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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3월 1일 정유 4번째기사 1591년 명 만력(萬曆) 19년

김성일이 왜인의 답서가 거만하다 하여 현소에게 항의하다

왜인의 답서(答書)에,

"일본국 관백(關白)은 조선 국왕 합하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글은 향불을 피우고 재삼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우리 나라 60여 주는 근래 제국(諸國)이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고서 조정의 정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격을 견디지 못하여 3∼4년 사이에 반신(叛臣)과 적도(賊徒)를 토벌하여 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삼가 나의 사적(事蹟)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小臣)이지만, 일찍이 나를 잉태할 때에 자모(慈母)가 해가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相士)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 하였는데, 이토록 기이한 징조를 인하여 나에게 적심(敵心)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여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토공(土貢)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本朝)가 개벽한 이래로 조정(朝政)의 성대함과 수도(首都)의 장관(壯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한평생이 백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 곳에만 오래도록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先驅)가 되어 입조(入朝)한다면 원려(遠慮)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近憂)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입조하는 무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軍營)에 임한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盟約)을 굳게 할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삼국(三國)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정(國政)을 관장하는 무리는 전일의 사람들을 다 바꾸었으니 【관속(官屬)을 바꾸어 전의 호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러서 나누어 주겠습니다. 나머지는 별지에 있습니다. 몸을 진중히 하고 아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하고, 끝에 ‘천정(天正) 18년 경인 중동(仲冬) 일(日) 수길(秀吉)은 받들어 답서한다.’고 쓰여 있었다.

김성일(金誠一)은 답서의 내용이 거칠고 거만하여, 전에는 전하(殿下)라고 하던 것을 합하(閤下)라 하고 보내는 예폐(禮幣)도 ‘방물(方物)은 받았다.’ 하였으며, 또 ‘한 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으로 들어간다.’느니 ‘귀국이 선구가 되라.’는 등의 말이 있음을 보고서 ‘이는 대명을 빼앗고자 하여 우리 나라로 선구를 삼으려 한 것이다.’ 하고는 현소(玄蘇)에게 바로 서신을 보내어 대의(大義)를 들어 깨우치고 ‘만일 이 글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이 있을 뿐, 가져갈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현소가 서신을 보내어 사과하면서 글을 짓는 자가 말을 잘못 만든 것이라 핑계하였다. 그러나 전하와 예폐 등의 글자만 고쳤을 뿐, 기타 거만하고 협박하는 식의 말에 대해서는 ‘이는 대명에 입조(入朝)한다는 뜻’이라고 핑계대면서 고치려 하지 않았다. 성일이 두세 차례 서신을 보내어 고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황윤길허성(許筬) 등은 ‘현소가 그 뜻을 스스로 이렇게 해석하는데 굳이 서로 버티면서 오래 지체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성일이 논쟁하였으나 관철하지 못하고 마침내 돌아왔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01면
  • 【분류】
    외교-왜(倭)

答書云:

日本國關白, 奉書朝鮮國王閤下。 雁書薰讀, 卷舒再三。 吾國六十餘州, 比年諸國分離, 亂國綱、廢世禮, 而不聽朝政, 故予不勝感激, 三四年之間, 伐叛臣、討賊徒及異域遠島, 悉歸掌握。 竊諒余事蹟, 鄙陋小臣也。 雖然, 余當托胎之時, 慈母夢日輪入懷中, 相士曰: "日光所及, 無不照臨。 壯年必八表聞仁聲, 四海蒙威名者, 何其疑乎?" 依此奇異, 作敵心, 自然摧滅, 戰必勝、攻必取。 旣天下大治, 撫育百姓, 矜悶孤寡, 故民富財足, 土貢萬倍千古矣。 本朝開闢以來, 朝政盛事, 洛陽壯麗, 莫如此日也。 人生一世, 不滿百齡焉, 鬱鬱久居此乎? 不屑國家之遠、山河之隔, 欲一超直入大明國, 欲易吾朝風俗於四百餘州, 施帝都政化於億萬斯年者, 在方寸中。 貴國先驅入朝, 依有遠慮無近憂者乎? 遠方小島在海中者, 後進輩不可作容許也。 予入大明之日, 將士卒望軍營, 則彌可修隣盟。 余願只願顯佳名於三國而已。 方物如目錄領納。 且至于管(館)〔領〕 國政之輩, 向日之輩皆改其人, 【易置官屬, 非前名號故也。】 當召分給。 餘在別書。 珍重保嗇。 不宣。

【末書天正十八年庚寅仲冬日秀吉奉復書。】

誠一見書辭悖慢, 嘗稱殿下, 而稱閤下, 以所送禮幣爲方物領納。 且一超直入大明國, 貴國先驅等語, 是欲取大明, 而使我國爲先驅也。 乃貽書玄蘇, 譬曉以大義云: "若不改此書, 吾有死而已, 不可持去。" 玄蘇有書稱謝, 諉以撰書者失辭, 但改書殿下、禮幣等字, 其他慢脅之辭, 託言此是入朝大明之意, 而不肯改。 誠一再三移書請改, 不從。 黃允吉許筬等以爲: " 自釋其意如此, 不必相持久留。" 誠一爭不能得遂還。


  • 【태백산사고본】 6책 2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01면
  • 【분류】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