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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211권, 선조 40년 5월 4일 병인 2번째기사 1607년 명 만력(萬曆) 35년

이교 엄금, 정업원·안일원의 거주자 철거, 허균과 곽재우 탄핵 등에 관한 헌부의 상소문

헌부가 아뢰기를,

"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정학(正學)을 장려하고 이교(異敎)를 배척하기를 지극하게 하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설(邪說)이 영원히 끊어지고 좌도(左道)가 있다는 말이 들리지 않았으니, 승니(僧尼)가 없어져 이색(異色)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난리 이후에 전쟁에 관한 일이 많아 미처 문교(文敎)를 펴지 못한 채 구로(舊老)가 다 죽어 후생들이 흥기(興起)되지 않으므로, 유식한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입니다. 10여 년 전부터 인심이 흐려지고 사설(邪說)이 횡행해도 금하여 검칙하지 못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어 남자는 거사(居士)가 되고 여자는 사당(社堂)이라 칭하며 본분의 일을 일삼지 않고 승복을 걸치고 걸식하며 서로를 유인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현에서 금단하지 않으므로 평민의 절반이 떠돌아다녀 도로에 줄을 잇고 산골짜기에 가득 차며 혹 자기들끼리 모이면 천백(千百)의 무리를 이루니 보기에 놀랍습니다.

경성(京城)에 있어서는 엄한 법이 있는데도 출입하며 유숙(留宿)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뿐만 아니라 여염 사이에도 상하가 모두 휩쓸려 중을 접대하고 부처를 공양하며, 사신(捨身)하여 재(齎)를 설시하는 자가 역시 많고, 사대부 중에도 마음을 기울여 부처를 받들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자가 있으니, 이런 풍속을 가지고 세도를 어떻게 구하겠습니까. 백련교도(白蓮敎徒) 난과 같은 변이 혹 뜻밖에 일어 백성들의 이목을 가리고 천하를 혼탁한 지경으로 빠뜨릴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중외(中外)로 하여금 거사와 사당이라 일컫는 남녀로서 떠돌아다니면서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은 자는 소재(所在) 주현에서 잡아가두고 추궁하여 더욱 심한 자를 조사해 낸 다음, 여자가 있고 가업(家業)이 실한 자는 뽑아서 북도(北道)로 들여보내 변방을 채우고, 의탁할 사람이 없는 자로 나이가 젊어 부릴 만한 자는 관노비(官奴婢)로 정속(定屬)시키고, 요언으로 군중을 현혹시키거나 유혹하기를 창도하여 민간에 화를 끼치는 자는 취복(取服)해 계문(啓聞)하여 국법을 시행할 것을 해조로 하여금 경중(京中) 및 개성부(開城府)와 팔도에 알려 특별히 신칙하여 착실히 거행하게 하소서.

정업원(淨業院)·안일원(安逸院) 등의 옛터는 바로 전일 선왕(先王)의 후궁이 거주하던 별처(別處)로 궁궐에서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승(女僧)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많이 들어가 집을 짓고 감히 전철을 따르고 있는데도 관에서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도성 안의 무식한 자들이 분주하게 떠받들고 혹 딸들을 다투어 투속시키고 있습니다. 전일에는 조정에 공론이 있어 선왕의 후궁이 거주할 때에도 철거하기를 청하였는데 지금 보잘것 없는 저 무리들이 어찌 감히 국법(國法)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돌하게 다시 설치한단 말입니까. 청컨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집을 모조리 철거하여 성문 밖으로 내쳐 성안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게 하소서.

삼척 부사(三陟府使) 허균(許筠)은 유가(儒家)의 아들로 그 부형이 종사하던 것과는 반대로 불교를 숭신(崇信)하여 불경을 외며 평소에도 치의(緇衣)를 입고 부처에게 절을 하였고, 수령이 되었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재(齎)를 열어 반승(飯僧)023)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으며, 심지어 중국 사신이 나왔을 때에는 방자하게 선담(禪談) 불어(佛語)를 하며 부처를 좋아하는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중국 사신의 눈을 현혹시켰으니, 매우 해괴하고 놀랍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아 사습(士習)을 바로 잡으소서.

