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수정실록12권, 선조 11년 7월 1일 경술 2번째기사 1578년 명 만력(萬曆) 6년

아산 현감 이지함의 졸기

아산 현감(牙山縣監) 이지함(李之菡)이 졸(卒)하였다. 지함의 자(字)는 형중(馨仲)인데 그는 기품이 신기하였고 성격이 탁월하여 어느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모산수(毛山守) 정랑(呈琅)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초례를 지낸 다음 날 밖에 나갔다가 늦게야 들어왔다. 집 사람들이 그가 나갈 때 입었던 새 도포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니, 홍제교(弘濟橋)를 지나다가 얼어서 죽게 된 거지 아이들을 만나 도포를 세 폭으로 나누어 세 아이에게 입혀주었다고 하였다.

그는 어려서 글을 배우지 않았었는데 그의 형 이지번(李之蕃)의 권고를 받고 마침내 분발하여 학문에 주력하면서 밤을 새워 날이 밝도록 공부하곤 했다. 그리하여 경전(經傳)을 모두 통달하고 온갖 사서(史書)와 제자백가의 책까지도 섭렵하였다. 이윽고 붓을 들어 글을 쓰게 되면 평소에 익혀온 것처럼 하였다. 그래서 과거에 응시하려고까지 하였는데 마침 이웃에 신은(新恩)을 받고 연희(宴戲)를 베푼 자가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마음 속으로 천하게 여기고 마침내 그만두었다. 하루는 그 부친에게 고하기를,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으니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가솔을 이끌고 떠났는데, 그 다음 날 모산수 집에 화가 일어났다. 그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 그들의 현부와 길흉을 이따금 먼저 알아맞추곤 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무슨 수로 그렇게 알아맞추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평소에 형제와 우애를 돈독히 하여 따로 거처한 적이 없고 상사(喪事)와 제례에 있어서 전부 고례(古禮)대로만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듯이 하였는데 형이 죽자 심상(心喪) 삼년의 복을 입으면서 ‘형님이 실상 나를 가르치셨으니 이것은 형님을 위한 복이 아니고 스승을 위해 입는 복(服)이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처신하기를 확고히 하되 여색을 더욱 조심하였다. 젊은 시절에 주·군(州郡)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수령과 군수가 이름난 기생을 시켜서 온갖 수단을 다하여 시험해 보았지만 그는 끝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극기(克己)로 색욕을 끊었다.

그는 열흘을 굶고도 견딜 수 있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초립(草笠)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성시(城市)에 다니면 사람들이 서로 손가락질하며 웃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어떤 때는 천리 먼 길을 걸어서 가기도 하였으며 배를 타고 바다에 떠다니기를 좋아하여 자주 제주도에 들어가곤 하였는데 바람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조수의 시기를 알았기 때문에 한번도 위험한 고비를 겪지 않았다.

또 선친의 산소를 위하여 바닷물을 막아 산을 만들려고 수천 석의 곡식을 마련하여 모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교우 관계로는 이이가 가장 친했는데 이이가 성리학을 공부하라고 권하자, 지함이 말하기를,

"나는 욕심이 많아서 할 수가 없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공(公)은 무슨 욕심이 있는가?"

하자, 지함이 말하기를,

"사람 마음의 향하는 바가 천리(天理)가 아니면 모두 인욕인데, 나는 스스로 방심하기를 좋아하고 승묵(繩墨)으로 단속하지 못하니 어찌 욕심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내가 1백 리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만들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리게 하여 나라의 보장(保障)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말년에 아산군(牙山郡)에 부임하여 정치를 하게 되었다. 그의 정치는 백성 사랑하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서 해를 없애고 폐단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한창 시설을 갖추어나갔는데 갑자기 병으로 졸하니, 고을 사람들은 친척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지함은 일찍이 용산(龍山)의 마포 항구(麻浦港口)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그 아래에는 굴을 만들고 위에는 정사(亭舍)를 지어 자호를 토정(土亭)이라 하였다. 그 뒤에 비록 큰 물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갔지만 흙언덕은 완연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77면
  • 【분류】
    인물(人物)

    牙山縣監李之菡卒。 之菡馨伯。 氣稟神異, 卓犖不羈。 娶毛山守 呈琅女, 醮之翌日, 出而暮返。 家人覺其新袍亡, 問之則過弘濟橋, 見丐兒將凍死, 割而分之, 衣三兒矣。 少不學, 其兄之蕃勸讀書, 遂發憤力學, 夜以繼日, 盡通經傳, 凡史、子、百氏之書, 無不蒐獵。 旣而下筆爲文, 詞如素習。 然若將以應科擧, 適見隣有以新恩設宴戲者, 心賤之, 遂已之。 一日告其父曰: "婦門無吉氣, 不去禍將及。" 遂挈家而去, 翌日毛山家禍作矣。 其觀人賢否、吉凶, 往往先知奇中, 人莫知其何術得之也。 平生篤於友愛, 未嘗異處, 喪祭不盡依古禮。 事亡如事生, 兄沒而服心喪三年曰: "兄實敎我, 此, 師服也。" 處己壁立, 尤謹於女色。 少遊州郡, 守宰飭名妓, 試之百端, 終不動念, 克己斷慾。 能浹旬忍饑, 盛夏不飮。 草笠木屨, 僂行城市中, 人爭指笑之, 自若。 或步行千里, 好乘舟浮海, 屢入耽羅, 占風候潮, 未嘗遇險。 爲先壠, 捍海造山, 辦轉聚穀累千石, 竟不能成。 與李珥最相善, 勸以性理之學, 之菡曰: "我多慾未能也。" 曰: "公有怎欲?" 曰: "人心所向, 非天理則皆人欲。 吾喜自放, 而不能束以繩墨, 豈非慾乎?" 嘗曰: "得百里之邑而爲之, 貧可富、薄可敦、亂可治, 足以爲國保障。" 末年赴牙山爲政, 其治以愛民爲主, 除害袪弊, 方有施設, 遽以病卒, 邑人悲之, 如喪親戚。 之菡嘗於龍山 麻浦港口, 築土爲阜, 下爲窟穴, 上爲亭舍, 自號土亭。 其後雖大水暴齧, 而土阜宛然猶存。


    •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77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