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정관 조헌이 경사에서 돌아와 올린 시무에 절실한 8조의 상소문
질정관(質正官) 조헌(趙憲)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다. 조헌은 중국의 성대한 문물을 익히 살펴보고 그것을 동방에 시행해 볼 생각으로 우리 나라에 돌아와서는, 시무(時務)에 절실한 것 8조와 근본에 관계된 것 16조 등 상소문 두 장을 초하였다. 이는 모두 중국의 제도를 먼저 인용한 다음 우리 나라가 현재 시행하고 있는 제도를 언급하여 그 득실의 이유를 갖추 논하고, 고의(古義)031) 와 절충하여 오늘날 시행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었다. 먼저 8조 소를 올리자, 상이 답하기를,
"천백 리 풍속은 서로 다른 것인데, 만약 풍기(風氣)와 습속이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본받아 행하려고 하면 끝내 소요만 일으킬 뿐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 때문에 조헌은 16조 소를 올리지 않고 말았다. 그 8조 소에,
"첫째, 성묘(聖廟)의 배향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가정(嘉靖)032) 때에 공자의 위패에 쓴 문선왕(文宣王)의 칭호를 ‘지성선사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고 고쳐 썼으며, 안자(顔子) 이하는 모두 작명(爵名)을 떼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문묘의 액호(額號)도 ‘대성전(大成殿)’이라 하지 않고 ‘선성묘(先聖廟)’라고 하였습니다. 위판(位版)의 길고 짧음은 감히 자세히 헤아려 보지 못하였습니다마는, 공자는 붉은 바탕에 금니(金泥)033) 로 썼는데 길이는 약 1자 남짓하고 폭은 2치 남짓했으며, 사성(四聖)034) 이하는 조금 짧아 1자가 조금 못되고 붉은 바탕에 먹으로 썼습니다. 종사(從祀)035) 이하는 더 짧고 부방(趺房)도 쓰지 않았으며 나무를 깎아서 대(臺)를 만들어 안치하여 놓았는데, 모두 독(櫝)036) 이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금년 5월에 내리신 바 위판의 치수를 상고하여 아뢰라는 교지를 보고 생각건대, 신의 소견으로는 융경(隆慶)037) 연간에 나온 《태학지(太學志)》에 기록된 척수(尺數)는 주척(周尺)이지 포백척(布帛尺)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태학(太學)의 동·서무(東西廡)에는 위(位)마다 각각 향로가 있었는데 우리 나라는 향로를 하나로 겸설(兼設)하였으나, 이런 일은 마땅히 의논하여 고쳐야 할 것입니다.
신은 살펴보건대 문선왕(文宣王)을 공자로 고쳐 부른 내력은 이렇습니다. 한 평제(漢平帝) 때에 왕망(王莽)이 간계(奸計)를 부리기 위해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고 잘못되게 불렀으며, 당 현종(唐玄宗)이 처음으로 ‘문선왕’이라고 시(諡)를 붙였는데 안자 이하는 차례로 공(公)·후(侯)·백(伯)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왕(王)과 공(公)으로 봉한 것은 부자(夫子)의 이른바 ‘군군(君君)·신신(臣臣)·부부(父父)·자자(子子)’의 도038) 에 있어서는 일체가 어긋나는 것으로서 성인을 거짓으로 높여 천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어찌 가신(家臣)을 둔 거짓을 꾸짖고039) 대부(大夫)가 앉는 자리라고 하여 바꾸도록 하신040) 분들이 그 이름을 일각인들 마음 편히 누리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자신은 황제라 자칭하고 자기의 신자(臣子)에게나 봉하는 왕의 칭호를 강제로 가하는 것은 더욱 성인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정(嘉靖) 10년041) 에 태학사(太學士) 장부경(張孚敬)의 건의로 인하여 천 년 동안의 과오를 일시에 바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아직까지 그 잘못을 답습하고 있으니, 마땅히 논의하여 고쳐야 할 것입니다.
신은 또 살펴보건대, 동·서무의 서열(序列)에 임방(林放)·거원(遽瑗)·공백요(公佰寮)·진염(秦冉)·안하(顔何)·순황(荀況)·대성(戴聖)·유향(劉向)·하휴(何休)·가규(賈逵)·마융(馬融)·정중(鄭衆)·노식(盧植)·정현(鄭玄)·복건(服虔)·범영(范寧)·왕숙(王肅)·왕필(王弼)·두예(杜預)·오징(吳澄) 등은 그 가운데에 있지 않았고, 후창(后蒼)·왕통(王通)·구양수(歐陽脩)·호원(胡瑗)·양시(楊時)·육구연(陸九淵)·설선(薛瑄) 등은 그 열에 들어 있었습니다. 대체로 종사(從祀)의 전례(典禮)는 성문(聖門)에 공이 있는 것을 보답하고 후학(後學)의 추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진염과 안하는 상고할 곳이 없고, 임방과 거원도 승당(升堂)042) 의 서열은 못 되고, 정중·노식·정현·복건·범영 등도 순유(純儒)가 아니므로 종사에서 내보내었는데, 임방의 예를 좋아함과 거원의 허물이 적은 점은 남의 스승이 될 만하고 정중 등 여러 사람들의 경(經)을 주해(注解)한 공은 기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각기 그 지방에서 향사하고 있습니다.
공백요는 직접 성문(聖門)에 유학하였으나 도리어 부자의 도를 해치려 하였고, 순황은 인성(人性)이 악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사(子思)와 맹자가 천하를 어지럽혔다고 말하였고, 대성은 자신이 장리(贓吏)의 오명을 입었고, 유향은 신선(神仙)을 즐겨 말하였고, 가규는 참위설(讖緯說)을 견강 부회하였고, 마융은 탐비(貪鄙)하여 권세가에 붙어 양기(梁冀)를 위해 조서(詔書)를 초하여 이고(李固)를 죽였고, 하휴는 《춘추》를 주해하면서 주실(周室)을 내치고 노(魯)를 왕으로 했고, 왕필은 노장(老莊)의 사상을 받들었고, 왕숙은 사마소(司馬昭)를 도와 위(魏)를 찬탈하였고, 두예는 관리가 되어서는 청렴하지 않고 장수가 되어서는 의롭지 않았으며, 오징은 출처가 바르지 않은데다 학술 또한 선(禪)으로 기울었으니, 이들은 마땅히 수사(洙泗)의 서열에서 거절당하여 다사(多士)의 모범이 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관(貞觀)043) ·원풍(元豊)044) ·정통(正統)045) 연간에는 조정에 진유(眞儒)가 없어서 정밀하게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마단림(馬端臨)이 사실 일찍이 그것을 논의한 일이 있고 홍치(弘治)046) 제신(諸臣)들도 축출하기를 청한 자가 많았으나, 예부(禮部)의 저지로 그 논의는 끝내 행하여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태학사 장부경(張孚敬)의 말로 인하여 과감히 개정하여 단번에 전대의 잘못된 견해를 씻어버림으로써 후생의 이목을 혼란하게 하지 않게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그들이 종사의 열에 끼어 있으니, 마땅히 논의하여 축출해야 할 것입니다.
후창(后蒼)은 《예서(禮書)》를 처음으로 주해하여 대·소대(大小戴)의 예학047) 이 그에 힘입어 후세에 전해졌고, 왕통(王通)은 학술이 도(道)에 가까와 격언(格言)에 순황(荀況)이나 양웅(揚雄)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고, 구양수(歐陽脩)는 성도(聖道)를 부지하고 이단을 배격한 공이 있어 주자(朱子)가 인의(仁義)로운 사람이라고 말하였고, 호원(胡瑗)은 제 몸을 닦은 뒤에 남을 다스리는 학문으로 맨 먼저 수당(隋唐)의 이(利)를 추구하는 풍조를 씻어버렸고, 양시(楊時)는 동남 지방에서 도를 제창하여 홀로 정씨(程氏)048) 의 가르침을 받아서 나(羅)·이(李)049) 에게 전함으로써 주자에게 미치게 하였고, 설선(薛瑄)은 도학이 끊겼을 때 떨치고 일어나 독실한 뜻으로 학문에 주력하였는데,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세워져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니 고풍 대절(高風大節)이 급류에 우뚝한 지주산(砥柱山)과 같았고, 물러나 강학(講學)하니 척구 미언(隻句微言)도 중천에 빛나는 일성(日星)과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홍치(弘治) 때에 양시를 부묘(附廟)하고 가정(嘉靖) 때에 구양수·호원·설선을 추가하였던 것이니, 우리 나라에서도 마땅히 강구하여 이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육구연(陸丘淵)의 학술만은 강문(講問)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돈오(頓悟)를 힘써 그 당시에 주자가 참으로 그 설의 해독을 우려하였는데, 유전되어 시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사람들이 더욱 심하게 빠져들어 온 세상이 휩쓸린 나머지 모두 선학(禪學)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어긋난 논의를 주장하고 주자를 비방한 왕수인(王守仁)과 같은 자를 오히려 종사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는 필시 강서(江西)의 사람들이 그 학설을 익히 보고 듣다가 조정에 벼슬한 자가 많아서 힘껏 육상산(陸象山)을 지지하여 위 로는 조정을 그르치고 아래로는 사학(斯學)을 그르치게 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니, 이와 같은 사례는 그 잘못을 본받아 구차스레 따라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은 또 보건대, 성묘(聖廟)의 서북쪽에 계성묘(啓聖廟)가 또 있었는데, 계성공(啓聖公) 공씨(孔氏)는 북쪽에 있고, 선현(先賢) 안무요(顔無繇)와 공이(孔鯉)는 동쪽에 있고, 증석(曾晳)과 맹손씨(孟孫氏)는 서쪽에 있었으며, 동무(東廡)에는 선유(先儒) 정향(程珦)과 채원정(蔡元定)이 있고, 서무(西廡)에는 주송(朱松)만 있었습니다. 대체로 학궁(學宮)은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안자·증자·자사는 묘(廟) 안에 있으면서 버젓이 먼저 흠향하는데, 안노(顔路)·증점(曾點)·백어(伯魚)는 아득히 밑에 있으니, 이는 보통 사람이라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성현의 마음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웅화(熊禾)와 홍매(洪邁)가 일찍이 한 묘를 따로 설치하자는 논의를 하였고, 홍치 때 정민정(程敏政)이 또 건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명 세종(明世宗) 때에 이르러 비로소 별묘(別廟)를 지어 춘추 석전(春秋釋奠) 때 동시에 행사(行祀)하였으니, 이른바 ‘자식이 비록 성인이라도 아비보다 먼저 먹지 않는다.’는 의리가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 나라도 문묘의 서쪽에 비어 있는 넓은 땅이 있으니, 만약 논의하여 별묘를 세워 춘추에 함께 행사한다면 인륜이 온전해지고 의리가 맞게 되어 한 나라의 부자 관계가 정립될 것입니다.
신은 또 중국 조정의 종향(從享)하는 일로 인하여 깊이 느낀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사습(士習)의 추향은 오직 윗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좌우되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지난번에 관학 유생들이 제현을 종사하자는 계청을 여러 번 올렸는데도 윤허하지 않으셨고, 근신(近臣)이 경연에서 아뢴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참으로 한 시대의 선을 지향하는 마음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신은 삼가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대체로 김굉필(金宏弼)은 처음으로 도학을 제창하여 선성(先聖)을 잇고 후학을 연 업적이 있고, 조광조(趙光祖)는 사도(斯道)를 이어서 밝혀 세상을 건지고 사람을 선량하게 한 공로가 있고, 이언적(李彦迪)은 도(道)를 지니고 순독(純篤)하여 기울고 위태로운 세도를 부지한 공로가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중국에서 찾아본다면 허형(許衡)과 설선(薛瑄) 이외에는 견줄 만한 자가 없고, 우리 나라에서 찾아본다면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안유(安裕) 같은 이도 그 경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황(李滉)은 동유(東儒)를 집대성하고 주자의 적통을 계승하여 조정에 나가서는 임금을 옳은 도리로 인도하는 정성이 소장(疏章)을 올릴 때에 간절히 나타나고, 초야에 물러나서는 후학을 각기 재능에 따라 가르치는 뜻이 강론할 때에 간절히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선한 자는 그 말을 듣고 경모(敬慕)하고 악한 자는 멀리서 그 풍모만 우러러 보아도 스스로 단속하였으니, 오늘날 선비들이 약간이나마 임금을 높이고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며 예의염치가 있게 된 것은 모두 그의 덕에 감화되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그 생존시 크게 쓰지 못하고 식자들이 태평 시대를 보기 어려움을 탄식하였는데, 사후(死後)에까지도 숭장(崇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현인을 시기하는 방탄(放誕)한 무리가 주위에서 보고 은근히 기뻐할 뿐만 아니라, 지난날 그 덕에 감화하여 일어났던 자들도 모두 실망하고 심지어는 직접 그 문하에서 배우고서도 성리(聲利)에 자취를 더럽힌 자가 있으니, 그 문하에 가지 않은 자야 장차 무엇을 믿고 선을 행하겠습니까. 아, 제현의 종사를 청하는 소청은 따르고 따르지 않는 일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지만, 사습(士習)의 사정(邪正)은 이미 그것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어찌 중난(重難)한 일이라고 하여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후창(后蒼) 등 제현(諸賢)은 전대(前代)에 종사하던 이들이 아닌데도 세종 황제가 어질다는 것을 분명히 알자 종향(從享)하며 의심하지 않았고, 공백요(公伯寮) 등 제인(諸人)은 전대에 일찍이 종사하던 이들이었지만 세종 황제가 어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자 출향(黜享)하는데 의심이 없었으며, 임방(林放) 등 제인이 모두 취할 만한 한 가지 장점이 있자 각각 그 고향에 제사지내게 하여 그 좋은 점이 민몰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기타 근세의 제현으로서 장무(章懋)·오여필(吳與弼)·진헌장(陳獻章)·호거인(胡居仁)·진진성(陳眞晟)·채청(蔡淸) 같은 이들이 각기 사문(斯文)에 공이 있자, 황상(皇上)이 명하여 그 고향에서 제사지내게 하고 선조(先朝)에서 정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여 혐의하지 않았으며, 요동 성중(遼東城中)에도 관영(管寧)·왕열(王烈)·이민(李敏)·장승(張升)·호심(胡深)·하흠(賀欽)을 서원(書院)에 사당을 짓게 하여 사액(賜額)하고 아울러 서책을 다 내려주었습니다. 따라서 숭장(崇奬)하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학문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높아서 후학을 일깨우고 격려할 만한가에 달려 있을 뿐, 그와 같이 조금도 시대의 고금(古今)에는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 김굉필 등 네 사람의 군자(君子)는 마땅히 종사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조정에서나 사류가 다 이론이 없는데도 이처럼 시일을 끌고 있으니, 과연 이 사람들이 어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사현(四賢)을 숭장하여 종사(從祀)의 서열에 넣으소서. 그리하여 그 사람을 존숭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말을 채용하실 것이며, 그들이 일찍이 진달했던 말을 전부 취하여 매일 앞에다 놓고 성치(聖治)에 도움을 받으시기를 그 사현(四賢)이 임금 앞에서 친히 아뢰는 것처럼 하실 것이며, 또 그 나머지도 추장(推奬)하여 팔방의 사자(士子)로 하여금 모범을 삼게 하신다면, 선현을 포숭하고 후학을 권장하는 일이 두 가지가 다 진선 진미하게 되어 문왕(文王)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나는 자들050) 이 일반 백성들 속에서 많이 나올 것입니다.
