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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23권, 선조 22년 11월 1일 을사 10번째기사 1589년 명 만력(萬曆) 17년

조헌을 방면하여 향리로 돌아가도록 명하다

조헌(趙憲)을 방면하여 향리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조헌이 유배(流配) 중에 있으면서 조정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감사(監司)를 통하여 소장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형(荊) 땅 사람이 박옥(璞玉)을 안고 세 번이나 발꿈치가 잘렸어도 징계되지 않은 것066) 은 품고 있는 것이 옥이기 때문이었고, 장준(張浚)067) 이 적소에 있으면서 열 번이나 소장을 올리면서도 중지하지 않은 것은 원하는 것이 충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이 죽지 않은 것 또한 천지와 같은 성은(聖恩)을 입은 것입니다. 해산(海山)의 황폐한 역참(驛站)에도 해와 달이 비추지 않는 데가 없으니 의리상 입을 다물고 명을 편히 여기면서 시사(時事)가 끝나는 것을 지켜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천상(天象)을 우러러 살펴보면 형혹성(熒惑星)이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을 관통하여 남두(南斗)에 들어간 지 열흘이 넘었고 낭성(狼星)이 또 광채가 있으니, 옛날 서적에서 찾아보면 모두 병상(兵象)에 관계됩니다. 《춘추(春秋)》의 일식과 역대의 성변(星變)은 반드시 천자에게만 해당될 뿐만 아니라, 흔단이 있는 나라는 실로 패망을 당해왔습니다. 성상(聖上)의 총명으로 어찌 이를 생각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멀리서 듣건대, 왜사(倭使)가 반년 동안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면서 패악한 말을 함부로 하여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한다고 말하여도 온 조정이 두려워하여 한 사람도 지론(持論)을 주장하여 원호(元昊)068) 의 간사함을 꺾는 자가 없다 하니, 조선(朝鮮)의 사기(士氣)가 이처럼 꺾일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는지라 신은 목에 음식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더욱이 신의 스승이 죽은 뒤로는 독서한 사람이 우리 임금의 좌우에 있지 아니함을 더욱 한탄하게 됩니다.

예로부터 승부의 형세가 어찌 군사의 강약(强弱)에만 달려 있을 뿐이겠습니까. 춘추(春秋) 때의 열국(列國) 중에 초(楚)나라가 막강하였으나 제 환공(齊桓公)관중(管仲)을 임용하여 의리에 의거하여 지론(持論)을 주장하니 소릉(召陵)의 군사가 전쟁을 하지 아니하고 맹약을 하게 되었고069) , 항적(項籍)은 싸움을 잘하여 천하에 대적이 없었으나 한왕(漢王)동공(董公)의 말을 들어070) 명분있게 군사를 출동시키니 해하(垓下)에서 군사가 흩어져 비가(悲歌)를 부르고 스스로 목찔러 죽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시역(弑逆)의 죄를 지고 있어서 천지에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가 기세를 부릴 즈음에는 혹 바람과 우레를 부릴 수도 있으나 인도(人道)에 순응하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도 도와주지 않는 것이니, 여기에서 도의(道義)의 기운이 1만 명의 군사보다 장대함을 알겠고 어진 자는 적이 없다는 맹자(孟子)의 훈계가 더욱 분명합니다. 당당한 우리 나라가 부여받은 은택(恩澤)이 다하지 않아 또한 스스로 지킬 수 있는데 어찌 죽음에 몰아넣는 술책에 빠져 억지로 화친 요청에 부응해야겠습니까.

원하건대, 오늘날 세상에서 왕손만(王孫滿)071) 과 같은 사람을 가려서 사자에게 말하게 하기를 ‘너희들이 우리의 신사(信使)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강하다 하여 몰래 군사가 가서 습격할까 두려워하여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약한데다가 흉년이 든 것을 다행하게 여겨 침략 유린하려고 해서 그러는 것인가. 몰래 군사를 보내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조선조(祖先朝)로부터 하지 않는 바인데 내 대에 와서 차마 전대의 아름다운 덕을 말살할 수 있겠는가. 이웃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겨 침략하는 것은 사서(史書)에서도 부도(不道)하다고 기평(譏評)하였다. 너희 나라가 새로 이루어져 안정되지 못한 시기에 또 천하에서 이 경계를 범하려 한단 말인가. 아비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자는 공자(孔子)·맹자(孟子)가 배척한 바이다. 원왕(源王)이 죽은 일에 대해 내가 자세히 알지 못하니 내가 사신을 교통(交通)하고자 하나 우리 경사(卿士)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만일 내가 회답하지 않는 것에 성내어 기필코 군사를 동원하려 한다면 내가 덕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의 장사(將士)들이 자못 임금을 사랑하는 의리를 알고 변방을 지키는 군졸들도 부모의 은혜를 알고 있으니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 성을 굳게 지키며 마땅히 힘을 다할 것이다. 상사(上使)가 타국 임금을 현혹시킨 죄는 《춘추(春秋)》에 나타나 있다. 신하들의 대다수가 천조(天朝)에 주달하여 주벌하기를 청하고 있으나 바다를 건너 와서 쟁론(爭論)하는 것은 각각 자기 임금을 위하는 것이므로 지금 우선 용서하여 보내주니, 제도(諸島)에 두루 고하라.’ 하소서. 그렇게 하면 은애(恩愛)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져서 절대로 범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는데, 감사(監司) 권징(權徵)이 당로자(當路者)의 마음을 거듭 거스를까 두려워하여 잘못 썼다 핑계하고 재삼 물리쳤다. 마침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호남 유생 양산숙(梁山璹)이 상소하여 조헌의 원통함을 송변(訟辨)하면서 그가 정여립이 반드시 반역할 것을 예언한 선견(先見)의 충언(忠言)이 있었음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찬배(竄配)한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니,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헌이 돌아오는 도중에 다시 감사에게 올렸던 전의 소장을 인하여 또 한 통의 소장을 작성하여 반역의 일이 일어나게 된 까닭을 논하니, 권징이 또 물리치며 말하기를,

