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박충간·이축·한응인 등이 정여립의 모반에 대한 변서를 올리다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재령 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 안악 군수(安岳郡守) 이축(李軸), 신천 군수(信川郡守) 한응인(韓應寅) 등이 변서(變書)를 올려 ‘전 수찬 정여립이 모반한다.’고 하였는데, 여립이 망명(亡命)하였다.
당초 여립이 왕의 견책을 자주 입고 호남 금구현(金溝縣)으로 달아나서 전주에 거주하기도 하였고 김제(金堤)·진안(鎭安)의 별장을 왕래하였다. 조정에서 그가 퇴휴(退休)하는 것을 애석히 여겨 논천(論薦)이 서로 잇따라 매양 청망(淸望)에 주의(注擬)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여립이 본디 발호(跋扈)하는 뜻이 있었는데 억누름이 심하게 되자 배반하려는 모의를 더욱 펴게 되었다. 이에 강학(講學)을 가탁하여 무뢰배를 불러모았는데, 무사와 승도(僧徒)들도 그 가운데 섞여 있었다. 호강한 세력으로 남의 재물을 함부로 강탈하여 전원(田園)을 광대하게 점유하고 나서 또 주군(州郡)에 구청하여 조금만 마음에 만족하지 않으면 곧 대관(臺官)에게 부탁하여 공격 모함하니, 복종하여 따르는 자가 문을 메웠고 선물과 증유(贈遺)가 뜻에 차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자산이 실로 관가(官家)와 같았는데 이것으로 몰래 무리들을 길렀다.
이때 국가가 군정(軍政)이 문란하고 재력이 탕갈되었는데, 해마다 흉년과 재변이 들고 도적이 간간이 일어났다. 민간에서 항상 일족과 이웃의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것을 괴롭게 여기고 또 북계(北界) 백성을 쇄환(刷還)하는 소요가 있었다. 여립이, 백성이 반란을 생각하는 조짐이 있는 것을 보고 드디어 그들과 반란을 도모하기로 결의하였다. 또 해서(海西)는 풍속이 완악(頑惡)한데다가 일찍이 임꺽정(林巨正)의 난리가 있음을 보고 황해 도사(黃海都事)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안악(安岳) 사람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 사람 지함두(池涵斗) 등과 몰래 서로 교결하여 돌려가며 꾀니 응하는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지함두란 자는 본래 교생(校生)으로 문자를 꽤 알았는데 간사한 행실로 향리에 죄를 얻었다. 이름을 여러 번 변경하고서 누른 갓과 도복(道服)을 착용하고 호남·호서를 돌아다니며 여립을 사사(師事)하였다. 해서 사람으로 제자라 일컬으며 왕래한 자로서 함두 같은 축이 많았다.
이보다 앞서 1백여 년 전에, 민간에 ‘목자(木子)044) 가 망하고 전읍(奠邑)045) 이 일어난다.’는 참언(讖言)이 있었다. 여립이 요승(妖僧) 의연(義衍)과 모의하여 이를 옥판(玉版)에 새긴 다음 지리산 석굴 안에 간직하였다. 의연이 승도인 도잠(道潛)·설청(雪淸) 등과 산을 유람한다고 핑계하고 지리산에 이르러서는 ‘아무 방위에 보기(寶氣)가 있다.’ 하고 같이 가게 하여 옥판을 찾아내어 여립에게 돌려주니, 여립이 같은 동아리에게 비밀히 보여주고는 그 말을 누설하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의연은 본래 운봉(雲峰) 사람으로서 스스로 요동(遼東)에서 나왔다고 일컫고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사람을 만나면 넌지시 풍자하여 말하기를,
"내가 요동에 있을 때에 조선을 바라보니 왕기(王氣)가 있었는데, 조선에 와서 살펴보니 왕기가 전주 동문(東門) 밖에 있었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전주에 왕기가 있다.’는 말이 원근에 전파되었다. 여립이 또 말하기를,
"내 아들 옥남(玉男)의 등에 왕(王)자의 무늬가 있는데 피기(避忌)하여 옥(玉)자로 해서 이름을 옥남(玉男)이라 하였다."
