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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14권, 선조 13년 2월 1일 신미 1번째기사 1580년 명 만력(萬曆) 8년

동지중추부사 허엽의 졸기

동지중추부사 허엽(許曄)이 졸하였다. 허엽의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다. 젊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따라 배웠고 노수신(盧守愼)과 벗하였으므로 사류로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가정(嘉靖)병오년001) 문과에 등제하여 즉시 간원에 들어갔다. 그는 일시의 원칙없는 논의에 대해 비록 의사를 달리하지는 못하였으나 마음 속으로 선류를 보호하려고 하여 일에 따라 구제한 점에 있어서는 칭찬할 만한 것이 있었다. 금상의 조정에서 간장(諫長)·관장(館長)에 오래 있으면서 직언을 잘하였지만 일의 실정에는 절실하지 못했으므로 상이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관질을 올려 경상 감사(慶尙監司)를 삼았다가 즉시 판서의 천망(薦望)에 의주(擬注)하여 장차 크게 등용하려 했다. 그런데 허엽은 말년에 매우 창기(娼妓)를 가까이 하였고, 조약(燥藥)002) 을 복용하다가 병을 얻은 뒤로는 성질이 편벽되고 조급해져서 형벌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 많게 되자 선비와 백성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결국 병으로 인하여 해직되어 오다가 상주(尙州)의 객관(客館)에서 졸했다.

허엽이황(李滉)과 더불어 학문을 논의할 적에 고집스럽고 구차한 논란을 많이 하자, 이황이 말하기를 ‘태휘(太輝)가 학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선인이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경훈(經訓)을 독실히 좋아하여 늙도록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이 점에 대해 훌륭하게 여겼다. 동·서의 당이 갈라진 뒤로 허엽은 동인의 종주(宗主)가 되어 의논이 가장 엄격했다. 박순과는 동문 수학한 친한 벗이었는데 만년에는 색목이 달랐기 때문에 공박하는 일에 서슴치 않았으며, 사람들이 묘지(卯地)라고 일컬었는데 묘(卯)는 정동(正東)이 되기 때문이었다. 세 아들인 성(筬)·봉(篈)·균(筠)과 사위인 우성전(禹性傳)·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하였다. 【허균이 패역(悖逆)으로 주멸(誅滅)당함에 미쳐서야 문호가 침체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87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001]
    병오년 : 1546 명종 1년.
  • [註 002]
    조약(燥藥) : 부자(附子) 등 약성이 조삼(燥渗)한 약을 말함.

○朔辛未/同知中樞府事許曄卒。 太輝, 號草堂。 少從花潭 徐敬德學, 與盧守愼爲友, 以士類著名。 登嘉靖丙午文科, 卽入諫院。 其於一時橫議, 雖不敢作異, 心護善類, 隨事救正, 有足稱者。 今上朝, 久爲諫長、館長, 好直言, 而不切於事情, 上不甚重之。 及陞秩爲慶尙監司, 卽擬判書薦望, 將大用矣。 末年, 頗近娼妓, 服燥藥得病, 性忽褊急, 刑罰多不中, 士民怪之。 仍病解職, 卒于尙州之客館。 李滉論學, 多執滯苟難, 曰: "太輝若不學問, 則眞是善人也。" 然篤好經訓, 至老不懈, 世以此賢之。 東西分黨之後, 爲東人宗主, 議論最嚴。 與朴淳同師相友, 晩年以色目之異, 攻駁不顧, 人稱爲卯地, 以卯爲正東故也。 三子, 女壻禹性傳金誠立, 皆以文士登朝, 論議相高, 故世稱許氏爲黨家最盛。 【及筠悖逆誅滅, 而門戶替矣。】


  • 【태백산사고본】 3책 1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87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