"역옥(逆獄)이 크게 일어나서 인심이 흉흉하고, 사신을 보내어 통호(通好)하는 것은 조정 의논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 소장은 도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화를 한층 더 유발시키게 될 것이다. 우선 입을 다물고서 시변을 살피라."

하였다. 조헌이 말하기를,

"위망의 기틀이 호흡 사이에 결정되는데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 어찌 신자의 도리이겠는가? 그리고 죽은 여립을 공이 오히려 이처럼 두려워하니 산 수길(秀吉)이 오면 공이 마땅히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권징이 이에 받아서 올렸다.


  • 【태백산사고본】 5책 23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58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

  • [註 066]
    형(荊) 땅 사람이 박옥(璞玉)을 안고 세 번이나 발꿈치가 잘렸어도 징계되지 않은 것 : 형(荊)은 초(楚)를 말함. 초(楚)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초나라 산 중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초 여왕(楚厲王)에게 바치니, 여왕이 옥인(玉人)에게 감정을 의뢰하였는데 돌이라 하자 속였다 하여 변화의 왼쪽 발꿈치를 잘랐다. 초 무왕(楚武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또 박옥을 바쳤는데 옥인이 감정하고는 역시 돌이라 하니 그의 오른쪽 발꿈치를 잘랐다. 초 문왕(楚文王)이 즉위하자 변화가 박옥을 안고 우니, 문왕이 옥인을 시켜 쪼깨어 보옥(寶玉)을 얻었다 한다.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
  • [註 067]
    장준(張浚) : 송(宋)나라 명신. 고종(高宗) 때 천섬 경서 제로 선무사(川陝京西諸路宣撫使)로서 실지(失地) 회복에 뜻을 두고 금인(金人)을 힘껏 막았다. 마침 진회(秦檜)가 화의를 주장하여 영주(永州)로 좌천되었다. 효종(孝宗) 때 추밀사(樞密使)에 제수되었다. 《송사(宋史)》 권361.
  • [註 068]
    원호(元昊) : 서하(西夏) 이낭소(李曩霄)의 본명. 송(宋)나라에서 조씨(趙氏)로 사성(賜姓)하였으므로 조원호(趙元昊)라고도 부른다. 송나라 신하노릇 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다가 송 인종(宋仁宗) 명도(明道:1032∼1033) 초에 서하의 왕위를 세습, 현도(顯道)란 연호를 쓰고 보원(寶元:1038∼1039) 초에 천수(天授)란 연호를 참칭(僭稱)하여 황제 노릇을 하였다. 뒤에 송과 싸워 승리하였으나 사망과 부상자가 상반되므로 화의를 애걸하여 하국주(夏國主)로 봉해져서 그대로 나라에서 제(帝) 노릇을 하였다. 《송사(宋史)》권485. 일본이 참람하게 연호를 쓰고 통신(通信)을 청해온 것을 원호(元昊)가 송나라에 화의를 청한 일에 비유한 것이다.
  • [註 069]
    소릉(召陵)의 군사가 전쟁을 하지 아니하고 맹약을 하게 되었고 : 소릉은 춘추(春秋) 때 초(楚)의 지명. 초나라 대부(大夫) 굴완(屈完)이 군사을 거느리고 소릉(召陵)에 주둔하여 맹약을 청하므로 제 환공(齊桓公)이 제후(諸侯)의 군사를 진열하고 굴완과 수레를 함께 타고 만나 대화한 다음 맹약을 맺었다. 《좌전(左傳)》 희공(僖公) 4년.
  • [註 070]
    항적(項籍)은 싸움을 잘하여 천하에 대적이 없었으나 한왕(漢王)이 동공(董公)의 말을 들어 : 항적은 초 패왕(楚霸王), 한왕(漢王)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 초한(楚漢) 전쟁 때 한왕(漢王)이 낙양(洛陽) 신성(新城)에 이르자 삼로(三老:교화 맡은 사람) 동공(董公)이 길을 막고 한왕에게 "명분있는 군사를 출동해야 한다."고 말하니, 한왕은 항우에 의해 시해된 의제(義帝)를 위해 초상을 발표하고 군사에게는 모두 흰 상복을 입혀 진격하였다. 그 뒤 초 패왕은 해하(垓下)에서 한군에게 포위당하였는데 밤에 우미인가(虞美人歌)를 지어 부르고 나서 탈출하였으나 오강(嗚江)에 이르러 목찔러 죽었다. 《사기(史記)》 권8 항왕 본기(項王本紀).
  • [註 071]
    왕손만(王孫滿) : 주 정왕(周定王) 때의 대부(大夫). 초자(楚子)가 육혼(陸渾)의 융적(戎狄)을 칠 적에 낙양(洛陽)에 이르러 주(周)의 경내에서 관병(觀兵)하려 하자, 주 정왕이 왕손만을 보내어 초자를 위로하게 하였다. 초자가 전국보(傳國寶)인 주정(周鼎)의 대소와 경중에 대해 묻자, 왕손만은 "덕에 있는 것이요 주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덕이 아름답고 밝을 적엔 작더라도 무겁고, 간사하고 혼란할 적엔 크더라도 가볍다. ……주덕(周德)이 쇠퇴하기는 하였으나 천명(天命)이 바뀌어지지 않았으니 주정의 경중을 물을 수 없다." 하였다. 초자가 주정의 경중을 물은 것은 주(周)를 핍박하여 천하를 취하려는 의도를 보인 것인데, 왕손만이 명분을 들어 준엄히 나무란 것이다. 《좌전(左傳)》 선공(宣公) 3년.

