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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21권, 선조 대왕 묘지문[誌文]

선조 대왕 묘지문[誌文]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다.

"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 선종 정륜 입극 성덕 홍렬 지성 대의 격천 희운 현문 의무 성경 달효 대왕(宣宗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敬達孝大王) 목릉지(穆陵誌)이다. 삼가 상고하건대 우리 선종 대왕의 성은 이(李)씨요, 휘는 연(昖)이니, 중종 공희 대왕의 손자이고 덕흥 대원군 이초(德興大院君李岹)의 세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鄭)씨니 영의정에 증직된 정세호(鄭世虎)의 딸이다. 가정(嘉靖)005) 임자년006) 11월 11일에 대왕은 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에서 탄생하였다. 대왕은 탄생하면서부터 자질이 아름답고 놀이할 때에도 범상치 않았다. 어렸을 적에 명종 공헌 대왕(明宗恭憲大王)이 두 형과 함께 불러 어관(御冠)을 벗어주며 차례로 써보라고 하였는데, 대왕에게 이르자 꿇어앉아 사양하기를 ‘임금께서 쓰시는 것을 신하가 어찌 쓰겠습니까.’ 하였다. 인하여 묻기를 ‘임금과 아버지는 누가 중한가?’ 하니, ‘임금과 어버이는 비록 같지 않으나 충효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고 답하니, 공헌왕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장성하게 되자 하성군(河城君)에 봉하였다. 가정(嘉靖)을축년007)공헌왕이 미령하였는데, 세자 이부(李暊)는 이미 죽고 세자를 정하지 못하니,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여러 조카 중에서 선택하기를 청하자, 공헌왕이 대왕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토록 하였다. 융경(隆慶)008) 1년 정묘년009)공헌왕이 승하하자 영의정이 유교(遺敎)를 받들어 대왕을 맞이하니, 대왕이 어머니 상중이라서 상차(喪次)에서 울며 굳이 사양하다가 절박하게 되자 행하였다.

이때 한림원 검토(翰林院檢討) 허국(許國)과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 위시량(魏時亮)목종 황제(穆宗皇帝)의 등극(登極) 조서를 받들고 우리 나라에 왔었는데 국왕이 승하하고 세자가 없다는 것을 듣고 매우 걱정하였다. 그러나 반조(頒詔)하는 날 대왕의 의표(儀表)가 단정하고 엄숙하며 예절이 익숙하고 우아한 것을 보고는 서로 눈을 돌려 감탄하기를 ‘동방(東方)에 진주(眞主)가 나왔다.’고 하였다. 이때 대왕의 연세 16이었는데, 배신(陪臣)을 보내어 명조(明朝)에 부고(訃告)하고 또 이어 승습(承襲)을 청하였다. 다음해010) 봄에 황제가 태감(太監) 요신(姚臣)이경(李慶)을 보내 조서를 내려 조선 국왕에 봉하였고 고명(誥命)·면복(冕服)·채폐(彩幣)를 하사하였다. 대왕이 즉위한 초기부터 선치(善治)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전념하여 날마다 강연(講筵)에 나아가 경전과 사기를 토론하고 밤이 늦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당시 명유(名儒)였던 이황(李滉)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는데 여러 차례 불러도 오지 않자 대왕이 정성과 예를 다하고 나오기를 돈유(敦諭)하여 찬성으로 발탁하였다. 이황이 치도(治道) 6조를 진달하고, 또 《성학십도(聖學十圖)》《서명고증(西銘考證)》을 지었으며 정이(程頤)의 사물잠(四勿箴)을 손수 써서 올리니, 대왕께서 마음을 비우고 기꺼이 받아들여 모두 정서(精書)하여 병풍을 만들라 명하고 좌우에 놓아두고 조석으로 성찰(省察)하였다. 이황이 별세하자 슬퍼하여 마지 않으며 ‘이황의 글과 말은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하니 유사로 하여금 모아서 간행토록 하라.’ 하였다. 우리 나라는 고려(高麗)로부터 정몽주(鄭夢周)가 끊어진 학문을 비로소 창도하고 본조(本朝)에 이르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이 잇달아 일어나 사도(斯道)를 강명(講明)하고 경전(經傳)을 발휘(發輝)하였다. 대왕께서 이 사람들은 사도에 큰 공로가 있다고 하여 특명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증직과 시호를 내렸으며 그 자손들을 등용하였다.

또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하씨소학(何氏小學)》은 모두 치도(治道)에 관계되고 본조(本朝)에서 지은 《삼강행실(三綱行實)》은 윤기(倫紀)를 부식(扶植)할 만하니 아울러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또 해조에 하교하기를 ‘근래 사유(師儒)의 선발은 오로지 문사(文詞)만을 숭상하여 학궁에 유학(遊學)하는 선비들까지도 모두 문장을 익히고 과거보는 것으로 업을 삼으니, 선비들의 풍습이 이와 같으면 후일에 성취하더라도 무슨 보잘것이 있겠는가. 학행(學行)이 있어 사표가 될 만한 자를 뽑아 지방 관직을 제수하고 그로 하여금 열읍(列邑)을 순행하며 과업을 권장하고 가르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유일(遺逸)을 천거하여 등용하는 것으로 새 정치의 제일 업무로 삼으라.’ 하교하고, 마침내 역마로 징사(徵士)인 조식(曹植)·성혼(成渾) 등을 불러 불차 서용(不次敍用)하였다.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현사(賢邪) 진퇴(進退)의 기미를 논하면서 ‘간당(奸黨)의 비석이 세워지자 변경(汴京)이 폐허가 되었고 위학 당적(僞學黨籍)이 조성되자 남송(南宋)이 망하였으니 비록 나중에 후회한들 미칠 수 없었다.’ 하였다. 대관(臺官)이 사림을 해친 선조(先朝)의 간신 남곤의 죄를 추론하여 삭탈 관직시킬 것을 청하니, 혹은 이미 지난 일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대왕께서 ‘남곤을 죄주는 것은 조광조(趙光祖)의 도학(道學)을 추모하는 것이고, 또 일시의 추향(趨向)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죄를 주었다. 논하는 자가 또 ‘지금 조정에는 권간(權奸)이 없고 국가에는 변방의 경보가 없으니 이는 실로 훌륭한 정치를 할 만한 시기입니다.’ 하니, 대왕이 ‘이 말은 그렇지 않다. 맹자(孟子)가 전국(戰國) 시대를 당하여 제후들에게 왕도(王道)를 시행하라고 권하였으니, 국가가 비록 전쟁과 많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능히 다스리지 못할 시기가 있겠는가.’ 하였다.

