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평 최영경을 하옥하다
전 지평 최영경(崔永慶)을 하옥하였다. 정여립의 난이 일어난 초기에 적의 무리가 길삼봉(吉三峯)이 상장(上將), 정팔룡(鄭八龍)·정여립이 차장(次將)이라고 천명하였었다. 그래서 국청이 드디어 길삼봉의 행방을 심문하여 용의자가 많이 체포되었으나 다들 신원이 증명되어 석방되었다. 그때 적의 무리 이기(李箕)·이광수(李光秀) 등이 말하기를,
"전주(全州) 정여립의 집에 가면 삼봉(三峯)이란 자가 있는데, 나이는 60세쯤 되었고 낯빛은 검으며 몸은 비대하다."
하였고, 혹자는 말하기를,
"삼봉은 나이는 30세쯤 되었고 키는 크며 얼굴은 파리하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삼봉은 나이는 50세쯤 되었고 수염이 길어 배에까지 드리워졌으며 낯빛은 검고 키는 크며 말할 때마다 기침을 한다."
하였다. 그 뒤 적의 무리 김세겸(金世謙)이 말하기를,
"길삼봉은 상장이 아니고 졸병이다. 진주(晋州)에 사는데 나이는 30세쯤 되었고 하루에 3백 리를 달린다."
하고, 또 한 역적은 말하기를,
"삼봉은 본디 나주(羅州)의 양반 집안이다."
하고, 또 박문장(朴文章)이란 자가 있어 말하기를,
"삼봉은 길씨가 아니라 최삼봉(崔三峯)인데 진주의 사노(私奴)이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1년 전에 한 선비가 전주의 만장동(滿場洞)을 지나갔다. 거기에 활쏘기 모임이 있었는데, 최영경이 수석에 앉고 정여립이 차석에 앉았었다."
하였다. 그리하여 뜬 소문이 떠들썩하게 일어났는데, 여러 역적들의 공초 중 최영경의 형모와 근사한 것들을 모아 엮어 ‘길삼봉은 필시 최영경일 것이다.’고 하였다. 이는 호남 사람 양천경(梁千頃) 등이 지적한 것으로 최영경을 해치려는 음모였다. 양사가 처음에 소문을 듣고 곧장 최영경을 가리켜 정여립의 친우라 하면서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잡고 있다고 논하여 관작을 삭탈하기를 청하였다. 뒤에 대석(臺席)에서 발론하는 자가 있자 정언 황신(黃愼)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뜬 소문에 의거하여 사람을 죄주어선 안 된다. 더구나 최영경은 한 도에서 높은 명망을 갖고 있는데 지금 애매한 말을 가지고 죄를 준다면 반드시 한 도의 인심을 잃을 것이다."
하고, 사간 유근(柳根)도 그렇다고 하여 드디어 그 의논이 중지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금구(金溝)의 유생 김극관(金克寬)이 정여립의 처족(妻族)으로 평소에 여립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역적 토벌을 자임하고는 삼봉이 영경이라는 설을 제원 찰방(濟源察訪) 조기(趙騏)에게 전하고 또 어사(御史) 백유함(白惟咸)의 말을 증거로 들었다. 조기가 감사 홍여순(洪汝諄)에게 말하였는데, 진사 양천경(梁千頃)·강현(姜誢)·홍천경(洪千璟) 등이 다 증인으로 거론되었다. 홍여순은 이를 치계하는 한편 경상 우병사 양사영(梁士瑩)에게 이문(移文)하여 형리를 풀어 최영경을 체포하게 하고 또 그 집을 수색하여 선비 이황종(李黃鍾)의 편지를 찾아냈다. 그 편지는 시사를 극도로 비방한 내용으로서 심지어 역옥(逆獄)을 사림(士林)의 화라고까지 하였는데, 양도(兩道)의 감사가 일시에 계문하였다. 그리하여 최영경과 이황종이 모두 나문(拿問)을 입어 옥사가 크게 벌어졌다. 교리 백유함이 소장을 올리기를,
"당초 도성에 과연 사실 무근한 설이 있었으나 믿을 것이 못되었습니다. 신이 호남의 어사로 나아가 진사 김극인(金克仁)과 이야기할 때 우연히 전해들은 소문이 이렇다고 했을 뿐입니다. 길삼봉은 흉적입니다. 신이 만약 그 말을 듣고 조금이라도 단서가 보였다면 스스로 장계(狀啓)했을 것이요 무관한 사람에게 말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 살펴 처리하겠다."