둘째, 내외(內外)의 서관(庶官)에 관한 일입니다. 신은 관제(官制)에 대해서는 달리 상고할 길이 없었는데, 겨우 《진신편람(縉紳便覽)》 두 책을 얻어 내용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대소의 경관(京官) 및 외관(外官)으로 남북 두 직례(直隷)와 지부(知府) 이상까지가 모두 이 책에 실려 있는데, 기타의 외관은 일일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천하의 서관(庶官)이 이와 같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주의(注擬)할 때는 한결같이 어렵게 여겨 신중을 기합니다. 혹시 결관(缺官)이 생기면 육부(六部)와 도찰원(都察院)이 모여 의망할 사람을 의논해서 중론이 다 정해진 다음에 이부(吏部)가 이망(二望)만을 갖추어 올리는데, 황산(皇上)은 의례 수천(首薦)에 낙점하곤 합니다. 대체로 중국의 그 많은 인물로 어찌 삼망(三望)을 갖출 만한 자가 없겠습니까. 참으로 인재를 얻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서관(庶官) 중에 하나라도 혹시 바르지 않은 사람이 끼어든다면 그 피해가 생민에게 돌아가고 재앙이 국가에 미치기 때문에, 밑에서는 감히 좋지 않은 인재로 구차히 천거하지 아니하고 위에서는 감히 사사로운 뜻으로 구차히 임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단 뽑혀 제수되면 오래도록 논박을 받지 아니하며 부임하고 나서는 또 그 직책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되는데, 구재 삼고(九載三考)051) 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출척(黜陟)을 결정합니다. 교관(校官)이나 변수(邊帥)도 가족을 데리고 가서 대부분 오래지낼 계획을 함으로 서관(庶官)이 대부분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여 백성들이 거의 안정된 삶을 누려가고 있으니, 중국이 천하를 보전하고 안정을 누리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인재가 중국에 비해 2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데 사화(士禍)를 여러 번 겪은 나머지 사류의 추향이 잘못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삼강(三綱)이 밝지 않아 의리(義利)를 분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경영하고 도를 논하는 자를 쉽게 만나기가 어렵고 국사를 책임지고 직책을 생각하는 자도 많이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조(政曹)에서는 주의(注擬)할 때 논의할 대상을 미리 정하지 않고서 정청(政廳)에 좌기(坐起)한 다음에야 붓을 잡고 비로소 논의하므로, 삼망(三望)이 다 합당한 인물인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빈 자리가 많아 인원이 모자랄 때는 일망(一望)만 겨우 갖추고 나머지는 다 구차하게 채우는데, 상께서 낙점하시는 것도 인망(人望) 밖에서 나오니, 군정(群情)이 만족해 하지 않고 공론이 시끄럽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동쪽에서 빼내어 서쪽에 보충하고 아침에 제수하였다가 저녁에 교체하는 것을 면치 못하니, 경외 관원이 자기가 맡은 일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며 앉은 자리가 미처 따뜻해지기도 전에 이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장부가 없어지고 재물만 도적질 당한 채 간리(奸吏)의 술책에 빠지는가 하면, 신임자를 맞이하고 전임자를 보내느라 인부를 차송하고 말을 보내 천 리 밖에서 창황 분주하여 잔약한 백성의 산업(産業)을 망치니, 이것 또한 중원(中原)에는 없는 폐단입니다.
그리고 새로 제수된 사람이 목민관(牧民官)에 합당하지 않으면 빨리 의논하여 체차하는 것이 옳은 것인데, 반드시 떠나는 날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계청하여 파직하므로 처음에 1개월 먹을 양식만 가지고 멀리서 온 관속(官屬)이 월리(月利) 빚을 내어 새 관원이 출발할 때까지 머물러 기다리니, 집에 들어가서 전답을 팔아 겨우 월리만 갚고도 집은 망하고 맙니다. 1년 동안에 폄파(貶罷)되는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의 관원을 위하여 서울로 와서 맞이하는 자가 백 명 뿐만이 아니니, 1년 동안에 이로 인하여 생기는 실업자가 몇 백 명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아, 이조(吏曹)가 사람을 쓸 때에 잠시라도 잘 살피지 않으면 사방의 사민(士民)이 그 해를 입지 않는 자가 없으니, 어찌 작은 일이라고 하여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벼슬의 임용을 삼가서 하라는 이윤(伊尹)의 가르침을 받들고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공자의 탄식을 생각하시어 이조를 신칙(申勑)하심으로써, 반드시 적합한 인재를 논정하고 공론에 흡족하게 한 다음에 그 망(望)을 채우게 하되, 만약 사람이 모자라면 꼭 세 사람을 갖추게 하지 마소서. 그리고 상께서도 항상 한 사람을 잘못 쓰면 국사가 그만큼 망가지고 서관(庶官)을 자주 교체하면 백성이 그 해독을 받는다는 것을 두려워하시어, 친근한 자에게 주지 말고 오직 유능한 자에게 주며 악덕(惡德)에게 주지 말고 오직 어진이에게 주소서. 또 반드시 수선(首選)을 임용하여 그 직을 오래 맡겨서 분발하여 치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초천(超遷)한다면, 사람마다 열심히 직무를 수행할 것이고 백성이 그 안식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셋째, 귀천의 의관(衣冠)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삼가 중조(中朝)의 의관 제도를 보건대, 복두(幞頭)052) 의 연각(軟脚)053) 은 이름을 안시(鴈翅)라고 하는데, 그 제도가 구부러져 있고 그 끝은 좌우에서 복두의 몸에 가로 꽂았으며 굽은 곳이 위로 향해 있어 마치 새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형상이기 때문에 또한 전시(展翅)라고도 합니다. 홍포(紅袍)·청포(靑袍)·벽적(襞積)은 도포(道袍)와 같고 단령(團領)과는 달랐습니다. 기타 상복(常服)은 위에서부터 밑자락까지 부대(浮大)하지 않고 땅과의 거리도 칫수가 모두 같았습니다. 신이 삼가 홍무(洪武)054) 연간에 정한 규례를 보니, 문관의 옷은 땅까지 1치이고 무관의 옷은 땅까지 5치이며, 소매의 너비는 문무관이 다 1자쯤이었습니다. 소매통[袪]은 문관은 9치, 무관은 겨우 주먹이 들어갈 정도이고, 의살 직령(衣撒直領)055) 을 입은 것은 지금 문무관의 제도가 같기는 하나 그 정제되고 의젓한 모양은 본받을 만했습니다.
유건(儒巾)의 이름은 민자건(民字巾)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모양이 민(民)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제도는 대[竹]를 얽어 치포(緇布)056) 로 싸기도 하고 종이에 풀을 발라 만든 뒤에 옻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항상 쓰고서 안개나 빗 속에도 그냥 다니는데 우리 나라의 사건(士巾)처럼 이슬만 맞아도 쳐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모양도 단정하고 평평하여 그다지 뾰죽하거나 경사지지 않으니, 매우 잘못되었다고 할 팔도의 사건(士巾)을 이 제도에 따라 고치게 한다면 외관상 보기에도 좋을 것입니다. 국자감(國子監)에 있는 거인(擧人)이나 서정(西庭)에 참례(參禮)하는 무학생(武學生)057) 은 모두 유건(儒巾)과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고 기타 학생은 중외(中外)가 모두 난삼(襴衫)을 입는데, 대체로 옥색(玉色)에다 청견(靑絹)으로 선을 둘렀으며 선의 너비는 2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이른바 청금(靑衿)058) 은 이와는 크게 다른데, 그 제도를 따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청금을 시행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내시들의 건(巾)은 대[竹]로 얽고 베로 싼 것으로서 모양이 모자(帽子)와 같으며, 관직이 있는 자는 테[簷]가 있는데, 정수리 뒤로부터 위로 올라가서 모자보다 1치가 높아 마치 세워 놓은 기왓장과 같고, 관직이 없는 자는 모자만 쓰되 다만 베로 앞에서부터 모자를 둘러싸고 그 끝은 정수리 뒤로 늘어뜨렸으며 길이는 거의 반 자쯤 됩니다. 옷은 망룡 철릭(蟒龍帖裏)이나 의살 직령(衣撒直領)을 입었는데, 그 길이는 모두 복숭아뼈 부분까지 내려오고 띠는 가느다란 실끈으로 하였으며, 탑전(榻前)에 시립(侍立)하는 자라 할지라도 이 옷만 입기 때문에 봉록이 작은 내시들도 구비하기가 쉽습니다. 문무 서관(庶官)은 다 아패(牙牌)를 패용하여 자신의 직명(職名)을 기록하는데 그 끈은 모두 흑색이고, 내시는 아패의 끈을 적색으로 하여 일반 관원과 구별하였습니다. 그 의복이 이와 같이 법도가 있었습니다.
요동(遼東)과 광령(廣寧)은 다 변군(邊郡)인데도 일을 맡고 있는 연리(掾吏)는 건(巾)이 녹사(錄事)와 같고, 지인(知印) 이하의 건은 서리(書吏)와 같은데 조금 높고 모두 단령(團領)을 착용합니다.
작은 현(縣)인 무령(撫寧)과 풍윤(豊潤)의 아전도 모두 그와 같았습니다. 대체로 수령이 관대(冠帶)를 갖추고 청사에 좌기하면 아전은 감히 그러한 의복을 입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경우는 외읍(外邑) 아전이 수령이 관대를 갖추고 있는 곳에 테가 넓은 호립(胡笠)을 쓰거나 혹은 평립(平笠)을 쓰고 있고 모두 예복이 없으므로 매우 사람 꼴이 되지 않는데, 심지어 평양(平壤)과 의주(義州) 등지의 아전 의복까지도 그와 같습니다. 각사(各司)의 아전과 지방 고을아전의 의복을 만약 중국의 법에 따라 고친다면, 비록 천한 도필리(刀筆吏)라도 의젓하게 예복을 갖추어서 괴벽한 풍속이 없어질 것입니다.
사내아이는 머리를 따지 않는데, 15세 이하는 잘라서 드리우고 15세 이상은 목뒤에 묶은 뒤 모두 모자를 쓰며, 친족에 상사(喪事)가 있으면 흰 모자로 상기(喪期)를 마칩니다. 경·(卿)·사(士)·서인(庶人)의 아들은 모두 20세가 된 뒤에 비로소 관을 쓰니, 빠른 성취를 바라지 않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미 시집간 여인은 머리를 정수리에 묶고 붕계(鬅髻)059) 를 얹는데, 그 제도는 북쪽 사람은 철사로 묶고 남쪽 사람은 대[竹]로 묶으며 남북이 다 비단으로 쌉니다. 또 비단을 걷고 수박(首帕)060) 을 하기도 하는데 역자(鈠子)라고 부릅니다. 겨울에는 혹 모피(毛皮)로도 하는데 난액(暖額)이라고 하며, 이마에서부터 상투를 둘러 머리 뒷꼭지에 맺고 그 위에 비녀를 꽂습니다. 부인이 무슨 일로 밖에 나갈 때는 역자를 무늬비단으로 꾸미거나 혹은 금피(金皮)를 얹습니다. 신부를 친영(親迎)할 때에도 그것만 머리에 씌울 뿐이며 혹은 칠보(七寶)로 단장할 때도 있는데, 시속에서는 이것을 화관(花冠)이라고 합니다. 배자(背子)는 소매가 매우 넓고 장옷[長衣]은 없습니다. 긴 치마[長裙]는 주름을 잡지 않고 짧게 하며 화려하게 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의관을 단장하기는 하나 오히려 검약한 풍속이 있습니다.
