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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209권, 선조 40년 3월 23일 병술 2번째기사 1607년 명 만력(萬曆) 35년

북병사 이시언의 북방의 급보에도 군사들이 요동하지 않고 있음을 치계하다

북병사 이시언(李時言)이 치계하였다.

"무이 만호(撫夷萬戶) 조덕수(趙德秀)의 치보 가운데 ‘여오리(汝吾里)에 살고 있는 호인 남녀 30여 명이 적에게 잡혀갔기에 적호(賊胡)의 행방을 정탐해 보니 이쪽 큰 길을 따라 아산(阿山)으로 갔다.’ 하였고, 아산 만호 신제업(申悌業)의 치보 가운데 ‘현성(縣城)에 주둔한 적 수백 명이 성 밑에 와서 번호(藩胡)를 내놓으라고 갖은 공갈 협박을 하다가 오시에 현성으로 되돌아갔다.’ 하였습니다. 5거(炬)로 목멱산(木覓山)에 전하도록 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적의 세력이 치성하여 곳곳에서 급보를 알려오고 있으나, 그래도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여러 진들이 조금이나마 완비되고 성과 무기가 견고하다는 점을 믿고 있습니다. 요즘에 와서는 토병과 포수들의 훈련도 제 모양을 갖춰가고 있으나, 방어하기 위해 증강된 숫자가 적은 점이 안타깝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북방의 병사와 백성들은 담비 가죽과 베[布]를 얼마나 내느냐에 따라 곧 생활 상태가 결정되는데, 남김없이 긁어가는 바람에 뿔뿔이 도망하는 숫자가 날로 늘어가고만 있다. 그런데도 장수들의 탐학은 끝이 없는데 시언은 그 중에서도 더욱 심한 자이다. 만일 큰 적을 만나게 되면 병사와 백성들이 반드시 흘겨보면서 구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같이 지켜줄 백성이 없고 함께 싸워줄 병사가 없음이겠는가. 이번에 노적(老賊)이 온 것은 현성 때문일 뿐이고 우리 변경에는 뜻이 없었는데, 여러 진들이 조금 완비되었다느니 훈련이 이제 모양을 갖췄다느니 하여 마치 군사를 정돈하여 적과 맞서 싸울 듯이 하였다. 이는 자신의 허물을 숨기려고 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장차 자신의 공을 내세우려 한 것이니, 하늘을 속일 수 있겠는가. 논죄할 가치조차 없다.


  • 【태백산사고본】 113책 209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317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통신(通信)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北兵使李時言馳啓曰: "撫夷萬戶趙德秀馳報內: ‘汝吾里住胡男女三十餘名, 被賊擄去, 賊胡去留偵探, 則由此邊大路, 向阿山。’ 云。 阿山萬戶申悌業馳報內: ‘縣城屯賊數百名, 來到城底, 藩胡出給之說, 百般恐嚇, 午時還向縣城。’ 五炬於驗傳準之事, 以此發送。 賊勢熾張, 處處告急, 軍心所恃者, 列鎭粗完、城機堅固。 及近日, 土兵、砲手, 操練成形, 而添防數少, 以此爲悶矣。"

    【史臣曰: "北方兵民, 視貂布多少, 而便爲其身勞逸, 剝割之下, 逃散日倍。 將官之貪虐, 無有限極, 而時言其尤甚者也。 若遇大敵, 兵民必疾視而不救, 況無民與守; 無兵與戰者乎? 今日賊之來, 爲縣城而已, 無意於我邊則曰列鎭稍完; 曰操練成形, 有若嚴兵求敵者然, 不徒掩己之過, 將以求己之功, 天可欺乎? 不足誅也。"】


    • 【태백산사고본】 113책 209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317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통신(通信)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