하였다. 정옥남은 눈 하나에 겹 동자였으므로 사람들이 또한 이상하게 여겼다. 이때 동요가 있었는데,
뽕나무에 말갈기 나자
집 주인은 왕이 되리
하였다. 여립이 의연과 몰래 집 동산 뽕나무의 껍질을 크게 벗겨내고 말갈기를 메워넣었다. 날짜가 오래되어 껍질이 아물어지자 짐짓 인근의 친밀한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하고는 말하지 말도록 경계하고 곧 없애버렸다.
국초 이래로 참설(讖說)이 있었는데,
"연산현(連山縣) 계룡산(鷄龍山) 개태사(開泰寺) 터는 곧 후대에 정씨(鄭氏)가 도읍할 곳이다."
하였다. 여립이 일찍이 중 의연의 무리와 국내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폐사(廢寺)의 벽에 시를 쓰기를,
손이 되어 남쪽 지방 노닌 지 오래인데
계룡산이 눈에 더욱 환하여라
무자·기축년에 형통한 운수 열리거니
태평 성세 이루는 것 무엇이 어려우랴
하였는데, 그 시가 많이 전파하였다. 또 무명자가(無名子歌)를 지었으니, 모두 백성이 곤궁하여 난을 일으키려는 뜻을 기술한 것인데,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알지 못하였다.
여립은 잡술에 두루 통하여 감여(堪輿)와 성기(星紀) 등에 관한 서적을 중국에서 사다가 무리들과 강설(講說)하였고 국가에 장차 임진 왜변(壬辰倭變)이 있을 것을 알고 때를 타고 갑자기 일어나려 하였다. 그리하여 이웃 고을의 여러 무사, 공사천(公私賤)의 장용(壯勇)한 사람 등과 대동계(大同禊)를 만들어 매월 15일에 한 곳에 모여 활쏘기를 겨루고 주식(酒食)을 장만하여 즐기면서 말하기를,
"활쏘기란 육예(六藝) 중의 하나이니, 남자로서 마땅히 학습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수학(受學)하는 문인은 모두 활쏘기를 익히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서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 동방의 선유(先儒)들은 예학(禮學)만 알 뿐이었는데, 사예(射藝)를 가르치는 것에 이르러서는 오직 우리 선생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정해년046) 왜변에 열읍(列邑)이 군사를 조발(調發)하였는데 전주 부윤(全州府尹) 남언경(南彦經)이 소활하여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립을 청하여 군대를 나누게 하였더니, 여립이 사양하지 않고 담담하여 한 번 호령하는 사이에 군병이 모였는데, 부서를 나누어 조견(調遣)하는 데 있어 하루가 안 되어 마무리지었다. 그 장령(將領)들은 여립이 모두 대동계(大同禊)에 들어 있는 친밀한 무사를 썼다. 적이 물러가고 군사를 해산하자 여립이 장령에게 말하기를,
"훗날 혹시 변고가 있으면 너희들은 각각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시에 와서 기다리라."
하고, 그 군부(軍簿) 1건은 여립 자신이 가지고 갔다. 언경이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은 유술(儒術)뿐만이 아니니, 그 재능을 따를 수 없다."
수십 년 전에 천안(天安)의 사노(私奴) 길삼봉(吉三峰)이란 자가 용맹이 뛰어나 하루에 3백∼4백 리를 걸어다녔는데 그대로 흉포한 도적이 되었다. 관군이 매양 체포하기 위해 엄습하였으나 그때마다 탈주하였으므로 이름이 국내에 자자하였다. 여립이 지함두(池涵斗) 등으로 하여금 해서 지방에 말을 퍼뜨리기를,
"길삼봉·삼산(三山) 형제가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계룡산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팔룡(鄭八龍)은 신용(神勇)한 사람으로 마땅히 왕이 되어 계룡산에 도읍을 정할 터인데 머지 않아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팔룡은 곧 여립의 환호(幻號)인데, 실정을 모르는 자들은 다른 사람으로 알았다.