○命放趙憲歸鄕。 在謫中, 聞朝廷將遣使日本, 因監司上疏, 略曰:

荊人抱璞, 三刖而不懲者, 以其所蘊者玉也; 張浚在謫, 十疏而不休者, 以其所願者忠也。 臣之不死, 亦荷天地之恩。 海山殘馹, 莫非日月所照, 義當結舌安命, 以見時事之所終極矣。 惟是仰觀乾象, 則熒惑貫于箕尾, 入南斗浹旬, 狼星又有光耀, 求之古籍, 俱係兵象。 《春秋》日食、歷代星變, 非必天子當之, 有釁之國, 實當其敗。 上聖聰明, 何所不思乎? 逖聞, 使半歲留館, 肆其悖語, 以興兵犯境爲辭, 擧朝惶怖, 無一人執言, 折元昊之姦者。 朝鮮士氣, 不圖摧折之至此, 臣食不下咽。 益歎臣師之亡, 而讀書之人, 不在吾王之左右也。 自古勝負之勢, 豈徒以兵之强弱乎? 春秋列國, 惟無强, 而齊桓管仲, 仗義執言, 則召陵之師, 不戰而致盟; 項籍善戰, 天下無敵, 而漢王董公兵出有名, 則垓下人散, 悲歌自刎。 蓋其身負弑逆之罪, 天地之所不容也。 雖其假氣游魂之際, 或能指使風霆, 而人道所不順, 天意亦不佑, 斯知道義之氣, 壯於萬甲, 而仁者無敵, 訓益昭。 堂堂我國, 資澤未殄, 亦自可守, 豈宜陷於死術, 而强副要盟乎? 願擇今世之王孫滿, 俾語其使曰: "爾之求我信使者, 謂我之强, 而恐其潛師往襲耶? 謂我之弱, 而幸我飢饉, 要以侵軼耶? 潛師盜隣, 自祖先所不爲, 其在眇躬, 忍沫前徽乎? 幸災侵隣, 史譏不道。 新造未定之秋, 又犯斯戒於天下耶? 無父無君, 所闢。 源王所終, 吾未詳知, 吾雖欲交使, 吾卿士恥之。 如其怒我不報, 必欲用兵, 則我雖涼德, 而吾家將士, 頗知愛君之義; 戍邊厮卒, 亦知父母之恩, 爲君親, 嬰城固守, 宜自戮力矣。 上价熒惑之罪, 著在《春秋》。 臣庶多請, 奏天朝誅之, 而越海爭論, 各爲其君, 故今姑恕送, 其以遍告諸島。" 云則恩威竝行, 截然難犯矣。

監司權徵, 恐其重忤當路, 託以誤書, 再三却之。 會逆獄起, 湖南儒生梁山璹上疏, 訟之冤, 言其預言汝立必叛, 有先見之忠言, 上曰: "當初竄謫, 非予本意, 可放釋。" 歸途, 復因監司, 上前疏, 又爲一疏, 論逆節之所由起, 又却之曰: "逆獄大起, 人心洶懼, 遣使通好, 朝議已定。 此疏不惟無益, 必將滋禍。 姑且含默, 以觀時變。" 曰: "危亡之機, 決於呼吸, 畏縮不言, 豈臣子愛君之道乎? 且死汝立, 公尙畏之如此, 生秀吉來, 公當何如?" 乃受而進之。


  • 【태백산사고본】 5책 23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58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