융경(隆慶) 3년 기사011) 가을에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만력(萬曆)012) 1년 계유013) 에 태학생(太學生)이 벽불소(闢佛疏)를 올리자 대왕이 수찰(手札)로 답하기를 ‘너희들이 수선(首善)의 위치에 있으니 마땅히 동심 인성(動心忍性)하고 절차 탁마(切磋琢磨)하여 후일 진유(眞儒)가 되어 조정에 서서 위로는 과군(寡君)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혜택을 주어 정치가 향상되고 풍속이 아름다워지게 하면 오도(吾道)가 쇠하고 이단(異端)이 성하는 것은 족히 걱정할 것이 없다. 어찌 꼭 태무(太武)가 중을 죽이고 사찰을 훼철하는 것처럼 하겠는가.’ 하였다. 당시 대왕이 병을 앓다가 오랜만에 쾌유되자 예조가 여러 차례 하례드릴 것을 청하니, 대왕이 이르기를 ‘사람의 병은 거의 조섭을 잘못하므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지난번 뜻밖에 병을 얻어 고통을 치르다가 다시 소생하여 대신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아랫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현재 삼가고 죄를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는데, 어찌 버젓이 하례를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만력 3년 을해에 공헌 왕비(恭憲王妃) 심(沈)씨가 서거하자 예관(禮官)은 《오례의(五禮儀)》에 근거하여 ‘졸곡(卒哭) 후에는 마땅히 현관(玄冠)과 오각대(烏角帶)를 사용해야 한다.’ 하고, 지평 민순(閔純)은 ‘삼년상은 통례로서 귀천이 없이 동일하니 마땅히 주자(朱子)의 의논을 따라 백모(白帽)와 포과 각대(布裹角帶)를 사용해야 한다.’ 하여 조정의 의논이 통일되지 않았으나, 대왕께서는 과감히 단행하여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만력 5년 정축에 영정 왕비(榮靖王妃) 박(朴)씨가 서거하자, 예조는 ‘숙질(叔姪)의 복(服)을 따라 자최 기년(齊衰期年)을 입어야 한다.’ 하고, 상신(相臣) 박순(朴淳) 등은 ‘대왕은 영정 왕비에게 조손(祖孫)의 의가 있으니 체(體)를 잇는 중함으로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니, 대왕이 그 의논을 따라 마침내 삼년상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앞서 간신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년014) 간에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계획적으로 죽이고 녹훈까지 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의 뜻이 오랠수록 더욱 분해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아울러 복직(復職)시키고 녹훈은 삭탈하니 중외(中外)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만력 14년 병술015) 에 성절 배신(陪臣)이 회동관(會同館)에 있다가 불을 내었다. 대왕은 몹시 놀라 사신 이하를 엄히 국문하고 즉시 배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사례하게 하니, 황제는 대왕의 충성스럽고 신중함이 칭찬할 만하다 하여, 특별한 칙서를 내리고 많은 선물을 내렸다. 다음해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왔을 때에 평수길이 왕위를 찬탈하여 자립하였는데, 대왕이 이르기를 ‘일본은 임금을 내쫓았으니 이는 바로 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나라이다. 접대할 수 없으니 마땅히 대의(大義)로 물리쳐야 한다.’ 하고, 조정 신하에게 의논하라고 명하니 대신 모두가 ‘교화 밖의 나라이니 예의로써 책망할 수 없습니다.’ 하자, 대왕은 비록 마지못해 허락하였으나, 이처럼 의리를 엄격하게 지켰다.

만력 16년 무자016) 에 사은사 유홍(兪泓)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와서는 종계(宗系)의 누명을 모두 씻어주었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이 우리 나라의 반적(叛賊) 윤이(尹彝)이초(李初)의 무고(誣告)를 입었는데 강헌왕을 역적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황명조훈(皇明祖訓)》《대명회전(大明會典)》에 모두 잘못된 것을 그대로 기록했었다. 태종 공정 대왕으로부터 선왕(先王)에 이르기까지 누대(累代)에 걸쳐 진주(陳奏)하였지만 개정하라는 허락을 바지 못했었다. 대왕께서 왕위를 잇게 되자 탄식하면서 ‘국가의 종계(宗系)가 무함을 받은 지 2백여 년이 되었으니 어찌 하루라도 태연히 천지간에 살 수 있겠는가. 마땅히 사신을 선발하여 혈성(血誠)으로 호소해야 한다.’ 하고 사신이 떠날 때 경계하기를 ‘기어이 요청을 허락받고서 돌아오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그 위사(危辭)와 고어(苦語)는 천지를 감동시킬 만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무함을 말끔히 씻게 되자, 대왕은 여러 신하에 하교하기를 ‘여러 경(卿)들의 힘을 입어 오늘과 같은 경사가 있게 되었으니 황은(皇恩)이 망극하다. 옛적의 임금은 조업(祖業)을 회복하는 일보다 더 큰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는 외물(外物)에 불과할 뿐이다. 이륜(彝倫)이 펴지고 동한(東韓)이 재조(再造)되어 수백 년의 지극한 통분을 씻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 하였다. 이에 군신들이 회의하여 존호(尊號)를 정륜 입극 성덕 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고 올렸다.

