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수정실록 13권, 선조 12년 9월 1일 갑진 3번째기사 1579년 명 만력(萬歷) 7년

지중추부사 백인걸의 졸기

지중추부사 백인걸(白仁傑)이 졸하였다. 인걸의 자는 사위(士偉)이고 호는 휴암(休庵)이다. 그는 늙어서는 관사(官事)를 맡지 않았으며, 서울에 있는 사대부들이 자신을 중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그것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녹봉미와 마초값[騶直]을 모두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보내고 왕래하고 유숙하면서 우러르는 회포를 붙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위독하자 상이 문병하고 의원과 약을 내려보내 치료케 하였다. 졸하자 하교하기를,

"어진 재상이 죽었으니 내 마음이 놀랍고 애통하다. 부의를 더욱 후하게 하라."

하였다. 백인걸은 고매하고 소광(疏曠)하며 강개한 기백과 절의가 있었고 높은 뜻은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처음에 조광조를 스승으로 삼아 종신토록 한결같이 높이 사모하고 심복하였다. 을사년의 난(難) 때부터 만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곧은 말로 항거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감히 먼저 하지 못하였다. 그의 정직한 소리가 한때에 진동하였고 간사한 무리들도 역시 무섭고 두려워서 감히 그들의 분함을 풀지 못했다. 같은 때에 죄를 얻은 자들이 서로 잇따라 귀양가고 사사(賜死)되었는데 백인걸은 중도(中道)에 5년 간 정배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러 해 동안 곤궁하였으나 일찍이 뜻을 꺾지 않았고 만년에 등용되어서는 다시 시대와 뜻이 맞지 않았으나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은 머리가 희도록 변치 않았다. 일에 따라 선을 권하고 악을 못하도록 하되 반드시 그 뜻을 극진히 하였다. 나이 팔십이 넘어서도 오히려 강학에 힘을 써 밤낮으로 연구를 하되 성명(性命)에 관한 책이 아니면 읽지를 않았다. 그리고 집에 거처할 때에는 가난하고 검소하였으며 입고 먹는 것은 소략하고 거칠었는데, 먼지가 자리에 가득 쌓여도 쓸지 않았다. 상이 그의 기풍과 절의를 중히 여겨 끝끝내 총애하고 염려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86면
  • 【분류】
    인물(人物)

○知中樞府事白仁傑卒。 仁傑士偉, 號休菴仁傑老不任事, 雖在京士大夫不之重, 仁傑不以掛意。 祿米、騶直, 皆歸之道峯書院, 命駕往來宿留, 以寓景仰之懷。 至是疾篤, 上問, 賜醫藥。 及卒, 下敎曰: "賢宰卒逝, 予心驚動。 弔賻加厚。" 仁傑高邁踈曠, 慷慨有氣節, 卓然志不在溫胞。 初師趙光祖, 景慕心服, 終身如一。 自乙巳之難, 冒萬死抗危言, 他人莫敢先。 直聲振乎一時, 姦黨亦懾憚, 不敢肆其忿。 同時得罪者, 竄死相望, 而仁傑止於中道定配, 五年而放歸田里。 雖積年困窮, 而未嘗挫志。 晩際登庸, 雖復齟齬, 而忠義之心白首不渝。 因事獻替, 必極其意。 年踰大耋, 猶講學矻矻, 晝思夜索, 非性命之書, 則不讀。 處家貧儉, 服食粗踈, 凝塵滿席, 而不屑也。 上重其風節, 終始眷顧不衰。


  •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86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