해서 지방이 바야흐로 임꺽정의 난을 겪었는데 여립의 요언(妖言)을 듣게 되어서는 백성들과 관리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군장(軍裝)을 예비하고 급경(急警)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여립의 도당들도 그 사이에 섞여서 또한 변고에 대비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앞을 다투어 병기를 수리하였는데, 실정을 모르는 자는 도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여겼다.
이때 해서에 떠도는 말이 자자하였는데,
"호남 전주 지방에 성인이 일어나서 우리 백성을 구제할 것이다. 그때에는 수륙(水陸)의 조례(皂隷)와 일족·이웃의 요역(徭役)과 추쇄(推刷) 등의 일을 모두 감면할 것이고 공·사천과 서얼(庶孽)을 금고(禁錮)하는 법을 모두 혁제(革除)할 것이니 이로부터 국가가 태평하고 무사할 것이다."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현혹되어 왁자하게 전파하였다. 그리고 호남의 사인(士人)들도 더러는 여립이 장차 군사를 일으키려고 도제(徒弟)가 그 사이에 왕래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승도(僧徒)와 무뢰한이 뒤섞여 거처하고 남녀가 분별이 없음을 보고 크게 의심하였다. 장성(長城) 사인(士人) 정운룡(鄭雲龍)이 처음에는 여립과 교유하였으나 그의 소위를 보고 깜짝 놀라 장성 현감 이계(李啓)에게 말하여 상변(上變)하려 하였으나 단서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자 여립에게 편지를 보내 다른 일을 의탁해서 그를 끊어버린 다음 경기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여립의 형 정여복(鄭汝復)은 먼 마을에 떨어져 살았는데 난을 일으키려는 조짐을 살피고 또한 상변하려고 짐짓 편지를 보내어 ‘문하에 무뢰한 자제들을 거접하면 반드시 후환을 끼치게 될 것이다.’고 경계하여 그의 답서를 받아 증거로 삼으려 하였다. 여립이 그 의도를 알아채고 답서를 보내지 않고 몸소 형의 집에 가서 다른 뜻이 없음을 스스로 변명하니 여복은 감히 고발하지 못하였다. 그의 사위 진사 김경일(金敬一)이 고부(古阜)에 있으면서 민간에 전파된 말을 듣고 편지로 여립에게 물으니, 여립이 답서를 보내어 경계하기를,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가 이러한 말들을 지어낸 것이니 절대로 입에 담지 말고 또 문자에 드러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중 도잠(道潛)·설청(雪淸) 등은 그가 반역하려는 정상을 알고 또한 도망하여 흩어졌다.
여립이 사기(事機)가 자못 누설되어 사람들의 말이 점차 널리 퍼진 것을 보고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하여 변란을 일으키려는 계책을 결정하였다. 이에 비밀로 부서(部署)를 약속하여 이해 겨울 말에 서남 지방에서 일시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기약하고, 강진(江津)에 얼음이 얼어 관방(關防)에 원조가 없기를 기다려 곧바로 경도(京都)를 침범한 뒤 무기고를 불태우고 강창(江倉)을 빼앗아 점거한 다음, 도성 안에 심복을 배치하여 내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객을 나누어 보내어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 판서를 먼저 죽이고 전지(傳旨)를 사칭하여 병사(兵使)와 방백(方伯)을 죽이도록 언약하였다. 또 대관(臺官)에게 청탁하여 전라 감사와 전주 부윤을 논핵해서 파면하고 그 틈을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다.