만력 19년 신묘017)평수길현소(玄蘇) 등을 보내어 우리 나라에 편지를 하였다. 중국을 침략하려 한다 말하고 길을 빌려 달라고 위협하였는데, 그 말투가 몹시 거만하여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었다. 다음해인 임진년에 왜적이 제나라 군대를 모두 거느리고 들어와 우리 나라를 짓밟으니 마치 파죽지세와 같았다. 중국을 침범하려는 계획은 실로 하루 이틀에 세운 것이 아니고 흉악한 계책을 오래 전부터 품고 있다가 시기를 기다려 발한 것이었다. 우리 나라는 누대(累代)를 태평하게 지내어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광분하는 왜적을 만나니, 초목이 쓸어지듯 지탱하지 못하여 남쪽의 고을들이 잇달아 패몰하였다. 대왕께서 장수를 나누어 보내 요충지를 지키게 하고 자신의 잘못이라는 애절한 전교를 내려 팔도(八道)의 근왕병(勤王兵)을 징집하여 목숨을 바치고 도망치지 말라는 의리로 훈시하였다. 충주(忠州)와 상주(尙州)의 군사가 잇달아 패하자 왜적이 그 틈을 타서 쳐들어오니 그들의 칼날을 당할 수 없었다. 대왕은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알고 이에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왜적이 천조 침략을 꾀하였으니 실로 천하의 적이다. 내가 마땅히 천조를 위하여 강토를 사수(死守)해야 하겠으나 왜적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 서로 대적하지 못할 형편이다. 이미 흉봉(兇鋒)을 애써 대항하여 왜적의 길을 차단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부모의 나라에 가까이 가서 천자께 호소하고 왕사(王師)를 빌려 이 적을 토벌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서쪽으로 옮길 계획을 정하였다.

당시에 왕비 박씨(朴氏)가 아들이 없어 세자 자리가 비어 있었다. 대왕께서 대신을 불러 이르기를 ‘광해군이 총명하고 효성스러우며 학문을 좋아하여 싫어하지 않는 데다가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으니, 백성들의 소망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종사와 신민의 복입니다.’ 하였다. 이튿날 광해군 이혼(李琿)을 왕세자로 삼았다. 당시 국사(國事)가 몹시 어수선하여 미처 직접 주문(奏聞)하지 못하고 먼저 요동에 자문으로 보고하여 전주(轉奏)토록 하였다. 얼마 후에 왜적의 소식이 더욱 시급해지자 대왕이 성문을 나와 서쪽으로 떠나니 세자가 대왕을 따랐다. 평양(平壤)이 함락되자 대왕이 의주(義州)로 나아가 머무르니, 세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나는 곳마다 격문(檄文)을 전하여 도망친 백성들을 모집하여 모두 의리에 분발하여 왜적 무찌르기를 생각하게 하였다. 대왕이 이에 배신 정곤수(鄭崑壽) 등을 보내 거듭 왜적의 상황를 아뢰니 황제가 행인(行人) 설번(薛藩)을 보내어 유고(諭告)하기를 ‘선세(先世)의 토지를 회복하는 것은 대효(大孝)라 이르고, 군부(君父)의 환란을 급히 구원하는 것은 지극한 충성이라 하니, 그대 나라의 군신은 반드시 나의 마음을 본받아 옛 강토를 다시 찾고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凱歌)를 부르며 서울로 돌아가 종사(宗社)를 보전하고 번병(藩屛)을 오래 수호하여 나의 뜻을 위로토록 하라.’ 하였다. 대왕이 의주에 있다가 강가에 나아가 맞이하고 실성 통곡(失聲慟哭)하니, 곁의 사람들까지 슬퍼하여 여러 신하가 모두 울었다. 겨울에 황제가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요동(遼東)과 광동(廣東)의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나왔다. 대왕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황제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대인(大人)을 보게 되었으니, 소방(小邦)의 실오라기 같은 운명을 다만 대인에게 부탁합니다.’ 하니, 제독은 대왕의 충성스럽고 간절함을 보고는 태도를 바꾸었다.

만력 21년 계사018) 봄에 제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양의 왜적을 대파하였다. 대왕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는 다만 중국 군사의 식량에 있으니, 내가 한 필의 말을 타고 중국 군사의 뒤를 따르며 책응하려 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오는 중국 장수도 마땅히 머물러 기다려야 하니, 세자로 하여금 안주(安州)에 나아가 한편으로는 책응하고 한편으로는 군량 수송을 독려하며, 왜적에게 패하여 죽은 구도(舊都) 백성들의 시체를 모두 거두어 묻고 푯말을 세우게 하라.’ 하고, 인하여 각 고을에 전교하여 반찬은 2∼3그릇에 지나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여름에 관군이 서울을 수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가 하례할 것을 청하자, 대왕이 이르기를 ‘위로할 일이지 하례할 만한 일은 못된다. 다만 신민을 거느리고 망궐례를 행하여 황제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뿐이다.’ 하였다. 당시 서울과 지방에 흉년이 들었다. 대왕은 내인(內人)이 소고기를 구워먹는 것을 보고 ‘소가 없으면 밭을 갈지 못하는데 사람이 소를 죽이니 매우 불인(不仁)하다. 현재 탕패(蕩敗)한 나머지 비록 도살을 엄금하더라도 오히려 번식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도살을 그대로 방치하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행차중에 임금의 활을 잃어버렸는데, 유사(有司)가 주운 자를 잡아 형벌을 주려고 하자, 대왕이 이르기를 ‘이미 잃어버렸으니 반드시 습득한 자가 있기 마련이다.’ 하고, 즉히 방면하라고 명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제독이 대왕의 필법이 정묘(精妙)하다는 소문을 듣고 매우 간절하게 써주기를 청하였으나 대왕은 병이 있다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대왕의 뜻은 조그마한 기예로써 남에게 과시하지 않으려고 한 것인가 보다.