신이 도중에서 향화(向化)한 달자(㺚子)의 부인을 보고 또 중국에 진공(進貢)하고 돌아가는 그들 무리를 보았는데, 불행히도 우리 나라의 사내아이 및 여인의 염발(斂髮)한 모습과 비슷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습속이 오래도록 유전되어 온 결과라 하더라도 지금 성주(聖主)께서 한 번 변화하여 도에 이를 수 있는061) 좋은 기회에 또 흐지부지 넘어간다면 후일에 중국 사가(史家)가 기록할 때 과연 조선은 관대지국(冠帶之國)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신은 삼가 듣건대 경사(卿士)의 집에서 간혹 그 제도를 본받아 남녀의 머리를 거두어 싸매게 하고는 싶으나, 아직 상의 명이 없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고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약 사부(士夫)로 하여금 먼저 행하게 하고 백성도 따라서 차츰 고쳐가게 한다면, 중국의 풍속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뇌포(腦包)는 곧 우리 나라의 이른바 이엄(耳掩)입니다. 그 제도는 비록 작지만 항상 착용하기에 편리하며, 여인은 늙고 병든 자만이 착용하는데 그 제도가 더욱 작아서 준비하기가 쉽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 나라 사람은 이엄을 사치스럽고 큰 것을 좋아하여 상민(常民)도 오히려 2구(具)의 피륙을 쓰고 여인의 모관(毛冠)은 거의 3구의 피륙을 쓰며, 이른바 대이엄(大耳掩)이란 것은 거의 5구의 피륙을 씁니다. 이 때문에 피륙값이 매우 비싸서 가난한 노병자가 사서 쓰고 싶어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중국의 제도에 의하여 고치고 사치스럽고 큰 것을 사용하는 풍습을 일체 금한다면, 피륙 값이 오르지 않아 노병자에게까지 두루 차지가 갈 것입니다. 중원(中原)에 삿갓을 쓰는 제도가 있기는 하나 사람마다 모두 갖추고 있지는 않습니다. 밖에 출행할 때에는 문관(文官)은 충정관(忠正冠)을 쓰고, 무관은 테가 있는 털모를 쓰고, 유자(儒者)는 유건(儒巾), 아전은 이건(吏巾)을 쓰고, 상인(常人)은 모두 모자(帽子)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공통으로 입자(笠子)를 쓰므로 많은 값을 헛되이 소비합니다. 만약 중국의 풍속을 따라 아전이나 사류는 각기 그들에게 맞는 건을 착용하고 서인(庶人)은 모자만 착용하게 한다면, 곤궁한 사람이 많은 값을 들여가며 입자를 사는 걱정이 없어질 것입니다.
대체로 중원의 의관 제도는 간략하여 쉽게 구비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천하가 같은 제도권에 있는 때에, 운남(雲南)과 귀주(貴州)같은 경우는 경사(京師)와 1만여 리나 떨어져 있어 거친 머리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오랑캐 지역인데도 대소 남녀가 하나같이 중국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 기방(箕邦)062) 은 경사와의 거리가 4천 리가 채 못되어 실로 오복 제후(五服諸侯)063) 와 다름이 없는데도 남녀 의관에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신은 삼가 안시(鴈趐)·유건(儒巾)·붕계(鬅髻)·역자(鈠子)를 갖추어 올립니다. 전하께서 만약 시왕(時王)의 제도를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신다면 청컨대 이것을 공조(工曹)에 내려 견본으로 삼도록 하소서. 그리고 뇌포(腦包)·건모(巾帽)·삼포(衫袍)·벽적(擘積) 등에 대해서는 사행(使行)에 오래 따라다닌 통사(通事)로 하여금 공인(工人)을 자세히 가르치게 하여, 종이를 재단해서 견양을 만들어 널리 팔도에 나누어 준 뒤 그대로 차츰 고치게 한다면, 의관이 전부 중국 제도를 따른다는 것이 실어(實語)가 될 것입니다.
넷째, 음식 연음(宴飮)에 관한 일입니다. 신은 삼가 보건대 중원 사람은 절용(節用)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관원의 가공(家供)은 반찬이 두세 그릇 뿐이었고 사가(私家)의 음식은 더욱 검소하였습니다. 연음할 때에는 작은 잔에 따르고 순배 수를 정해 놓고서 감히 한계를 넘게 마셔 정신이 혼란하게 함으로써 맡은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하니, 이것이 공사(公私)의 재력이 다 넉넉하고 서정(庶政)이 잘못되지 않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풍속은 오로지 풍성한 음식에다 많이 마시는 것을 힘써서 재물이 바닥이 나도 걱정할 줄 모르고 백성이 곤궁해도 구제할 줄 모르며, 위에서 명해도 따를 줄 모른 채 자연의 물산을 쓸데없이 소모하고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해치는 일이 끝이 없습니다. 내사(內司)의 서관(庶官)이 가공(家供)을 행하기는 하나 호사하는 무리가 찬품(饌品)064) 을 성대히 갖추므로, 빈약한 선비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 간혹 까닭없이 정병(呈病)하고 직무를 부지런히 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이항(里巷) 간에는 원대한 생각이 없어서 소비 풍조가 더욱 심합니다. 아, 이것이 무슨 풍속인데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외방 열읍(列邑)에서는 비록 찬품의 그릇 수를 한정한 분부가 있어도 오활한 말로 보아 전혀 봉행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조명(朝命)을 따르고 싶어하는 자가 있더라도 떳떳한 임무로 나간 사신(使臣)이 그 찬품의 풍약(豊約)을 보고 그 사람의 현부(賢否)를 정합니다. 그리하여 공억(供億)을 성대히 하면 아무 수령은 어질어서 윗사람을 공경한다고 하고, 자봉(自奉)을 박하게 하면 아무 수령은 본심을 속여 명예를 구한다고 하여 분분하게 비방하면서 논의가 끝이 없으니, 명색이 유식한 자라도 바야흐로 뜻을 굽혀 풍속을 따라서 남의 비난을 면하려고 꾀하는데 무지한 수령이야 나무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임금도 이유없이는 소를 죽이지 않는 법인데 영리(營吏)와 추종(趨從)까지도 반드시 소를 도살하여 먹이며, 대부(大夫)라야만 세 끼 밥을 먹는 법인데 7세된 관아의 아이가 많은 찬품을 갖추어서 네 끼를 먹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심지어는 중국 사신이 올 때에만 큰 고을에서 이따금 구작(九爵)의 연회를 베푸는 법인데도, 사행(私行)의 무뢰배들까지 모두 잔치를 열어 풍악을 잡히고 밤새도록 취하여 마시니, 그와 같이 소비하는 술이며 고기는 또한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저절로 솟아난 것이 아닙니다. 읍리(邑吏)를 차례로 육례방(肉禮房)으로 삼아 한 달에 소 세 마리 값을 주지만 관원이 먹는 것은 열 마리까지 되기도 하고, 관비(官婢)를 차례로 주모(酒母)로 삼아 한 달에 쌀 세 가마를 주지만 관원이 마시는 것은 거의 스무 가마에까지 이릅니다. 그리하여 객사 장교(客舍將校)는 등석(燈席)의 주선에 시달리고 원두 관노(園頭官奴)는 채과(菜果)의 지공에 시달린 나머지 전답을 팔게 되고 그런 다음에는 일족(一族)에게서 거두어들이며, 더 나아가 촌민(村民)을 침색(侵索)하다가 그래도 지탱하지 못하게 되면 옷을 찢어 거지 주머니를 만들어 차고는 서로 무리지어 도망갑니다.
아, 중원의 서관(庶官)은 닭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도 감히 민간에게서 무리하게 거두지 아니하는데, 우리 나라는 관원으로 있는 자가 자신의 구복(口腹)을 봉양하는 일로 조종(祖宗)의 적자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 몇 천만 가지나 되는지 모릅니다. 어찌 군신(君臣)이 서로 맹세를 하고 서둘러서 음식을 검소하게 함으로써 진공(進供)을 올바르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변방의 장사(將士)는 더욱 한 자리에 모여 술 마시는 일이 많습니다. 인경(隣境)의 수수(守帥)와 병사(兵使)·수사(水使)가 왕복할 때, 영송(迎送)하는 관례라고 명분을 삼아 소를 잡고 술을 빚으며 짐바리에 보화를 싣는가 하면, 진(鎭)을 버리고 경계를 넘어가서 주거니 받거니 연일 통음(痛飮)하는데, 양계(兩界)와 양남(兩南)이 이와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잔약한 병졸을 수탈하는 것이 염려스러울 뿐만이 아닙니다. 적이 그 헛점을 틈타 침범할 경우 그 누가 과연 막아 지키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우증(李友曾)이 몹시 취하여 부산(釜山)이 함락되는 것도 알지 못했던065) 까닭인데, 후일 어려움이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 중원 지방은 주화(酒禍)가 오히려 적은데 우리 나라 사람은 술을 즐겨 마시다가 요사(夭死)한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이야 비록 구욕(口欲) 때문에 몸을 망쳤다 하더라도 세상을 수역(壽域)으로 올려놓기를 추구하시는 성주(聖主)의 마음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가련한 일입니다.
모든 화의 근원은 면밀히 예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신은 삼가 작은 술잔 10매(枚)를 갖추어 올립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찹쌀 술을 금한 황조(皇祖)를 본받고 음주를 경계한 광묘(光廟)066) 의 뜻을 받들어, 두 개는 경중(京中)에 여덟개는 각도에 견본으로 내려서 그것을 모방하여 술잔을 만들게 하소서. 그리하여 대빈(大賓)·대사(大祀)·향음(鄕飮)·향사(鄕射)067) 하는 때에 한결같이 중국인의 예법을 따라 잔 수를 엄히 정하게 함으로써 많이 취하여 몸을 망치게 하지 마시고, 기타 제때가 아니거나 예가 아닌 연회와 사행(私行)에 술 세 잔을 초과하여 마신 자는 한결같이 주고(酒誥)의 법068) 대로 처벌하소서. 그러면 거의 재물을 허비하고 백성을 병들게 하며 국정을 해치고 일을 망치는 화가 없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사부(士夫)의 읍양(揖讓)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예부(禮部)가서 좌기(坐起)하는 의식을 보았습니다. 당상(堂上)이 앉기 전에 낭중(郞中)·원외랑(員外郞)·주사(主事)·사무(司務)·관정(觀政)·진사(進士)가 동서로 당 위에 서로 향하여 서서 잠시 읍하고, 앞 줄에 있는 사람은 뒷 줄을 돌아보고 읍하며, 역사(歷事)와 감생(監生)은 동서의 섬돌 위에 서로 향하여 서고 당리(堂吏)는 그 뒤에 섭니다. 당상이 후합(後閤)으로부터 나와서 앉으면 낭중 이하가 모두 북으로 당상을 향하여 일어나서 읍합니다. 당상이 의자 위에서 약간 구부려 읍하면 낭중 이하는 동서로 나눠 서서 서로 향하여 한 번 읍하고 나가고, 감생과 당리는 차례로 첨하(簷下)에 나아가 한 번 읍하고 물러납니다. 낭중은 동쪽으로 동협실(東夾室)의 밑에 서고, 원외 이하는 서쪽을 향하여 마주보고 서며 진사는 모두 북쪽을 향하여 서쪽으로 올라가 서로 나란히 서서 읍합니다.
원외 이하가 또 낭중의 오른쪽에 나아가고 진사는 나란히 서서 서로 읍하는데, 낭중이 협실의 문으로 나가면 원외 이하는 모두 서쪽으로 섰던 제 자리로 돌아가며, 진사는 두서너 걸음 물러나서 모두 낭중을 향하여 서로 읍하고 그 국(局)으로 물러납니다.
낭중 이하는 마주 앉아서 일을 의논하고, 일을 아뢸 것이 있는 외관(外官)은 뜰 밑에 섰다가 월대(月臺) 위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낭중 한 사람이 손에 게첩(揭帖)을 들고 한 번 읍하고서 당상의 책상 위에 놓아두고, 당상이 일어나라고 말하면 외관은 일어나서 한 번 읍하고 물러갑니다. 당상이 투문(投文)069) 을 받아서 사사(四司)070) 에 나누어주고 물러가 화방(火房)에서 쉬면 낭관들이 그 일을 상세히 논의하여 아뢰어서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공사(公事)를 주하(奏下)하는 데 1∼2일이 지나지 않으며 민첩(民牒)을 복주(覆奏)하는 것은 그날로 결정하여 줍니다. 그 예모(禮貌)를 보면 온화하고 정숙하며 사무를 처리할 때는 가부를 논정하여 적체되는 일이 없게 하니, 이 한 부(部)만 보더라도 타사(他司)의 일을 따라서 알 만합니다.
