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약의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였으나 정지할 것을 명하다
향약의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자 대신의 헌의가 옳으니 그르니 하며 일정하지 않았는데, 상이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허엽(許曄)이 이이를 보고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상에게 향약을 정지하라고 권하였습니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의식이 풍족한 뒤에야 예의를 아는 법입니다. 기한(飢寒)에 허덕이는 백성에게 억지로 권하여 예를 행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허엽이 탄식하기를,
"세도(世道)의 승강(升降)에는 천명이 있는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공의 생각에는 민생이 비록 극도로 곤궁하다 하더라도 향약을 시행하면 과연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순화시켜 태평 시대가 될 수 있다고 여깁니까?"
하니, 허엽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공은 향약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하니, 허엽이 말하기를,
"상의 명이 없으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공이 집안을 다스리는 데 상의 명을 기다릴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예로부터 백성이 도탄에 빠졌는데도 예속(禮俗)을 제대로 이룬 경우가 있었습니까. 부자 간이 아무리 지친(至親)이라 해도 만약 기한(飢寒)을 생각하지 않고 매일 매를 때리면서 글을 배우라고 권하면 반드시 서로 등을 지는 결과가 벌어질 것인데, 더구나 백성이겠습니까."
하였다. 허엽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 사람은 선한 자가 많고 선하지 않은 자는 적기 때문에 향약을 시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이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당신의 마음은 선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한 것만 보셨습니다마는, 나는 선하지 않은 사람을 본 것이 더 많으니 필시 내 마음이 선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몸으로 가르치면 따르고 말로써 가르치면 말썽이 생기는 법인데, 지금 향약의 경우 어찌 말썽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허엽이 말하기를,
"당신은 고집부리지 말고 대죄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양사(兩司)로 하여금 다시 논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나는 내가 그르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므로 감히 대죄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허엽이 개탄해 마지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2책 8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46면
- 【분류】사상-유학(儒學)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以鄕約事, 議于大臣, 大臣獻議可否不一, 上命停之。 許曄見李珥曰: "何以勸上停鄕約?" 珥曰: "衣食足, 然後知禮義。 飢寒之民, 不可强之以行禮也。" 曄歎曰: "世道升降, 有命存焉, 奈何?" 珥曰: "公意以爲, 民生雖極困瘁, 若行鄕約, 則果能化民成俗, 治升大猷乎?" 曄曰: "然。" 珥曰: "公能以鄕約治家乎?" 曄曰: "無上命, 故不能也。" 珥曰: "公之治家, 奚待上命? 自古民墜塗炭, 而有能成禮俗者乎? 父子雖至親, 若不念飢寒, 日撻而勸學, 必至相離, 況百姓乎?" 曄曰: "今世之人, 善者多, 不善者少, 故可行鄕約。" 珥笑曰: "君心善, 故但見人之善。 若珥則見不善人多, 必是余心不善而然也。 但以身敎者從; 以言敎者訟, 今之鄕約, 無乃訟耶?" 曄曰: "君無堅執, 須待罪然後, 使兩司更論可也。" 珥曰: "余不自知其非, 故不敢待罪。" 曄慨恨不已。
- 【태백산사고본】 2책 8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46면
- 【분류】사상-유학(儒學)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