가을에 대왕이 서울로 돌아왔다. 내주(內廚)에서 날마다 공궤하는 쌀을 덜어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주고 유해(遺骸)를 모아 단(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팔도(八道)에 공문을 내려 조세를 감면하고 공물을 폐지하며 충신·효자·열녀를 찾아 표창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예조에 하교하기를 ‘난리를 겪은 후 서울 백성으로서 죽은 자가 한이 없어, 남은 백성은 절반 이상이 소복을 입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서울에 들어오는 날 서울 백성이 길을 메웠으나 상복(喪服)을 입은 자가 없으니, 이는 반드시 난리를 겪은 후 윤리가 무너져 그러한 것이다. 오부(五部)로 하여금 규찰(糾察)토록 하라.’ 하였다. 이해 여름에 대왕이 배신(陪臣)을 보내어 서울 회복한 것을 사례하니, 황제가 행인(行人) 사헌(司憲)을 보내어 유고하기를 ‘대왕이 대병(大兵)으로 왜적을 국경 밖으로 몰아냈고 토산물을 표문(表文)과 함께 보냈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인하여 망의와 채단을 하사하였다. 대왕이 서울로 돌아온 후로 제일 먼저 서적을 모아 교서관에 소장하라 명하고, 또 몸소 문묘(文廟)에 제사지내려고 하자, 예관이 ‘성전(聖殿)이 모두 불타 제사지낼 곳이 없습니다.’ 하니, 대왕이 이르기를 ‘나의 의견은 그와 다르다. 대저 신이 천하에 있는 것은 마치 물이 땅에 있는 것과 같아 어디로 가나 있는 것이며, 귀신은 일정한 곳에서만 흠향하는 것이 아니고 치성(致誠)하면 귀신이 그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단(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기도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나무로 만든 신주가 있어야 하겠는가. 나의 뜻은 학궁(學宮) 옆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 한편으로는 선성(先聖)의 영령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전쟁중에도 윤리를 중히 하려고 한다.’ 하였다.

대왕이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는 인재가 많지 않고 채용하는 것은 다만 과거에 있다. 넓은 천지에 재간과 특이한 행실을 지닌 선비로서 시골에서 부질없이 늙어가는 자가 어찌 없겠는가. 옛 사람이 「대신은 인재로써 임금을 섬겼다. 」고 하였다. 옛날 안영(晏嬰)은 자기의 노복을 천거하였고 사안(謝安)은 조카를 천거하였다. 진실로 적격자라면 미천한 자라 하여 혐의하지 말고 친척이라 하여 폐하지 말고 각자 천거하라.’ 하였다. 당시 대왕이 정릉동 행궁에 우거(寓居)하였다. 하루는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옛 궁성(宮城) 안에 초가(草家)를 대충 짓고 우거하려고 한다. 옛날 위군(衛君)조(漕)에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지금이 어떤 때이기에 큰 집에 살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중국 장수가 궁궐을 지으라고 말하자 대왕이 답하기를 ‘깊은 원수를 보복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집을 짓겠습니까.’ 하였다. 당시 남쪽 변방에서는 오로지 수군에만 뜻을 두고 있었는데 대왕께서 장수에게 하교하기를 ‘우리가 현재 주함(舟艦)에 전력하여 군대를 부산(釜山)에 집결하고 육지의 요해처와 도로의 요충지에 대해서는 모두 돌볼 여가가 없으니 이는 전일 수전(水戰)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다만 군사는 일정한 형세가 없고 변고는 뜻밖에 생기는 것이니, 어찌 전일의 일을 끌어다 준례를 삼을 수 있겠는가. 왜적이 만약 우리 군사가 부산에 모여 있는 것을 정탐하여 알고 오도(五島)로부터 향하여 우리 군사의 후면으로 돌아 나온다면 우리 군사가 왜적에게 습격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호남·호서로부터 황해도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해안 일대에 어느 곳이든 이르러갈 것이니 누가 막겠는가. 수군(水軍)을 부산에만 집결시키고 호남에 군사를 배치하지 않으며 육지의 요해처를 지키지 않는 것은 훌륭한 계략이 아니다.’ 하였다.

일찍이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마음을 보존하는 데 있어서 요체가 있다. 일상 생활에 천 가지 만 가지의 사물이 앞에 교접(交接)할 때 공허한 자세로 공정하게 처리하고 순리로 대응하여 외물(外物)이 이르러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뒤에야 정(靜)하려 하면 정하고 동(動)하려 하면 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지 않아 간사하고 망녕된 생각이 마치 구름이 일듯 하면 비록 제거하려고 해도 제거하지 못한다.’ 하였다. 당시 물괴(物怪)가 있었는데 중국 장수가 우리 나라의 점치는 사람을 찾아 길흉(吉凶)을 점치려고 하자, 대왕이 이르기를 ‘천하 만물에 있어서 정상이 아닌 것이 괴이(怪異)라고 하니, 괴이는 정상을 잃은 것이다 정상이라는 것은 곧 이치이다. 사람의 하는 일이 그 이치를 잃을 경우 모두 그에 상응하는 것이 있는 것인데, 저 보잘것없는 소경이 무엇을 알겠는가.’ 하였다.

만력 27년 기해019) 에 왜적이 모두 물러갔고 28년 경자에 왕비 박씨가 서거하였다. 만력 30년 임인에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책봉(冊封)하여 계비(繼妃)로 삼았다. 병화(兵禍) 시에 고명과 면복을 모두 잃어버렸는데, 대왕께서 배신(陪臣)을 보내 주청하여 하사를 받았다. 예조가 면복의 크기가 맞지 않는다고 고쳐 입기를 청하자, 대왕이 이르기를 ‘우리 황제께서 주신 것이니 입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찌 감히 고치겠는가. 내가 임진년 서쪽으로 가던 날 궁중(宮中)의 물건을 모두 버렸지만 다만 황제께서 주신 망룡의(蟒龍衣)를 직접 찾아내어 가지고 갔으니, 이는 후일 반드시 이것을 입고 죽으려고 한 것이다.’ 하고, 그때 다시 펼쳐보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만력 32년 갑진020) 에 여러 신하들이 다시 존호(尊號)를 지성대의 격천희운(至誠大義格天熙運)으로 올렸다. 대왕이 환란을 당한 이래 근심하다가 병이 났는데 정미년 여름에 이르러 대왕의 병이 심해져 증세가 더욱 위독하니, 세자가 밤낮으로 모셨으며 목욕 재계하고 향을 피우며 하늘에 빌었다. 혹은 밤새도록 밖에 서있었고 종일 먹지 않으니, 대왕께서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늘 부탁할 만한 사람을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무신년021) 2월 1일 정릉동 행궁의 정침에서 승하하니 수(壽)는 57이었고 재위(在位)한 지 41년이었다.

