 전혀 염치를 잊은 자들이겠습니까. 단지 상하가 전도되고 종국(宗國)이 망하여 의관(衣冠)과 골육(骨肉)이 모두 오랑캐에게 함몰될 것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서 기력(氣力)을 내어 몇 해 동안의 편안함을 보전하게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진(秦)나라의 간첩에게 금(金)을 받고 제왕(齊王)에게 진을 섬기라고 권했기 때문에 공전(攻戰)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았다가 임치(臨淄)가 갑자기 진나라의 땅이 되게 만들어서 송백(松栢)의 노래가 만고의 사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신은 지금 외방에서 살고 있으므로 관리로서 해야 할 걱정은 없습니다만, 사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을 적에는 강혁(江革)037) 처럼 노모를 업고 난을 피하려 하나 피할 곳이 없을까 매우 두렵습니다. 변(變)을 듣고 나서 십일 동안을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일이 있기 전에 미리 대비하라는 경계를 가지고 완전무결한 계책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들이 꺼지고 기둥이 불타는 화(禍)가 닥쳤을 때 다행히 천신(賤臣)이 멀리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가난한 서생(書生)으로서 서울에 온 지 여러 날이 되어 낭탁(囊槖)이 이미 비었으므로 동방삭(東方朔)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영원히 하직할까 합니다. 성명(聖明)을 우러러 보건대 황공하고 격절(激切)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7조(條)의 내용을 붙여 아뢰었는데 그 내용은 1. 강적(强賊)을 이간시키는 일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귀부(歸附)하기 전에 해야 하는데 반드시 현소(玄蘇)·평의지(平義智)의 목을 자르고 천하에 선포하여 천하 사람들과 함께 소리를 같이하여 격문을 보내되 허점을 노려 수도(首都)를 공격한다고 하면 이러한 말이 사방에서 동쪽으로 보고되어 수길(秀吉)도 감히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 나라를 엿볼 계책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2. 변란에 대해 황조(皇朝)에 아뢰는 표문(表文)의 초안, 3. 유구 국왕에게 전하는 국서(國書)의 초안, 4. 일본국 유민(遺民)의 부로(父老)들에 보내어 효유하는 편지의 초안, 5. 대마도의 부로들에게 보내어 효유하는 글의 초안, 6. 적사(賊使)를 참하는 데 대한 죄목(罪目)의 초안, 7. 영남 호남의 비왜책(備倭策)에 대한 초안이었다.

조헌(趙憲)이 궐하(闕下)에 엎드려 상소에 대한 비답이 있기를 기다렸으나 내리지 않자 머리를 돌에다 찧어 피가 얼굴에 가득하여 보는 사람들도 안색이 위축되었다. 그래도 비답이 내리지 않자 이 상소를 봉진(封進)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받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조헌이 상소를 진달했는데도 정원에서 받지 않고 있는데 상소의 내용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언로가 막히는 단서가 있게 되니 색승지(色承旨)를 파직시켜소서."

하니, 상이 추고(推考)만 하도록 윤허하였다. 조헌은 통곡하면서 물러갔다. 【정유 왜란 때 우리 나라의 어떤 사인(士人)이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들어가서 민간(民間)으로 다니며 구걸하다가 한 사람의 노승(老僧)을 만났는데 그의 말이 ‘수길은 조선에 대해서는 한때의 적이지만 일본에 있어서는 만세의 적이다. 그때에 한두 명의 의사(義士)가 있어 격문을 보내고 의에 입각하여 거사(擧事)하였다면 수길로 인한 재앙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조헌의 비왜책(備倭策)에서 천거된 10여 명은 평상시에는 모두 이름도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뒤에 왜란이 일어나자 모두 기용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김시민(金時敏)·조웅(趙熊) 등은 더욱 두드러져 칭송할 만한 사람이었다.

조헌옥천(沃川)으로 돌아가 아들 조완도(趙完堵)를 시켜 평안 감사 권징(權徵)과 연안 부사(延安府使) 신각(申恪)에게 글을 보내어 참호를 깊이 파고 성을 완전히 수리하여 전수(戰守)에 대한 준비를 미리 수거(修擧)하도록 권하였는데, 권징은 그 글을 보고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황해도·평안도에 어찌 왜적이 올 리가 있겠는가. 돌아가 그대 부친에게 부디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라.’ 하였다. 신각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기계(器械)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성내(城內)에 봇물을 끌어들여 큰 못을 만들었다. 뒤에 왜란이 일어나자 이정암(李廷馣)이 성을 지켜 온전할 수가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각이 사전에 준비한 공로를 추모하여 아울러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5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02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 / 군사(軍事) / 인사(人事)

  • [註 002]
    노중련(魯仲連)이 포위된 한단(邯鄲)으로 들어가서 : 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고절(高節)을 지켜 벼슬하지 않았다. 그가 조(趙)나라에 갔을 때 진(秦)나라의 군대가 조나라의 서울 한단을 포위하였는데 위(魏)나라에서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포위를 풀기를 요구하였다. 이때 노중련은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東海)에 빠져 죽겠다." 하였는데,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후퇴시켰다. 결국 진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돌아 갔다. 《사기(史記)》 권89.
