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부가 왜와의 통호에 앞서 부국강병을 위한 내치와 왕도 실현을 상차하다
헌부가 상차하기를,
"신들이 비변사의 문서를 가져다 보니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스스로 말하기를 「임진년의 변란 때에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바다를 건너가지 않았다. 」라고 했고 또 스스로 풍신수길이 한 짓을 죄다 돌이켰다 한다.’ 하였습니다. 대저 오랑캐는 곧 짐승이니, 우리의 좋은 소문에 귀순하여 마음을 고치고 와서 조회한다면, 성인의 포용하는 도량으로 어찌 속인다고 예측하여 청하는 것을 물리치겠습니까. 사람을 보내어 회답하고 아울러 정탐하는 것도 형세를 살펴 변화에 대처하는 한 가지 방도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에게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원수이니, 대판성(大阪城)을 무찌르고 수길의 뼈를 불사르지 않으면 원수를 갚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강이 갈음하여 관백(關白)이 된 다음 국명(國命)을 잡고 있으므로 지금의 사세는 수길 때와 다릅니다마는, 적의 정상이 매우 비밀스럽고 변사(變詐)가 백출(百出)하는데 수뢰(秀賴)가 무사하여 평씨(平氏)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니, 우리의 원수는 오히려 갚지 못하였습니다.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헤아려도 결코 통호(通好)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중국 조정이 끝까지 구제하여 준 것은 성상의 지극한 정성과 큰 의리가 사무쳤기 때문인데, 이제는 불행하게도 이런 구차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어떻게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지사(志士)가 팔을 걷어붙이고 분하게 여기며 길게 탄식하고 동쪽을 바라보며 눈을 흘겨 노하는 까닭입니다.
조정에서도 어찌 대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까마는, 당초에 이미 엄한 말로 거절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이제까지 여러 해 동안 미루어 왔으므로 이를테면 썩은 생선의 배를 가르면 손을 더럽히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이 계책이 마지 못하는 데에서 나온 줄 압니다마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능침(陵寢)의 화(禍)로 말하면 차마 말할 수 없이 참혹하므로 도적을 잡아 형벌을 바루어야 신인(神人)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종사(宗社)를 손상하고 화가 산릉(山陵)에까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괴수의 죄인데, 이제 한두 도둑만을 얻고도 마치 큰 우두머리를 얻은 듯이 하니,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또 우리 기세가 저들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만하지 못한데 문득 우리 말을 따라 묶어 보내니, 묶어 보내는 뜻이 어찌 그저 그럴 뿐이겠습니까. 묶어 보낸 것을 정성을 바친 공으로 삼고 또 묶어 보낸 것을 보답을 요구하는 여지로 삼는다면, 장차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사신을 보낸 뒤 혹 사기(事機)가 바뀌거나 중국에 입공(入貢)하겠다고 요구하거나 해마다 조회하는 왜인을 보내겠다고 요청한다면, 응변(應變)할 방책과 선후(善後)할 계획을 일찍부터 생각하여 살펴서 정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 가강의 교활함은 수길보다 못하지 아니하며, 우리가 글을 보낸 적이 없는데 그는 답서라 칭하고, 우리가 말한 것은 능침을 범한 도둑이었는데, 그는 한 가지 일로 범연히 대답하였습니다. 오랑캐의 말에 대하여 예를 갖추기를 일체 요구할 수는 없으나, 그 뜻이 또한 지극히 망측하니, 앞으로 있을 일이 이보다 심할지 또한 어찌 알겠습니까. 가강이 덕과 의리를 사모하는 뜻에서 나왔을 뿐이라면 괜찮겠으나, 가강이 우리를 시험하려고 이런 짓을 한다면 오늘의 가강은 곧 내일의 수길이 될 것이니, 어찌 크게 걱정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늘이 복을 주려 한다면 이런 일이 없겠는데, 신들의 지나친 염려에 절로 한심합니다.