대왕은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공검하고 인자하며 효성은 하늘이 냈고 영특한 지혜는 남보다 뛰어났다. 조서(詔書)를 맞이하고 표문(表文)을 올리는 의식과 성절(聖節)이나 망궐(望闕)하는 예(禮)에 있어서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정하게 하고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비록 곤함을 당하고 떠돌아다닐 때에도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우리 나라의 물건을 중국에 진상할 때에는 반드시 목욕 재계하고 손수 점검하며 간절히 경계토록 하였다. 혹 물력(物力)이 넉넉하지 않고 성의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사신이 돌아올 때까지 잠시도 잊지 못하였다. 궁중에서 한 가지의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상 위에 올려 놓고 서쪽을 향해 절하면서 ‘우리 황제께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나.’ 하였으니, 황제를 우러러 받드는 성의는 마치 효자가 부모를 사모하듯 할 뿐만이 아니었다. 일찍이 신하들에게 말할 때 첫번째도 황제의 은혜라 하고 두 번째도 황제의 은혜라 하며 일념(一念)으로 대하여 마치 좌우에 있는 것처럼 여겼다. 전쟁이 일어난 후 중국 조정 문무 장관(文武將官)이 전후로 나온 자가 몇 명인지 모른다. 위로는 장수부터 아래로는 군졸까지 정성을 다해 각기 예를 다하였다. 금년 정월 배신(陪臣)이 조서(詔書)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대왕이 병세가 위독하였는데도 오히려 교외(郊外)에서 맞이하지 못한 것을 몹시 가슴 아프게 여겼다. 칙서가 도착하자 이부자리를 밀치고 억지로 일어나 사람을 붙들고 절하였으니,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고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양대비(兩大妃) 섬기기를 친 어머니 섬기듯 하여 마음과 뜻 맞추기를 곡진히 하였으며,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는 예는 10여 년을 하루같이 하였고 만일 병이 있으면 정성을 다하여 쾌를 빌었다. 상(喪)을 당하자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우애가 지극하여 두 형과 한 누이를 공경스레 대우하여 평생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품이 본래 간략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성색(聲色)과 사냥, 안일과 사치 즐기는 것을 한 번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한 끼에 여러 가지 음식을 먹지 않았고 의복은 늘 깨끗한 것을 입으니, 비빈(妃嬪)과 궁인(宮人)도 감히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못하였다. 아껴 쓰고 근본을 힘써 농사를 중히 여겼다. 궁중에서 한 낱의 쌀도 버리지 못하게 하며 ‘이는 모두 한 알, 한 알에 농부의 고생이 담겨 있는 물건이니 편안히 앉아서 먹는 것도 만족스러운 일인데 더구나 감히 함부로 써서 아까운 줄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풍화(風化)를 숭상하고 절의를 중히 여겼으며, 염치(廉恥)를 독려하고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였다. 백성의 목숨을 애석하게 여겨 일찍이 망녕되게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비록 곤충과 같은 미물(微物)이라도 죽이기를 경계하였으며, 매번 옥사(獄事)를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측은히 여겨 살려주는 방도를 구하되 삼가 법을 지키고 크게 잘못한 일이 아니면 부산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간(臺諫)을 예우하여 비록 혹 과격하더라도 늘 너그럽게 용서하였고, 변방의 대책을 꾀하고 적을 헤아리는 데 있어서는 남보다 뛰어났다. 본래 유도(儒道)를 숭상하여 부지런히 공부하고 날마다 유신(儒臣)을 접견하여 경전(經傳)을 강독하였으며, 고금(古今)의 사적을 포괄하여 심오한 경지에 출입하였고, 논한 바는 선유(先儒)의 전주(箋註)보다 훌륭하니 여러 신하가 감히 한 마디도 더하지 못하였다. 방 하나를 깨끗이 소제하고서 좌우에 도서(圖書)를 놓아두고 비록 혼자서 멋대로 할 만한 곳에서도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정신을 가다듬고 단정하게 앉았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제자 백가(諸子百家)와 잡류(雜類)의 글까지도 모두 통달하였다. 또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과거 시험장에서 장자(莊子)·노자(老子)·불가(佛家)의 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말년에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아무리 어수선할 때라도 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책을 볼 때에는 10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가고 한 번만 보면 모두 기억하였으며, 많은 기무(機務)가 수없이 쌓였어도 착오없이 결재하였고 명령을 내리면 문득 교훈이 되였다. 전후(前後) 존호(尊號)를 올릴 때에도 대왕이 모두 굳게 사양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함께 요청하자 한 달이 지난 뒤에야 윤허하였다. 겸양하고도 더욱 겸양하여 자처하지 않았으니 대저 대왕의 천성(天性)이 그러하였다.

아, 대왕의 학문은 사명(辭命)을 억양할 수 있었고 무략[武]은 환란을 진정시킬 수 있었으며 총명은 어진 자와 간사한 자를 분별할 수 있어, 초년(初年)의 청명(淸明)한 정치는 거의 천재 일시(天載一時)였다. 백성들이 지금까지 칭송하여 마지 않는데, 난리를 겪은 뒤 불행하게 병이 걸려 큰 뜻을 끝내 펴지 못하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의 아픔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비록 그러나 사왕(嗣王)이 어질고 성스러워 계술(繼述)하기에 걱정이 없고 원량(元良)이 출중하여 국가의 기반이 견고하다. 장차 종묘에서 흠향하고 자손을 보호하여 억만 년토록 끝없는 경사를 볼 것이니, 대왕이 하늘에 보답을 받은 것이 어떠하다 하겠는가. 이해 6월 12일 정묘에 양주(楊州)의 건원릉022) 서쪽 유좌 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현문 의무 성경 달효(顯文毅武聖敬達孝)이고 능호(陵號)는 목릉(穆陵)이며 전(殿)은 영모전(永慕殿)이고 묘호(廟號)는 선종(宣宗)이다. 백세 전부터 만세 뒤까지 하늘을 그리고 해는 그리더라도 감히 대왕의 일을 방불하게는 못하리라. 공손히 윤음을 받들어 삼가 지문(誌文)을 위와 같이 짓는다. 신하로서 죽지 않았으니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 있겠는가. 만력 36년023) 6월 12일."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가 짓고 행 삭령 군수(行朔寧郡守) 김현성(金玄成)이 쓰다. 】


