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의 시체를 군기시 앞에서 추형케 하다
정여립의 시체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추형(追刑)하였는데 백관을 차례대로 서게 하였다.
여립은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선조(先祖) 때부터 전주 동문 밖에 거주하였는데 가세(家世)가 한미하였다. 아버지 정희증(鄭希曾)이 비로소 문과에 올랐으나 벼슬이 첨정(僉正)에 그쳤고 현용(顯用)되지 못하였다. 일찍이 꿈에 전조(前朝)049) 의 역신(逆臣) 정중부(鄭仲夫)를 보고 나서 여립을 잉태하였는데 출산하는 날 밤이 되자 또 중부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 이웃 사람이 남자 아이를 낳은 것을 하례하였으나 희증은 기뻐하는 빛이 없었다. 집안 식구들만은 그 뜻을 알았다.
정여립이 장성하게 되자 체구가 장중하고 얼굴빛이 청적색(靑赤色)이었다. 나이 겨우 7∼8세에 여러 아이들과 장난하고 놀면서 칼로 까치 새끼를 부리에서 발톱까지 도막내었다. 희증이, 누가 한 짓이냐고 꾸짖으며 묻자 그의 집 어린 여종이 여립을 가리켜 말하였는데 그날 밤 여립이 그 아이의 부모가 이웃 집에 방아찧으러 나간 틈을 타서 칼을 가지고 몰래 들어가 그 아이를 찔러 죽여 피가 자리에 흥건히 흘렀다. 그 부모가 그것을 보고 울부짖으면서 몸부림쳤으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온 마을 사람이 모여 구경하고 있는데 여립이 서서히 나와 말하기를,
"이 아이가 나를 일러 바쳤으므로 내가 죽였다."
하는데, 말씨가 태연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놀랐고 어떤 사람은 악한 장군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여립이 아비 슬하에 있으면서도 항상 모든 일을 제 마음대로 결단하였다. 아비가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있을 적에도 관의 일을 천단하여, 아랫사람을 아비가 하는 것처럼 형장(刑杖)으로 때렸으나 아비는 금지하지 못하고 혀를 차며 속으로 두려워할 뿐이었다. 과거에 오르게 되어서는 명사들과 두루 사귀고 파주(坡州)의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하에 왕래하였다. 총명하고 논변을 잘하여 오로지 널리 종리(綜理)하는 것을 힘썼으며 특히 《시경(詩經)》의 훈고(訓詁)와 물명(物名)의 통해(通解)로 자부하였다. 성훈과 이이 두 사람이 불시에 만나고 간혹 그와 평증(評證)하였는데 그의 박변(博辨)함을 좋아하여 조정에 천거, 현양시키니 드디어 이발(李潑) 등과 교분을 맺었다. 그런데 성혼의 문인 신응구(申應榘)·오윤겸(吳允謙) 등은 한가로울 때 같이 거처하며 그가 하는 일을 익히 보고서 마음씀이 불측함을 논하여 소원하게 대하였으나 감히 사문(師門)에서 칭찬이나 헐뜯는 일을 하지는 못하였는데 이이는 마침내 그의 인품을 깨닫지 못하였다.
조사(朝士)로서 서로 아는 사람으로는 홍진(洪進)·김수(金晬) 등이 있는데 그가 거칠고 기를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점차 접촉하지 않았다. 이경중(李敬中)은 강정(剛正)하므로 그를 더욱 미워하여 매양 그의 등진(登進)을 막다가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다. 김첨경(金添慶)이 전주 부윤으로 있을 적에 그의 호세를 부리며 침탈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가 관부의 위엄을 빌어 행세하지 못하도록 하고 드디어 그와 끊어버렸다. 그 뒤 여립이 상의 앞에서 김첨경을 헐뜯어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첨경은 그대의 성주(城主)인데 이처럼 헐뜯는단 말인가."
하니, 여립이 기가 꺾였다.
