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수정실록17권, 선조 16년 5월 1일 임오 3번째기사 1583년 명 만력(萬曆) 11년

적호 5천여 기병이 방원보에 또 침범하니 최호 등이 물리치다

적호 5천여 기병이 방원보(防垣堡)에 또 침범했는데, 만호 최호(崔浩) 등이 조전장 이천(李薦)·이영침(李永琛) 등과 강한 쇠뇌[弩]로 사격하니, 적이 예기가 꺾여 물러갔다. 그 후에 율보리이탕개가 많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재차 방원보를 포위하였는데, 최호가 조방장 이발(李) 등과 함께 성에 올라 힘껏 싸웠고 우후 장의현(張義賢)과 판관 윤담(尹湛) 등이 종성부(鍾城府)에서 와서 구원하여 안팎으로 합세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크게 공격하니, 적이 마침내 패하여 물러갔다. 이때에 정예로운 장졸(將卒)들이 변방 진에 많이 모였는데 신입을 대장으로 받들기를 희망했으나, 조정에서 미처 발탁하여 등용하지 못하였다. 김우서(金禹瑞)는 아무 계책도 세우지 못하는 겁쟁이로서 호령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는데, 장사(將士)들이 모두 분개하며 매도하였다.

그러나 적호가 반년 동안 반란을 일으켜 여럽 번 침입하였으나 좌절만 당하고 실제로 소득이 없었으므로 번호들 스스로가 몹시 후회하면서 다시 모여 납관(納款)하였다. 그러나 율보리이탕개만은 심처(深處)로 도망해 들어가 다시 변방을 침입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탕개가 가장 사나운 자로 이름이 났다.

이탕개는 처음엔 변방의 장수를 섬기며 스스로 우리의 교화를 사모한다고 하면서 삼년상까지 치뤘으므로 조정에서 장성문(長城門) 밖에 효자문(孝子門)을 세워 정표해 주기도 하였다. 배반하고 떠난 지 수년 후에 다시 번호를 통해 납관(納款)하면서 다시 약속하여 속죄하고 변방을 지키기를 원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회령 판관에게 명령하여 항복을 받아들이는 체하고 국경에서 잡아 죽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판관이 겁을 먹고 몰래 대비책을 마련하는 통에 이탕개가 장막에 들어가려 하다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도로 달아나 다시는 오지 않았는데, 수년 후에 죽었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515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賊五千餘騎, 又犯防垣堡, 萬戶崔浩等, 與助戰將李薦李永琛等, 以强弩射之, 賊挫銳而退。 其後栗甫里尼湯介率大衆, 再圍防垣堡崔浩與助防將 等, 登城力戰, 虞候張義賢、判官尹湛等, 自鍾城府來援, 中外合勢, 開門大擊, 賊遂敗退。 是時, 精銳將卒, 多聚邊鎭, 思得申砬爲大將, 而朝廷未及擢用。 金禹瑞恇怯無謀, 號令不行, 將士皆憤嗤罵。 然賊叛亂半年, 屢入見挫, 實無所得, 藩種頗自悔, 還集納款。 惟栗甫里尼湯介, 遁入深處, 亦復寇邊, 尼湯介最號桀驁。 初, 服事邊帥, 自以爲慕我聲敎, 服喪三年, 朝廷命立孝子門於長城門外以旌之。 旣叛去數年, 復因藩胡納款, 願更約束贖罪守藩。 朝廷令會寧判官, 僞受降, 界上執而誅之。 判官恇撓, 潛爲之備, 湯介將入幕, 覺有異還走, 不復來, 數年乃死。


    • 【태백산사고본】 4책 1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515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