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돌아오다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왜사(倭使) 평조신(平調信) 등과 함께 왔다.
당초 윤길 등이 지난 해 4월 바다를 건너 대마도에 도착하였는데, 일본은 당연히 영접사를 파견해서 사신 일행을 인도하여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에 김성일(金誠一)은 그들의 거만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의논하고 1개월을 지체한 뒤에야 출발하였다. 일기도(一岐島)와 박다주(博多州)·장문주(長門州)·낭고야(郞古耶)를 거쳐 계빈주(界濱州)에 당도했을 때에야 도왜(導倭)의 영접을 받았다. 왜인은 일부러 길을 돌아 몇 달을 지체하고서야 국도(國都)에 도착하였다.
사신 일행이 대마도에 있을 때 도주(島主) 평의지(平義智)가 국본사(國本寺)에서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자 하였는데, 국본사는 산 위에 있었다. 사신들이 먼저 가 있는데 의지가 가마를 탄 채 문을 들어와 뜰 아래에까지 와서 내리자 성일이 그의 무례함에 노하여 즉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니, 허성(許筬) 이하도 따라서 일어났으나 윤길은 그대로 앉아서 잔치에 임하였다. 성일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자 다음날 의지가 그 까닭을 듣고서 미리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시중을 든 왜인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와서 사죄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로 왜인들이 성일을 경탄(敬憚)하여 보이기만 하면 말에서 내려 더욱 더 깍듯이 예를 지켜 대접하였다.
그들의 국도 대판성(大阪城)에 도착해서는 큰 절에 숙소를 정하였는데, 마침 평수길(平秀吉)이 산동(山東)으로 출병하였다가 몇달 만에 돌아온데다 또 궁실(宮室)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즉시 국서(國書)를 받지 않아 5개월을 지체한 뒤에야 명을 전하였다.
그들 나라에서는 천황(天皇)이 제일 높아 수길 이하가 모두 신하로 섬기지만, 국사는 모두 관백(關白)이 통괄하였고 천황은 형식적인 지위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깍듯한 예절로 받들고 의장(儀章)도 특별하여 부처를 받들 듯이 하였다. 관백이라고 한 것은 곽광전(霍光傳)에 ‘모든 일을 먼저 보고받는다[凡事階先關白]’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때문에 수길를 대장군이라 부르고 왕(王)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후일 대군(大君)이라 칭하였다.】 이는 본래 천황을 국왕전(國王殿)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신을 접대함에 있어서 가마를 타고 궁문을 들어가도록 허락하고 가각(笳角)001) 을 울려 선도하였으며 당(堂) 위에 올라가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 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상사(上使)와 부사(副使)에게 각기 은 4백 냥을 주고 서장관 이하는 차등을 두어 주었다. 사신이 돌아가게 해줄 것을 재촉하자 수길은 답서(答書)를 즉시 재결하지 않고 먼저 가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성일(誠一)이 ‘우리는 사신으로서 국서를 받들고 왔는데 만일 답서가 없다면 이는 왕명을 천하게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고, 물러나오려 하지 않자 윤길(允吉) 등이 붙들려 있게 될까 두려워하여서 마침내 나와 계빈(界濱)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비로소 답서가 왔다. 그런데 말투가 거칠고 거만해서 우리 측에서 바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성일은 그 답서를 받지 않고 여러 차례 고치도록 요구한 뒤에야 받았다. 지나오는 길목의 여러 왜진(倭陣)에서 왜장(倭將)들이 주는 물건들을 성일만은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부산으로 돌아와 정박하자 윤길은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馳啓)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상이 인견(引見)하고 하문하니, 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윤길은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하였는데, 이는 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었다. 당시 조헌(趙憲)이 화의(和議)를 극력 공격하면서 왜적이 기필코 나올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윤길의 말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 모두가 ‘서인(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고 하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하니, 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01면
- 【분류】외교-왜(倭)
- [註 001]가각(笳角) : 갈대로 만든 피리.
○通信使黃允吉等, 回自日本, 倭使平調信等偕來。 初, 允吉等以上年四月, 渡海抵對馬島, 日本當送使迎導, 而不至。 金誠一議以不可受其慢, 留一月乃發, 歷一岐島、博多州、長門州、浪古耶, 導倭迎於界濱州。 倭人故迂路留滯累月, 乃抵國都。 其在對馬島, 島主平義智請使臣宴國本寺, 寺在山上。 使臣先赴, 義智乘轎入門, 至階方下。 誠一怒其無禮, 卽起入房, 許筬以下隨起, 允吉仍坐接宴, 誠一謝病不出。 翌日義智聞其故以爲: "從倭不預告。" 斬其頭來致謝。 自是倭人敬憚誠一, 望見下馬, 待之加禮。 到其國都(大板城)〔大阪城〕 , 館于大刹, 適平秀吉出兵山東, 數月以回, 又託以修治宮室, 不卽受國書, 留五月始得傳命。 其國尊其天皇, 秀吉以下皆臣事之, 而國事皆統於關白。 天皇尸位, 而禮事尊奉, 儀章有別, 如奉浮屠。 關白云者, 取霍光傳凡事皆先關白之語, 故號秀吉爲大將軍, 不得稱王, 【其後稱大君。】 以天皇本稱國王殿故也。 其接我使也, 許乘轎入宮門, 笳角先導, 陞堂行禮。 秀吉容貌矮陋, 面色皺黑, 如猱玃狀。 深目星眸, 閃閃射人, 紗帽、黑袍, 重席地坐, 諸臣數人列侍。 使臣就席, 不設宴具, 前置一卓, 熟餠一器, 瓦甌行酒, 酒亦濁, 三巡而罷, 無酬酢拜揖之禮。 有頃, 秀吉入內, 在席者不動。 俄而便服, 抱小兒出來, 徘徊堂上而已, 出楹外招我國樂工, 盛奏衆樂而聽之。 小兒遺溺衣上, 秀吉笑呼侍者, 一女倭應聲出, 乃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使臣辭出, 不復再見。 與上副使各銀四百兩, 書狀以下有差。 使臣促辭歸, 秀吉不時裁答書, 令先行。 誠一曰: "吾爲使臣, 奉國書來。 若無報書, 是同委命於草芥。" 不肯辭退, 允吉等懼見留, 乃發還至界濱待之, 答書始來, 而辭意悖慢, 非我所望也。 誠一不受, 改定數次, 然後乃受。 凡所經諸陣, 將倭所贈, 誠一獨却不受。 回泊釜山, 允吉馳啓情形以爲: "必有兵禍。" 旣復命, 上引見而問之, 允吉對如前。 誠一曰: "臣則不見如許情形。 允吉張皇論奏, 搖動人心, 甚乖事宜。" 上問秀吉何狀, 允吉言: "其目光爍爍, 似是膽智人也。" 誠一曰: "其目如鼠, 不足畏也。" 蓋誠一憤允吉等到彼恇怯失體, 故言言相左如此。 時, 趙憲力攻和議策倭必來, 故凡主允吉之言者, 皆以爲西人失勢, 搖亂人心, 區別麾斥, 以此廷中不敢言。 柳成龍謂誠一曰: "君言故與黃異, 萬一有兵禍, 將奈何?" 誠一曰: "吾亦豈能必倭不來? 但恐中外驚惑, 故解之耳。"
- 【태백산사고본】 6책 2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01면
- 【분류】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