  • [註 003]
    삼진(三晉) : 한(韓)·위(魏)·조(趙)를 가리킴.
  • [註 004]
    삼국(三國) : 고구려·신라·백제.
  • [註 005]
    전조(前朝) : 고려를 가리킴.
  • [註 006]
    조충국(趙充國) : 한 선제(韓宣帝) 때의 장군으로 서강(西羌)이 반란을 일으키자 나이 70이 된 노구(老軀)로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는데, 그가 둔전(屯田)에 대한 열두 가지 편리한 점을 열거하여 올린 계책이 유명하다. 《한서(漢書)》 권55.
  • [註 007]
    광묘(光廟) : 세조(世祖).
  • [註 008]
    공손술(公孫沭)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和親)을 약속하였으나 외효(隗囂)가 그 사신을 베자 공손술이 감히 농서(隴西)를 엿보지 못하였으며 : 적에게 대의에 입각하여 강력히 대처하면 감히 침구하지 못한다는 뜻. 공손술과 외효(隗囂)는 모두 후한(後漢) 때 사람. 당시 왕망(王莽)으로 인하여 군웅이 난립할 때였는데 공손술이 외효에게 사신을 보내어 부안왕(扶安王)의 인수(印綬)를 주면서 회유시키려 하였으나 외효가 이를 거절하고 그 사자를 베었다. 《후한서(後漢書)》 권13 외효(隗囂) 공손술 열전(公孫述列傅).
  • [註 009]
    살리갈(撒離喝)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항복하게 하였으나 유자우(劉子羽)가 베니 살리갈이 감히 추격하여 오지 못하였습니다 : 역시 적에게 강력히 대처하면 감히 침구하지 못한다는 뜻. 살리갈은 금(金)나라 장수이고 유자우(劉子羽)는 송(宋)나라 사람. 유자우가 패배하여 봉상(鳳翔)에 와 있을 적에 살리갈이 10명의 사자(使者)를 보내어 회유시키려 하였으나 자우가 이들을 모두 베고 그 중 1명만 살려 돌려보내면서 단호히 거절하자 더 이상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송사(宋史)》 권379 유자우 열전(劉子羽列傳).
  • [註 010]
    허겸(許謙)이 후회하듯 하고 : 나라가 망하여 남의 나라의 유민(遺民)이 된 것을 탄식한다는 뜻. 허겸은 원래 송(宋)나라 사람이었는데 나라가 망함에 따라 원(元)나라의 유민이 되었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백운 선생(白雲先生)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송원학안(宋元學案)》 권,82 《원사(元史)》 권189 유학(儒學) 허겸 열전(許謙列傳).
  • [註 011]
    공자(孔子)가 임금을 현혹시키는 자를 베자고 청했겠으며 : 임금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 노 정공(魯定公) 14년에 공자가 대사구(大司寇)를 거쳐 상사(相事)를 섭행하게 되었는데 이때 제일 먼저 정사를 혼란시키는 소정묘(少正卯)를 처형했다.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
  • [註 012]
    호전(胡銓)이 싸우지 않아도 사기가 배로 진작될 것이다 : 간신(姦臣)을 주참(誅斬)하면 사기가 고조된다는 뜻. 호전은 송(宋)나라 때 사람으로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 있을 적에 "왕윤(王倫)과 진회(秦檜)를 베어 그 머리를 네거리에 내어 걸면 삼군(三軍)이 싸우기 전에 사기가 배로 격양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여기서 온 말임. 《송사(宋史)》 권374 호전열전(胡銓列傳).
  • [註 013]
    한왕(漢王) : 유방(劉邦).
  • [註 014]
    동공(董公)이 한번 명분(名分)을 바루어야 된다는 의논을 진술 : 명분이 부당하면 항변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뜻. 동공은 한(漢)나라 때 신성(新城) 사람으로 한 고조 유방(劉邦)이 낙양(洛陽)에 이르렀을 때 "항우(項羽)는 자신의 주군(主君)인 초 회왕(楚懷王)을 시해한 죄인이니 군사들에게 상복(喪服)을 입혀 발상(發喪)하고 쳐야 명분이 선다."고 역설하자, 그에 따라 발상하였다. 뒤에 광무(廣武)에서 열 가지 죄를 수죄(數罪)할 적에 항우가 답변을 못했고, 그 뒤 해하(垓下)에서 결국 유방에게 패하여 항우는 자살하고 말았다. 《사기(史記)》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
  • [註 015]
    석늑(石勒)은 강포하여 스스로 약한 진(晉)나라를 능가(凌駕)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 석늑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후조(後趙)의 임금이고 조적(祖逖)은 역시 같은 시대 진(晉)나라의 장수로서 석늑과의 대전(對戰)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훌륭한 장수가 없어도 명분에 의거 강력하게 대처하면 적이 함부로 침범해 올 수 없다는 뜻임. 《진서(晉書)》 권104, 105 석늑재기(石勒載記), 《진서(晉書)》 권62 조적열전(祖逖列傳).
  • [註 016]
    삼묘(三苗) : 사흉(四凶)의 하나.