전 우윤(右尹) 곽재우(郭再祐)는 행실이 괴이하여 벽곡(辟穀)을 하고 밥을 먹지 않으면서 도인(導引)·토납(吐納)의 방술(方術)을 창도하고 있습니다. 성명(聖明)의 세상에 어찌 감히 오활하고 괴이한 일을 자행하여 명교(名敎)의 죄인이 되는 것을 달게 여긴단 말입니까.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아 인심을 바로잡으소서. 선비들 가운데 무뢰한 무리들이 혹 이 사람의 일을 포양(褒揚)하여 본받는 자가 또한 많으니,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적발해 정거(停擧)하게 하여 사도(邪道)를 억제하는 법을 보이소서.

초관(哨官) 이명신(李明)은 초군(哨軍)을 부려 자신의 집을 지었으므로 군사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매우 외람되니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승전을 받드는 일은 윤허한다. 안일원정업원의 일은 비록 옛터에다 초가집을 지어 거처하는 장소로 삼고 있지만 대체(大體)에 관계된 바가 아니니, 치지 도외(置之度外)하면 그만이다. 허물고 내쫓기까지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 허균의 일은 그 허실을 알 수 없으나 예로부터 문장을 좋아하는 자는 혹 불경을 섭렵하였으니, 의 심사도 그러한 것에 불과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혹시 말이 전해지면서 부연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곽재우가 벽곡하고 밥을 먹지 않은 것 역시 그대로 두어야지 어찌 죄를 주겠는가. 이명신의 일은 윤허한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예로부터 괴벽스런 무리는 모두 충성스럽고 강개한 선비가 아니었고, 충성스럽고 강개한 선비는 괴벽스런 행실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마치 빙탄(氷炭)처럼 상반되고 흑백(黑白)처럼 구별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때를 만나지 못하여 소행 역시 정상적이지 못한 경우가 있으나 이것이 어찌 그의 본심이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굴원(屈原)이 원유(遠遊)한 것을 임금을 잊고 멀리 간 것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며 장 자방(張子房)이 벽곡(辟穀)한 것을 색은 행괴(索隱行怪)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아, 깊은 근심이 있는 자는 반드시 강개하게 되고, 강개하여 마지않으면 슬픈 노래를 부르게 되고, 슬픈 노래를 불러 마지않으면 통곡하기에 이른다. 슬피 노래하고 통곡해 보아도 어쩔 수가 없으면 혹 술에 취해 깨어나지 않고자 하기도 하며, 미쳐서 스스로 어리석게 되고자 하기도 하고, 신선이 되어 세상과 인연을 끊고자 하기도 한다. 이것이 비록 중정(中正)의 도는 아니지만 군자 역시 그의 뜻을 슬피 여겨 그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곽재우의 뜻은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깊이 걱정하여 강개한 것이 아니겠는가.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으나 그 공을 사양하고 이름이 드러났으나 은둔으로 처신하였으니, 오탄(汚誕)하다는 배척과 파직하라는 청은 사실 그가 원했던 바였으리라. 그러나 거기다가 행동이 괴이하여 사람들의 의혹을 일으켰다는 죄명을 가하기까지 하였으니, 너무 잘못이 아니겠는가. 만약 성상의 포용하는 도량으로 치지 도외하지 않았다면 서용하지 않는 정도로만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 옛날의 벽곡은 몸을 보호하려 함이었는데 지금의 벽곡은 화만 끼치게 되니, 역시 세도(世道)가 더욱 야박해졌음을 볼 수 있다.


  • 【태백산사고본】 114책 21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331면
  •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사상-유학(儒學)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軍事) / 역사-사학(史學)

  • [註 023]
    반승(飯僧) : 중에게 밥을 먹이는 일.