  • 【태백산사고본】 116책 221권 5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395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誌文:

有明朝鮮國 宣宗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敬達孝大王穆陵誌。 謹稽, 我宣宗大王, 諱, 中宗恭僖大王之孫, 德興大院君 之第三子也。 母鄭氏, 贈領議政世虎之女。 嘉靖壬子十一月十一日, 生王於漢城仁達坊。 王生而質美, 戲嬉不凡。 幼時, 明宗恭憲大王召與二兄, 偕脫御冠, 令以次着, 及王, 跪而辭曰: "君上所御, 臣子何敢掛頭?" 仍問, 君與父孰重? 對曰: "君親雖不同, 忠孝無二致。" 恭憲王大奇之。 及長, 封河城君嘉靖乙丑, 恭憲王不豫, 世子旣卒, 儲貳未定。 首相李浚慶請選於諸姪中, 恭憲王命王入侍。 隆慶元年丁卯, 恭憲王上賓, 首相奉遺敎迎王, 王持母服, 居第涕泣固讓, 迫而後乃行。 時翰林院檢討許國、兵科給事中魏時亮穆宗皇帝登極詔入境, 聞國君新喪無嗣, 甚憂之。 及頒詔之日, 見王儀表端莊, 禮度閑雅, 相與旋目賞歎曰: "東方眞主出矣。" 至是, 王年十六, 遣陪臣, 告訃于朝, 且請承襲。

翌年春, 皇帝遣太監姚臣李慶, 齎詔封爲朝鮮國王, 欽賜誥命、冕服、彩幣。 王嗣服之初, 銳意圖治, 專精學問, 日御講筵, 討論經史, 夜分不寢。 時, 名儒李滉解官歸鄕, 屢召未至。 王致誠盡禮, 敦諭起之, 擢爲貳公。 疏陳治道六條, 又撰《聖學十圖》《西銘考證》, 手寫程頤 《四勿箴》以進, 王虛心嘉納, 命皆繕寫爲屛, 置諸左右, 朝夕觀省。 及亡, 傷悼不已乃曰: "之隻字片言, 皆可傳後。 其令有司, 裒集刊行。" 我國自高麗 鄭夢周, 始倡絶學, 至本朝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 相繼而起, 講明斯道, 發輝經傳。 王以此人等, 大有功於斯道, 特命賜祭, 贈官與謚, 錄其子孫。 且以《近思錄》《心經》《何氏小學》皆有關治道, 本朝所撰《三綱行實》, 可扶植倫紀, 竝命刊印。 且敎該曹曰: "近來師儒之選, 專尙文詞。 至於黌舍游學之士, 皆以習文, 決科爲業。 士習如此, 他日成就, 將何所觀? 擇有學行堪爲師表者, 擢授方面, 使之巡行列邑, 勸課敎誨。" 又敎以薦進遺逸爲新政第一務, 遂馹召徵士曺植成運等, 不次超敍。 嘗於筵中, 論賢邪進退之機曰: "奸黨(牌)〔碑〕立, 而汴京墟; 僞學籍成, 而南宋亡。 雖悔於終, 亦無及矣。" 臺官追論先朝奸臣南袞戕害士林之罪, 請削官爵, 或以事在旣往爲言, 王曰: "罪南袞者, 所以追慕趙光祖之道學, 且以定一時之趨向也," 遂罪之。 論者又曰: "今者朝無權奸, 國無邊警, 此正爲治之日。" 王曰: "此說不然。 孟子當戰國之時, 勸諸侯以行王道。 國家雖戰爭多事, 豈有不能爲治之時哉?"