  • [註 017]
    귀방(鬼方) : 미개한 먼 지역.
  • [註 018]
    정강(靖康) :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 [註 019]
    건염(建炎) : 송 고종(宋高宗)의 연호.
  • [註 020]
    훼복(卉服) : 섬 오랑캐들이 입은 옷.
  • [註 021]
    완안양(完顔亮)과 팽총(彭寵) : 완안양은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둘째 아들로서 희종(熙宗)을 시해하고 왕이 되었는데, 갖은 못된 짓을 하다가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패전하고 반란을 일으킨 절서로도통제사(浙西路都統制使) 완안원의(完顔元宜)의 군사에게 화살을 맞아 죽었다. 《금사(金史)》 권132 완안원의전(完顔元宜傳). 팽총은 후한(後漢) 때 사람인데 광무황제(光武皇帝) 때 공은 많은데도 벼슬이 낮은 것을 한하다가 군대를 일으켜 모반했다가 창두(蒼頭) 자밀(子密)에게 피살당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42.
  • [註 022]
    장준(張浚)·한세충(韓世忠)·악비(岳飛)·유기(劉錡) : 송(宋)나라 말기의 장수들임. 장준은 면죽(綿竹) 사람으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효종(孝宗) 때에는 추밀사(樞密使)에 제수되었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송사(宋史)》 권361. 한세충(韓世忠)은 연안(延安) 사람으로 전투에 능했는데 회동 양로 선무 처치사(淮東兩路宣撫處置使)를 지냈고 양무 익운 공신(揚武翊運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송사(宋史)》 권364. 악비(岳飛)는 탕음(湯陰) 사람으로 하남북제로 초토사(河南北諸路招討使)를 지냈는데 진회(秦檜)의 무함을 받아 3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죽었다. 《송사(宋史)》 권365. 유기는 덕순(德順) 사람으로 활을 잘 쏘았는데 동경 부유수(東京副留守)를 지내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 《송사(宋史)》 권366.
  • [註 023]
    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 : 진동은 송(宋)나라 때의 태학생(太學生)으로서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상소를 올려 채경(蔡京)·동관(童貫):왕보(王黼)·이언(李彦)·양사성(梁師成)·주면(朱勔) 등 6인을 육적(六賊)으로 지칭하고 이들의 목을 베어 천하에 사례하라고 하였다. 뒤에 황잠선(黃潜善)의 참소에 의해 저자에서 참형(斬刑)을 당했다. 《송사(宋史)》 권455. 구양철은 송나라 때 사람으로 포의(布衣)로서 상소를 올려 당시의 요직에 있는 대신(大臣)을 비방했다가 고종(高宗)의 노여움을 사서 진동과 함께 저자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송사(宋史)》 권455.
  • [註 024]
    왕(汪)·황(黃)·회(檜)·윤(倫) : 왕백언(汪伯彦)·황잠선(黃潜善)·진회(秦檜)·왕윤(王倫)을 말하는데 이들은 모두 송(宋)나라 때의 간신(姦臣)들이다. 《송사(宋史)》 권473.
  • [註 025]
    육가(陸賈)가 정색(正色)하고서 거만스럽게 걸터앉았던 위타(尉佗)를 굴복시켰고 : 육가는 한 고조(漢高祖) 때 사람으로 태중 대부(太中大夫)를 지냈는데 남월(南越)의 위타(尉佗)에게 사신으로 가서 그를 회유시킨 일이 있었다. 《사기(史記)》 권97, 《한서(漢書)》 권43.
  • [註 026]
    범중엄(范仲淹)은 글을 불태워 조원호(趙元昊)의 패만스러운 마음을 꺾었는데 : 범중엄은 송(宋)나라의 하동 선무사(河東宣撫使)를 지냈고 조원호(趙元昊)는 서하(西夏) 이낭소(李曩霄)의 고친 이름인데, 임복(任福)의 전투 때에 원호가 보낸 오만한 글을 그의 사신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 버린 일이 있었다. 《송사(宋史)》 권314 범중엄 열전(范仲淹列傳).
  • [註 027]
    이광필(李光弼)이 적장(賊將)을 속인 술책인데도 저들은 모두 깨닫지 못하였고 : 당 숙종(唐叔宗) 때 절도사를 지냈고 뒤에 천하 병마 도원수를 지냈음.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할 적에 태원(太原)의 전투에서 있었던 일임. 《당서(唐書)》 권110 이광필 열전(李光弼列傳).
  • [註 028]
    이희열(李希烈)이 중사(中使)를 속인 계책인데도 저들은 실로 두려워했습니다 : 이희열은 당 덕종(唐德宗) 때 사람으로 회서 절도사(淮西節度使)를 지냈는데, 이 일은 이납(李納)이 모반했을 때 그를 토평(討平)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당서(唐書)》 권145.
