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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6권, 선조 5년 1월 1일 무오 1번째기사 1572년 명 융경(隆慶) 6년

처사 조식의 졸기

처사(處士) 조식(曺植)이 졸하였다. 조식의 자는 건중(楗仲)이며 그 선대는 창녕인(昌寧人)으로 삼가현(三嘉縣)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호방하고 용감하여 잗단 예법에 구애받지 않아 스스로 그 재주를 과시하는가 하면 문장은 기고(奇古)를 지향했는데, 내심에 과거 급제나 공명(功名)은 손쉽게 이룰 것으로 여겼다. 그러던 중 일찍이 친구와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허노재(許魯齋)001) 가 말한 ‘이윤(伊尹)이 뜻한 바를 뜻하고, 안자(顔子)가 배운 바를 배우며, 세상에 나가면 공을 세우고 들어앉으면 절조를 지킨다.’는 대목에 이르러, 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하고 크게 마음을 가다듬고서 실학에 뜻을 독실히 하였으며 아울러 과거(科擧) 공부를 폐기하였다.

일찍이 서울에 갔다가 성수침(成守琛)을 방문했는데 그가 백악산(白岳山) 밑에 집을 짓고 세상사와 인연을 끊은 것을 보고는 마침내 그와 벗이 되었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벼슬하지 않고 지리산(智異山) 아래에서 살았다. 취사(取捨)를 함부로 하지 않아 남을 인정해 주는 일이 적었으며 항상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는가 하면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여 밤에도 정신을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다. 한가로이 지낸 세월이 오래되자 사욕과 잡념이 깨끗이 씻겨져 천 길 높이 우뚝 선 기상이 있었고, 꼿꼿한 절개로 악을 미워하여 선량하지 않은 향인(鄕人)에 대해서는 마치 자기를 더럽히는 것처럼 봤기 때문에, 향인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으며 오직 학도들만이 종유하였는데 모두 심복(心服)하였다.

명종조에 이항(李恒)과 함께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대하였을 때 임금이 치도(治道)를 물으니 조식은 매우 소략하게 대답하였는데, 물러나 이항과 술을 마시고 취하여 농담하기를,

"너는 상적(上賊)이고 나는 다음가는 도적이니 우리들 도적이 남의 집 담장을 뚫는 유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그 길로 하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청백한 이름이 더 한층 소문이 났다. 금상(今上)이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나자 상이 의원을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의원이 도착하기 전에 졸하였다. 나이는 72세였다. 조정 대신이 역명(易名)002) 하여 포장하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니 상이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은 대신, 대사헌을 증직하고 부물(賻物)을 하사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조식의 학문은 마음으로 도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고 치용(致用)과 실천을 앞세웠다. 시비를 강론하거나 변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학도를 위하여 경서를 풀이해 준 것은 없고, 다만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다. 그 정신과 기풍이 사람을 격려하고 움직이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배우는 자들이 공부가 열리는 일이 많았다. 《참동계(參同契)》를 꽤나 즐겨 보면서, 좋은 곳이 매우 많아 학문을 하는 데 도움이 있다고 했고, 또 석씨(釋氏)의 최고 경지는 우리 유가와 일반이라고도 하였다. 일찍이 ‘경의(敬義)’라는 두 글자를 벽에 써 두고 배우는 자들에게 보였는데, 임종시에 문인에게 말하기를,

"이 두 글자는 일월처럼 폐할 수 없다."

하였다. 조식의 저서는 없고 약간의 시문(詩文)만 세상에 나돌 뿐인데, 학자들이 남명 선생(南冥先生)이라 불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29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註 001]
    허노재(許魯齋) : 노재는 원나라 허형(許衡)의 호.
  • [註 002]
    역명(易名) : 시호를 내리는 것.

○朔戊午/處士曺植卒。 楗仲, 其先昌寧人, 家于三嘉縣。 少時, 豪勇不羈, 自雄其才, 爲文務奇古, 謂科第功名可俯取。 嘗與友人, 讀《性理大全》, 至許魯齋語: "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 出則有爲; 處則有守。" 丈夫當如此, 乃惕然發憤, 篤志實學, 因斷棄擧業。 嘗游漢都訪成守琛, 見其搆屋白岳峯下, 謝絶世故, 遂與爲友。 歸鄕不仕, 居智異山下, 取與不苟, 少許可, 常危坐一室, 以劍拄頣, 佩鈴以自警, 雖夜未嘗昏睡。 閑居旣久, 澄汰欲念, 有壁立氣像, 耿介嫉惡, 鄕人之不善者, 視之若浼, 故鄕人不敢干謁, 只有學徒從游, 皆心服焉。 明宗朝, 與李恒同被召入對, 問以治道, 對甚率略。 退與飮醉戲語曰: "汝爲上賊, 吾爲副賊。 此賊豈非穿窬之類耶?" 遂辭歸鄕里, 淸名益播。 今上朝, 累除官不就。 至是有疾, 上遣醫治疾, 未至而卒, 年七十二。 朝臣請易名以示褒奬, 上以無舊例不許, 贈大司諫, 賜賻物以葬。 之爲學, 以得之於心爲貴; 致用踐實爲急, 而不喜爲講論辨釋之言, 未嘗爲學徒談經說書, 只令反求而自得之。 其精神、風力, 有竦動人處, 故從學者多所啓發。 頗喜看《參同契》以爲: "極多好處, 有補於爲學。" 又言: "釋氏上達處, 與吾儕一般。" 嘗書敬義二字于壁, 以示學者。 臨終謂門人曰: "此二字, 如日月, 不可廢也。" 不著書, 有詩文若干篇行於世。 學者稱南冥先生


  • 【태백산사고본】 1책 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29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