아, 중조는 서관(庶官)이 예를 좋아하고 일에 부지런한 것이 이와 가은데 우리 나라의 육조 등처는 예모가 허술하고 폐풍이 만연해 있습니다. 희만(戲慢)하여 무리하게 처리하는 일이 지금은 조금 고쳐졌다고 하나 좌랑이 정랑에 대해서는 감히 머리를 들고 함께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공사(公事)를 조사(曹司)인 좌랑에게 일임하는데, 좌랑이 그 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나머지 계하(啓下)된 공사를 혹 순월(旬月)이 지나도 신복(申覆)할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며, 군민(軍民)의 송첩(訟牒)은 서리(書吏)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곧 판결하여 주지 않습니다. 신은 이러한 폐단을 제거하지 않는 한 국사는 끝내 잘 다스려질 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또 사대부가 서로 대하는 예를 보았습니다. 좌석은 으레 왼쪽을 사양하여 먼저 오른쪽에 나아가 나란히 서서 서로 읍하고 왼쪽에 선 사람은 또 오른쪽 사람의 오른쪽에 나아가 함께 읍합니다. 문에서 만나면 반드시 문을 양보하고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길을 양보하는데, 당하관이 당상관을 만나더라도 말[馬]을 피하지 않고 말을 길 옆에 세운 채, 채찍을 들어서 모자의 위에까지 올리고, 같은 등급을 만나면 채찍을 들어 눈썹까지 올립니다. 주인이 문에서 손님을 전송할 때에 손님은 반드시 세 번 읍하고 사양한 뒤에 말을 타며, 말을 탄 사람이 채찍을 들어 눈썹까지 올린 뒤에야 주인은 읍하고 들어갑니다. 그 읍양(揖讓)하는 모습을 보건대 뜻이 간절하고 예절이 있었습니다. 신들이 중국인과 서로 대할 때에도 이런 예로 하였으나 미리 익히지 않은 탓에 전혀 생소하기만 하여 많은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국가가 사대(事大)할 때 예모가 가장 중요하니, 평소에 익혀 놓지 않았다가 사신 갈 때에 임박해서야 통사(通事)에게 배우면 서투름으로 인한 수치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는 일과(日課)를 치부(置簿)하는 좌기가 있고 문관(文官)은 매월 세 번 모이는 규례가 있으니, 그 때에 학관(學官)과 통사 중에서 그 예법을 오랫동안 익힌 사람으로 하여금 그 예를 가르쳐 익히게 하고 조정과 여항(閭巷)에서 이것을 전습하게 한다면, 후일에 사신을 탁타(槖馳)로 비유하는 부끄러움을 면할 수가 있으며, 진신(縉紳)이 서로 접하는 예도 구차스럽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섯째, 사생(師生)의 접례(接禮)에 관한 일입니다. 신은 듣건대 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가 처음 부임한 날과 정조(正朝) 및 동지(冬至)에는 제생(諸生)이 정중(庭中)에서 사배(四拜)하고, 삭망(朔望)071) 에는 좨주가 그 요속(僚屬)과 제생을 거느리고 성묘(聖廟)에 배알한 뒤에 이륜당(彝倫堂)에 앉으면 제생이 월대(月臺) 위에 한 번 꿇어앉아 재배(再拜)하고 보통 때에는 한 번만 읍하는데, 좨주는 제생이 절하고 읍을 할 때에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있는다고 하니, 우리 나라 성균관의 관원이 내려서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공(公)·후(侯)·백(伯)과 신진사(新進士)로서 알성(謁聖)072) 하는 자도 모두 처마 밖에서 사배하는데, 좨주와 사업(司業)은 역시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있으니, 이는 사도(師道)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외읍(外邑)의 학생이 정지례(正至禮)073) 를 수령과 교수에게 행할 때에도 사배를 행하며, 수령은 두 번 절한 것은 읍으로 답례하고 나머지 두번은 서서 받습니다. 수령과 교수가 으레 삭망 때 제생을 거느리고 알성한 뒤 강당(講堂)에 앉으면 늠선 생원(廩膳生員)074) 과 제생이 차례로 월대에 나아가 한 번 꿇어앉아 두 번 읍한 뒤에 늠선 등이 의자 앞에 나아가 섭니다. 그러면 수령은 늠선이 동몽(童蒙)을 가르친 책을 가지고 반 달의 일과(日課)를 읽게 하는데, 그 뒤에 늠선이 읍하고 나가 그의 집에 돌아가면 동몽이 늠선에게 꿇어앉아 읍하기를 늠선이 수령에게 읍하는 것과 같이 합니다. 보통 때에는 제생이 나란히 서서 읍하면 교수와 늠선은 그대로 앉아 있으며, 휴일을 빼놓고는 책을 강론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산해관(山海關) 이서(以西)는 머리를 따고서 책을 끼고 다니는 자가 많았으며, 항간에는 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였는데, 지극히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도 힘써 돈을 마련하여 반드시 아들을 학관(學館)에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 가르치는 것이 비록 삼대(三代)의 정도(正道)로 교양하는 법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예모(禮貌)로 검속하고 명교(名敎)로 격려하여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느껴 더욱 분발하게 하느 것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중국이 많은 선비를 배출하여 사방의 쓰임에 부족함이 없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사유(師儒)가 처음 강당에 나와서 앉을 때, 제생이 재배례만 행하면 정지(正至)에는 배하(拜賀)하는 예가 없고 삭망에는 알성하는 관원도 없으며, 성균관에 있는 유생도 초하루에 문묘에 절할 뿐 사생(師生)이 함께 절하는 의식이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종친으로서 처음 관례(冠禮)를 치른 자와 생원·진사·문무과에 새로 급제한 자들이 알성하는 예가 있으나, 대사성에게 절하는 규례는 없습니다. 동몽(童蒙)은 다행히 날로 배우는 무리가 있으나, 대체로 질서가 없고 지나치게 공손하기만 할 뿐 행렬을 차려 읍양하는 예가 없습니다. 외읍의 교관(校官)으로서 급료를 받는 사람도 모두 공름(公廩)만 허비할 뿐 성묘(聖廟)가 있는 줄을 모르는데, 급료 없는 학장(學長)에게 어떻게 예로써 가르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명색이 유(儒)를 업으로 하고 과거에 합격한 자도 오히려 예양(禮讓)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교적(敎籍)075) 에 몸을 의탁했어도 반 줄의 글도 읽지 못하는 자가 어찌 능히 윗사람에게 공손하는 풍속을 알겠습니까. 이것이 어릴 적부터 늙을 때까지 무식하여 윤기를 손상하게까지 되는 이유입니다. 이는 사유(師儒)가 힘써 가르치지 못한 잘못이긴 하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상의 교육 방침에도 미치지 못한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제 사생(師生)이 서로 대하는 예와 삭망에 알성하는 규례에 대해 반드시 내외(內外)로 하여금 한결같이 중조의 제도대로 따르게 하여야 하니, 그런 뒤에야 고거(考據)할 데가 있게 되어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외학(外學)의 학장(學長)에게는 쓸데없는 곳에 소비하는 돈으로 그 월료(月料)를 주고 교독(敎督)을 책임지워 비록 《천자문(天字文)》을 처음 배우는 자라도 읍양의 예를 강명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책 읽기를 생각하고 선비마다 예를 지켜서 쓸모 있는 인재를 배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곱째, 향려(鄕閭)의 습속에 관한 일입니다. 신은 삼가 보건대 산해관(山海關) 이서는 마을마다 향약소(鄕約所)가 있었습니다. 무령(撫寧) 등처의 고을 사람에게 물으니 ‘매월 삭망에 약정(約正)·부정(副正)·직월(直月)이 모여 지현(知縣)을 알현하는데, 일배 삼고두(一拜三叩頭)076) 를 행하고 명을 듣는다.’ 하였고, 영평(永平) 사람에게 물으니 ‘약정·부정·직월 등이 삭망에 모여 지부(知府)를 알현하는데 월대(月臺) 위에서 사배(四拜)를 하면 지부가 의자에서 내려와 서서 받고, 약정 등이 지부의 의자 앞에 나아가 서서 함께 그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을 들은 뒤에 한 번 읍하고 물러가며, 각기 그 향약소에서 향약에 든 사람들을 모아 서로 예양한 뒤에 들은 가르침을 강론하는데, 그 가르치는 것은 부모에게 효순(孝順)하고 장상(長上)에게 존경하고 이웃과 화목하고 자손을 가르치고 농상(農桑)을 부지런히 하고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등의 일로서 고황제(高皇帝)가 정한 가르침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조목이 자상하기는 비록 여씨 향약(呂氏鄕約)에 미치지 못하나 그 강령이 간결하여 쉽게 백성을 깨우칠 수 있기 때문에, 백성이 이를 모두 믿어 촌항(村巷) 곳곳의 담벼락에 제시해 두고 서로들 외고 익혔습니다. 그리하여 부자 형제 간에 의견차이로 많이 틈이 벌어지더라도 차마 문호(門戶)를 나누지 못하고 고부(姑婦)와 동서[娣姒]가 서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정조(正朝)·동지 와 생일을 만나면 단칸 오막살이 집에 사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사배례로 가장(家長)에게 하례를 올리며, 천한 남녀라 할지라도 길에서 서로 만나면 또한 반드시 읍하고, 혼인하는 예는 반드시 친영(親迎)으로써 하고, 친족 중에 상을 당하면 남녀 노소가 다 백의(白衣)·백건(白巾)으로 그 달수를 마치며, 네 살짜리 아이도 능히 읍을 하고 머리를 조아릴 줄 알고, 천한 노복들까지도 누구 하나 바르게 염발(斂髮)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서 있을 때는 반드시 공수(拱手)하고 발을 가지런히 하였습니다. 요동·계주(薊州) 땅은 천백 년 동안이나 오랑캐 풍속에 젖어 있었는데도, 대명(大明)의 풍화(風化)로 새롭게 변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본디 예의지국으로서 열성(列聖)의 감화시킨 가르침을 받았고, 게다가 주상의 유신(維新)의 정사를 힘입어 해마다 내놓는 명령이 오직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힘써 왔으니, 당연히 집집마다 착한 사람이 있고 고을마다 후한 풍속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근년 이후로 민심은 날로 천박해지고 강상(綱常)의 도가 세상에 어지러워져서 아비로서 그 자식을 가르칠 줄 모르고, 자식으로서 그 아비에게 효도할 줄 모르고, 형으로서 그의 아우에게 크게 우애하지 않고, 아우로서 그의 형에게 크게 공손하지 않으며, 지아비는 그 지어미를 제어하지 못하고, 지어미는 그 지아비에게 순응하지 않으며, 이웃끼리는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날마다 싸우는 것으로 일삼고, 친구 간에는 아무리 달관(達官)이라도 날로 저해하는 것으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집에 있으면서 능히 그 행실을 닦지 못하기 때문에 임금을 섬겨도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임금의 명을 거슬려서 백성에게 학정을 하는 자가 내외에 깔려 있으니, 신의 소견으로 볼 때 신하는 신하 노릇을 못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못한다고 말할 만합니다. 아, 신하로서 신하 노릇을 못하고 자식 노릇을 못하면 임금과 아비된 자가 어찌 나라와 가정을 두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른바 ‘아무리 곡식이 있어도 내가 먹을 수 없다.’는 경우이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그 까닭을 따져보면 비록 세속의 추향이 잘못된 데서 나온 것이긴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상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오히려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으신 듯합니다.
신은 듣건대 기묘년077) 에 영변(寧邊) 백성 가운데서 가난하여 그 아비를 봉양하지 못하고 산골짜기에 버린 자가 있었는데, 향약의 글이 조정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그날로 다시 모셔다가 있는 힘을 다해 봉양하였다고 합니다. 아, 이와 같이 하여 마지 않으면 어찌 좋은 풍속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제 비록 그 글을 인출하여 내려주긴 하였으나, 예방(禮房)의 책 상자 속에 방치해 두고 수령이 마음을 두지 아니하여 민간에 그런 소식을 듣고 보기를 원하는 자가 있더라도 글 속의 뜻이 어떠한 것인지 전혀 듣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선(善)으로 가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고황제께서는 교조(敎條)를 반포하여 이내 수령들로 하여금 부로(父老)를 모아놓고 알리게 하고도, 또 이정(里正)으로 하여금 목탁(木鐸)을 가지고 거리를 순회하여 계몽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리 양지(良知)·양능(良能)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이 견문(見聞)에 익은 다음에야 분발할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 국가에서 백성을 깨우치는 것을 미리 널리 알리지도 않고서 자기들 멋대로 하도록 방치하고 있으니, 이것이 곧 수령이 태만하고 선한 사람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의자(議者)가 혹 이르기를, ‘양민(養民)의 정사를 먼저 하지 않고 백성을 인도하는 계책만 거행한다면 시끄러움만 더하고 치화(治化)에는 도움이 없다.’고 하는 데, 이 말이 참으로 옳긴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양민의 정사를 이미 급급하게 논의하여 행하지도 않지만, 백성을 인도하는 계책 또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들이 아무리 얼어 죽을망정 아비의 옷을 빼앗으면 안 되고 아우가 아무리 굶주려 죽을 망정 형의 밥을 훔치면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이제 이 법을 범한 자가 있다면 결코 흉년이라는 이유로 용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빼앗지 않고 훔치지 않으며 효성과 공손한 마음을 일으키는 조목에 있어서는 유독 궁민(窮民)이라는 것에다 핑계되어 빼앗거나 훔치기 전에 미리 막을 것을 생각하지는 않고 죄의 함정에 빠진 뒤에 가서야 벌을 주니, 이는 실로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으로서 어진 사람이 차마 할 일이 아닙니다. 옛날 송제(宋帝)가 애산(崖山)에 배를 대었을 때078) 망하는 것이 경각에 있었는데도 육수부(陸秀夫)는 오히려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써서 날마다 제생(諸生)과 권강(勸講)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떠돌아 다닐 때라도 사람이 윗사람을 친히 하고, 관장(官長)을 위해 죽는 도리를 모른다면 잠깐도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성명(聖明)이 임어하시고 나라가 한가한 때라서 조정에는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신하가 있고 초야에는 선을 지향하는 선비가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반포된 글을 받들어 행하게 하려면, 그 권강(勸講)의 방법을 대강 중조의 제도를 따라서 수령과 교수가 으레 삭망이나 알성하는 때에 약정(約正)과 교생(校生)을 함께 대하고서 그 뜻을 분명히 일러주고, 그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회합하여 가르치게 해야 합니다. 음식을 마련하는 일은 풍년이 드는 때를 기다려 시행하게 한다면 폐단이 많지 않아 백성이 쉽게 따를 것이며, 장차 무너지려는 윤기도 다시 펼 수 있고 이미 야박해진 풍속도 도로 순박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덟째, 군사(軍師)의 기율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계주(薊州)의 길에서 보졸(步卒) 수천 명이 군량을 싣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감히 무리가 많은 것을 믿고 남의 재물을 노략질하지 않았으며, 또 나귀와 노새로 병거(兵車) 수십 양(輛)을 끌고 가다가 밭 가에 쉬면서도 감히 볏단 하나를 가져다가 그 노세에게 먹이지 않았습니다. 신은 그 군대의 행진이 규율이 있는 것을 기특히 여겨 물어보니, ‘달로(㺚虜)가 변방을 침범하여 계진 총병관(薊鎭總兵官) 척계광(戚繼光)이 중군장(中軍將) 예선(倪善)으로 하여금 기현(畿縣)의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주장(主將)의 위신(威信)이 평소에 드러났기 때문에 군사들이 그 영(令)을 두려워하여 감히 백성을 괴롭히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이 일로 삼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듣건대 ‘서해평(西海坪)에서 오랑캐가 심은 화곡(禾穀)을 베어버리는 거사 때에, 내지(內地)의 군사들이 하나같이 통할(統轄)이 없어서 지나가고 머무는 곳마다 함부로 민전(民田)의 화곡을 가져다가 말을 먹였기 때문에, 지난 가을에는 수확도 하지 못하고 금년 여름에도 가뭄이 들어 겨우 늦벼를 심어 추수를 기다리던 것이 전부 군사들의 침해를 입어 적지(赤地)가 되어버렸으므로, 원통히 울부짖는 형상을 차마 볼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는 저들의 화곡을 베어버리기 이전에 먼저 우리 백성의 화곡을 해친 것입니다. 가령 저들의 화곡을 모조리 베어버렸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손상을 끼친 것이 그것의 백 배 정도만이 아닌데, 더구나 그들의 것은 지푸라기 하나도 베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모 읍(某邑)의 수령으로 하여금 모 주(某州)·모 현(某縣)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할 경우, 계행(啓行)하는 날에 즉시 군령을 엄하게 하여 감히 털끌만큼도 사람들의 물건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한다면, 적과 대진하였을 때도 쓸만한 군사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앞서는 군령이 없고 나중에는 절제(節制)가 없어 마치 이리에게 쫓기는 양(羊)처럼 조금도 통기(統紀)가 없으므로, 교전하기도 전에 낭패할 징조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관서(關西)의 병마를 움직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허약한 일개 부락의 오랑캐에게 위력을 펴보지 못하고, 혹시 강적을 만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토붕 와해가 됩니다. 대체로 병사의 강약은 주장(主將)의 재열(才劣)에 있는 것이지 군사의 다과(多寡)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전에 김수문(金秀文)은 또한 여러 번 깊이 들어갔는데, 내지(內地)의 군사를 멀리 움직인 적은 없고 강변의 토병(土兵)만 썼지만 패배하지 않았는데, 근년에는 더욱 원방의 군사를 동원하면서도 성공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비웃음만 사는 형편입니다. 만일 싸움에서 진 뒤에 그 죄를 다스리기만 하고 미리 가르치는 일이 없다면, 죄를 범한 자만 날로 늘어나고 변방에는 편안한 날이 없을까 신은 염려됩니다.