  • [註 029]
    약사(藥師)와 범경(范瓊)이 연주(燕州)·변주(汴州)를 보전할 수 있고 : 약사는 당나라 때의 명장 이정(李靖)의 자(字)임. 당 고조(唐高祖) 때 벼슬이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고 돌궐(突厥)을 비롯하여 토곡혼(土谷渾)에 이르기까지 정벌하여 많은 공을 세웠지만, 큰소리도 많이 하였다. 《당서(唐書)》 권93 이정 열전(李靖列傳), 범경(范瓊)은 당(唐)나라 때 사람인데 사적(事蹟)이 분명하지 않음. 실제적인 대비책이 없이 말만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뜻.
  • [註 030]
    진의중(陳宜中) : 송(宋)나라 말기 사람으로 우승상과 좌승상을 역임하였는데 큰 소리만 쳤을 뿐 실제적인 대비책에는 아무것도 조처한 것이 없어 결국 송나라가 원(元)에게 패망하였고 자신도 점성(占城)에게 죽었다. 《송사(宋史)》 권480.
  • [註 031]
    자공(子貢)이 연(燕)·초(岧)로 돌아다니며 유세(遊說)하여 제후(諸侯)들의 군대로 하여금 오(吳)나라를 쳐부수어 노(魯)나라를 보존시킨 것 : 유세(遊說)로 나라를 보존시킨 경우를 예로 든 것임. 자공은 공자(孔子)의 제자인 단목사(端木賜)의 자(字)인데, 자공이 위기에 처한 노나라를 구제하기 위해 당시 여러 나라의 군주를 설득하여 결국 노나라를 구하고 오(吳)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 《사기(史記)》 권67 중니제자 열전(仲尼弟子列傳).
  • [註 032]
    훼복(卉服) : 풀로 만든 옷으로 오랑캐들의 복장(服裝)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일본 사람들을 가리킨다.
  • [註 033]
    장영(張寧) : 명(明)나라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 나왔던 사신(使臣)임. 세조(世祖) 6년에 귀화인(歸化人) 낭패아한(浪孛兒罕)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를 수감하고 처형하였는데, 그들의 동아리가 보복하기 위해 이를 중국에 무함한 탓으로 중국에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나왔었음. 《세조실록(世祖實錄)》 권19 6년 3월 무인(戊寅).
  • [註 034]
    전조(前朝) : 고려(高麗).
  • [註 035]
    종군(終軍) : 한(漢)나라 사람으로 한 무제(漢武帝) 때 간의 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 그가 남월(南越)의 사신으로 가는 사행(使行)에 끼게 되자, 그때 "긴 포승줄을 주시면 남월왕의 목을 묶어 가지고 오겠습니다." 하였는데, 남월왕이 귀속(歸屬)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남월왕의 정승인 여가(呂嘉)가 따르지 않고 왕과 한사(漢使)를 살해하였으므로 종군도 해를 입고 죽었다. 《한서(漢書)》 권64.
  • [註 036]
    모수(毛遂) : 전국 시대 조(趙)나라 사람. 조나라의 한단(邯鄲)이 진(秦)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자 조나라에서는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연합하여 진군(秦軍)을 격파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평원군의 식객(食客)이었던 모수가 자천(自薦)하여 따라가서 대사(大事)를 성공시켰다. 《사기(史記)》 권76.