마침 이길(李洁)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가는 길에 금구(金溝)에 들러 여립을 만나 여러 날 동안 묵었다. 여립이 역루(驛樓)에서 전송하는데,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여립의 말이 수상하였으므로 이길이 괴이하게 여겨 도리어 힐문하니, 여립이 붓을 술에 적셔 반면(盤面)에 썼다. 이길이, 얼굴빛이 변하며 깜짝 놀라 일어나서 은진현(恩津縣)의 현사(縣舍)로 달려가서 편지를 써서 종에게 부쳐 형 이발(李潑)에게 통보하고, 현감에게 말하기를,
"도중에 도적의 위협이 있을 듯하니 모름지기 군병을 얻어 호행(護行)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현감이 읍내의 민병(民兵) 약간인을 내어 무장을 갖추어 호송하고 연로의 군현이 차례로 교대하게 하였다. 도중에 과연 장사 두세 사람이 군장 차림으로 말을 타고 선후로 지나가는 것을 만났는데 방비가 있는 것을 알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길이 차현(車峴)을 지나 호송하던 군사를 보내고 동향(同鄕)의 무사 두세 사람을 얻어 동행하여 서울에 이르렀다. 이길의 의사로는, 형과 상의하여 처치하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이발이 아우의 편지를 보고 달려가 삼례역(參禮驛)에 이르러서 역변(逆變)을 들었다.】 드디어 말을 숨기고 감히 바로 말하지 못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여립이 한 말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해서(海西) 구월산(九月山)의 중 가운데 호응하는 자가 있었다. 중 의엄(義嚴)이 그 정상을 염탐하고 재령 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에게 비밀히 말하였으나 충간이 망설이며 감히 고발하지 못하였다. 안악 군수(安岳郡守) 이축(李軸)의 족제(族弟)인 진사 남절(南截)이 군내 지방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는데, 민간에서 전하는 말을 듣고 이축에게 고하자 이축이 남절을 시켜 실상(實狀)을 살피게 하였다. 남절이 교생(校生) 조구(趙球)가 항상 여립의 제자라고 하면서 도중(徒衆)을 많이 모아 술을 마시는데 종적이 평소와 다른 것을 보고 이축에게 고하였다. 이에 이축은 엄습하여 잡아다가 실상을 물었다. 조구의 집에 여립의 서간(書簡)으로 별호를 오산(鰲山)이란 쓴 것이 몇 장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대다수가 호초(胡椒)와 부채를 그 무리에게 나누어 준 것으로 근 1백 인이나 되었다. 이축이 그것을 가지고 힐문하니, 조구는 속일 수 없음을 알고 모든 역상(逆狀)을 고발하였다. 【조구가 자의로 스스로 고한 것이 아니지만 이축이 여립과 대옥(對獄)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으므로 드디어 구를 고수(告首)로 삼았다. 그래서 그 족류(族類)가 모두 역당(逆黨)으로 죽었으나 조구만은 죽음을 면하고 녹훈(錄勳)되었다. 조정에서 그 실상을 알고 있었으므로 벼슬을 제수하기는 하였으나 매양 논박하여 그를 체직시켰다.】 이축이 서간으로 박충간을 초청해 모였는데, 신천 군수(信川郡守) 한응인(韓應寅)은 명사(名士)로서 조정에 신임을 받을 수 있다 하여 이에 조구를 신천에 보내어 연명하여 감사 한준(韓準)에게 장보(狀報)하게 하였다. 그리고 충간은 그날로 급히 달려 재령으로 돌아와서 또 같은 당여로 읍내에 거주하는 사람인 이수(李綏)를 잡아다가 물으니, 이수가 고하는 것도 조구의 말과 같았으므로 곧 전에 의엄(義嚴)에게 들은 것까지 아울러 거론하여 소장을 갖추어 그의 아들에게 부쳐 급히 달려 예궐하여 먼저 상변(上變)하게 하였는데 황해 감사의 장계가 뒤따라 도착하였다.
이달 초2일 혼야(昏夜)에 상이 편전에 나아가 삼공, 육승지(六承旨), 입직 도총관(都摠管) 2원, 홍문관의 상하번(上下番)을 【정경세(鄭經世)가 전경(典經)으로 입직하고 있었다.】 명초(命招)하여 좌·우 사관과 함께 입시하게 하고, 여립의 누이의 아들인 검열(檢閱) 이진길(李震吉)이 사관(史館)에 입직하고 있었는데 입시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제신(諸臣)에게 ‘여립이 어떠한 사람인가?’ 물으니, 영상 유전(柳㙉), 좌상 이산해는 ‘그의 인품은 모른다.’고 대답하였고, 우상 정언신은 아뢰기를,
"그가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다른 것은 모릅니다."