조헌(趙憲)이 이발(李潑)의 형제로 인하여 처음에는 그와 사귀었었다. 여립이 이이를 배반하고 전후 반복하여 간궤(姦詭)스런 정상이 다 드러나게 되어서는 명류(名流)로서 진심을 지키는 사람은 모두 그의 무상(無狀)함을 알았다. 그러나 오직 이발·백유양(白惟讓)은 그가 성혼과 이이를 배척한 것을 칭찬하면서 추천해서 숭장(崇奬)하기를 전일보다 더 후하게 하자 경박한 무리가 흔연히 귀의하였다. 조헌이 여립을 논할 적마다 반드시 역적질할 것이라 하였으므로 어떤 사람은 너무 심한 소리라 의심하니, 조헌이 말하기를,
"나는 유독 그가 사우(師友)를 배반한 것만으로 그르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가 상의 앞에 있을 적에 말과 기색이 패오(悖傲)하다는 말을 자세히 들었으니, 반드시 역심(逆心)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정해년·기축년 사이에 그의 향리를 미행(微行)하면서 도당을 모은 정상을 살펴보고서 역란(逆亂)의 조짐을 알고 소장 하나를 별도로 초하여 위에 아뢰려고 문인 송방조(宋邦祚)에게 보이니, 방조가 간절히 간하기를,
"단서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사람을 역적질한다고 고발하면 반드시 도리어 악명(惡名)을 입게 되어 형화(刑禍)가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자, 조헌이 말하기를,
"이것은 종묘 사직에 박절한 근심이므로 인신으로서는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니 형화를 어찌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도움이 없음을 깨닫고 그만두고는 다만 그의 죄악을 소장으로 지척(持斥)하되 그를 후예(后羿)와 한착(寒浞)050) 에 견주었다.
여립이 말과 외모를 거짓으로 꾸며왔기 때문에 국인이 당초 사행(私行)이 악하다는 것을 몰랐었다. 가정과 향리에 거처할 적에 흉독(兇毒)을 부리어 형제 자매 5∼6집과 내외 친척이 모두 서로 용납되지 못하였다. 중표형(重表兄) 문과 출신 이정란(李廷鸞)이 인근에 살고 있었는데 지절(志節)이 있어 스스로 자립하여 그에게 굽히지 않았으므로 여립이 그를 원수처럼 보았고 정란 또한 항상 그의 악을 면대하여 지척하였다. 여립이 몹시 미워하여 당로자(當路者)에게 그를 참소하여 탄핵이 서로 잇따라 작은 고을 말단 관직에도 오래 있지 못하였으나 정란은 개의하지 않았다.
태인(泰仁)의 무과 출신 백광언(白光彦)은 용맹하고 과감하기로 소문이 났다. 여립이 곡진한 뜻으로 사귀기를 원하였으나 광언이 사절하고 만나주지 않자 여립이 대관(臺官)에게 부탁하여 고성(固城)과 진해(鎭海) 두 고을의 수령 임명을 논핵하여 파면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권세가 치성해져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탐하는 자들이 행여 뒤질세라 다투어 문하(門下)에 들어가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조정에서도 따라서 그를 찬양하였으므로 괴론(怪論)을 주창하는 자는 그를 하분(河汾)과 해릉(海陵)051) 에 견주었다.
여립이 일세를 하찮게 보아 안중에 완전한 사람이 없었다. 경전(經傳)을 거짓 꾸미고 의리를 속여 논변이 바람이 날 정도로 잽싸서 당할 수가 없었다. 학도에게 항상 말하기를,
"사마온공(司馬溫公)의 《통감(通鑑)》은 위(魏)로 기년(紀年)을 삼았으니 이것이 직필(直筆)인데 주자(朱子)가 그것을 그르게 여겼다.052) 대현(大賢)의 소견이 각기 이렇게 다르니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바이다.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禹)임금은 서로 전수하였으니053) 성인이 아닌가."
하고 또 말하기를,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王蠋)054) 이 한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이지 성현(聖賢)의 통론(通論)은 아니다. 유하혜(柳下惠)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맹자(孟子)는 제 선왕(齊宣王)과 양 혜왕(梁惠王)에게 왕도(王道)를 행하도록 권하였는데, 유하혜와 맹자는 성현이 아닌가."
하였다. 그의 언론의 패역(悖逆)이 이와 같았으나 문도들은 ‘전성(前聖)이 발명하지 못한 뜻을 확장한 것이다.’고 칭찬하면서 조금이라도 어기거나 뜻을 달리하는 자가 있으면 곧 내쳐 욕을 보였다. 그래서 문하생들이 마음 속으로는 그의 그름을 알면서도 입으로는 다른 말이 없었다.