  • [註 037]
    강혁(江革) : 왜란(倭亂)을 당하여 피난다니게 될까 걱정된다는 뜻. 강혁은 후한(後漢) 때의 대효(大孝)인데 난을 만나자 자기 어머니를 업고 산 속으로 피란했다가 적(賊)을 만나자 너무도 애처롭게 간청하였으므로 적도 해치지 않고 갔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9 강혁전(江革傳).

○前敎授趙憲上疏, 不報。 日本書契悖逆, 使偕來, 乃自沃川, 白衣徒步, 詣闕上疏曰:

臣竊謂, 士不適用, 固宜括囊, 而綱常墜地, 則或有憤惋者。 魯仲連一入邯鄲之圍, 力沮帝之議, 而兵爲之退縮五十里。 夫邯鄲, 堅城也; 三, 强國也。 戰國君將, 力於守國, 故能堅壁數月, 以待魯連之奮義矣。 遠稽東方, 自箕王浮海之後, 以及三國、前朝之亡, 了無背城一戰之時。 臣之愚意以爲, 橘光連玄蘇西渡之日, 實我邯鄲之被圍也。 嘐嘐多言, 終不見信於君相, 自悼行己無狀, 深愧於古之魯連, 永矢杜口, 畢命溝壑, 而今聞, 東槎纔返, 賊船栖海。 陷我射天, 則自明無路; 乘機猝發, 則邊圉踈虞。 必爭之地, 迄無充國之經略; 勿迎使, 又無夢周之抗議。 誤國, 垂陷; 匹夫熒惑, 羞辱滋深。 綱常日墜, 君父禍急, 心崩膽割, 怒髮衝冠, 不得不雪涕而言之也。 臣謹按, 《周易》 《復》之初九曰: "不遠復, 無祇悔, 元吉。" 《程傳》曰: "陽, 君子之道, 故復爲返善之義。 初剛陽來, 復處卦之初, 復之最先者也。 是不遠而復也。 惟失之不遠而復, 則不至於悔, 大善而吉也。" 《比》之卦辭曰: "不寧方來, 後夫凶。" 《程傳》曰: "人之不能自保其安寧, 方且來求親比。 得所比則能保其安。 當其不寧之時, 固宜汲汲以求比。 若獨立自恃, 求比之志, 不速而後, 則雖夫, 亦凶矣。 夫猶凶, 況柔弱者乎?" 臣竊料, 今日之事, 安危成敗, 只在呼吸之間, 眞可謂不寧之時矣。 惟有亟斬虜使, 飛奏天朝, 分致賊肢于琉球諸國, 期使天下, 同怒以備此賊一事, 猶可以補復前過, 而庶免後時之凶, 萬一有興復於旣衰之理。 伏惟聖主, 亟察凝思, 不以人廢言, 勿緩宗社大計幸甚。 李滿住之一紙資級, 見失於上國, 而張寧來責之日, 光廟爲之無顔。 雖貢馬謝罪, 而滿住討滅之行, 至試武科千有八百, 盡輸一國之力, 而士馬物故, 亦略相當。 況此秀吉假道射天之惡, 不啻滿住, 而飛辭陷我之術, 當不止於中樞資級矣。 若天朝不悟其姦, 盛發唐朝之怒, 則當有李勣蘇定方之師, 來問之罪矣。 聖主將何以謝過, 臣民將何以免死乎? 狡虜之辭, 極愚極驕, 智士多策, 其必敗屠滅諸島, 殺人如麻, 群下多怨其荼毒。 若我有謀, 聲罪絶之, 以折其心, 使我士民, 預曉討賊之義, 則人思奮挺, 以撻其背矣。 公孫述遣使約和, 而隗囂斬之, 則不敢西窺, 撒離喝有使使降, 而劉子羽斬之, 則不敢來追。 大邦積養之士, 豈少於子羽敗軍之僅有百十者, 而不能自振其意義乎? 或者以爲: "秀吉已滅宗盛長之族, 而使其腹心平義智代之。 栖兵對馬, 積謀陰襲, 捨我不攻, 而先窺上國, 必無之理。 雖或緩奏, 可以無咎。" 是乃不思之甚者也。 臣竊聞被俘人之言, 賊輩將我國人迭賣于西南蠻諸島(以)及兩浙, 而又被轉賣還于日本云, 是其客商往來, 如梭之驗也。 狡虜答我之書, 旣極廣張其聲勢, 況於南洋諸島, 其不誇耀威武, 期使恇怯乎? 臣恐允吉之船, 初泊對馬之日, 彼必先播于南洋以謂, 朝鮮之通聘, 期以制服乎諸島矣。 兩浙將吏, 其獨不聞, 而不奏于天子乎? 中朝之致疑, 固已久矣。 況此狡虜, 常以掩襲不備爲利, 若我邊將粗能設備, 截然難犯, 則彼必趨利於上國矣。 其必揚言于 謂, 已制服朝鮮, 領兵以來, 則露布急傳, 半月奏京矣。 市有猛虎, 三聽致疑; 殺言三至, 母投杼。 我國介在虎狼國之間, 聖學未至於一以貫之之域, 其爲皇上之不爲母, 未可期也。 假使中國北被㺚虜隳突, 南虞日本之寇, 未暇謀之東師, 而中朝謂我淪胥爲夷, 老悔之, 史氏書之, 則堂堂禮義之國, 不亦羞辱之甚乎? 