하였다. 상이 손으로 고장(告狀)을 들어 상 아래로 내던지며 이르기를,
"독서하는 사람의 소위가 곧 이와 같단 말인가."
하고, 승지를 시켜 읽도록 하니, 흉모(兇謀)가 낭자하였다. 좌우 신하들이 모두 목을 움츠리고 등에 땀이 배었으나, 언신은 홀로 나지막한 소리로 킬킬 웃으니 상이 그 소리를 들었다. 대신이, 금부도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여립 등을 체포하는 한편, 고변한 자까지 아울러 잡아오게 할 것을 청하였고, 유전은 토포사(討捕使)를 나누어 파견하여 비상 사태에 대비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변숭복(邊崇福)은 일명 사(涘)인데 용건(勇健)이 뛰어났다. 조구(趙球)가 고변했다는 말을 듣고 안악(安岳)으로부터 여립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는데 4일 만에 금구(金溝)에 이르렀다. 여립이 곧 박연령(朴延齡)의 아들 박춘룡(朴春龍), 자기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는데 집안 사람들은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금부도사 유담(柳湛)이 이튿날 금구와 전주 두 곳의 여립의 집에 달려가 엄습하였으나 모두 잡지 못하니 도성 안이 진동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노수신(盧守愼)이 오랫동안 병으로 출사하지 못했는데, 변고를 듣고 예궐(詣闕)하여 문안하였다. 상이 인견(引見)을 명하자 노수신이 다리 저는 것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상이 하고 싶은 말을 서계(書啓)하도록 명하니 노수신이 서계하기를,
"근일의 대변(大變)은 고금에 없던 것이므로 위에서 경동(驚動)함이 반드시 깊으실 것입니다. 신은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와서 문안합니다. 천세토록 만복을 누리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경은 안심하도록 하라."
하고, 상이 시신(侍臣)을 보내어 수신에게 유시하기를,
"오래도록 경을 접견하지 못하였다. 아침에 경이 온다는 말을 듣고 인견하고자 하였는데, 경의 기거가 불편하므로 인견하지 않았다. 이번 역적의 변고가 과인의 시대에 나오게 된 것은 모두 치국(治國)을 변변히 하지 못한 소치이니 조선(祖先)께 부끄럽고 죄스러워 무어라 말할 수 없다. 경은 서리 내린 추운 아침에 출입하느라 손상이 없지나 않는가. 이에 사관을 보내어 나의 뜻을 돈유(敦諭)한다."
하고, 이어서 후피요(厚皮褥) 1건을 하사하였다. 수신이 회계(回啓)하여 사은하고 또 아뢰기를,
"성명한 세상에 어찌 이같은 변고가 있을 수 있습니까. 마치 헛말을 들은 것 같고 뼈가 저려 마지않습니다. 바라건대, 성려(聖慮)를 기울여 조용히 핵치(覈治)하여 죄인을 잡는 것이 실로 만세 국가의 복입니다."
하였다.【이때 노수신이 오래도록 병을 앓아 노쇠하였다. 문하의 명사가 갑자기 역변이 그의 제배(儕輩)에게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무망(誣罔)이 있는가 의심하여 수신에게 달려가 만나보고 말하기를 ‘해서(海西) 사람 중에는 이이(李珥)의 문인이 많으니 이는 반드시 무고하여 사림(士林)에 화를 끼치려는 것이다. 상공(相公)은 인망이 중하여 상께서 평소 의지하여 믿고 있으니 한 마디 말을 하여 해명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수신이 이미 여립을 여러 차례 천거하였고 또 편당(偏黨)한다는 말을 듣고 상의 뜻을 탐지하여 풍유(諷諭)하고자 하여 이 계사가 있었던 것이다. 정언신은 본디 여립과 숙종(叔宗)047) 으로 교분을 맺었고 또한 뜬 논의에 동요되어 고변한 자 5∼6인을 베려고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옥사를 뒤집으려 한다는 설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분울(憤鬱)하여 상소하여 논박하기에 이르자 상의 노여움을 크게 격발시켰다.】
- 【태백산사고본】 5책 23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583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사법(司法) / 인물(人物) / 사상-불교(佛敎) / 향촌-취락(聚落) / 신분-천인(賤人) / 왕실-사급(賜給)
- [註 044]목자(木子) : 이(李)의 파자(破字).