신이 중조의 장수를 기르는 제도를 듣건대, 일단 무학생(武學生)을 두어 글을 가르치고 또 과거를 보일 때 비변 삼책(備邊三策)으로 시험한 뒤에 선발하여 씁니다. 그러므로 변방을 방어하고 성을 지키는 직책에 있는 사람까지도 글을 알고 일에 익숙하여 그 직분을 다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 중에 총병 척계광(戚繼光) 같은 사람은 비록 습직(襲職)이긴 하지만, 그 역시 일찍이 양개(梁价)에게 수학하여 식견을 허다히 길렀습니다. 신이 도로에서 들으니, 그는 마음가짐이 올바르며 나라만 걱정하고 사사로운 일은 모른다고 합니다. 지난날 남방에서 왜구를 방비할 때 처음으로 병정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데 힘써 군대를 감하게 만들었는데, 자기 아들이 군령을 범하자 잡아서 참수하면서 ‘네가 명을 따르지 않으면 어느 누가 나를 두려워할 것이냐.’고 하였답니다. 이로부터 삼군(三軍)이 크게 두려워하여 마침내 태만한 버릇이 없어지고,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힘껏 싸워서 한창 기승을 부리던 오랑캐가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강남(江南) 연해 지방이 아직까지 큰 소란이 없는 것은 대개 척공(戚公)이 군법을 엄하게 하고 사기를 진작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뚝하게 옛 명장의 기풍이 있으므로, 목종 황제(穆宗皇帝)가 계문(薊門)에 옮겨 배치하여 중요한 방어 임무를 담당하게 한 것입니다.
얼마 전 대적(大敵)을 맞아 관방(關防)을 신칙하여 비어 방략(備禦方略)을 밝혔으며, 또 내지(內地)에 약속(約束)하는 방문을 크게 써서 두루 성문에 게시하였습니다. 평소에 사졸을 무양(撫養)하는 것이 지극하면서도 법을 범하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참장(參將) 이하에게 친히 곤장 40대 이상을 때리는가 하면, 야불수(夜不收)가 혹 허위 보고를 전하여 군사들을 현혹시키면 구집(拘執)하여 죽임으로써, 전군으로 하여금 주장(主將)이 있는 것만 알고 달자(㺚子)가 있는 것은 모르게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강적이 눈앞에 닥쳐도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았는데, 관내(關內)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척계광이 총병이 되고 양조(楊照)가 총독이 되니 변방 사람들이 그 힘을 입어 근심이 적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로 인하여 그가 지은 글 삼첩(三帖)을 보니, 전사한 사졸에게 모두 글을 지어 제향하였고, 행군할 때는 정성껏 신(神)에게 고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장주문기(漳州文記)를 지은 것은 예의(禮義)로써 병사를 기르자는 생각에서였고, 양개(梁玠)가 오랑캐를 만나 굴하지 않자 그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그 대절(大節)을 찬미하였으며, 삼충사(三忠祠)에 대하여는 경앙(景仰)하여 마지 않았고, 필부(匹婦)가 절의를 지키자 비를 세워 사실을 남겼으며, 기타 평범하게 음영(吟詠)한 것도 어느 하나 나라를 위하고 임금에게 보답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충정이 간절하고 품식(品式)이 구비된 것은 비록 고대의 양장(良將)이라도 그보다 낫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국가의 간성(干城)을 맡은 자가 처음에는 힘써서 청렴하지만 배우지 못하여 계책을 세울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지위가 높아지고 녹(祿)이 후해지면 스스로 바라고 원했던 것이 이미 다 되었다고 여긴 나머지, 사력을 다해서 국사에 목숨을 바칠 것은 생각지 않고 오직 사사로운 이익이 있는 것만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하여 성취합니다. 이러므로 병졸은 한마(悍馬)079) 와 같아 군위(軍威)가 서지 않고, 변방은 결제(決堤)080) 와 같아 국세가 부진한 것입니다. 장래 유망한 자들도 오직 현재의 노장(老將)들로만 목표를 삼을 뿐 긍지를 갖고 분발하여 고대의 맹장(猛將)을 따라가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후일에 혹시 근심되는 일이 있더라도 필시 수습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척공의 글은 본보기로 삼을 만하기 때문에, 신이 삼가 그 삼첩(三帖)을 갖추어 올립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양조(楊照)와 척계광의 일을 가지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전(傳)을 짓게 하시고, 아울러 그 글을 인출하여 널리 중외의 장사(將士)에게 나눠줌으로써 운명에 맡기고 스스로 단념하는 무리로 하여금 감모(感慕)하여 일어나게 하소서. 그러면 그들은 지금 세상에도 과연 이러한 명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비록 회계(回溪)에서 날개를 드리운 사람이라도 끝내는 능히 면지(澠池)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게 될 것입니다.081)
이상 몇 가지는 비록 미세한 일인 것 같지만 사습(士習)과 민풍(民風)의 약해진 것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바로 잡는 데에 관계되는 것이 매우 절실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신이 스스로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보고 들은 일을 다 아룁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천신(賤臣)의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국사가 잘못되는 것만을 생각하시어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여 빨리 조치할 것을 추진하신다면, 동방의 사민(士民)이 다행하기 그지 없겠습니다."
하였다. 올리려던 그 16조는 하늘에 닿는 정성[格天之誠], 근본을 생각하는 효도[追本之孝], 능침의 제도[陵寢之制], 제사의 예절[祭祀之禮], 경연의 규례[經筵之規], 조회의 의식[視朝之儀], 간언을 듣는 법[聽言之道], 사람을 뽑는 법[取人之方], 음식의 절제[飮食之節], 국가의 곡식을 알맞게 쓸 것[餼廩之稱], 생산을 늘릴 것[生息之繁], 사졸의 선발[士卒之選], 조련을 부지런히 하는 것[操鍊之勤], 성지를 견고하게 하는 것[城池之固], 출척을 밝게 하는 것[黜陟之明], 명령을 엄하게 하는 것[命令之嚴], 끝으로 군상(君上)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모범을 보이는 도를 총론(總論)하였다. 또 말하기를,
"《주자어류(朱子語類)》는 권질(卷帙)이 많지만 분류가 매우 정밀하여 임금은 임금대로 쓸모가 있고 신하는 신하대로 쓸모가 있으니, 청컨대 각사(各司)와 각도의 대아문(大衙門)에 각각 한 본을 수장하게 하여 일을 처리하는 여가에 필요한 유목(類目)을 골라서 보게 한다면, 주자가 미처 시행하지 못했던 것을 거의 우리 동방에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헌은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뜻을 지녀 글을 읽거나 이치를 궁구할 때 현실에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한 차례 중국에 들어가 몇 개월 간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를 알아보고 물어서 거의 빠뜨린 것이 없었으니, 그 정근(精勤)하고 충직한 말은 과거에도 없었던 일이다. 【국조(國朝)에서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使行)에 으레 질정관(質正官)을 보내어 중조(中朝)에 화훈(華訓)을 질문하였는데, 그 사람은 반드시 박문(博文)·상아(詳雅)한 선비로 충원하였다. 나중에는 사신이 화훈을 익히고 언어와 이문(吏文)까지 익히지 않은 것이 없어서 질정관이 비록 가더라도 물을 만한 것이 없고 인원 수만 채울 뿐이었으므로, 근래에는 다시 보내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2책 8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45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외교-명(明)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人事) / 의생활(衣生活) / 식생활(食生活) / 재정(財政) / 사법(司法) / 윤리(倫理)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군사(軍事)
- [註 031]고의(古義) : 옛법.
- [註 032]
가정(嘉靖) :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註 033]
금니(金泥) : 금을 녹인 물.- [註 034]
사성(四聖) : 안자·증자·자사·맹자.- [註 035]
종사(從祀) : 후유(後儒)를 공자 및 그의 제자 72현을 모신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것. 당 태종(唐太宗) 21년에 좌구명(左丘明) 등 21인을 공자 사당에 배향한 것이 종사의 시초이며, 후대에 내려오면서 계속 명유(名儒)를 추가 종사하였다. 《통전(通典)》 권53 예13(禮十三) 공자사(孔子祠).- [註 036]
독(櫝) : 신주를 덮어 씌우는 궤.- [註 037]
융경(隆慶) :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註 038]
부자(夫子)의 이른바 ‘군군(君君)·신신(臣臣)·부부(父父)·자자(子子)’의 도 : 군군·신신·부부·자자는,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 아비는 아비의 도리를 다하고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서, 공자가 정사하는 법을 묻는 제 경공(齊景公)의 물음에 답한 말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 [註 039]