祖宗二百年之恥, 僅能竭誠昭雪, 而 殿下千萬世之辱, 未及騰時澡洗, 則三綱五常, 將懼自此墮地, 而祖宗在天之靈, 亦必有殄享之悲, 而臣民匪敎之徒, 難可責以死長之道矣。 一使之遲發, 而有萬事瓦裂之虞, 懷利文過之臣, 雖或拱手招禍, 以爲激怒之可虞, 而城市野民之言, 萬口一談, 咸謂不斬則不振。 夫豈無是理, 而孔子請誅熒惑者乎? 夫豈無是理, 而胡銓謂之不戰氣倍乎? 項籍善戰, 固非漢王之敵, 而董公一陳正名之論, 則廣武十罪之責, 不能答一辭, 以騰歌乎軍。 石勒强梁, 自謂凌駕乎弱, 而一焚書幣, 則雖無祖逖, 而不敢一窺乎。 蓋辭直義壯, 乖悖之氣, 自然摧挫也。 臣竊仰惟, 殿下莅國之道, 自反而常直, 殿下事大之誠, 可質於神明; 殿下恤隣之義, 無愧於柔遠; 殿下保民之仁, 常慮匹夫之有傷; 殿下固邊之猷, 常使自守而無侵, 正曾子所謂, 我以吾仁, 我以吾義者也。 若能擴而大之, 則雖 富强, 吾無所畏矣, 況若秀吉匹夫之勇耳? 包劎弑君之日, 人思顯戮; 斬人如麻之際, 鬼議陰誅。 黥椓無辜, 不啻三苗, 窺我大邦, 不獨鬼方。 天下同怒, 則不勞交鋒, 而逆自斃矣。 簡書不亟, 則賊發不虞, 而中原震驚矣。 子思曰: "凡事豫則立, 不豫則廢, 事前定則不跲。" 若以聖主不豫之故, 盤手串人之刑, 旁及於琉球占城, 以致漸流於中國, 則天下後世, 謂殿下何如乎? 臣竊以爲, 報變請討之奏, 遲發一日, 則決有百年之憂; 遲發一旬, 則決有千歲之禍也。 嗚呼! 靖康建炎之間, 謂不可與虜和者, 楊時李綱張浚胡安國, 而目之爲黨, 擯棄不用, 奸臣誤國, 萬古如斯。 聖主讀史之際, 亦必慨然於君矣。 今玆禍亂之迫, 無異於此。 馬植纔還, 而兵渡河; 王倫濟江而兀朮南趨。 枕人睡不疑而謂虜情之可信者, 斷然無目者也。 尾箕之分, 熒惑方臨, 是實也先入寇之兆; 東南之地, 無月不震, 是嶺湖受兵之象; 未有不爭南島舟路, 而先趨畿海之理。 臣之愚意, 莫如早擇一代名將, 暗推亞夫之轂, 輕裝簡士, 由武關直下, 俾於賊來必爭之地, 暗備燒船之具, 兼持潔牲、精幣, 密祈回風于頭流、滄海之神。 對敵交兵之日, 仗一黃蓋, 佯取糧船請降, 實以燥荻, 間以火藥, 俟其首尾幾接, 付火以走, 則其所持精選之鋒, 必化爲烈焰矣。 書生談兵, 近於僭率而可笑, 惟在智將隨機應變矣。 乃令大小將士, 俱聲秀吉之罪, 俾知從行之卒亦無所容於天地之間, 中有智者設謀, 勇士還悔, 乘機斬獻者, 謂奏中朝, 請分封爲國相。 島主一依源氏舊制, 因許不廢《禹貢》之卉服, 則射之矢、斬之劎, 必集於其身矣。 如此則雖有餘兵, 不敢西棹, 畿海之間, 自爾無虞矣。 若不如此, 而聽其縱橫去來, 震搖恬憘之地, 則擔負之民, 其勢易散; 飢困之卒, 望風奔潰, 而浿之間, 擧被蹂躪之禍矣。 嗚呼! 之於, 日以侵削爲謀, 而秦檜之徒, 深諱虜情, 惟恐一時君將之或悟。 其有回諭之詔, 字大如掌, 而也急開急卷, 使人不見, 惟以割地一言爲幸, 以懈攻戰之備。 若非諸將之戮力者, 則龜玆之域, 亦不可保矣。 今玆秀吉之於我國, 日以呑噬爲計, 至殺對馬島主, 而暗遣腹心平義智代守, 奪我左臂, 諜報無路。 又使信長踵門窺覘, 俾探處置, 回謝一事, 以爲猝發之計。 雖使是月, 藏兵于此島, 而上下諱言, 不知有大擧之虞, 則其藏禍心慘矣, 而我乃盛備供億, 無異乎華使支待。 其於賊使之分二路上來也, 湖嶺各邑, 盡率吏民, 出候于院驛, 留時延日, 一不顧防備之事, 雖有顔眞卿之先見者, 未暇爲浚濠完城之計。 彼對我使, 殊薄以草具, 而我乃先示奪氣之色, 使其奴, 驕我將吏如賤隷, 不敢爲一言責以禮義, 則其所謂厚待之敎, 實所以縮我國命, 而永不能自振也, 傷我民力, 而俾不敢却敵也, 豈非爲痛哭之地乎? 尤可震駭者, 先來譯官以將秀吉悖謾之辭, 播于一道, 以及湖西南, 士莫不誦、民莫不聞, 而朝廷之上, 惟恐廣布, 先事豫謀之策, 一一不擧, 陳東歐陽澈之疏, 懼或出於草澤, 豈意聖主亦陷於之術乎? 《周書》曰: "作德, 心逸日休; 作僞, 心勞日拙。" 彼有射天之語, 而我乃敬之; 彼有呑我之計, 而我乃款之, 是非誠信相與之道, 而終不諱其內政外備之日拙也, 斯非取侮於醜虜之道乎? 臣恐不斬, 則將無以致謝于上國, 而申令於三軍也。 