- [註 045]
○黃海道觀察使韓準、載寧郡守朴忠侃、安岳郡守李軸、信川郡守韓應寅等, 上變書言: "前修撰鄭汝立謀叛。" 汝立亡命。 初, 汝立數被譴旨, 遁歸湖南金溝縣, 或居全州, 往來金堤、鎭安別庄。 朝廷惜其退休, 論薦相繼, 每擬淸望, 上終不許。 汝立素有跋扈之志, 及挫抑甚, 其叛謀益肆。 迺假託講學, 招聚無賴, 武士、僧徒雜於其中。 豪橫攘奪, 田園旣廣, 又求請州郡, 少不稱愜, 輒囑臺官攻陷, 賓從塡門, 饋餉、贈遺, 無不滿意。 故其資實如官家, 以之陰養徒衆。 時, 國家軍政紊亂, 財力殫屈, 比年凶災、盜賊發。 民間常苦族隣軍布之徵, 又有北界刷民之撓。 汝立見民有思亂之漸, 遂與其徒決意謀亂。 且見海西俗頑, 曾有林巨正之亂, 求爲黃海都事, 不遂。 與安岳人邊崇福、朴延齡, 海州人池涵斗等, 潛相交結, 轉相誑誘, 應者近數百人。 池涵斗者, 本校生, 頗識字, 以奸行得罪鄕曲。 累變名字, 着黃冠、道服, 轉行兩湖, 從師汝立, 海西人稱以弟子往來者, 多涵斗之類也。 先是百餘年, 民間有木子亡, 奠邑興之讖。 汝立與妖僧義衍謀, 刻之玉版, 藏於智異山石窟中。 衍與其徒道潜、雪淸等, 諉以游山, 至智異山言: "某方有寶氣。" 使同行, 尋得玉版, 歸之汝立, 密示同黨, 戒其勿洩。 義衍本雲峯人, 自稱出於遼東, 徧行名山, 遇人綢繆曰: "余在遼東時, 望朝鮮, 有王氣, 及來朝鮮候之, 則王氣在全州東門外。" 由是, 全州王氣之說, 傳於遠近。 汝立又言: "其子玉男, 背有王字文, 避忌云是玉字, 以爲名。" 玉男一眼重瞳, 衆亦異之。 時有童謠云: "桑生馬鬣, 家主爲王。" 汝立與義衍, 潛於家園桑木, 鉅剮其皮, 塡以馬鬣。 日久皮合, 故令隣近親密見之, 而戒以勿言, 卽削去。 自國初以來, 有讖說: "連山縣 鷄龍山 開泰寺基, 乃他代鄭氏所都。" 汝立嘗與衍僧輩, 遍覽國內山川, 題詩廢寺壁, 有云: "客遊南國久, 鷄岳眼偏明。 戊己開亨運, 何難致太平?" 其詩多傳播。 又作無名子歌, 皆述民窮亂作之意, 人不知所自來也。 汝立博通雜術, 購得《堪輿》、《星紀》等書於中朝, 與其徒講說, 知國家將有壬辰之變, 欲乘時猝起, 卽與隣邑諸武士、公私賤隷壯勇人等, 作爲大同禊, 每月十五日, 約會一處, 射帿賭勝, 辦酒食以爲樂曰: "射者, 六藝之一也。 男子所當學習。" 故門人受學者, 皆習射爲業曰: "吾東方先儒, 只知禮學而已, 至於敎射藝, 則惟吾先生有之。" 丁亥倭變, 列邑調兵, 全州府尹南彦經, 踈迂不知所爲。 請汝立分軍, 汝立當之不辭, 一號令間, 軍兵皆會, 部分調遣, 不日而辦。 其將領則汝立皆用大同禊中親密武士。 賊退散軍, 汝立謂其將領曰: "他日脫有變故, 爾等可各領所部, 一時來候也。" 其軍簿一件, 汝立自持以歸。 彦經歎曰: "斯人不獨儒術, 其才不可及也。" 