가신(家臣)을 둔 거짓을 꾸짖고 : 공자의 병세가 위독하자 자로(子路)가 문인(門人)을 시켜 공자의 가신(家臣)이 되어 치상(治喪) 준비를 하게 하였는데, 병세가 호전된 뒤 공자가 그 사실을 알고 말하기를, "너무 오래되었도다. 중유(仲由)의 거짓 행위여. 본디 가신이 없었는데 함부로 가신을 두었으니 내가 누구를 속일 것인가? 하늘을 속일 것인가?" 하였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註 040]
대부(大夫)가 앉는 자리라고 하여 바꾸도록 하신 : 증자(曾子)가 임종 시에 그가 깔고 있는 대자리[簀]가 대부가 쓰는 물건이어서 너무 화려하다는 동자(童子)의 말을 듣고는 자기가 미처 몰랐음을 깨닫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게 한 뒤에 임종하였다고 함. 《예기(禮記)》 단궁(檀弓).- [註 041]
가정(嘉靖) 10년 : 1531 중종 26년.- [註 042]
승당(升堂) : 출중한 제자.- [註 043]
정관(貞觀) :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 [註 044]
원풍(元豊) :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註 045]
정통(正統) :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註 046]
홍치(弘治) : 송 효종(宋孝宗)의 연호.- [註 047]
대·소대(大小戴)의 예학 : 대대(大戴)는 《대대례기(大戴禮記)》의 편저자인 한 선제(漢宣帝) 때의 대덕(戴德)이고, 소대는 《소대례기(小戴禮記)》의 편저자인 대성(戴聖)인데 대덕의 조카이므로, 세상에서 대·소로 구분하였음.- [註 048]
정씨(程氏) : 정이(程頤)를 말함.- [註 049]
나(羅)·이(李) : 나종언(羅從彦)과 이동(李侗).- [註 050]
문왕(文王)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나는 자들 : 임금의 훌륭한 정치를 보고 숨어 있던 자들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 문왕이 어진이를 예우하여 해가 중천에 뜨도록 밥도 먹지 않고 선비들을 접대하자 선비들이 그에게 많이 돌아갔는데, 특히 태전(太顚)·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육자(鬻子)·신갑 대부(辛甲大夫) 등이며, 백이(伯夷)·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에 있을 때, "들으니 서백(西伯)은 노인을 잘 봉양한다 하니, 어찌 그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하기도 하였다. 《사기(史記)》 권4 주본기(周本紀).- [註 051]
구재 삼고(九載三考) : 9년에 세 차례 치적을 고사하는 것으로 인사(人事)의 출척(黜陟)을 신중히 하는 것.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3년에 한 번 치적을 고사하고 세 번 고사가 끝난 뒤에 능·불능(能不能)에 대한 출척을 분명히 한다." 하였음.- [註 052]
복두(幞頭) : 관모(冠帽)의 일종. 사모(紗帽)의 원형으로서 그 모양이 비슷하나 모부(帽部)가 2단으로 턱이 져 있는데 앞턱이 낮다. 모두(帽頭)는 평평하거나 둥글고 좌우에는 각(角)을 부착하였다. 일명 절상건(折上巾)이라고도 함. 각(角)은 연각(軟脚)이다.- [註 053]
연각(軟脚) : 복두의 날개.- [註 054]
홍무(洪武) :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註 055]
의살 직령(衣撒直領) : 앞은 철릭과 같고 뒤는 직령(直領)인데, 좌우 양쪽에 각각 주름이 있음.- [註 056]
치포(緇布) : 검은 베.- [註 057]
무학생(武學生) : 무학에 들어가 각종 병법을 배우는 사람. 무학은 송 신종(宋神宗) 때 무성왕 묘(武成王廟)에 처음으로 설치한 기관으로 태학(太學) 종학(宗學)과 함께 삼학(三學)으로 불리었다. 《송사(宋史)》 직관지(職官志).- [註 058]
청금(靑衿) : 성균관 사학(四學) 등의 유생의 복장.- [註 059]
붕계(鬅髻) : 쪽.- [註 060]
수박(首帕) : 머리동이.- [註 061]
한 번 변화하여 도에 이를 수 있는 :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보다 더 좋은 상황으로 발전 할 수 있다는 것.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제(齊)나라가 한 번 변화하면 예교(禮敎)를 존중하는 나라에 이를 수 있고, 노나라가 한 번 변화하면 인정(仁政)을 시행하는 선왕(先王)의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데서 온 것임.- [註 062]
기방(箕邦) : 기자 조선.- [註 063]
오복 제후(五服諸侯) :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5백 리마다 한 구역씩 설정했던 곳의 제후. 오복은 후(侯)·전(甸)·수(綏)·요(要)·황(荒), 또는 후(侯)·전(甸)·남(男)·방(邦)·채(采)라고도 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강고(康誥).- [註 064]
찬품(饌品) : 음식의 가짓수.- [註 065]
이우증(李友曾)이 몹시 취하여 부산(釜山)이 함락되는 것도 알지 못했던 : 1510년(중종 5년) 4월 4일에 우리 나라 삼포(三浦)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이 대마 도주(對馬島主) 종정성(宗貞盛)의 군사 원조를 받아 폭동을 일으켜 제포·부산포·염포를 함락한 삼포 왜란 당시, 부산진 첨사 이우증이 그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방심하여 결국 진을 뺏기고 자신도 적의 칼에 난자당한 사건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권11 중종 5년(경오) 4월.- [註 066]
광묘(光廟) : 세조(世祖).- [註 067]
대빈(大賓)·대사(大祀)·향음(鄕飮)·향사(鄕射) : 대빈은 중국의 사신 등 국빈(國賓)의 접대이고, 대사는 종묘(宗廟)·사직단(社稷壇) 등에 제사하는 국가적인 제사이고, 향음은 온 고을의 유생(儒生)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향음 주례(鄕飮酒禮)이고, 향사는 시골 한량(閑良)이 모여 편을 갈라 활쏘기를 겨루는 일임.- [註 068]
주고(酒誥)의 법 : 주고는 《서경(書經)》의 편명. 주 무왕(周武王)은 은(殷)의 주(紂)를 정벌한 뒤에 강숙(康叔)을 은의 고도(古都)에 봉하였는데, 그 지방 백성이 주(紂)의 영향을 받아 술을 즐겨 마시므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의 명으로 경계한 글이다. 그 가운데 "백성들이 명을 듣지 않고 떼 지어 모여 술을 마시면 빠짐없이 체포하여 서울로 보내라. 그러면 내가 그들을 다 사형에 처하겠다." 한 내용이 있다.- [註 069]
투문(投文) : 우리 나라의 소지(所志)와 같음.- [註 070]
사사(四司) : 명 나라 예부 산하에 있는 의례 청리사(儀禮淸吏司)·사제 청리사(祠祭淸吏司)·주객 청리사(主客淸吏司)·정선 청리사(精膳淸吏司) 등의 네 부서를 말함. 각 부서의 장(長)은 각기 낭중(郞中)과 원외랑(員外郞)임. 《명사(明史)》 직관지(職官志).- [註 071]
삭망(朔望) : 초하루와 보름.- [註 072]
알성(謁聖) : 공자의 신위(神位)에 참배하는 것.- [註 073]
정지례(正至禮) : 정조와 동지의 예.- [註 074]
늠선 생원(廩膳生員) : 제생 중에서 경의(經義)를 가장 우수하게 해독하는 자.- [註 075]
교적(敎籍) : 교생의 명부.- [註 076]
일배 삼고두(一拜三叩頭) :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 [註 077]
기묘년 : 1519 중종 14년.- [註 078]
송제(宋帝)가 애산(崖山)에 배를 대었을 때 : 송제는 남송(南宋)의 마지막 왕인 위왕 병(衛王昺). 1278년 4월에 원(元)의 대군(大軍)에 계속 밀려 단종(端宗)이 죽자, 신하들이 도종(度宗)의 세째 아들 위왕 병을 군주로 옹립하였는데, 계속 궁지에 몰려 6월에 애산으로 옮긴 일을 말한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279년 2월에 결국 망하였다. 《송사(宋史)》 권47 본기(本紀).- [註 079]
한마(悍馬) : 고집이 센 말.- [註 080]
결제(決堤) : 무너진 둑.- [註 081]
회계(回溪)에서 날개를 드리운 사람이라도 끝내는 능히 면지(澠池)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게 될 것입니다. : 군사들이 처음에는 사기가 꺾였더라도 척계광 같은 명장에게 감명을 받고 크게 용기를 얻을 것이라는 뜻임. 후한(後漢)의 풍이(馮異)가 적미(赤眉)와 싸울 때 회계판(回溪阪)에서 대패한 뒤에 다시 진용을 정비하여 면지(澠地)에서 크게 승리하여 항복을 받아내자 광무제(光武帝)가 풍이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내용의 일부를 인용한 것인데, 군사를 새에 비유하였음. 《후한서(後漢書)》 권7 풍이전(馮異傳).○質正官趙憲, 還自京師。 憲諦視中朝文物之盛, 意欲施措於東方, 及其還也, 草疏兩章, 切於時務者八條; 關於根本者十六條。 皆先引中朝制度, 次及我朝時行之制, 備論得失之故, 而折衷於古義, 以明當今之可行。 先上八條疏, 上答曰: "千百里風俗不同, 若不揆風氣、習俗之殊, 而强欲效行之, 則徒爲驚駭之歸, 而事有所不諧矣。" 由是, 憲不復擧十六條。 其八條疏:
一曰聖廟配享。 臣竊見, 嘉靖中改題文宣王之號爲至聖先師孔子之位, 顔子以下俱改去爵名, 故廟額不曰大成殿, 而曰先聖廟。 位版長短, 不敢揣摸矣, 但孔子則朱漆而書以泥金, 長疑一尺餘, 廣二寸强; 四聖以下則稍短, 疑不滿尺, 朱漆而書以墨字。 從祀以下則又短, 下不用趺房, 刻木爲臺以安之, 俱無櫝。 臣伏覩今年五月所下, 位版寸尺考啓之敎而想, 臣所見則隆慶年間出來《太學志》所記尺數, 定是周尺, 而不爲布帛尺也明矣。 且太學東西廡中, 位各有爐, 而我國則兼設一爐, 此事恐當議改者也。 臣謹按, 文宣王之所以改稱孔子者, 蓋以漢 平帝時, 王莽騁其奸謀, 謬稱爲褒成宣尼公, 唐之玄宗始諡爲文宣王, 顔子以下秩稱公、侯、伯。 其封公封王者, 於夫子所謂君君、臣臣、父父、子子。" 之道則一切悖亂, 而佯尊聖人, 以欺天下。 曾謂責家臣之詐, 而易大夫之簀者, 其肯安享斯名於一刻乎? 況自稱皇帝, 而以其所以封其臣子者, 强加以王, 非所以尊聖人。 故嘉靖十年, 因太學士張孚敬之建言, 一改千載之誤。 而我朝久猶襲陋, 恐當議改者也。 臣又按, 東西廡之列, 林放、蘧瑗、公伯寮、秦冉、顔何、荀况、戴聖、劉向、何休、賈逵、馬融、鄭衆、盧植、鄭玄、服虔、范寗、王肅、王弼、杜預、吳澄等, 不在其中, 后蒼、王通、(歐陽脩)〔歐陽修〕 、胡瑗、楊時、陸九淵、薛瑄等, 皆與于列。 蓋從祀之典, 所以報聖門之有功, 而示來學之趨向也。 秦冉、顔何則未有所考矣。 林放、蘧瑗不是升堂之列, 而鄭衆、盧植、鄭玄、服虔、范寗, 亦非純儒, 故出于從祀, 而放之好禮; 瑗之寡過, 則可爲人師, 鄭衆諸人翼經之功, 不可不紀, 故各祀于其鄕。 公伯寮身遊聖門, 而嘗欲反害夫子之道, 荀况謂性爲惡, 而謂思、孟爲亂天下, 戴聖身陷贓吏, 劉向喜談神仙, 賈逵傅會讖緯, 馬融貪鄙附勢, 爲梁冀草詔, 以殺李固, 何休解《春秋》, 黜周王魯, 王弼宗旨《老》、《莊》, 王肅佐司馬昭簒魏, 杜預爲吏不廉, 爲將不義, 吳澄出處不正, 而學又歸禪, 是宜見擯于洙、泗之列, 不可表章乎多士者。 而貞觀、元豊、正統之際, 朝無眞儒, 擇之不精。 馬端臨固嘗有議, 弘治諸臣亦多請黜, 而禮部沮格, 議竟不行。 世宗皇帝以太學士張孚敬之言, 斷然改正, 一洗前代之謬見, 不能眩後生之耳目, 而其在我朝, 尙列于從祀, 恐當議黜者也。 后蒼始註禮書而《大》、《小戴》之禮學, 賴以傳世。 王通, 學近於道, 而格言極有荀楊道不到處, (歐陽脩)〔歐陽修〕 扶聖道、闢異端之功, 朱子稱其爲仁義之人, 胡瑗修乎己、治乎人之學, 首洗隋、唐趨利之習, 楊時倡道東南, 獨承程氏之緖, 而下傳羅、李, 以及朱子, 薛瑄奮乎絶學, 篤志力學, 迨其道成德立, 進仕于朝則高風大節, 砥柱乎奔流; 退而講學則隻句微言, 日星乎中天。