隆慶三年己巳秋, 納潘城府院君 朴應順之女爲妃。

萬曆元年癸酉, 太學生上闢佛疏, 王以手札答曰: "爾等居首善之地, 宜益動心忍性, 切磋琢磨, 爲他日眞儒, 立於朝端, 上以輔寡君; 下以澤斯民, 使治隆俗美, 則吾道之衰, 異端之盛, 不足慮也。 何必如太武誅沙門、毁佛寺之爲哉?" 時, 王有疾, 久而乃瘳, 禮曹累請陳賀, 王曰: "人之疾, 殆未必不由於失攝。 頃者不意得病, 危而復蘇, 貽憂大臣, 警動群下, 方且祗懼悔罪之不暇, 豈可偃然受賀乎?" 萬曆三年乙亥, 恭憲王妃 沈氏薨, 禮官據《五禮儀》, 卒哭後當用玄冠、烏角帶, 持平閔純以爲: "三年通喪, 無貴賤一也。 宜從朱子之議, 用白帽、布裹角帶。" 廷議不一, 王乃斷然行之, 一遵禮制。 萬曆五年丁丑, 榮靖王妃 朴氏薨, 禮曹以爲: "當從叔姪之服, 服齊衰期年。" 相臣朴淳等以爲: "王於榮靖王妃, 有祖孫之義, 以繼體之重, 當服三年。" 王從其議, 遂定爲三年喪。 先是, 奸臣李芑尹元衡等, 於乙巳年間, 謀殺尹任柳灌等, 至於錄勳, 群情久愈冤憤。 及是, 幷命復官削勳, 中外咸快之。 萬曆十四年丙戌, 聖節陪臣在會同館失火, 王驚駭不已, 嚴鞫使臣以下, 旋遣陪臣, 奉表陳謝, 皇帝以王忠愼可嘉, 降勑優異, 錫賚稠沓。 翌年日本差使臣來款時, 平秀吉簒君自立。 王曰: "日本廢放其主, 乃簒弑之國, 不可接待, 當以大義却之。" 命廷臣會議, 皆以爲: "化外之國, 不可責以禮義。" 王雖黽勉許之, 而其守義之嚴如此。 萬曆十六年戊子, 謝恩使兪泓回自京師, 宗系惡名, 幷皆消雪。 先是, 太祖康獻大王被我國叛賊尹彝李初誣告, 以康獻王稱逆臣李仁任之後。 《皇明祖訓》《大明會典》皆傳襲訛謬。 自太宗恭定大王以至先王, 累世陳奏, 未蒙準改。 及王嗣服, 慨然發嘆曰: "國系受誣二百餘年, 何可一日晏然食息於覆載間乎? 宜極擇使价, 血誠奏籲。" 臨行, 戒使臣曰: "不得準請, 則毋還也。" 其危辭苦語, 有可以感動天地。 至是, 始得快覩昭雪, 王敎群臣曰: "賴諸卿之力, 得有今日, 皇恩罔極。 古之人君, 莫大於中興祖業、匡復舊物, 然此不過外物耳。 豈如使彝倫攸敍, 東韓再造, 雪數百年至痛乎?" 於是, 群臣會議, 上尊號曰正倫立極盛德洪烈萬曆十九年辛卯, 平秀吉玄蘇等, 致書我國, 聲言欲犯上國, 脅以假途, 言辭悖慢, 非臣子所忍聞。 翌年壬辰, 賊乃空國而來, 長驅蹂躙, 勢如破竹。 是其射天之計, 固非一日蓄謀藏兇, 待時而發。 我國累世昇平, 民不知兵, 一朝猝遇狂寇, 剪焉不支, 南中州郡, 覆沒相望。 王分遣將士, 扼守要衝, 下哀痛罪己之 敎, 徵八道勤王之兵, 以示効死勿去之義。 及兩州之兵, 相繼不守, 大賊乘之, 其鋒不可當。 王知大勢已去, 乃謂群臣曰: "此賊謀犯天朝, 實天下之賊也。 我當爲天朝, 死守封疆, 而惟其衆寡之勢, 萬不相敵。 旣不能力抗兇鋒, 遮截賊路, 則無寧歸近父母之邦, 上訴於聖天子, 乞王師以討此賊耳。" 遂定西遷之計。 時, 王妃朴氏無嗣, 儲位空虛。 王召大臣謂曰: "光海君聰明仁孝, 好學不倦, 年旣長成, 可從民望。" 群臣頓首稱賀曰: "宗社臣民之福也。" 翌日, 光海君諱爲王世子。 時, 國事蒼黃, 未及專奏, 先令咨報遼東, 轉奏朝廷。 未幾, 賊報益急, 王乃出城西行, 世子從王而行。 及平壤失守, 王進駐義州, 世子乃冒觸危險, 所過傳檄, 召募奔竄之民, 皆思奮義戮賊。 王乃遣陪臣鄭崐壽等, 申奏賊情, 皇帝遣行人薛藩諭曰: "恢復先世土宇, 是謂大孝; 急救君父患難, 是謂至忠。 該國君臣, 必能仰體朕心, 光復舊物, 俾國王奏凱還都, 仍保宗社, 長守藩屛, 庶慰朕意。" 王在義州, 迎于江上, 失聲慟哭, 哀動左右, 群臣皆哭。 冬, 皇帝遣提督李如松, 領兵四萬出來, 王涕泣而言曰: "蒙皇上罔極之恩, 得見大人, 小邦一縷之命, 惟托於大人。" 提督見王忠懇, 爲之動色。

萬曆二十一年癸巳春, 提督協率軍兵, 大破平壤之賊。 王曰: "今日急務, 只在天兵糧餉, 予欲以匹馬, 策應天兵之後, 而續來天將, 亦當留待。 其令世子, 前進安州, 一以策應; 一以督運, 舊都黎庶陷賊而死者, 竝皆收瘞立標。" 仍令傳諭各邑, 供膳毋過三四器。 夏, 聞官軍收復京都, 群臣請賀, 王曰: "可慰, 不可賀也。 但當率臣民, 行望闕禮, 以謝皇恩而已。" 時, 京外飢荒。 王見內人灸食牛肉曰: "非牛不能耕, 人而殺牛, 不仁甚矣。 目今蕩敗之餘, 雖嚴禁, 猶懼不足以(孽息)〔孶息〕 , 況任其屠殺乎?" 嘗於行中, 失御弓。 有司捕拾遺者欲法之, 王曰: "旣已失之, 必有得之者," 卽命放之, 聞者咸悅。 提督聞王筆法精妙, 求之甚懇, 王辭以疾不許, 蓋其微意, 不欲以小技誇示於人也。 秋, 王還京師, 命減內廚日供之米, 分賑飢饉, 收集遺骸, 設壇致祭。 下書八道, 減貢稅、廢供獻, 忠臣、孝子、烈女, 訪問褒錄。 仍敎禮曹曰: "喪亂之後, 都民之死者何限, 意其遺民過半縞素。 及入城之日, 都民塡塞, 而未有服喪者。 此必亂後, 倫紀墜廢而然。 令五部糾檢。" 是年夏, 王遣陪臣, 奏謝快復京城。 皇帝遣行人司憲諭曰: "王以大兵, 驅出境, 表進方物, 朕甚嘉悅。" 仍賜蟒衣、綵段。 王還都之後, 首命收聚書籍, 藏于芸閣, 且欲親祭文廟, 禮官以爲: "聖殿燒盡, 行祭無所。" 王曰: "予見則異於是。 夫神之在天下, 如水之在地中, 無所往而不在。 鬼神無常享, 唯其致誠, 則神在是矣。 故古人或設壇而祭, 豈必待木主哉? 予意築壇於學宮之(則)〔側〕, 設位以祭, 一以慰先聖之靈; 一以重倫紀於干戈之中也。" 王敎大臣曰: "我國人材眇然, 其所用者, 只在科擧。 四方之廣, 豈無懷材異行之士, 空老林下? 古人曰: ‘大臣以人事君。’ 昔, 晏嬰薦其僕臣; 謝安擧其兄子。 苟其人也, 不以微賤而嫌; 不以親戚而廢, 其各薦之。" 時, 王寓貞陵洞行宮, 一日謂近臣曰: "舊宮城裏, 略構草家, 欲爲移寓。 昔衛君茇舍于, 此誠何時, 欲居大廈乎?" 天將有以營建宮室爲言, 王曰: "深讎未復, 何以家爲?" 時, 南邊專意舟師, 王敎帥臣曰: "我方致力於舟艦, 集師於釜山, 至於陸地之據險、他路之要衝, 皆不暇及, 此蓋有見乎前日水戰之捷也。 但兵無常勢, 變出意外, 豈可引前事而爲例乎? 賊若諜知我師之屯聚於釜山, 自五島因風掛帆, 一瞬千里, 直向湖南, 繞出我師之後, 則是我師爲賊所襲。 自湖南、湖西, 以至海西、關西, 一帶沿海, 無處不到, 誰得而禦之? 徒聚舟師於釜山, 不置重兵於湖南, 不守陸地之險, 非計之得也。" 嘗語講官曰: "存心有要。 日用之間, 千緖萬端, 交接於前, 廓然大公, 順而應之, 不以外物之來, 動于中然後, 欲靜而靜, 欲動而動矣。 不然, 邪思妄慮, 有如雲興, 則雖欲消遣, 而不可得矣。" 時有物怪, 天將欲得我國卜者, 以占吉凶, 王曰: "天之賦物, 不得其常, 是謂之怪。 怪者, 失其常也。 常者, 理而已矣。 人事之失其理者, 皆足以應之。 彼幺麽瞽者, 安能知之?" 萬曆二十七年己亥, 倭賊盡退。 二十八年庚子, 王妃朴氏薨。 萬曆三十年壬寅, 冊延興府院君 金悌男之女爲繼妃。 兵禍之時, 誥命、冕服皆已淪失, 王遣陪臣, 奏請蒙賜。 禮曹以冕服長短不稱, 請改造, 王曰: "吾皇之賜, 服之無斁, 何敢改也? 予於壬辰西遷之日, 悉棄宮中之物, 唯皇上所賜蟒龍衣, 手索提出, 擬於他日必着此以終也。" 時復披見, 不覺淚下。 萬曆三十二年甲辰, 群臣復上尊號曰至誠大義格天熙運。 王自禍亂以來, 憂勞成疾, 至于丁未夏, 王疾彌留, 證益危苦。 世子晝夜侍寢, 沐浴齋心, 焚香祝天, 或達夜露立, 終日不食。 王嘉其誠孝, 每以付托得人爲喜。 乃於戊申二月初一日, 薨於貞陵洞行宮之正寢, 壽五十七, 在位四十一年。 王剛毅果斷, 恭儉慈仁, 誠孝出天, 英智過人。 迎詔拜表之儀、聖節望闕之禮, 率皆虔心精白, 肅敬將事。 雖在顚沛流離之際, 未嘗少懈, 每封進方物, 必盥濯齋潔, 手自點視, 丁寧戒飭。 或物力未敷, 情意小歉, 則比使臣之回, 一刻不能忘。 宮中得一珍味, 則必置之案上, 西望拜祝曰: "欲獻吾皇, 何可得也?" 瞻戴之誠, 不啻如孝子之慕父母。 嘗語臣隣, 一則曰皇恩, 二則曰皇恩, 一念對越, 如在左右。 兵興之後, 天朝文、武將官, 前後出來者, 蓋不知其幾。 上自元戎, 下至軍丁, 無不殫誠致款, 各盡其禮。