금구현(金溝縣)의 아전이 사천(私賤)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아 딸 애복(愛福)을 낳았는데 뛰어난 자색(姿色)이 있었다. 그 주인의 종제(從弟)가 그녀를 취하여 첩으로 삼은 지 수년 만에 고질(蠱疾)055) 로 죽자, 애복은 죽음을 맹세하고 수절하였다. 1년이 채 안 되었는데 여립은 그녀가 미색이라는 소문을 듣고 현령 김요명(金堯命)을 통하여 그의 부모와 형제를 가두고 차례로 형벌을 가하여 딸을 바치게 하였다. 애복이 땅굴을 파고 몸을 숨겼는데 일족이 함께 찾아내니 스스로 목을 매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드디어 여립에게 시집보내니 여립이 크게 고혹하였다. 문인이 사적으로 서로 말하기를,
"선생의 이 일은 예절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닌가."
하였으나, 또한 감히 말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거주하는 고을의 이민(吏民) 남녀가 그의 침독(侵毒)을 괴롭게 여겼는데 감사·수령·사신의 무리가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공장(供帳)과 번다한 비용이 드는 것을 보고 모두 원망하여 말하기를,
"이 적(賊)이 무슨 사랑할 만한 것이 있기에 아는 사람이 저처럼 많단 말인가."
하였다. 호남의 풍속이 진취(進取)하기를 좋아하고 거취(去就)를 가볍게 여기므로 사자(士子)가 더러움에 오염되어 풍습이 크게 훼손되었다. 예컨대 오희길(吳希吉)·정운룡(鄭雲龍)은 처음에는 그와 사귀다가 뒤에 편지를 보내어 끊어버렸고, 그 나머지는 신중히 피했을 뿐이었다. 이때에 크게 연루되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오직 이정란(李廷鸞)만은 옥에 들어갔다가 방면되었다. 여립의 아내와 첩은 모두 고문받아 죽었으나 애복은 실정을 간절히 호소하니 상이 특별히 용서하였다.
대개 명종 말엽으로부터 유학(儒學)이 성대히 일어나서, 부형의 가르침이나 사우(師友)의 모임에는 대부분 예법을 강구하고 도의(道義)를 담론하는 것으로 일삼으니, 유속(流俗)이 자못 좋아하지 않았다. 당론(黨論)이 나뉘어지고 사유(師儒)가 무함당한 뒤로부터 선비의 습속이 방달(放達)을 숭상하여 학문을 강론하는 자가 적어졌다. 여립의 옥사가 일어나게 되어서는 학사(學士)와 대부들이 억울하게 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진의 제생(諸生)도 유학으로 이름 삼기를 부끄럽게 여겨 기폄(譏貶)을 피하였다. 그리하여 풍속이 크게 무너졌으니 이는 모두 정여립이 역적질한 빌미였던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5책 23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584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사법(司法) / 인물(人物) / 역사-고사(故事) / 윤리(倫理) / 가족-친족(親族) / 사상-유학(儒學)
- [註 049]전조(前朝) : 고려.