所以弘治中附以楊時; 嘉靖中益以歐陽、胡、薛者也, 而我朝似當講究而從之者也。 獨陸九淵之學, 不事講問, 專務頓悟。 當時朱子, 固憂其說之爲害, 而流傳益久, 人惑愈甚, 擧世靡然, 胥歸禪學。 如王守仁之敢爲橫議, 詆謗朱子者, 而尙請其從祀, 則是必江西之人, 習熟見聞, 而筮仕者衆, 力佑象山, 以至上誤朝廷; 下誤斯學。 如此之流, 臣恐不可效尤而苟從者也。 臣又見, 聖廟西北, 又有啓聖廟。 啓聖公 孔氏在北, 先賢顔無繇、孔鯉在東, 曾晳、孟孫在西, 東廡有先儒程珦、蔡元定, 西廡只有朱松。 蓋學宮, 所以明人倫也。 顔子、曾子、子思, 在於廟中, 偃然先饗, 而顔路、曾點、伯魚, 杳然居下, 於常人, 亦有所不安, 況聖賢乎? 故熊禾、洪邁, 曾有別設一廟之議, 而弘治中, 程敏政又嘗建白。 至于世宗朝, 乃作別廟, 春秋釋奠, 同時行事, 所謂 "子雖齊聖, 不先父食" 者, 至是無遺憾矣。 臣愚竊念, 我國文廟之西, 有地閑敞, 若議立廟, 而春秋同祀則庶乎倫全義安, 而一國之爲父子者定矣。 臣愚又因中朝從享之事, 而深有所感焉。 蓋士習之趨, 一視其上好之所在, 而殿下頃於館學儒生, 諸賢從祀之請, 屢陳而不允, 近臣經席之啓, 亦不頷可, 是實沮一世向善之心也, 臣竊悶焉。 夫金宏弼肇倡道學, 而有繼往開來之業; 趙光祖繼明斯道, 而有拯世淑人之功; 李彦迪體道純篤, 而有扶顚持危之力。 玆三人者, 求之中朝, 則許衡、薛瑄之外, 鮮有倫比, 而求之東方, 則薛聰、崔致遠、安裕之徒, 未有及其見到處者。 況如李滉, 集東儒之大成, 而紹朱子之嫡統, 進則引君當道之誠, 懇懇乎章疏之間; 退則因才設敎之意, 切切於講論之際, 善者聞言而景慕; 惡者望風而自戢。 當今之士, 稍知尊君愛親, 而有禮義廉恥者, 皆薰其德, 而興起者也。 但國家旣不能大用於生時, 識者已歎太平之難見, 而又不肯崇奬於死後。 不惟媢嫉放誕之輩, 旁觀竊喜, 而昔之興起者, 咸有沮喪之心, 甚有登其門, 而泹跡于聲利者, 不及其門者, 將何所賴而爲善乎? 嗚呼! 從違之際, 若不大關, 而士習之邪正, 已判于此。 殿下其可謂重難, 而不之從乎? 夫后蒼諸賢, 雖非前代之所嘗祀, 而世宗皇帝明知其賢, 則從享而不惑, 公伯寮諸人, 雖是前代之所嘗祀, 而世宗皇帝明知其不賢, 則黜去而無疑, 林放諸人, 俱有一長之可取, 則各祀于鄕, 而不沒其善。 其他近世諸賢如章懋、吳與弼、陳獻章、胡居仁、陳眞晟、蔡淸, 各有功於斯文則皇上命祀于鄕, 而不以先朝之所未定爲嫌, 遼東城中亦以管寧、王烈、李敏、張升、胡深、賀欽, 立祀於書院, 無不賜額降書。 其所崇奬, 惟在於其人之學成行尊, 而可以風勵乎後學者耳, 略不拘攣於古今如此。 況此金宏弼四君子, 所當從祀之議, 朝無異言、士無異論, 而尙此遲留者, 謂斯人爲不賢乎? 伏願殿下, 亟奬四賢, 列于從祀。 不徒尊其人, 而又必用其言, 盡取其所嘗啓沃之說, 而日陳于前, 以資聖治, 如四賢之親達于冕旒, 而又推其餘, 使八方士子, 知所矜式, 則庶乎褒崇嚮用, 兩盡其美, 而待文王而興者, 蔚起乎凡民矣。
二曰、內外庶官。 臣於官制, 他無所考, 謹得《搢紳便覽》兩冊, 粧䌙以進。 大小京官及外至兩直隷、知府以上, 都載于此, 其他外官, 不盡載錄。 天下庶官, 如此其多, 而注擬之際, 一皆難愼。 或有缺官, 則六部、都察院會議, 擬望之人僉論皆定然後, 吏部只擬二望以進, 而皇上所點, 例於首薦。 夫以中夏人物之盛, 而豈無三望之可擬者哉? 誠以人才難得, 而庶官之中, 一或非人而間之, 則害流於生民, 而禍及於國家。 故下不敢以非才苟充, 而上不敢以私意苟任。 一被選授, 永無劾駁之議, 旣到其任, 又皆久於其職, 九載三考, 乃定黜陟。 校官、邊帥, 亦以家累自隨, 率爲經遠之計, 故庶官多盡其職, 而百姓多得其所。 中朝之所以保大享安者, 有由然矣。 臣竊惟, 東方人才之盛, 視中夏, 不滿二十分之一, 而屢經斬伐, 士趨隨訛, 以至于今, 則三綱不明, 義利莫分。 求其經邦論道者, 蓋難屢遇, 而求其當局思職者, 亦不多見矣。 政曹乃於注擬之際, 論不豫定, 坐于政廳, 然後執筆始議, 三望全合者無幾矣。 至於闕夥員乏之際, 僅備一望, 餘皆苟充, 而上之所點, 乃出於人望之外, 群情所以不厭; 公議所以喧騰。 而不免抽東補西, 朝授夕換, 京外官員, 未諳所職之爲何事, 而或有坐席之未煖者。 絶簿盜財, 秪陷於奸吏之術, 而迎新送舊, 差人發馬, 奔走千里之外, 以破殘民之産者, 又中原所無之弊也。 且其新除之人, 不合牧民之官, 則速議遞差可也。 而必於當行之日, 乃始啓罷, 遠來官屬之初持一月糧者, 又出月利, 留待新官之發, 則歸家賣田, 僅償月利, 而家已告絶矣。 一歲之中, 貶罷者不止一二, 而爲一官來迎者, 不啻百人則一年之中, 以此而失業者, 不知其幾百人哉。 嗚呼! 吏曹用人, 止於暫時之不察, 而四方士民, 無不被害, 其可謂細事而不之改乎 伏願聖明, 體伊尹其愼之訓; 思孔子才難之嘆, 申勑吏曹, 使之須先論定, 洽於公議然後, 乃充其望, 如其乏人, 不須塡三。 而自上恒懼誤用一人, 而國事一以僨, 數易庶官, 而赤子被其毒, 罔及私昵而惟其能; 罔及惡德而惟其賢。 必用道選, 而久任其職, 待其奮庸熙載而後, 乃加超遷, 則庶乎人人知勸, 而民獲其所矣。
三曰、貴賤衣冠。 臣竊見, 中朝衣冠之制, 幞頭軟脚, 名曰雁翅, 其制句曲, 其端橫揷之, 而曲處向上, 有若擧趐奮迅之象, 故又名展趐。 紅袍、靑袍、襞積, 一如道袍, 而不如團領。 其他常服, 自上達下, 不尙浮大, 而距地寸數如一。 臣竊考洪武間所定之規, 文官之衣, 距地一寸; 武官之衣, 距地五寸。 袖闊俱一尺袪口, 文則九寸, 而武則僅容出拳, 穿衣撒直領, 今雖文、武同制, 而其整齊端嚴之象, 宜若可傚也。 儒巾之名, 或曰民字巾, 蓋形如民字故也。 其制或竹結, 而裹以緇布, 或糊紙爲之而着漆。 雖常着而行于烟雨之途, 不如我國士巾之遇露輒垂。 其體端平, 不甚尖斜, 八道士巾之極訛者, 若令倣此改之, 則庶合於瞻視矣。 擧人之在監者及武學生之參禮于西庭者, 俱服儒巾、黑團領, 其他學生, 中外俱服襴衫, 蓋玉色而緣以靑絹, 緣廣二寸。 東士之所謂靑衿者, 與此大異, 旣不能盡從斯制, 則不若勿施靑衿之爲愈也。 宦者之巾, 竹結布裹, 形如帽子, 有職者有簷, 自頂後上起, 高於帽一寸, 形如立瓦, 然無職者, 止着帽子, 但以布自前裹之, 垂其餘于頂後, 長幾半尺。 所服之衣, 或穿蟒龍帖裏, 或穿衣撒直領, 其長俱至于踝, 帶用細絛兒, 雖侍立於榻前者, 止服此衣, 祿薄之宦, 亦所易備者也。 文武庶官, 皆佩牙牌, 以記職名, 而俱黑其緩, 宦者牌綬則赤以別之, 其衣服之有章如此。 遼東、廣寧, 俱是邊郡, 而任事掾吏, 巾如錄事, 知印以下, 巾如書吏而稍高, 俱服團領。 小縣如撫寧、豐潤之吏, 莫不如是。 蓋守令冠帶坐廳事則吏不敢不服其服。 而我國外邑之吏, 於守令冠帶之處, 或戴深簷胡笠、或戴平笠, 而俱無禮服, 甚不如人形, 平壤、義州等處吏服尙同。 各司之吏、他邑吏服, 若令依此改之, 則雖刀筆之賤, 儼具禮服, 而庶無怪僻之習矣。 男童不編其髮, 十五以下, 則剪以垂之; 十五以上, 則總於項後, 俱戴帽子, 族人有喪, 則白而終期。 卿、士、庶人之子, 俱待二十, 然後乃冠, 其不求速成如此。 女人旣嫁者, 束髮于頂, 而加以𩭲䯻, 其制北人結以鐵絲; 南人用竹爲之, 俱裹以絹。 又捲絹爲首帕, 名曰鈠子。 冬月則或以毛皮爲之, 名曰暖額, 自額繞䯻, 結于頂後, 而上橫以䈂。 婦人因事出外, 則开鈠子以文絹, 或加金皮。 新婦親迎之際, 亦止戴此, 而或施七寶粧嚴, 俗所謂花冠也。 背子之袖甚闊, 而無長衣。 其長裙不施趲短, 而不務豊豐飾。 其衣冠靚莊, 而猶有儉約之俗如此。 臣路見向化㺚子之婦, 又見其進貢廻還之輩, 我國童男及女人斂髮之容, 不幸而近之。 是雖習俗流傳之久, 而於聖主一變至道之幾, 若又因循, 則異時華史之筆, 謂朝鮮爲冠帶之國乎? 臣竊聞, 卿士之家或欲效此, 以斂男女之髮, 而曾無上命, 故未敢擅改。 若令士夫先行, 而民改以漸, 則庶乎變夏之不難矣。 腦包卽我國之所謂耳掩也。 其制雖小, 而便於常着, 女人則惟老病者服之, 而其制尤小易備。 臣愚竊念, 國人耳掩, 好尙侈大, 常民則猶用兩具之皮, 女人毛冠, 幾用三具之皮, 其所謂大耳掩者, 幾用五具之皮。 以故, 皮價甚高, 貧而老病者, 雖欲貿着, 而不得。 若令依此改之, 一禁侈大之習, 則庶乎皮價不踊, 而遍及于老病之人矣。 中原雖有笠制, 而人不能備。 其出行之際, 文官着忠正冠; 武官着毛帽而有簷, 儒用儒巾, 或着方巾, 吏用吏巾; 常人皆着帽子。 而東方之人不論貴賤, 通戴笠子, 虛費重價, 若從華俗, 使吏、士, 常着其巾; 庶人止戴帽子, 則窮人庶無費價買笠之患矣。 大抵中原衣冠之制, 不惟簡約易備, 而如今天下同文之日, 如雲南、貴州, 距京師萬餘里, 曾是椎䯻、侏離之域, 而大小男女, 一遵華制。 況我箕邦, 距京師不滿四千, 實與五服諸侯無異, 而男女衣冠, 多有可羞者。 臣謹具雁翅、儒巾、𩭲䯻、鈠子以進。 殿下若謂時王之制, 不敢不遵, 則請以此, 下于工曹, 使其視爲式樣。 如腦包、巾帽、衫袍、擘積之類, 令久行通事, 詳敎工人, 裁紙爲樣, 廣頒于八道, 使其改之有漸, 則衣冠之悉從華制者, 庶爲實語矣。
四曰、飮食宴飮。 臣竊見, 中原之人無不節用。 官員家供, 止以數器自從, 私家所食, 尤尙儉素。 宴飮之際, 酌以小鍾, 限其行數, 不敢踰節亂性, 荒廢厥事, 所以公私咸裕, 庶政不墜。 而我國之俗, 專以豐饌崇飮爲務, 財盡而不知憂; 民窮而不知恤; 上命而不知從, 暴殄天物, 而斲傷國本者, 罔有紀極。 內司庶官, 雖行家供, 而豪奢之輩, 盛備饌品, 貧約之士羞不能及, 或有無故呈病, 而不勤職事者, 里巷之間, 不計遠慮, 而糜費尤甚焉。 嗚呼! 此是何等風俗, 而不思改之乎? 外方列邑, 雖有限品定器之敎, 而視若迂言, 專不奉行。 間有欲遵朝命者, 而經行使臣, 視其饌品之豐約, 以定其人之賢否。 盛其供億則以爲: "某倅賢而敬上也," 薄於自奉則以爲: "某倅矯情而干譽也。" 紛紜詆罵, 論議靡定。 名爲有識者, 方且屈而從俗, 圖免人言, 無知守令, 又何足責? 是以, 君無故不殺牛, 而營吏、趨從, 亦必屠牛以饗之。 大夫然後, 乃得三飯, 而七歲衙兒, 或具多品以四飯。 甚至如天使之來, 止於大邑, 間設九爵之宴, 而私行無賴, 亦皆張筵設樂, 窮宵酣飮, 彼酒與肴, 亦非天隕而地湧也。 輪定邑吏爲肉禮房, 月給三牛之價, 而官員所食, 或至十牛; 輪定官婢爲酒母, 月給三石之米, 而官員所飮, 幾至二十石。 以至客舍將校, 困於燈席; 園頭官奴, 困於菜果, 賣田徵族, 侵索村氓, 而猶不能支, 則裂衣爲囊, 相率而逃之。 嗚呼! 中原庶官, 一雞、一魚, 不敢橫斂于民間, 而我國爲官員者, 以養口腹之故, 而病及于祖宗之赤子者, 不知其幾千萬, 則可不君臣相誓, 汲汲乎菲食, 以正供也哉? 而況邊方將士, 尤多崇飮。 於其隣境守帥及兵、水使之往還也, 名爲迎送之例, 而推牛釃酒, 載貨執寶, 棄鎭越境, 而浮觴倒觥, 劇飮連日, 兩界、兩南, 莫不如是。 此不惟剝割殘卒之爲可慮, 而賊乘其虛, 則誰復防守? 此, 李友曾之所以昏醉, 不知釜山之陷, 而他日之患, 不可謂必無也。 嗚呼! 中原之地, 酒禍猶少, 而我國之人崇飮夭死者, 不可勝記。 雖彼以欲敗身, 而在聖主躋世壽域之心, 定所矜悶。 凡百禍源, 不可不周防, 故臣謹具小鍾十枚以進, 伏願聖上, 法皇祖之禁秫; 體光廟之戒酒, 二以垂樣於京中; 八以垂樣於各道, 使其倣爲白鍾。 於大賓、大祀、鄕飮、鄕射之際, 一從華人之禮, 刻定爵數, 俾勿縱醉以喪身, 其他非時、非禮之宴及與私行, 飮過三爵者, 一依《酒誥》之法, 則庶無糜財病民、妨政廢事之禍矣。