嗚呼? 陸賈正色, 而屈尉佗之箕倨; 范仲淹焚書, 而折元昊之悖慢。 彼皆單車屛從, 而壯我王氣者也; 片言據理, 而挫彼凶鋒者也。 曷嘗如誠一之輩, 載糧千石, 持國樂娛賊, 而竝使軒轅蚩尤之具, 悉爲虜人之所得乎? 兼其易服循環之卒, 乃是李光弼欺賊將之術, 而彼皆不悟; 陳船耀兵之謀, 乃是李希烈欺中使之計, 而彼實恇怯。 五月不見者, 乃所以困縶也; 陳饌躬視者, 乃所以誘心也; 陶盃飮破者, 示終必敗盟也; 抱子相持者, 視我如嬰兒也。 賊酋姦譎有萬不測, 而彼乃還啓謂賊不來, 以懈將士之心。 時所謂一德大臣, 則盛稱王倫善於奉使, 俾竊金章之寵, 雖辱國無狀者, 附會權奸, 則可以次第同升矣, 將何以勸善懲惡乎? 此輩鴟張, 白日欺明, 懼有公論或激, 則乃謂秀吉非眞叛逆, 是可以寒浞爲純臣乎。 又謂通信一行, 深覺彼情, 而豫爲之備, 則非小助也。 捨置嶺南不備, 是欲捐乎? 先備三敗將于湖南重望, 一則善事, 而一則奴事永慶者也。 是謂藥師范瓊可保, 而陳宜中之將, 可坐而策也則所謂豫備者, 果何術也? 視湖西、嶺南, 則疲於奔命, 而邑里蕭然; 視湖南一方, 則梨津一焚, 他鎭枵然, 宵旰之憂, 此時政急。 雖得實經行陣之人, 勢難及措, 而諂佞之臣, 自負誤國大罪, 惟恐主計之或悟, 不汲汲於奏變, 不求援於與國, 只管安坐聽命於狡虜。 使彼謀完計得, 坐策萬全之後, 乃欲待聲息遣將, 驅市民以戰, 則長驅之勢, 實不可遏, 而士不豫習, 以其將與敵矣。 季, 倭賊鎭江入嶺湖之間, 永同化寧無不被兵燹之禍, 況此勍敵不止於拔都者, 則如臣魯鈍者, 何地逃死乎? 等是一死, 寧死之路, 以學子貢遊說, 期使諸侯之軍, 擣之虛, 而存我魯國, 則聖主活臣之恩, 庶幾小報, 而天生男子之意, 亦可自副矣。 海南萬里, 如無肯行之人, 則臣願假一節, 充備末价, 星夜西馳, 以頭, 馘獻于天朝, 竊效包胥之哭, 以明我王心事。 幸蒙皇上矜憐, 則借馬南陲, 分致賊肢于南洋諸國, 諭以整兵俟便, 如聞秀吉西寇, 則俾駕艅艎, 傳檄于日域, 而倒戈逆攻者, 自出於卉服矣。 踈遠賤臣敢請爲踰分之行, 時事猝急, 切懼不豫以致敗。 玆於皇朝, 竊草奏變之狀, 琉球國王及日本對馬遺民豪傑中, 又草移文、移檄勦捕賊使及嶺湖備之策, 又皆隨事箚記, 謹具別紙七幅, 藏在懷袖間。 事大、交隣之規, 雖未解貫, 不直則道不見, 曾有訓。 自謂如此, 則事理自明, 辭直義壯, 可以感人, 而狂踈僭越, 未敢徑進。 倘蒙聖主曲採蕘言, 卽使世叔子産, 討論而潤色, 卽令槐院朝寫午封, 別遣重臣馳奏, 使其理裝一旬之 內, 先謄一本, 付譯官一人, 使與賤臣, 先達于, 以及燕京, 庶幾中朝君臣, 感我辰告之誠, 遍曉諸鎭、諸國, 豫防而密措, 天下同怒, 期使此賊, 不容於覆載, 則臣雖死於道路, 亦可以脫臣老母於江淮俘徒之辱矣。 頑雲不解, 天日常陰, 臣不勝憂國憂家, 感憤血泣之至, 謹奉危疏, 昧死以聞。

又貼黃, 略云:

機事不密, 則害成。 今者賊使閃舌者, 將入東平, 臣之封章, 吁亦晩矣。 願留臣疏, 密措機策, 無使東平人購得, 無使臣名掛於朝報, 幸甚。

疏入不下。 又上疏曰:

臣竊謂, 藩侯警急簡書, 不可以不亟也; 匹夫熒惑, 身首不可不異處也。 故逖聞呑虞消息, 不勝怒髮衝冠, 跋涉山河, 瀝血刳肝, 期見聖主之不遠而復。 上不見過於中朝, 內貽恥於宗廟, 外不取侮於醜虜, 下不嫁禍於生靈, 則平生讀書之力, 似可以一扶綱常之重。 上可以免吾君之憂; 下可以免臣母江淮之浮, 誠能若是, 則茅焦鼎鑊, 謂可甘蹈, 而封章三日, 未有所聞。 雖知聖主寬容不欲罪臣, 而臣之活國、活母之計, 只恃今日而已。 邊塵一驚, 則遠歎何及, 天責一臨, 則隱憂何補? 臣不得不留臣七紙以走, 冀紆明主悔時之一察也。 臣竊計, 狡虜反覆, 有萬難測, 厚遇之使, 而謂無南寇之辱, 則眞箇是脚、壑之愚者也。 以其君則斬艾而無惜; 以其隣則窺覬而不攻, 古往今來, 決無是理, 臣所以必請名將, 暗備東南維者也。 臣又聞, 琉球致書, 爲我而事云, 此聲久發, 其可謂中朝之不聞乎? 之師, 所以東來者, 只爲之謀, 絶新羅入貢之路也。 狡虜之揚言于天下也, 其必謂我賓服矣。 