先數十年, 天安私奴名吉三峯者, 勇猛絶倫, 日步行三四百里, 因爲獷賊。 官軍每襲捕, 輒跳脫, 名聞國內。 汝立使涵斗等, 揚言於海西曰: "吉三峰、三山兄弟, 領神兵, 或入智異山; 或入鷄龍山。" 又言: "鄭八龍, 神勇人, 當爲王, 都鷄龍, 不久擧兵。" 八龍卽汝立幻號, 而不知情者, 疑爲別樣人。 海西方經巨正之亂, 及聞汝立等妖言, 人吏洶懼, 皆預備軍裝, 以備急警。 汝立徒黨混其間, 亦以待變爲名, 爭治兵器, 而不知者以爲禦寇也。 於是, 海西行言藉藉以爲: "湖南全州地, 當有聖人作興, 拯濟吾民, 則水陸皂隷、族隣徭役、推刷等役皆蠲免, 公私賤、庶孽禁錮之法皆革除, 自此國家太平無事。" 愚民聞之, 眩惑喧傳。 湖南士人, 亦或傳聞汝立將擧兵, 徒弟往來其間, 見其僧徒、光棍, 混雜居處, 男女無別, 大以爲疑。 長城士人鄭雲龍, 初與汝立交游, 見其所爲大驚, 言于長城縣監李啓, 欲上變而未得端緖。 移書汝立, 托他事絶之, 避地于京畿。 汝立兄汝復, 別居遠村, 察其亂萌, 亦欲上變, 故與書戒: "其門接無賴子弟, 必貽後患。" 擬取其答簡以爲証。 汝立覺其意, 而不答書, 躬詣兄家, 自明無他, 汝復不敢發。 其女壻進士金敬一, 在古阜, 聞民間傳言, 書問汝立, 汝立答書戒之曰: "仇我者做出此等說, 愼勿掛口, 又勿形諸文字也。" 僧道潜、雪淸等, 知其叛狀, 亦逃散。 汝立見事機頗洩, 人言漸廣, 恐便事覺, 決計作變。 乃陰部署約束, 期以是年冬末, 西南一時擧兵, 待江津氷合, 關防無助, 直犯京都, 焚燒武庫, 奪據江倉, 布腹心於都內, 規爲內應。 分送刺客, 約先殺大將申砬及兵曹判書, 矯傳旨, 殺閫帥、方伯。 又囑臺官, 論罷全羅監司、全州府尹, 欲乘其隙而起。 適李洁承召赴京, 過見汝立于金溝, 留連累日。 汝立餞送于驛樓, 酒間汝立談說殊常, 洁怪而反詰, 汝立以筆濡酒, 書于盤面。 洁失色驚起, 馳入恩津縣舍, 裁書付奴, 走報于兄潑, 謂縣監曰: "路中似有盜劫, 須得軍兵護行也。" 縣監發邑內民兵若干人, 備戎裝衛送, 縣次遞易。 行中果遇壯士數人, 軍裝騎馬, 穿過先後, 知有備不敢近。 洁過車峴, 解送所送軍, 得同鄕武士數人, 同行至京。 洁意欲與兄, 相議處置, 而不及, 【潑見弟書, 馳至參禮驛, 聞變。】 遂秘其言, 不敢直供, 世莫知所言云何也。 海西九月山僧, 有相應者。 僧義嚴詗其狀, 密言于載寧郡守朴忠侃, 忠侃遲疑未敢發。 安岳郡守李軸, 有族弟進士南截, 寓居郡地, 聞民間傳說, 告于軸, 軸使截譏察實狀。 截見校生趙球, 常稱汝立弟子, 多聚徒衆飮