- [註 050]
후예(后羿)와 한착(寒浞) : 후예는 유궁국(有窮國)의 군주. 하(夏)의 제왕인 태강(太康)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일락(逸樂)에 빠지자 후예가 제위를 빼앗았다. 후예는 활을 잘 쏘았는데 사술(射術)을 믿고 사냥만 일삼은 채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신하인 한착(寒浞)에게 시해당하였다. 《서경(書經)》 하서(夏書) 오자지가(五子之歌). 한착은 유궁 후예(有窮后羿)가 하나라 제위를 찬탈하자 그의 정승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후예를 시해하고 대신 제(帝)가 되어 유궁씨(有窮氏)를 계승하였다. 뒤에 하나라의 유신(遺臣) 유격씨(有鬲氏) 등에게 멸망당하고 제위는 하의 소강(少康)에게 돌아갔다. 《좌전(左傳)》 양공(襄公) 4년. 이 두 사람은 찬역한 악인의 대명사로 불린다.- [註 051]
하분(河汾)과 해릉(海陵) : 하분은 수(隋)의 왕통(王通)을 말함. 왕통의 자는 중엄(仲淹), 시호(諡號)는 문중자(文中子)이다. 경학(經學)에 밝아 유가(儒家)로 자처하여 강학(講學)을 자기 소임으로 삼았다. 하분에 살며 가르쳤는데 수업받는 자가 1천여 인에 달하여 인재가 성대히 배출되니 당시에 하분 문하(河汾門下)라 일컬었다. 《당서(唐書)》 권164. 해릉은 송 고종(宋高宗) 때의 사람 주인지(周麟之)를 말함. 주인지는 해릉 사람으로 자는 무진(茂振)인데 벼슬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註 052]
사마온공(司馬溫公)의 《통감(通鑑)》은 위(魏)로 기년(紀年)을 삼았으니 이것이 직필(直筆)인데 주자(朱子)가 그것을 그르게 여겼다. : 사마온공은 송 신종(宋神宗) 때의 명신 사마광(司馬光). 온공은 시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294권을 편찬하였는데, 중국의 사서(史書) 중 편년체(編年體)의 대표로 꼽는다. 예컨대 삼국(三國) 조위(曹魏)를 후한(後漢) 다음 왕조의 정통으로 인정하여 위기(魏紀)로 썼었는데, 주자(朱子)는 그의 사관(史觀)을 문제삼아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지어 바로잡으면서 소열제(昭烈帝:유비)를 후한 헌제(後漢獻帝)의 뒤를 이어 한(漢)의 유통(遺統)을 이은 것으로 기술하였다.- [註 053]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禹)임금은 서로 전수하였으니 : 요임금은 제위(帝位)를 순임금에게, 순임금은 제위를 우(禹)임금에게 전수하고 자손에게 승계시키지 않았다.- [註 054]
왕촉(王蠋) : 전국(戰國) 제(齊)의 충신. 제(齊)나라가 격파되었을 때 연(燕)나라 대장 악의(樂毅)가 그의 어짊을 듣고 부르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기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 하고 자살하였다. 《사기(史記)》 권82 전단 열전(田單列傳).- [註 055]
