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공조 참의 이원록의 졸기
전 공조 참의 이원록(李元祿)이 졸하였다. 원록은 이행(李荇)의 아들인데 기개(氣槪)가 있고 의(義)를 좋아하여 노수신(盧守愼)·이황(李滉) 등과 벗이 되었다. 오랫동안 옥당(玉堂)과 서당(書堂)에 있다가 을사003) ·병오004) 연간에 이조 정랑이 되었는데, 숙부(叔父) 이기(李芑)가 한창 권력을 부리던 때라, 문정 왕후(文定王后)는 그가 반드시 이기를 도울거라고 생각하여 은혜로 하사하는 것이 몹시 후하였다. 이황이 죄를 입었을 때 원록이 이기에게 강력히 말하여 풀어주게 하자 사론(士論)이 중시하였다. 원록이 이기에게 사류의 화를 누그러뜨리기를 매번 빗대어 말하자 이기는 차츰 좋아하지 않았다. 원록이 사람들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숙부가 하는 일을 보건대 후일에 집안의 재앙이 될까 걱정이 된다.’ 하였는데, 그 말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일찍이 술에 취하여 임백령(林百齡)을 비웃으며 꾸짖었으므로 백령이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기는 그가 자기와 달리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겨 대간을 사주하여 논박하게 하였다. 그러자 문정 왕후가 크게 노하여 하교하기를, ‘원록이 한 말을 보니 그가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이 분명하다.’ 하고는 잡아 가두어 장 일백을 친 뒤 극변(極邊)에 안치하게 하여 강계부(江界府)에 유배시키니, 드디어 유감(柳堪)과 함께 귀양을 갔다. 유감은 이조 좌랑이었는데, 이조에서 《신간을사정난기(新刊乙巳定難記)》를 인쇄하여 보려하였다. 유감은 ‘이조에 저장된 종이로 이 책을 인쇄하지 못한다.’ 하니, 동료 한지원(韓智遠)이 고자질하여 끝내 죄를 얻게 되었다. 명종 말년에 모두 사면(赦免)을 받아 돌아왔는데 유감은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으나 곧 죽었고, 원록은 두문 불출한 채 병을 조리하면서 다시는 진출하려는 뜻이 없어 한관(閑官)으로 있다가 죽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10권 7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468면
- 【분류】인물(人物)
○朔庚申/前工曹參議李元祿卒。 元祿, 荇之子也。 倜儻好義, 與盧守愼、李滉等爲友。 久在玉堂、書堂, 乙巳、丙午間爲吏曹正郞, 叔父芑方用事, 文定王后意必助芑, 恩賜甚厚。 李滉之被罪也, 元祿力言于芑, 得開釋, 士論重之。 元祿每諷芑緩士類之禍, 芑漸不悅。 元祿私語人曰: "觀叔父所爲, 異日恐爲家禍。" 其言傳洩。 又嘗醉酒, 嘲罵林百齡, 百齡銜之。 芑憾其異己, 嗾臺諫論之。 文定大怒下敎曰: "觀元祿所言, 其懷異心明矣。" 命拿囚, 決杖一百, 極邊安置, 配江界府, 遂與柳堪同竄。 堪爲吏曹佐郞, 曹中欲印看《新刊乙巳定難記》, 堪以爲: "曹藏之紙, 不須印此書。" 同僚韓智遠訐之, 遂得罪。 明廟末年, 竝蒙赦還, 堪爲議政府舍人, 旋卒; 元祿杜門養病, 無復進取意, 以閑官終。
- 【태백산사고본】 2책 10권 7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46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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