○憲府啓曰: "自上臨御以來, 崇奬正學; 斥黜異敎, 無所不用其極。 故, 邪說永殄, 左道無聞, 僧尼消絶, 異色之人不復見矣。 亂離之後, 兵革事多, 未遑文敎, 舊老已盡, 後生不興, 有識之寒心久矣。 十許年來, 人心貿貿, 邪說肆行, 無復禁檢, 愚民迷惑, 男爲居士; 女稱社堂, 不事其事, 緇服乞食, 互相誘引, 其徒寔繁。 州縣不知禁止, 平民半爲遊蕩, 道路相望, 山谷彌滿, 或自聚會, 則千百爲群, 所見駭愕。 至於京城, 法有嚴條, 而非但出入留宿者, 其麗不億, 閭閻之間, 上下靡然, 飯僧供佛, 捨身設齋者, 亦多有之, 而士大夫亦或傾心奉佛, 不知怪恥, 將此風流, 世道何救? 竊恐白蓮之變, 或出於意外, 而塗生民之耳目, 溺天下於汚濁者, 不幸近之矣。 請令中外, 居士、社堂稱名男女, 流徙轉移, 不奠厥居者, 所在州縣, 囚禁推詰, 覈出尤甚, 有女子家業稍實者, 則抄入北道, 以實邊, 鄙無依之人, 年少可使者, 則定屬官奴婢施行, 或至妖言惑衆, 倡爲誑誘, 貽禍民間者, 則取服啓聞, 以正邦刑, 令該曹知委京中及開城府、八道, 另爲申飭, 着實擧行。 淨業院安逸院等舊基, 乃前日先王後宮所住別處, 而宮闕至近之地。 今者女尼稱見者, 多入作屋, 敢循前轍, 而官不爲怪, 都中無識, 奔波供奉, 或率女子, 爭相投屬。 前者朝廷有公論, 則先王後宮居住之時, 亦請撤去, 今則幺麽彼輩, 何敢不畏國法, 唐突還設乎? 請令漢城府, 盡撤房屋, 驅出門外, 使不得接足於城中。 三陟府使許筠, 以儒家之子, 反其父兄所爲, 崇信佛敎, 誦讀佛經, 平居緇衣拜佛, 爲守令時, 設齋飯僧, 衆目所見, 恬不知恥。 至於天使時, 恣爲禪談佛語, 張皇好佛之事, 以眩觀風之鑑, 極爲駭愕。 請命罷職不敍, 以正士習。 前右尹郭再祐, 行己詭異, 辟穀不食, 倡爲導引、吐納之術。 聖明之世, 安敢恣行迂怪之事, 甘爲名敎中罪人乎? 請命罷職不敍, 以正人心。 士子中無賴之徒, 或有褒揚此人之事, 而慕效之者亦多。 請令四館, 擲發停擧, 以示抑邪之典。 哨官李明 , 役哨軍, 造成其家, 軍士呼怨, 極爲泛濫。 請命罷職。" 答曰: "捧承傳事, 允。 二院事, 雖自作草搆於舊基, 以爲栖身之所, 非所關大體, 置之度外而已, 至於毁撤驅出, 則似未平穩。 許筠事, 雖未知其虛的, 自古喜文章者, 或涉獵佛經, 之心事, 想亦不過如此。 而意者, 傳之或致敷衍歟? 郭再祐辟穀不食, 亦宜置之, 何可加之以罪? 李明 事, 允。"

【史臣論曰: "自古詭異迂怪之流, 皆非忠志慷慨之士, 而忠志慷慨之士, 則不爲詭異迂怪之行, 正如氷炭之相反; 白黑之易辨。 如或所遇不常, 而其所行, 亦不得其常者, 夫豈其心之所存乎? 不然則屈子之遠遊, 謂之忘君而長往可乎; 子房之辟穀, 謂之索隱而行怪可乎? 嗚呼! 人之有深憂者, 必至慷慨; 慷慨不已, 必至悲歌; 悲歌不已, 必至痛哭。 悲歌、痛哭之亦無柰何則於是, 或有欲醉而無醒者; 欲瞽而無見者; 欲狂而自愚者; 欲仙而絶世者。 雖非中正之道, 而君子亦或悲其志, 而恕其罪也。 再祐之志, 則不可知, 其亦深憂, 而慷慨者歟? 首義而不居其功; 名顯而自處以晦, 迂誕之斥; 罷職之請, 固其所願。 而至加以行己詭異, 起人疑惑, 則不亦謬乎? 若非聖量包容, 置之度外, 則其亦不止於不敍而已。 噫! 古之辟穀, 將以保身; 今之辟穀, 祗以禍身, 亦可見世道之益薄也。"】


  • 【태백산사고본】 114책 21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331면
  •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사상-유학(儒學)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軍事)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