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와 별시의 시행에 대한 대신들의 견해를 아뢰니 계사대로 하라고 전교하다
우승지 이선복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본조의 계사에, 정미년에 실시할 중시(重試)와 별시(別試)의 길일(吉日)을 가려 점련한 계목(啓目)에 대하여 전교하시기를 ‘중시 뒤에 별시를 보인다 하니 무슨 일로 별시를 보인다는 것인가? 예조에 묻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중시와 별시를 당초 설치한 본의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본조(本朝)의 《등과록(登科錄)》에는 「중시를 보여 뽑을 때에는 으레 별시를 아울러 거행하여 동시에 방방(放榜)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지난 해에 이미 마련한 공사(公事)대로 택일(擇日)하여 입계한 것이다.’ 하니, 전교하시기를 ‘중국에는 별시가 일찍이 있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기습(氣習)이 경박스러워 해마다 별시를 보이는데 어떤 해는 두 차례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학자들이 독서에는 힘을 쓰지 않고 우리 나라 문인(文人)들의 글을 표절하기에만 힘을 기울여서 문장을 꾸며가지고서는 요행으로 등제(登第)할 계책을 삼고 있다. 선비를 길러 등용하는 도리가 이러하지 않을 듯하여 늘 미편하게 여겨온 지 오래였다. 근년에 이르러 과거를 자주 실시했을 뿐더러 금년에 이르러서도 두 번이나 보였고 또 앞으로 중시와 별시를 보인다고 하니 크게 사리에 어긋나는 짓이다. 이번 중시와 별시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행 판중추부사 윤승훈(尹承勳), 행 판중추부사 기자헌(奇自獻)은 ‘상교(上敎)가 윤당(允當)하여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다.’ 하고, 영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은 ‘《대전(大典)》의 규정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유생에게 대거(對擧)118) 를 아울러 보이는 것은 반드시 한 때의 은명(恩命)에서 나왔던 것이 그대로 성례(成例)가 되어서일 것이다. 지금 받든 상교는 지극히 윤당하다.’ 하고, 영의정 유영경은 ‘상교가 지당하다. 선왕조(先王朝)에서는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보였으면 중시만을 보이는 것이 규례였다.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상께서 재결하실 뿐이다.’ 하고, 지중추부사 심희수는 ‘중시를 보일 때마다 별시를 겸하여 보이는 것은 당초 어디에 근거하여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국조등과록》을 고증해 보면 중시만을 보이고 대거 별시(對擧別試)를 보이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로 본다면 반드시 일시의 은명에서 나온 것으로서 우연히 대거가 되어 마침내 전례(前例)로 된 것이다. 중시는 병년(丙年)119) 을 식년(式年)으로 삼으나 사고가 있으면 정년(丁年)으로 물린 것이 이번까지 두 번이었다. 때에 따라 변통하는 것이 사체(事體)에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하필 분명치도 않은 옛 규례를 고집하여 여러 차례 선비를 선발한 끝에 또 다시 과거를 시행해야겠는가. 상교가 지극히 윤당하다. 오직 상께서 재결하실 뿐이다.’ 하고, 좌의정 허욱(許頊)은 ‘중시를 보인 첫 해에 대거로 선비를 뽑는 것이 조정의 옛 규례라지만, 단지 중시만을 보인 때도 있었다면, 지금 이미 시행했던 규례라고 하여 다시 크게 선비를 뽑은 끝에 과거를 보이는 것은 옳지 않다. 상께서 재결하실 뿐이다.’ 하고,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은 ‘매번 중시를 보일 때에 반드시 별거(別擧)를 겸해 보이는 것이 어디에 근거하여 규례로 정해졌는지는 모르겠다. 더구나 선왕조에서도 단지 중시만을 보이고 취사(取士)하지 않은 때도 있는 데이겠는가. 상교대로 정미년 중시에 별시를 겸해 보이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다. 상께서 재결하실 뿐이다.’라고 하였는 바, 대신들의 뜻은 이와 같았습니다. 등과기(登科記)를 자세히 상고해 보건대 중시를 보인 각 해에는 모두 별거를 겸해 보였으나, 단지 중묘조(中廟朝) 정묘년과 명묘조(明廟朝) 병오년의 해만은 중시만 보이고 별거가 없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계사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2책 20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293면
- 【분류】인사(人事) / 정론-정론(政論)
○右承旨李善復以禮曹言啓曰: "曹啓辭以丁未重試、別試吉日, 推擇粘連啓目, 傳曰: ‘重試後別試云, 爲何事而別試乎? 問于禮曹。’ 事, 傳敎矣。 ‘重試、別試, 當初設立本意, 則未知如何, 而本朝《登科錄》中 「重試試取時, 例爲兼擧別試, 同時放榜。」 故依上年已磨鍊公事, 擇日入啓矣。’ 傳曰: ‘中國未嘗有別試也。 我國氣習輕浮, 年年別試, 或一年而再焉。 因是而學者, 不務讀書, 惟剽竊東人語, (雕縷)〔雕鏤〕 組織, 以爲倖中之計。 養士待價之道, 似不如此, 常以爲未便者久矣。 近年以來, 科擧頻數, 至今年而再擧, 又將有所謂重試、別試者, 殊乖事理。 此重試、別試, 雖勿爲可也。 議大臣。’ 事, 傳敎矣。 鵝城府院君 李山海、完平府院君 李元翼、鰲城府院君 李恒福、行判中樞府事尹承勳、行判中樞府事奇自獻以爲: ‘上敎允當, 無容更議。’ 領中樞府事李德馨以爲: ‘一從《大典》施行爲當。 其竝試儒生對擧者, 必出於一時恩命, 而仍爲成例也。 今承上敎, 至爲允當。’ 領議政柳永慶以爲: ‘上敎至當。 先王朝或有旣設增廣別試, 則只爲重試規例, 依此施行爲當。 伏惟上裁。’ 行知中樞府事沈喜壽以爲: ‘每於重試時, 兼擧別試者, 當初未知何所據而創設也。 考諸國朝《登科錄》, 或有獨設重試, 而不爲對擧別試之時。 以此觀之, 則必出於一時恩命, 偶然對擧, 而遂以爲例。 重試以丙年爲式年, 而因有事, 故退行於丁年者, 今且再矣。 隨時變通, 事體當然。 今何必膠守未瑩之舊例, 煩復設科於許多取士之餘乎? 上敎至爲允當。 伏惟上裁。’ 左議政許頊以爲: ‘重試當初之年, 對擧取士, 雖是祖宗朝舊規, 而或有只爲重試之時, 則今不可援以已行之例, 復設科擧於大擧取士之後。 伏惟上裁。’ 右議政韓應寅以爲: ‘每當重試之時, 必兼爲別擧, 未知何所據, 而仍成規例也。 況先王朝亦有只爲重試, 而不爲取士之時。 依上敎, 丁未重試勿爲兼擧別試爲當。 伏惟上裁。’ 大臣之意如此。 詳考《登科記》則各年重試時, 皆兼有別擧, 而只中廟朝丁卯年、明廟朝丙午年, 兩年有重試, 而無別擧矣。 何以爲之? 敢稟。" 傳曰: "依啓辭爲之。"
- 【태백산사고본】 112책 20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293면
- 【분류】인사(人事)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