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국경의 번호가 난을 일으켜 경원부를 함락하니, 김수·양사의를 효수하도록 하다
북쪽 국경의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켜 경원부(慶源府)를 함락시켰다. 이때 변방의 장수들 대부분이 적임자가 아니어서 번호의 부락에 조금씩 피해를 끼치면서 변방의 대비책이 오래 전부터 해이해졌었다. 이에 호인들이 분개한 나머지 난을 일으킬 생각을 내었는데, 경원부 아산보(阿山堡) 번호의 추장인 우을지(迃乙知)가 ‘전 만호(萬戶) 최몽린(崔夢麟)이 번호를 침학한다.’고 소문을 내면서 부근에 격문을 보내어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만호 유중영(柳重榮)은 이런 모의가 있는 줄도 알지 못하고 토병(土兵) 몇 명을 보내어 정탐하게 했는데, 우을지가 잡아서 심처(深處)에게로 보내고 【북도의 오랑캐로서 강 건너 변보(邊堡) 가까이 살며 무역을 하고 공물을 바치는 자들을 ‘번호(藩胡)’라고 하고, 백두산 북쪽에 사는 여러 오랑캐로서 아직 친부(親附)하지 않은 자들을 ‘심처호(深處胡)’라고 하는데, 그들 또한 때때로 변방에 찾아와 정성을 바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처호가 변방에 들어오려고 할 때면 번호가 즉시 보고하고 이들을 막거나 구원을 하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조종조 때부터 번호를 후하게 대해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변방의 방어가 차츰 소홀해져 번호가 차츰 강성해지는데도 이들을 제대로 무마하지 못하게 되자 도리어 반란의 계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에 와서 번호가 앞장서서 난을 일으켰는데, 이로부터 혹은 심처호를 이끌고 와서 침범하기도 하며 반복해서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였으므로 북쪽 변방이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난을 일으켜 밤에 보성(堡城)을 습격하였다. 적이 성에 올라왔을 때, 이성 현감(利城縣監) 이지시(李之詩)가 계원장(繼援將)으로 보에 있다가 적이 온 것을 먼저 알고 혼자 나가 싸워 적을 물리쳤는데, 유중영은 겁에 질려 감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지시 역시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고 중영의 죄를 덮어 주었으므로 이들에게 상과 벌이 다 시행되지 아니하였다.
경원 부사(慶源府使) 김수(金璲)와 판관 양사의(梁士毅)는 아산(阿山)의 토병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경병(輕兵)을 인솔하고 강을 건너가 오랑캐를 쳐서 토병을 데리고 오려 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오랑캐에게 포위를 당하여 간신히 탈출해 돌아오긴 하였으나 군수품은 모두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적병 1만여 기(騎)가 부성(府城)을 포위하자 서문을 지키던 군사가 먼저 도망하니 적이 성 안으로 난입하였는데 김수가 군사를 이끌고 군기고와 창고를 지키며 힘을 다해 적에게 활을 쏘아대자 적이 들어오지 못하였다. 사의는 숨어 있으면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는데, 적이 그의 첩을 납치하고는 군졸을 풀어 크게 노략질을 해 갔다. 그때 종성(鍾城)의 오랑캐 율보리(栗甫里)와 회령(會寧)의 오랑캐 이탕개(尼湯介) 등도 연락을 받고 호응하여 일시에 모두 배반하였는데, 이탕개가 더욱 강성하였다. 병마사 이제신(李濟臣)이 연달아 장계를 올려 급한 상황을 보고하였다.
처음에 상이 변방의 보고를 듣고는 삼공과 비변사의 재신을 인견하고서 파산 무신(罷散武臣) 오운(吳沄)과 박선(朴宣)을 조방장으로 삼아 용사 8천 명을 인솔하고 먼저 달려가 응원하게 하는 한편, 경기 감사 정언신(鄭彦信)을 우참찬 겸 도순찰사로, 이용(李𢧳)을 남도 병마사로 삼아 빠른 시일 내에 계속해서 응원하게 하였으므로 나라 안이 크게 술렁거렸다. 그런데 얼마 후에 경원의 패보(敗報)가 이르가 상이 김수와 양사의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전관을 보내 군사들 앞에서 효수함으로써 군대의 기율을 떨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7권 1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509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인사-임면(任免)
○朔甲申/北界藩胡作亂, 陷慶源府。 是時, 邊將多不得人, 稍侵漁藩落, 而邊備久弛。 胡人忿驕思亂, 慶源府 阿山堡 藩胡酋長迂乙知聲言: "前萬戶崔夢麟, 侵虐藩胡," 傳箭旁近, 將作亂。 萬戶柳重榮不知其謀, 遣土兵數人偵之, 迃乙知執送深處胡中, 【北道胡人, 居江外接近邊堡, 交貨納貢者爲藩胡; 山北諸胡, 未嘗親附者, 謂之深處胡, 亦時時款邊。 深處胡欲入邊, 藩人輒告之, 或遮防調捄。 故自祖宗朝厚待藩胡者以此。 及邊防浸踈, 藩胡浸盛, 撫馭失宜, 反爲亂階。 至是, 藩胡首亂, 自是或引深處胡入寇, 反覆自利, 北邊始不安矣。】 遂作亂, 夜襲堡城。 賊已登城, 時, 利城縣監李之詩, 以繼援將在堡, 先知賊來, 獨戰却之, 重榮恇擾, 不敢出戰。 之詩亦不暴已功, 以掩重榮之罪, 賞罰皆不行。 慶源府使金璲、判官梁士毅, 聞阿山土兵被執, 領輕兵渡江, 欲擊胡取土兵來, 反爲胡人所圍, 挺身脫歸, 輜重、器械, 皆沒於賊。 賊萬餘騎進圍府城, 西門守兵先遁, 賊闌入城。 金璲率兵, 守軍器庫及倉庫, 力射賊, 賊不得入。 士毅竄伏不敢出, 賊掠取其妾, 縱兵大掠而去。 於是, 鍾城胡 栗甫里、會寧胡 尼湯介等, 傳箭響應, 一時皆反, 尼湯介尤强梁焉。 兵馬使李濟臣, 連狀告急。 上初聞邊報, 引見三公及備邊司宰臣, 以罷散武臣吳沄、朴宣爲助防將, 領勇士八千先赴援, 以京畿監司鄭彦信爲右參贊兼都巡察使, 李𢧳爲南道兵馬使, 刻期繼援, 國內大震。 旣而慶源敗報至, 上以金璲、梁士毅失守, 命遣宣傳官, 梟示軍前, 以振軍律。
- 【태백산사고본】 4책 17권 1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509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