하였다. 최영경이 공초하기를,
"삼봉이란 본디 저의 별호가 아닙니다. 정도전(鄭道傳)의 호가 삼봉이니 이것이 어찌 답습할 호이겠습니까. 서울에 있을 때 역적과 지면 관계가 있었지만 어느 해 이후론 서찰도 통하지 않았는데 어찌 상종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국청이 아뢰기를,
"영경의 호가 삼봉인지 양남(兩南)의 감사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게 한 뒤에 심문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주필(朱筆)로 요어(要語)에다 줄을 친 정여립이 최영경에게 준 편지 한 통을 내리며 이르기를,
"영경의 상자에 이 편지가 있었는데 어찌 임금을 속이려 하는가. 하늘의 그물이 성근듯하나 죄상을 회피하기는 어렵다. 그가 전원에 은거하며 스스로 처사(處士)라고 하면서도 권세가와 줄을 대고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잡고 있었다. 그 아우는 글도 모르는 자인데 고을 수령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 아우 최여경(崔餘慶)은 경명 행수(經明行修)로 발탁되어 현감이 되었는데, 이때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공초하는데 글도 모르고 대답도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상이 크게 놀라와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형문하였는데 그만 사망하였다.】 그리고 조보(朝報)를 남에게 뒤질세라 구해 보았으니 처사가 과연 이와 같을 수 있는가."
하였다. 【이것은 대관의 논의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고 또 유생의 상소에서 나온 말이기도 한데 서찰에 실린 말을 가지고 증명한 것이다.】 최영경이 다시 공초하기를,
"늙고 병든 사람이 새로 상사를 당하여 정신이 혼미한 탓으로 서찰을 주고받은 세월을 기억하지 못해서 이런 착오가 있었습니다."
하니, 국청이 아뢰기를,
"노인은 간혹 잊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 감히 기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또 영경의 책 속에서 나온,
우계에서의 어느날 밤에 범이 바람을 일으키니
선리의 뿌리가 흔들리고 머리 기른 중이 있다
라는 시를 내리며, 이 시의 뜻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영경이 공초하기를,
"신은 본디 시를 모릅니다. 벗 이노(李魯)가 이 시를 말해 주기에 종이에 써놓았다가 우연히 상자 속에 두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정철(鄭徹)이 아뢰기를,
"이 시는 신도 일찍이 들었습니다. 바로 지난 해 종루(鐘樓) 위에 이름을 숨긴 자가 써 붙였던 시입니다. 그가 시를 못 짓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압니다."
하였다. 어느 날 대신(大臣)이 입시했는데 상이 최영경의 옥사가 어떠한가고 묻자, 정철이 아뢰기를,
"전혀 단서가 없습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그가 평고 기절(氣節)을 숭상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효우(孝友)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고 영남의 사론(士論)도 매우 존중한다고 하니, 역모를 꾸몄을 리는 없습니다. 신은 그와 평소에 전혀 모르는 사이여서 감히 사심을 둘 수 없습니다. 단지 들은 바가 이러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아우에게 준 편지를 보건대 과연 우애가 있는 듯하였다."
하였다. 남도(南道) 지방을 탐문해 봤지만 삼봉이란 소문에 대해 끝내 신빙성이 있는 것이 없자, 상이 명하여 석방시켰다. 이튿날 간원이 아뢰기를,
"최영경이 정여립과 편지를 통한 사실을 숨기고 사실대로 공초하지 않았고 또 상종했다는 소문이 있으니, 온전히 석방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다시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하문하기를,
"영경이 역적과 상종했다는 소문이 어디에서 발설된 것인가?"
하니, 정언 구성(具宬)이 아뢰기를,
"경상 도사(慶尙都事) 허흔(許昕)이 ‘지난 해 섣달 그믐날 감사 김수(金睟)와 밤에 이야기하였는데 김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말하였다는 것을 신이 직접 들었기 때문에 아뢴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간 이해수(李海壽) 등이 동일한 말로 아뢰니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최영경이 다시 하옥되어 공초하기를,
"편지를 통한 일은 기억 착오로 잘못 공초하였으니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적과 상종했다는 소문에 대해선 전혀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허흔을 잡아다 물으니, 과연 김수를 끌어대었다. 김수가 당시 병조 판서였는데 국청이 잡아다 국문하기를 청하자 상이 정원에서 문초하도록 명하였다. 김수가 답하기를,
"신이 지난 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마침 도사가 유고(有故)하여 밀양 교수 강경희(姜景禧)를 임시 도사로 수행하게 했는데, 경희가 이 말을 신에게 했습니다."