아아, 믿을 수 없는 것은 오랑캐이고 의지할 수 없는 것은 화호(和好)이니, 적을 막는 방도는 스스로 강해지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킬 수 있고서야 싸움을 말할 수 있고 싸울 수 있고서야 화호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위성(威聲)이 성대하고 국세(國勢)가 스스로 튼튼하다면, 우리가 화호하려 하지 않아도 저들이 스스로 화호하고 우리가 교통하려 하지 않아도 저들이 스스로 교통하여 백년 동안 무사할 것을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작은 안일 때문에 화호를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경계를 소홀히 하면서 적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줄곧 나약해지고 게을러져서 떨치지 못한다면 해마다 사신을 보내더라도 모욕만 받을 것입니다. 화호한다는 말이 나오고부터 모든 장병이 해이해지고 동남 지방의 해방(海防)은 형식적이 되고 말았으니, 적을 익숙히 여기는 해독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일에 따라 사기(事機)을 정탐하려 하거니와 적이 도리어 우리의 허실을 살피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이것이 사신을 보내는 것이 성패에는 보탬이 없고 대외적으로 부끄러움만 사게 되어 일국 신민의 기를 꺾는 까닭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내수(內修)에 스스로 다스리는 실속이 있고 나라를 지키는 데에 변란을 제압하는 책임을 다하면 시세는 만회될 수 있고 오랑캐는 염려할 것도 못된다 합니다. 그러므로 남의 나라를 살피는 자는 형세의 강약을 계교하지 않고 정치하는 근본을 먼저 논하며, 바야흐로 커지는 적의 형세를 걱정하지 않고 반드시 스스로 강해질 방도를 살핍니다. 예전부터 임금이 오랑캐를 제어하는 방책에는 경상(經常)과 권의(權宜)가 있기는 하나 우리가 할 일을 다한 뒤에야 일이 만전에서 나와 조금도 불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국사(國事)는 통곡하고 눈물을 흘릴 것이 셀 수 없이 많다 하겠으니, 이것이 신들의 근심이 적국에 있지 않고 내치(內治)가 미진한 데에 있는 까닭입니다. 군사로 말하면 군사가 없는 지 오래고, 백성으로 말하면 백성이 흩어진 지 오랩니다. 인재는 죄다 잘 쓰여지지 못하고 인심은 배반하는 뜻을 벗어나지 못하며 학문이 밝지 않고 의리가 어두워 천박한 풍속이 날로 심해지고 경박한 풍습이 점점 더해 가니, 접때 성묘(聖廟)의 변이 있었던 것도 그 중의 한 가지입니다. 【지난 여름 실지(失志)한 무리가 어두운 밤을 타서 조정 진신(搢紳)의 성명을 문묘(文廟)의 벽에다 늘어 쓰고서 매우 방자하게 헐뜯으면서 궁위(宮衛)의 비밀한 일을 언급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수직(守直)한 관노(館奴)를 고치(拷治)하고 초사(招辭)에 관련된 생원(生員) 정언규(丁彦珪)·정언선(丁彦濬) 등을 여러 날 동안 가두었는데, 상이 특별히 명하여 전석(全釋)하였다. 】 인심이 이러하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듣건대, 기묘년간에 불령(不逞)한 무리가 몰래 조광조(趙光祖)의 성명을 정부(政府)와 간원(諫院)의 문에 적고 헐뜯었는데 이윽고 북문(北門)의 변100) 이 있었다 합니다. 지금은 다행히 백일(白日)이 중천(中天)하여 도깨비가 두려워하나, 청조(淸朝)의 수치는 대단히 심합니다. 내치가 이렇게 미진한 것을 어떻게 이웃 적에게 듣게 하겠습니까. 반드시 교화를 밝혀 인심을 맑히고, 기강을 세워 군정(軍政)을 닦으며, 미천하여 버려진 인재를 널리 찾고, 거꾸로 매달려 고할 데 없는 백성의 고통을 잘 돌보아, 공도(公道)가 행해지고 사유(四維)가 펴지게 한다면, 도리에 바른 백성이 다 웃어른을 위하여 죽을 마음을 가져서 수족(手足)이 두목(頭目)을 호위한다 하는 비유도 부족할 것입니다.
아아, 지극한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닦을 도리를 다할 방법을 생각하고, 지극한 아픔이 몸에 있는 것을 절실하게 여겨 스스로 강해질 방도를 다할 방법을 생각하여, 와신 상담의 일념이 오래도록 게을러지지 않고 위의 마음이 먼저 그 중대한 것을 정하신다면, 보고 느끼는 사이에 인심이 절로 굳어지고 사기가 백배하여 지킬 만하여 지키고 싸울 만하여 싸울 것입니다. 이런 뒤에야 적을 복종시킬 수 있고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익(益)이 순(舜)을 경계하기를 ‘태만하지 않고 황음하지 않으면 사방의 오랑캐가 와서 조회할 것이다.’ 하였고 《시경(詩經)》에 문왕(文王)을 기려 ‘초치(招致)하고 내부(來附)시켜 사방이 업신여기는 일이 없다.’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성신(聖神)은 유의하소서. 처분을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箚子)를 살펴서 충모(忠謀)와 의기(義氣)를 갖추 알았다. 이런 논의가 없어서는 안되니, 참으로 아름답다. 비변사와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1책 204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27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사법(司法)
- [註 100]북문(北門)의 변 : 중종 14년(1519) 11월 밤에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 등이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들어가 임금에게 고변(告變)하여 조광조(趙光祖) 등을 처단하는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일.