, 踪跡不類平素告軸, 掩捕問狀。 見其家有汝立書簡, 書別號鰲山數紙, 多以胡椒、扇柄, 分寄其徒, 近百人。 軸詰之, 球知不可諱, 盡以逆狀發告。 【球非自意首告, 而軸難於與汝立對獄, 遂以球爲告首。 故其族類, 皆以逆黨死, 而球獨免死錄勳。 朝廷知其實, 雖除官, 而每駁遞之。】 軸以書招朴忠侃來會, 以信川郡守韓應寅名士, 可以取信朝廷, 乃以球詣信川, 聯名狀報于監司韓準。 忠侃卽日馳還載寧, 又得同黨, 居邑內者李綏問之, 綏自告一如球言, 卽竝擧前所聞於義嚴者, 具疏付其子, 馳詣闕先上變, 黃海監司狀啓追至。 是月初二日昏夜, 上出御便殿, 命招三公、六承旨、入直都摠管二員、弘文館上下番, 【鄭經世以典經在直。】 與左右史入侍, 汝立姊子檢閱李震吉, 方直史館, 命勿入侍。 上問諸臣: "汝立何如人?" 領相柳㙉、左相李山海對以不知其爲人。 右相鄭彦信對曰: "但知其爲讀書人, 不知其他也。" 上手擲其狀床下曰: "讀書人所爲, 乃若是乎?" 使承旨讀之, 兇謀狼藉, 左右咸縮頸汗背, 彦信獨低聲嘻笑, 上頗聞之。 大臣請分遣禁府都事, 逮捕汝立等, 倂拿告者來。 柳㙉請分遣討捕使, 以備非常, 上從之。 邊崇福一名涘, 勇健絶倫。 聞球告變, 自安岳奔告汝立, 四日而至金溝。 汝立卽與朴延齡子春龍、其子玉男, 乘夜逃脫, 家人不知所向。 都事柳湛, 翌日馳襲金溝、全州兩家, 俱弗獲, 都中震動。 領中樞盧守愼久病不出, 聞變詣闕起居。 上命引見, 守愼辭以蹇躄。 上命書啓所欲言, 守愼啓曰: "近日大變, 古今所無。 自上驚動必深。 臣不勝悶慮, 敢來問安, 千歲萬福。" 上曰: "安有如此事? 卿宜安心。" 上遣侍臣, 諭守愼曰: "久不見卿。 朝聞卿來, 欲引見, 而卿起居不便, 故不果矣。 玆者逆賊之變, 出於寡昧之時, 無非治國無狀之致, 慙負祖先, 無以爲懷。 卿霜朝出入, 得無有傷? 玆遣史官, 敦諭微意。" 仍賜厚皮褥一件。 守愼回啓謝恩, 且言: "臣意, 聖明之世安有如此之變? 如聞虛語, 骨痛不已。 伏惟聖慮, 從容覈治, 罪人斯得, 實萬世國家之福。" 【時, 守愼久病老耗。 門下名士, 卒聞逆變, 出其儕輩, 疑有誣罔, 奔謁守愼曰: "海西人多李珥門人, 此必誣告, 欲禍士林。 相公望重, 上素所倚信, 可以一言解釋也。" 守愼旣累薦汝立, 又聞偏黨之說, 欲探諷上意, 而有此啓辭。 鄭彦信本與汝立叔宗結交, 亦動於浮論, 至欲斬告者五六人。 由是有翻獄之說。 人情憤鬱, 致有疏論, 大激天怒。】
- 【태백산사고본】 5책 23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583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사법(司法) / 인물(人物) / 사상-불교(佛敎) / 향촌-취락(聚落) / 신분-천인(賤人) / 왕실-사급(賜給)
- [註 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