今年正月, 陪臣之齎詔而回也, 王疾已劇, 猶以不得郊迎爲痛。 及勑書至, 推枕强起, 扶人拜跪, 出於至情, 非强爲也。 事兩大妃, 如事親母, 承顔養志, 靡不曲盡, 朝夕問安之禮, 十餘年如一日, 如有疾則竭誠祈禱。 及其喪也, 哀毁過傷, 友愛天至, 敬待二兄、一姊, 終身不少替。 性素簡約, 不喜紛華, 聲色、游畋之娛, 逸豫、侈靡之樂, 無一掛心。 食不重味, 衣常澣濯, 妃嬪、宮人, 亦不敢服侈。 節用惜費, 務本重農, 宮中粒食, 不令遺地曰: "此皆農夫粒粒辛苦之物, 安坐而食, 已足矣, 況敢暴殄乎?" 尙風化, 而重節義; 勵廉恥, 而愼賞罰。 愛惜民命, 未嘗妄殺一人, 雖昆蟲微物, 亦戒其殺傷。 每當決獄, 必哀矜惻怛以求生道, 謹守成憲, 非大謬則不喜紛更。 禮遇臺諫, 雖或過激, 常示優容, 至於籌邊, 料敵出人意表。 雅尙儒術, 孜孜不倦, 日接儒臣, 講讀經傳, 揚(確)〔搉〕古今, 出入淵微, 所論高出, 先儒箋註之外, 群臣莫敢贊一辭。 淨掃一室, 左右圖書, 雖於幽獨得肆之地, 不示惰慢之容, 凝神端坐, 手不釋卷, 以至諸子百家雜類之書, 無不貫穿融洽。 斥絶異端, 科場試士, 禁用語。 晩而好《易》, 雖在搶攘, 誦讀不輟。 觀書十行俱下, 一覽皆記, 萬機叢冗, 裁決不爽, 發號施敎, 輒成典訓。 至於前後上號, 王皆固執牢讓, 群下同請, 浹月乃允。 謙而益謙, 不遑自居, 蓋王之天性而然也。 嗚呼! 王文足以抑揚辭命; 武足以戡定禍亂; 明足以察賢辨邪, 而初年淸明之理, 庶幾千載一時。 民到于今, 稱頌不衰, 而經亂以來, 不幸遘厲, 使大有爲之志, 終不得展, 一國臣民之痛, 寧有旣乎? 雖然, 嗣王仁聖, 繼述無憂, 元良岐(薿)〔嶷〕, 國圖鞏固。 將見宗廟饗之, 子孫保之, 爲億萬年無疆之休, 王之受報於天, 爲如何? 是年六月十二日丁卯, 葬于楊州 健元陵西阜西坐卯向之原, 謚曰顯文毅武聖敬達孝, 陵曰, 殿曰永慕, 廟號曰宣宗。 百世在後, 萬世在前, 摹天畫日, 非敢以爲髣髴, 而祗奉綸音, 謹撰幽誌如右。 臣而未死, 其何以爲心哉? 萬曆三十六年六月十二日。 【鵝城府院君 李山海製, 行朔寧郡守金玄成寫。】


  • 【태백산사고본】 116책 221권 5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39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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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