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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1권, 선조 즉위년 7월 17일 경오 1번째기사 1567년 명 융경(隆慶) 1년

허국과 위시량이 등극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도성에 들어오다

조사(詔使)인 검토관(檢討官) 허국(許國), 급사중(給事中) 위시량(魏時亮)이 도성에 들어왔다. 허국 등은 새 황제(皇帝)의 등극 조서(登極詔書)를 반포하기 위하여 온 것인데, 박충원(朴忠元)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가산(嘉山)에 이르렀을 때 국상(國喪) 소식을 듣고는 통역관에게 이르기를,

"이런 일은 전에 없던 일이었는데 우리들이 왔을 때 마침 당했으니 몹시 불행한 일이다."

하고는, 이어 국왕이 자식이 있느냐고 물었다. 통역관이, 세자가 일찍 죽고 그 밖의 후사(後嗣)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또 지금 수상(首相)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기에 통역이, 수상은 이준경인데 어진 재상으로 나라 사람들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말하자 두 사신은, ‘그렇다면 걱정이 없겠다.’고 하였다.

즉시 두목(頭目) 유심(兪深)을 시켜 문상(問喪)한다고 하며 먼저 달려 도성에 들어가도록 하였는데, 사실은 정탐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들이 도성에 들어오자 상은 권지 국사(權知國事)라 하며 세자(世子)의 곤면(袞冕) 장복(章服)을 갖추고 모화관(慕華館)으로 나아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예조 판서 이탁(李鐸)이 곁에서 도왔는데 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두 사신이 주목하여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러한 소년이 모든 것을 예절에 맞게 행동하니 동국(東國)의 복이다.’ 하였다.

그날 두 사신은 상이 아직 책봉(冊封)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輦)을 타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가 이탁이 맞서 다툰 끝에 타게 되었고, 다음날은 두 사신이 소복(素服)을 하고 조문하였다. 그리고 또 문묘(文廟) 배알도 하였는데, 유생(儒生) 2천여 명이 정알(庭謁)하자 두 사신이 매우 엄숙한 태도로 답읍(答揖)하였다. 그리고 관반(館伴)에게 이르기를,

"동방의 예의(禮義)가 더욱 훌륭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하였다. 허(許)는 사람이 자세하면서 조용하였고, 위(魏)는 엄정하고도 거지(擧止)에 법도가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그들의 행장이 빈약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사람은 그들의 청표(淸標)에 대하여 감복을 하며 전후 사신들 중 제일이라고들 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03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왜(倭)

○庚午/詔使檢討官許國、給事中魏時亮入都。 等以新皇帝頒登極詔來, 朴忠元爲遠接使。 至嘉山聞有國喪, 謂譯官曰: "此事前所未有, 吾等之行適値焉, 殊不幸矣。" 仍問: "國王有子乎?" 譯官曰: "世子夭歿, 無他嗣矣。" 又問: "首相何如人?" 曰: "首相, 李浚慶, 賢相也, 國人信之。" 兩使曰: "無虞矣。" 卽使頭目兪深, 託以問喪禮, 先馳入都, 實欲偵探事故也。 及至都, 上稱權知國事, 具世子袞冕、章服, 出迎于慕華館, 禮曹判書李鐸相禮, 終始無違禮。 兩使注目歎曰: "這等少年, 動中禮節, 東國之福也。" 是日兩使以上未受冊封, 不許乘輦, 爭之乃已。 翌日兩使素服弔喪, 又謁文廟, 儒生二千餘人庭謁, 兩使答揖甚肅, 謂館伴曰: "益見東方禮義之盛矣。" 詳悉從容, 嚴正, 擧止有法度。 畢事而還, 橐裝蕭然。 東人服其淸標以爲: "前後使臣, 皆無出其右。"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03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