五曰、士夫揖讓。 臣到禮部, 見其坐起之儀, 堂上未坐之前, 郞中、員外郞、主事、司務、觀政、進士, 東西相向, 立于堂上而暫揖, 在前列者, 又顧後列而揖, 歷事、監生, 相向立于東西階上, 堂吏立于其後。 堂上自後閤出坐, 則郞中以下, 俱北向堂上立而揖。 堂上於椅上微揖, 郞中以下分立東西, 相向一揖而出。 監生、堂吏以次進于簷下, 一揖而退。 郞中東向立于東夾室之下, 員外以下, 西向對立, 進士俱北向西上, 相與齊揖。 員外以下, 又就于郞中之右, 進士連立而相揖, 郞中進于夾室之門, 員外以下, 俱還于西向立位, 進士退數步, 俱向郞中, 相揖而退于其局。 郞中以下同坐議事, 外官曰事者, 立于庭下, 進跪月臺上。 郞中一人, 手持揭帖, 一揖而置于堂上之案, 堂上曰起來, 外官乃起, 一揖而退。 堂上受投文, 分付于四司, 退歇于火房, 郞官詳議其事, 白而決之。 以故, 凡奏下公事, 不過一二日, 而覆奏民牒, 則卽日決給。 其爲禮貌, 雍容整肅, 而其治事務, 商確可否, 不使積滯, 卽此一部, 而他司之事, 從可知矣。 嗚呼! 中朝庶官之好禮勤事如此, 而我朝六曹等處, 禮貌疎而弊風滋。 戲慢無理之事, 今雖少革, 而佐郞之於正郞, 猶不敢仰首與言。 凡有公事, 一付之曹司佐郞, 佐郞不能盡治其事, 啓下公事, 或經旬月, 而不思申覆, 軍民訟牒, 不賂于書吏, 則不卽決給。 臣恐不除此弊, 則國事終無可治之日矣。 臣又見士大夫相接之禮, 例讓其左, 先就其右, 齊立而相揖, 立于左邊者, 又就右邊人之右而同揖。 遇門必讓; 遇路必讓, 堂下官遇堂上官, 亦不避馬, 立馬于道傍, 擧鞭至帽, 其遇等夷, 則擧鞭至眉。 爲主者送客于門, 必三揖以讓, 然後乘馬, 乘馬者擧鞭至眉, 然後主人揖入。 觀其揖讓之意, 懇切而有文。 臣等與華人相接, 亦以此禮, 而不能夙習, 到底生疎, 多被人笑。 臣愚竊念, 國家事大之際, 禮貌最關, 不於平日相習, 而臨使价, 學於通事, 未免有扞格之羞。 承文提調, 日課置簿之坐, 文官月有三會之例。 若於此時, 令學官、通事之久諳其禮者, 導而習之, 朝行、閭巷之間, 以此傳習, 則他日爲使臣者, 得免橐駝同譬之恥, 而搢紳相接之禮, 亦不苟率矣。
六曰、師生接禮。 臣聞, 國子祭酒, 初赴任日及正朝、冬至, 諸生四拜于庭中, 朔望, 祭酒率其僚屬, 與諸生拜聖之後, 坐于彛倫堂, 則諸生一跪兩揖于月臺上, 常時止行一揖, 而祭酒於拜、於揖, 皆坐椅自如, 不如成均官員之降立。 雖公、侯、伯及新進士之謁聖者, 無不四拜于簷外, 而祭酒、司業, 亦坐椅自如, 蓋尊師道也。 惟外邑學生之行正、至禮于守令、敎授也, 亦行四拜, 守令答兩拜以揖, 而立受兩拜。 守令、敎授例以朔望, 率諸生謁聖, 而坐于講堂, 則廩膳生員及諸生, 以次就于月臺, 而一跪兩揖訖, 廩膳等進立于椅前則守令將廩膳所敎童蒙之書, 讀過半月日課後, 廩膳揖出, 退于其家, 則童蒙跪揖于廩膳, 一如廩膳之跪揖于守令。 常時則生徒齊立一揖, 而敎授、廩膳坐自如, 除休日外, 無有不講之朝。 是以, 山海以西, 垂髫而挾冊者, 甚多有之, 閭巷之間, 誦聲洋洋, 雖至貧至賤之人, 力辦銀錢, 必欲送子于學。 其所以爲敎者, 雖非三代養正之方, 而自少至長, 拘束以禮貌; 激礪以名敎, 使一世之人, 莫不觀感而思奮。 此, 中朝之所以多士濟濟, 而用之於四方, 不患不足者也。 臣愚竊念, 我朝師儒之初坐講堂也, 諸生止行再拜之禮, 而正、至無拜賀之節, 朔望無謁聖之官, 在泮儒生, 但於朔日拜廟, 而師生同拜之儀, 則寂寥乎無聞。 宗親始冠者及新中生進、文武科者, 雖有謁聖之例, 而無拜于大司成之規。 童蒙幸有日講之徒, 而類皆草草無序, 僕僕過恭, 無排行揖讓之禮。 外邑校官之受料者, 皆徒費公廩, 而不知有聖廟, 學長之無料者, 又何能責以禮敎? 是以, 名爲業儒, 而得中科擧者, 猶不識禮讓之爲何事, 託身校籍, 而不讀半行者, 能知遜弟之風乎? 所以從幼抵老, 蠢然無識, 以至傷倫而敗紀者。 雖彼師儒訓誨不力之過, 而竊恐上之所以爲敎者, 猶有所未至也。 今若師生相接之禮、朔望謁聖之規, 必令內外, 一依中朝之制然後, 乃能有所據依可行。 而外學學長, 須以費耗之積於無用者, 給其月料, 責以敎督, 雖初學《千字》者, 莫不講揖, 則庶乎人思讀書, 士皆由禮, 而有用之才, 可得培養矣。
七曰、鄕閭習俗。 臣竊見, 山海以西, 每村立鄕約所。 問于撫寧等縣人則曰: "每月朔望, 約正、副正、直月, 會見于知縣, 一拜三扣頭, 而聽命。" 問于永平人則曰: "約正、副正、直月等, 以朔望, 會見于知府, 四拜于月臺上, 則知府降椅立受, 約正等進立于知府椅前, 同聽其敎。 聽訖, 一揖而退, 各於其所會, 其約中之人, 相與爲禮, 而講其所聽之敎。 所敎者, 是孝順父母、尊敬長上、和睦隣里、敎訓子孫、勤作農桑、不爲非義等事, 而高皇帝所定之敎也。" 其目詳備, 雖不及於《呂氏鄕約》, 而其綱簡切, 易以牖民, 故民咸信之, 村巷之間, 多有列書于墻壁, 而相與誦習。 是以, 父子、兄弟, 雖多異釁, 而不忍分門割戶, 婦姑、娣姒, 不相勃磎。 如遇正、至及生日, 則雖一間小屋之人, 必以四拜禮, 賀于家長。 雖賤男、賤女, 相遇於道, 亦必作揖。 婚姻之禮, 必以親迎, 族人有喪, 則男女、長幼, 俱以白衣、白巾, 終其月數。 四歲童子, 亦能作揖扣頭; 厮夫、走卒, 一無斂髮之不正者, 而立必拱手齊足。 遼、薊之地, 雖被千百年胡俗之染, 而大明之化, 所作新者如此。 我國之地, 本以禮義之邦, 加以列聖漸摩之敎; 重蒙主上維新之政, 歲歲命令之所發, 惟化民成俗之是務, 宜乎戶有善人; 鄕有厚俗。 而頃年以來, 民心日漓, 綱常之道板蕩于世, 父而不知敎其子, 子而不知孝其父; 兄而大不友于弟, 弟而大不克恭其兄; 夫不能制其婦, 婦不能順其夫。 爲隣里者, 雖是切親, 而日以鬪狠爲事; 爲朋友者, 雖是達官, 而日以狙詐相高。 在家而不能修厥行, 故事君而不能盡其職, 方命而虐民者, 遍於內外。 以臣觀之, 可謂臣不臣, 而子不子矣。 嗚呼! 臣不臣, 而子不子, 則爲君父者, 可謂有其國家乎? 所謂雖有粟, 吾不得而食諸者, 誠可寒心。 究其所以然, 則雖由俗尙之澆漓, 而竊恐上之所以爲敎者, 猶有所未至也。 臣聞, 己卯之歲, 寧邊之民有貧不能養其父, 而棄之於壑者, 聞鄕約之書, 降自朝廷, 卽日迎歸, 而竭力以養焉。 嗚呼! 若此不已, 則幾何而不爲善俗乎? 今雖印頒其書, 徒藏於禮房之笥, 而不經于守令之心, 民間雖有竊聞願見之人, 而一不聞書中之意如何, 則寧有不待敎而之善者乎? 臣聞, 高皇帝頒敎條, 旣使守令, 集父老而告之, 又令里正, 執鐸徇路, 而遍曉之。 雖有良知、良能者, 必待善言、善行之習於聞見然後, 乃可思奮, 而國家之所以牖民者, 播告不豫, 聽其自爲, 所以守令之怠惰, 而善人之不興也。 議者或以爲: "不先養民之政, 而徒擧導民之術, 則只益紛擾, 而無益於治。" 此言誠是矣。 今者養民之政, 旣不汲汲然議行, 而導民之術, 亦付相忘之域。 臣之愚意竊以爲 "子雖凍死, 不可奪父之衣; 弟雖餓斃, 不可攘兄之食。" 今有犯此者, 則決不以窮年而宥之。 而所以不奪不攘、興孝興悌之目, 則獨諉之窮民, 而不思豫防於不奪不攘之前, 及陷於罪然後, 從而刑之, 是實罔民, 而非仁人之所忍也。 昔者宋帝之泊舟於崖山也, 亡在呼吸之頃, 而陸秀夫猶書《大學章句》, 日與諸生勸講, 誠以流離顚沛之際, 人不知親上死長之道, 則不可與一朝居故也。 況今聖明臨御, 國家閒暇之時, 巖廊之列, 猶有望治之臣; 草野之中, 不無向善之士。 已頒之書, 若令奉行, 使其勸講之方, 略依中朝之制, 守令、敎授, 例於朔望謁聖之時, 同對約正、校生, 而明諭其義, 使之私會而敎之。 設食一事, 俾待豐年而乃行, 則弊不煩, 而民易從, 將斁之倫, 庶可復敍, 而已薄之俗, 庶可還淳矣。
八曰、軍師紀律。 臣於薊州之路, 見步卒數千, 荷兵糧以行, 不敢恃衆而掠人之物, 又以騾驢, 駕兵車數十兩, 憩于田旁, 而不敢取田禾一束, 以秣其驢。 臣奇其師行有律, 而問之則曰: "㺚虜寇邊, 薊鎭總兵官戚繼光, 令中軍將倪善, 領畿縣軍三萬以赴之。" 蓋以主將威信之素著, 故軍畏其令, 而不敢擾民也。 臣因此而竊聞西海坪伐穀之擧, 平安內地之軍, 一無統轄, 而所經、所止之地, 恣取民田之禾, 以飼其馬。 前秋失收, 今夏又旱, 纔付晩種, 以待西成者, 一被師毒, 便爲赤地, 繞田冤呼之狀, 有不可忍見, 是則不待伐彼之穀, 而先害吾民之穀也。 假令伐盡彼穀, 而所傷於我者, 已不啻百倍, 況一藁之伐, 又不可得乎? 若令某邑守令, 帶領某州、某縣軍而來, 啓行之日, 卽嚴軍令, 使不敢一毫掠人, 則庶乎臨敵對陣, 而可得用衆也。 今則先無號令; 後無節制, 如驅狼羊, 略無統紀, 不待交兵, 而狼狽之勢已形。 故歲動關西兵馬, 一不得伸威於一部落之羸胡, 脫遇勁敵, 則土崩瓦解, 定在須臾之間矣。 蓋兵之强弱, 在於主將之才劣, 而不在衆之多寡。 故頃如金秀文者, 亦屢深入矣, 而未嘗遠動內地之軍, 止用江邊土兵, 而不至敗事。 近歲愈勤遠兵, 而愈未見功成, 祗益取笑而見侮。 若於敗事之後, 徒治其罪, 而不有以豫敎, 則臣恐犯罪者日積, 而邊無奠枕之期矣。 臣聞, 中朝養將之制, 旣置武學生, 敎之讀書, 而又於科擧之際, 試以備邊三策, 然後乃拔而用之。 故雖爲備禦、守堡之職者, 亦多知書諳事, 而思盡其職者。 其中如戚摠兵繼光者, 雖是襲職, 而亦嘗受學於梁玠, 以長許多知見。 臣於道路, 聞其爲人, 秉心持正, 憂國忘私。 頃嘗備倭於南方也, 始勤募練, 變弱爲强, 子犯軍令, 收而斬之曰: "爾不用命, 孰肯畏我?" 自是三軍股慄, 遂無懈頑之習, 莫不以死力戰, 而方張之虜, 乃潰而散。 江南沿海之迄無大警者, 蓋緣戚公之所以嚴軍法, 而振士氣。 屹有古名將之風, 故穆宗皇帝移置葪門, 倚爲鎖鑰。 頃臨大敵, 申飭關防, 以明備禦方略, 而又於內地, 大書約束之文, 周揭于城門。 其在平日, 撫養士卒, 雖極其至, 而及其犯法, 不少容貸, 參將以下, 親決四十以上, 夜不收或傳虛報以惑衆, 則執以殺之, 使一軍之人, 知有主將, 而不知有㺚子。 是以, 勍寇當前, 而人不動搖, 關內之人咸曰: "戚爲總兵、楊爲總督, 邊鄙之人賴以少憂。" 云。 臣因是而觀其所爲文三帖, 其戰亡士卒, 莫不爲文以祭之; 其行師戒塗, 莫不虔誠而告神。 《漳州文記》之作, 則思以禮義養士; 梁玠遇寇而不屈, 則詳記而歎其大節, 三忠有祠, 景跂之不已; 匹婦守義, 勒碑而不遺, 其他尋常所吟詠者, 無非所以許國而報主者。 其忠誠懇切, 而品式備具, 雖古之良將, 無以過此。 臣竊計, 國家之所以任干城者, 始雖勉而淸白, 由其不學而無術, 故及其位重祿厚, 則自謂志願之已極, 而不肯鞠躬盡瘁, 思所以畢命於王事, 惟其私之所在, 則必極力而遂之。 是以, 卒如悍馬, 而軍威不立; 邊如決堤, 而國勢不競。 將來有望者, 惟以卽日老將爲限, 不思矜奮, 以及於古之烈將, 則他日或有可虞之事, 而定無人收拾矣。 如戚公之文, 可以爲法, 故臣謹具三帖以進。 伏願聖明, 以楊照、戚繼光之事, 命儒臣作傳, 而竝印其文, 廣布于中外將士, 使倚命自畫之徒, 有所感慕而興起, 則彼知當今之世, 果有如許名將, 雖垂翅回溪之人, 終能奮翼於澠池矣。 凡玆數條, 雖若微末之事, 而有關於士習、民風蘇殘補弊者, 爲甚切, 故臣愚不自揆, 取悉見聞。 伏願殿下, 勿謂賤臣之言, 而惟念國事之非, 議于大臣, 亟謀所以區處者, 則東方士民, 不勝幸甚。
其十六條; 曰格天之誠, 曰追本之孝, 曰陵寢之制, 曰祭祀之禮, 曰經筵之規, 曰視朝之儀, 曰聽言之道, 曰取人之方, 曰飮食之節, 曰餼廩之稱, 曰生息之繁, 曰士卒之選, 曰操練之勤, 曰城池之固, 曰黜陟之明, 曰命令之嚴, 末乃總論君上正心表率之道。 又言: "《朱子語類》, 卷帙雖多, 分類甚精, 君有君用、臣有臣用, 請於各司、各道大衙門, 各藏一本, 使於治事之暇, 擇其類而觀之, 則朱子之所未行者, 庶可明於東方矣。" 憲有經濟之志, 讀書窮理, 要以施諸事爲。 一入中國, 數月途店之次, 求訪咨詢, 殆無遺漏, 其精勤忠讜, 前所未有也。 【國朝於朝燕使行, 例送質正官, 質問華訓于中朝, 必以博文詳雅之士充之。 其後漸習華訓, 言語, 吏文, 無不及者, 質正雖往, 無可問, 備數而已。 故近來則不復遣矣。】
- 【태백산사고본】 2책 8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45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외교-명(明)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人事) / 의생활(衣生活) / 식생활(食生活) / 재정(財政) / 사법(司法) / 윤리(倫理)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군사(軍事)
- [註 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