고질(蠱疾) : 정신이 어지러운 병.○追刑汝立屍于軍器寺前, 命百官敍立。 汝立, 東萊姓籍人。 自其先祖, 居全州東門外, 家世單微, 父希曾始登文科, 官止僉正, 不得顯用。 嘗夢見前朝逆臣鄭仲夫, 已而胎孕汝立, 及解娩之夜, 又夢仲夫。 隣里賀生男, 希曾無喜色, 家人獨知其意。 及壯, 身幹壯偉, 容色靑赤, 年才七八, 與群兒嬉戲, 刀剉鵲雛, 自觜至趾。 希曾訶問誰所爲, 有其家女僕稚兒, 指證汝立。 其夜, 汝立乘兒父母出舂隣家, 持刀潛入, 刺殺其兒, 流血滿席。 其父母見之號哭, 莫知其由, 一里聚觀, 汝立徐出謂之曰: "此兒告我, 故吾殺之。" 辭氣晏然, 聞者大駭, 或以爲: "惡將軍出矣。" 汝立在父側, 常自擅斷諸事, 父守益山郡, 亦擅官事, 刑杖下人如其父, 父不能禁, 每咄咄內懼而已。 及登第, 徧交名士, 往來坡州 成、李門下。 聰警善辨說, 專務博綜, 尤以《詩經》訓誥、物名通解自負。 成、李二人不時見, 間與評證, 悅其博辨, 薦揚於朝, 遂與李潑等定交。 惟成渾門人申應榘、吳允謙等, 同處燕居, 稔視所爲, 論其用心不測, 待之踈異, 亦不敢稱毁於師門, 李珥終不覺其爲人。 朝士相識者, 洪進、金睟等, 惡其麤暴使氣, 漸不與接。 李敬中剛方, 尤惡之, 每阻其登進, 至於被劾。 金添慶尹全州, 惡其豪奪, 使不容假威官府, 遂與之絶。 其後汝立, 追詆添慶於上前, 上曰: "添慶汝之城主, 詆斥乃爾耶?" 汝立沮詘。 趙憲以李潑兄弟故, 初與之交, 及汝立背叛李珥, 前後反覆, 姦詭盡露, 名流守靜者, 皆知其無狀。 而惟李潑、白惟讓, 賞其能斥成、李, 推薦崇奬, 加於前曰, 浮躁之流, 翕然歸之。 憲每論: "汝立必作賊。" 或疑其已甚, 憲曰: "吾不獨爲其背師友而非之。 詳聞其在上前, 辭色悖傲, 必有逆心而然。" 丁亥、己丑年間, 微行其鄕里, 察見聚徒狀, 認其亂兆, 別草一疏, 欲上聞, 以示門人宋邦祚。 邦祚苦諫以爲: "端緖未現, 告人作逆, 必反蒙惡名, 刑禍不測。" 憲曰: "此乃憂迫宗社, 人臣當盡吾心, 刑禍焉恤?" 然終覺其無益而止, 但疏斥其惡, 比之羿、浞。 汝立詭飾言貌, 國人初不知內行之惡。 惟處家鄕, 舒肆兇獷, 兄弟姊妹五六家、內外親戚, 皆不相容。 重表兄文科出身李廷鸞, 居在隣近, 有志節自立, 不爲之下, 汝立仇視之, 廷鸞亦常面斥其惡。 汝立大忤, 讒之當路, 彈駁相繼, 雖小縣末官, 亦不居久, 廷鸞不恤也。 泰仁武科白光彦, 以勇果聞。 汝立曲意願交, 光彦謝不見。 汝立囑臺官, 論罷固城、鎭海兩除。 由是, 權勢鴟張, 干名嗜利者, 執策登門恐後, 弟子益衆。 朝廷從而贊之, 怪論者比之河汾、海陵。 汝立睥睨一世, 眼無全人。 飾經詭義, 談辯風生。 常語學徒云: "溫公 《通鑑》以魏紀年, 是直筆, 朱子非之。 大賢所見各異, 吾所未解也。 天下, 公物, 豈有定主? 堯、舜、禹相傳, 非聖人乎?" 又曰: "不事二君, 乃王蠋一時臨死之言, 非聖賢通論也。 柳下惠曰: ‘何事非君?’ 孟子勸齊、梁行王道, 二子非聖賢乎?" 其言論悖逆如此。 其徒稱以: "擴前聖所未發之義。" 稍有違貳者, 輒黜辱之。 故及門者雖心知其非, 而口無異辭。 金溝縣吏娶私賤爲妻, 生女愛福, 有殊色。 其主之從弟, 取以爲妾數年, 以蠱疾死, 福誓死守寡。 未及朞, 而汝立聞其美, 通縣令金堯命, 囚其父母兄弟, 次第刑扑, 使納其女。 愛福窟土匿身, 其族共搜取之, 自縊不死, 遂歸汝立, 汝立大惑之。 門人私相謂曰: "先生此事, 何踰閑耶?" 亦不敢言。 其所居邑中吏民男女, 苦其侵毒, 每見監司、守令、使臣輩, 爭來坌集, 供帳煩費, 無不怨罵曰: "此賊有何可愛, 而相識人, 如彼其衆耶?" 湖俗好進取、輕去就, 士子汚染鄙穢, 風習大毁。 如吳希吉、鄭雲龍初與之交, 後貽書絶之, 其餘謹避而已。 至是大被株累, 死者甚衆, 惟李廷鸞就獄得免。 汝立妻妾皆栲死, 而愛福哀訴情實, 上特原之。 蓋自明廟之末, 儒學蔚興, 父兄之敎、師友之會, 多以講禮法、談道義爲事, 流俗頗不悅。 自黨論分而師儒被誣, 士子習尙放達, 講學者已少矣。 及汝立獄起, 非但學士大夫橫罹受禍, 後進諸生, 亦羞以儒學爲名, 以避譏貶, 風俗大壞, 皆汝立作逆之祟也。
- 【태백산사고본】 5책 23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584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사법(司法) / 인물(人物) / 역사-고사(故事) / 윤리(倫理) / 가족-친족(親族) / 사상-유학(儒學)
- [註 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