하니, 허흔을 석방하고 경희를 잡아다 국문하였다. 경희는 진주 판관 홍정서(洪廷瑞)를 끌어대었으므로 또 정서를 잡아왔다. 옥사가 만연되어 영경은 오래도록 옥에 갇혀 있게 되었고 또 그 아우가 심문받다가 죽은 것을 애석히 여겨 질병이 생겼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4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598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인사-관리(管理) / 정론-간쟁(諫諍) / 어문학-문학(文學) / 인물(人物) / 출판(出版)
○朔辛未/下前持平崔永慶獄。 逆變之初, 賊黨首言: "吉三峯爲上將, 鄭八龍、鄭汝立爲次將。" 鞫廳遂尋問吉三峯所在, 疑似者多見捕, 而皆辨釋。 其時賊黨李箕、李光秀等言: "往全州 鄭汝立家, 則三峯年可六十, 面鐵體中豐肥。" 或言: "三峯年可三十, 體長面瘦。" 或言: "三峯年可五十, 髯長至腹, 面鐵體長, 語輒喘發。" 其後賊黨金世謙言: "吉三峯非上將, 乃其卒徒。 居晋州, 年可三十, 日行三百里。" 又一賊言: "三峯本羅州士族。" 又有朴文章者言: "三峯非吉姓, 是崔三峰, 乃晋州私奴" 云。 或言: "前一年, 士人過全州 滿塲洞, 有衆會射, 崔永慶首座, 汝立次座。" 由是浮議紛紜, 有捏合諸賊招, 近似永慶形貌者曰: "吉三峰必是崔永慶也。" 大槪湖南人梁千頃等所指認, 欲害永慶之計也。 兩司初聞行言, 便指永慶爲汝立親友, 論以遙執朝權, 請削官爵。 後有發論於臺席者, 正言黃愼止之曰: "飛語不可據以罪人。 況永慶負重名於一道, 今以暗昧之言非之, 則必失一道人心。" 司諫柳根亦以爲: "然。" 其議遂止。 至是, 金溝儒生金克寬以鄭汝立妻族, 素與汝立不平, 以討逆之論自任, 迺以三峰, 永慶之說, 傳於濟源察訪趙騏, 且以御史白惟咸之言爲証。 騏言于監司洪汝諄, 進士梁千頃、姜誢、洪千璟等, 皆在指証中。 汝諄一邊馳啓, 一邊移文慶尙右兵使梁士瑩, 發吏捕永慶, 且搜其家, 得士人李黃鍾書, 書中極詆時事, 至以逆獄爲士林之禍, 兩道監司, 一時啓聞。 於是, 永慶、黃鍾竝被拿問, 獄事遂重。 校理白惟咸上疏云:
當初都下果有無根之說, 不足據信。 臣巡按湖南, 與進士金克仁相語, 偶傳所聞, 如此而已。 吉三峯, 劇賊也。 臣若聞其言, 小有苗脈, 則當自狀啓, 不但說與閑人也。
答以省疏具悉, 當察處。 永慶供云: "三峯本非身之別號。 鄭道傳號三峯, 此豈可襲之號乎? 在京時, 曾識賊面, 自某年以來, 書札亦不通, 豈有相從之理乎?" 鞫廳啓曰: "永慶號三峰與否, 請令兩南監司, 覈實以聞, 然後隨爲盤問宜當。" 上, 下汝立與永慶書一紙, 以朱筆抹其要語曰: "永慶篋中有此書, 何欺罔耶? 天網恢恢, 渠固難逃。 身居林下, 自以爲處士, 而連通權貴, 遙執朝綱。 其弟目不知書者, 至爲臨民之官。 【其弟餘慶以經明行修, 被擢用爲縣監。 至是辭連被逮。 供時不知文字, 所對荒亂, 上大駭之。 先爲刑訊至死。】 求見朝報, 如恐不及, 處士果如是乎? 【此或出於臺論, 或出於儒疏, 且以書札間言語驗之也。】 永慶再供云: "老病人新經喪患, 精神昏昧, 不記通書歲月, 有此違誤。" 鞫廳啓: "以老人容或忘之, 渠豈敢欺罔乎?" 上又下永慶冊中一詩有 "牛溪一夜風生虎, 仙李根搖有髮僧" 之句, 問此詩何意, 永慶供云: "臣素不解詩。 友人李魯傳說此詩, 書于紙, 偶置篋中矣。" 鄭澈啓曰: "此詩臣亦曾聞, 乃昔年鍾樓上, 匿名子詩也。 渠之不能作詩, 則人皆知之。" 一日大臣入侍, 上問崔獄如何, 澈曰: "了無端緖。 臣之所聞, 渠素尙氣節, 又以孝友著名於世。 嶺南士論亦甚推重, 似無逆謀之理。 臣與渠素昧平生, 不敢有私。 特以所聞如是, 故敢達矣。" 上曰: "見渠與弟書, 果似友愛者矣。" 及按問南中三峯之說, 終無可據, 上命釋之。 翌日諫院啓曰: "崔永慶與汝立通書, 則諱不直招, 且有相從之說, 不可全然放釋。 請更鞫定罪。" 上不允。 仍問: "永慶與賊相從之說, 出於何處耶?" 正言具宬啓曰: "臣親聞慶尙都事許昕言前年除夕, 與監司金睟夜話, 睟有此語云, 故啓之矣。" 大司諫李海壽等, 同辭以啓; 上卽允之。 永慶再下獄供云: "通書事出於錯記, 萬死無惜。 與賊相從之說, 則全無此事。" 乃拿問許昕, 昕果引金睟。 睟時爲兵曹判書, 鞫廳請拿問, 上命自政院招問。 睟對曰: "臣去年巡行列邑, 適都事有故, 密陽敎授姜景禧攝都事從行, 景禧以此語語臣矣。" 乃釋許昕, 而拿問景禧, 景禧引晋州判官洪廷瑞。 又拿廷瑞來, 獄事蔓延。 永慶久繫牢獄, 又悼其弟刑死, 疾已作矣。
- 【태백산사고본】 6책 24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59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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