我於皇朝, 恩義不薄, 見彼悖辭, 義當朝聞夕奏, 而遲延時月, 只欲順付於節使之行, 則人馬猥繁, 決無先春赴京之理, 而狡虜江浙之檄, 則必有半月北飛之虞矣, 史氏之筆, 曷可昭洗乎, 張寧之責, 曷可圖免乎? 天朝恩愛, 方深眷眷, 唐帝一怒, 所不忍言矣。 俾滅建州衛, 乃是皇朝家法, 若不諒我力, 而必使討滅日本, 則以我孱兵, 自守不暇, 曷有餘力, 可以東征乎? 洪茶丘八萬之兵, 金方慶糾集之師, 猶不得志於東洋, 而死傷過半。 況若天朝不假茶丘, 而我國又無方慶之亞, 則其謂不敢東討之際, 天朝之怒, 實不可測矣。 素愛之子, 而少拂父意, 則其父之怒必深。 此時之師, 其可資日本而却之乎? 臣之所大震駭者, 之師, 未掃, 而移徙十萬餘戶於之間, 水陸困頓之民, 豈望盡活乎? 臣有一繼母年老病甚, 負避無地。 賊使煦濡之日, 聖主雖自以爲晏然無虞, 而乘機猝發之際, 其必盡國力於東隅, 而西方赫臨之師, 則更不可遏矣。 臣切欲力耕聖域, 以養病母, 冀免困頓之行, 旣爲初筮之吉, 而猶不厭再三之瀆。 伏願聖主, 藏臣疏一通, 以待事至而更察, 則臣之爲國、爲母惓惓奔走之意, 雖或轍耕, 而不爲迂闊矣。 臣之尤所衋傷者, 今此之來, 路由賊使所向二道之中, 備聞彼之奴, 皆肆陵轢, 有若上國之使, 而我之官吏, 一切喪氣, 罄一道之力, 以爲供億, 而全忘防備之事。 只此使价之往來, 可占他日之大敗, 而朝無胡銓之論; 野絶陳東之議, 但有黃李沃之疏, 出於洛下, 將使流離顚沛之秋, 一無挺身赴急之人, 則聖明之所倚以爲天祥秀夫者, 終有何人哉? 季必殺黨錮諸賢, 亡必投淸流於濁河, 此是盛世之所不願聞者也。 鄭夢周仕前朝危疑之際, 而猶不避嫌疑, 廣延國士, 談論不休。 其詩曰: "座上客常滿, 樽中酒不空。" 任事之臣, 閉門兀坐, 不集衆思, 而能扶其國者, 古未之有也。 惟聖明密察股肱之有無, 屛去致疑之端, 以杜讒賊之口, 則社稷之大幸也。 嗚呼! 終軍弱冠而請纓; 毛遂自薦而脫穎, 彼豈專忘廉恥者乎? 只見冠屨之倒置, 或悶宗國之垂亡, 而衣冠、骨肉擧將淪陷於腥膻。 故不得不犯笑侮、出氣力, 求保數歲之安, 而受間金者, 勸王, 故不修攻戰之備, 以致臨淄之忽爲地, 而松栢之歌, 萬古悲涼。 臣身方在事外, 宜無肉食之憂, 而四面受敵之日, 大懼江革之無地負母。 聞變數旬, 夜不能寐, 抽得先事之戒, 冀補苞桑之計。 突缺棟焚之秋, 幸思賤臣之不我遐棄, 幸甚幸甚。 臣以寒生, 抵洛數日, 囊橐已空, 不忍方朔之飢。 自此長辭, 瞻天望聖, 無任激切屛營之至。

仍附奏七條, 一言携離勍敵之行, 須趁其衆心未附, 而必分之首, (手)〔身〕 露布于天下, 與天下之人, 同聲飛檄, 欲乘虛擣都, 如此之言, 四面東飛, 則秀吉亦不敢爲越海窺我之計矣。 二擬奏變皇朝表, 三擬與琉球國王書, 四擬諭日本國遺民父老書, 五擬諭對馬島父老書, 六擬斬賊使罪目, 七擬嶺湖備之策略云云。 伏闕下, 待疏不下, 以頭叩石, 流血滿面, 觀者色沮, 猶不下, 乃封進此疏, 政院不受。 諫院啓曰: "趙憲陳疏, 而政院不受。 雖不知疏中措辭之如何, 大槪似有壅蔽言路之端。 請色承旨罷職。" 上只允推考。 痛哭而退。 【丁酉之變, 我國有一士人擄入日本, 丐食民間, 遇一老僧言: "秀吉於朝鮮爲一時之賊也; 於日本爲萬世之賊也。 當時若有一二義士, 傳檄擧義, 則秀吉之禍, 必不至若是" 云云。】 之備策中, 所薦十餘人, 在平時皆未知名。 及後亂作, 竟獲其用。 其中如金時敏趙熊等, 尤表表可稱。 沃川, 遣子完堵, 遺書于平安監司權徵延安府使申恪, 勸以浚濠完城, 預修戰守之備。 見書大笑曰: "黃海平安道豈有來之理? 歸語汝爺, 愼勿復出此言。" 則然其言, 大修器械, 城內引洑流, 作大池, 及後亂作, 李廷馣守城得全。 州人追思預先備戒之功, 竝立碑以旌之。


  • 【태백산사고본】 6책 25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02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 / 군사(軍事)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