○憲府箚曰:
伏以, 臣等取見備邊司文書, 則有云: "家康自以爲: ‘壬辰之變, 我軍無一人渡海。’ 又自稱, 盡反秀吉之所爲。" 夫夷狄, 卽禽獸也。 懷我好音, 革心來王, 則聖人包荒之量, 豈可逆其詐, 而拒其請乎? 遣人回答, 兼之偵探, 亦審勢處權之一道也。 然而, 日本於我, 有萬世不可忘之讎。 苟非屠(大板)〔大阪〕 之城、焚秀吉之骨, 則不足以言復讎矣。 家康代爲關白, 方執國命, 卽今事勢, 似異於秀吉時矣。 但賊情深閟, 變詐百出, 而秀頼無恙, 平氏未滅, 我之讎怨, 猶未復矣, 揆諸大義, 決難通好。 況天朝之終始拯濟者, 出於聖上至誠大義之所格, 而今乃不幸, 有此苟且之擧, 則其何以有辭於天下萬世也? 此, 志士之所以扼腕長吁, 東望裂眥者也。 朝廷亦豈不知大義之所在? 當初旣不能嚴辭斥絶, 依違遷就, 屢年于玆, 譬如爛魚開腹, 不免染手, 固知此計, 出於不得已, 而其亦戚矣。 至於陵寢之禍, 慘不忍言, 斯得正刑, 庶可以少洩神人之憤。 而夷我宗社, 禍及山陵者, 實是巨魁之罪。 今也, 只得一二俘賊, 而有若獲巨魁者然, 不已過乎? 且我氣勢, 不足以制其死命, 而便從我言, 縛而送之, 其縛送之意, 豈徒然而已哉? 如以縛送爲納款之功, 又以縛送爲責報之地, 則將何以應之? 遣使之後, 或事機變遷, 或要入貢天朝、或請歲遣朝倭, 則應變之策; 善後之圖, 不可不早慮而審定之也。 矧今家康之狡, 不下秀吉, 我未嘗致書, 而渠以復書自稱, 我之所言者, 陵寢之賊, 而渠以一件事泛對。 夷狄之言, 雖難盡責以禮, 其情亦極叵測。 又安知前頭之事, 有甚於此乎? 使家康出於嚮德慕義而止, 則可矣, 如使家康試我而爲此, 則今日之家康, 卽明日之秀吉, 豈不大可虞哉? 天若祚宋, 必無此事, 臣等過慮, 不覺寒心。 嗚呼! 難信者夷狄; 難恃者和好, 禦敵之道, 莫如自强, 能守而後言戰; 能戰而後言和。 使我威聲有截, 國勢自固, 則我不欲和, 而彼自和; 我不欲通, 而彼自通, 可保百年無事。 如或恬於小安, 而謂和可恃, 忽於不戒, 而謂敵可信, 一向委靡, 偸惰不振, 則雖按歲遣使, 徒取侮而已。 自和說之行, 大小將士, 渙然解體, 東南海防, 只存陰套, 狃賊之害, 一至此哉? 我欲因事, 偵探事機, 而賊之反察我虛實, 亦安保其無也? 此, 遣使之無益於成敗; 有愧於大義, 而沮一國臣民之氣者也。 臣等竊聞之, 內修有自治之實; 保邦盡制亂之責, 則時勢可以挽回, 夷狄不足爲恤。 故, 觀人之國者, 不計强弱之勢, 而先論出治之要, 不虞方張之敵, 而必審自强之術。 自古帝王馭夷之策, 雖有經權, 而能盡在我之道然後, 事出萬全, 動罔不吉矣。 今之國事, 可謂痛哭流涕者, 難一二計。 此臣等之憂, 不在於敵國, 而在於內治之未盡也。 以言乎兵, 則無兵久矣; 以言乎民, 則民散久矣。 人材未盡修擧; 人心未免携貳, 以至學術不明; 義理晦塞, 澆漓之俗日甚; 浮薄之習漸長。 頃者聖廟之變, 亦其一也。 【前夏失志輩, 乘暗夜, 列書朝紳姓名於文廟壁上, 極肆詬詆, 至侵宮闈密事。 於是, 拷治守直館奴, 辭連生員丁彦珪、丁彦璿等, 囚繫之累日, 上特命全釋。】 人心如此, 何事可爲? 臣等嘗聞, 己卯年間, 不逞之徒, 潛錄趙光祖姓名於政府、諫院之門, 而醜詆, 俄有北門之變。 今幸白日中天, 魑魅破膽, 而淸朝之羞辱, 固已甚矣。 內治之未盡如此, 其何以使聞於隣敵乎? 必也, 明敎化而淑人心; 立紀綱而修軍政, 廣詢人材於側陋遺棄之中; 克恤民隱於倒懸無告之地, 使公道行; 四維張則直道之民, 咸懷死長之心, 而手足之於頭目, 不足喩矣。 嗚呼! 以至讎未復爲恥, 而思所以盡自修之道; 以至痛在身爲切, 而思所以盡自强之術, 薪膽一念, 久而不懈, 上心先定乎其大者、重者, 則觀感之間, 人心自固, 士氣百倍, 可守而守; 可戰而戰。 夫然後, 敵可使服; 國可使安。 益之戒舜曰: "無怠、無荒, 四夷來王。" 《詩》之贊文王曰: "是致、是附, 四方無侮。" 伏願聖神留意焉。 取進止。
答曰: "省箚, 具見忠謨義氣。 此論不可無也, 良用嘉焉。 當與備邊司, 議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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