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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202권, 선조 39년 8월 6일 임인 2번째기사 1606년 명 만력(萬曆) 34년

원접사로서 조사를 접대한 대제학 유근을 인견하여 대화하다

대제학 유근(柳根) 【우승지 이형욱(李馨郁), 가 주서 민호(閔護), 사관 조명욱(曺明勖)·유호증(兪好曾). 】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원접사(遠接使)로 먼 곳을 돌아다녔으니 얼마나 수고로왔는가? 조사(詔使)를 접대함에 있어서 오로지 경의 수고가 컸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조사가 의주(義州)에 이르러 복통이 일어났고 중강(中江)에 이르러서는 병세가 심하여 신이 그 때문에 염려하였습니다. 상사(上使)는 천천히 가려 하고 부사(副使)는 그의 아버지가 중로(中路)에 이르렀기 때문에 행색이 급하였습니다. 차연관(車輦館)에 이르렀을 때 비가 퍼부어 신이 새벽에 일어나 양사(兩使)에게 문안하니 ‘상사는 머물려고 하였으나 부사는 먼저 길을 떠나고 싶어 양책(良策)까지 달려 빨리 도강(渡江)할 계획으로 단번에 세 참(站)을 지났기 때문에 병이 났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의술을 안다고 들었는데 그 의술이 어떠하던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진맥하여 내린 처방을 의관(醫官)에게 보였더니, 의술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조사는 의술을 아는 자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의 사람됨은 어떠하던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조사의 성품이 너그러워 지나는 길에 별로 까다롭게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사가 상사를 압도하던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았습니다. 상사는 장원이었고 부사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번 함께 올 때에 어떤 일을 부사가 반드시 상사에게 치사하면 상사는 잠자코 있고 회사(回謝)하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보면 상사가 부사를 압도함이 분명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건대 상사가 먼저 하지 않고 부사가 먼저 하니 어찌 상사와 부사 사이가 이러한가?"

하니, 이형욱(李馨郁)은 아뢰기를,

"중국 사람들은 대개가 이러하니 이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유근은 아뢰기를,

"상사는 우리 나라 사람을 대하기를 친구와 다름없이 하였습니다. 지나는 일로에 어찌 경멸할 일이 없었겠습니까마는 반드시 은근히 치사하고 한 마디도 꾸짖는 일이 없었으며, 비단으로 자리를 편 것을 보면 거두고 밟지 않았으니, 대체로 사람됨이 부처님의 자비를 숭상하여 그런 것입니다. 혹시 말썽을 일으키는 가정(家丁)이 있으면 금하기를 마지 않았으며, 도강(渡江) 이후에도 아랫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스스로 준비하여 먹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가 그대를 매우 후히 대한 것은 그의 환심을 얻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처음 의주를 떠날 때 신이 행례(行禮)하기를 청했더니, 조사가 ‘이런 빗속에 어떻게 행례를 하겠는가.’ 하고, 곧 그가 동팔참(東八站)을 지나오면서 지은 오언율(五言律) 선자시(扇子詩) 20수를 내보였습니다. 이튿날 나올 때에 신이 곧 차운하여 바쳤더니, 조사가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출발하였는데 이로부터 대우가 매우 후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장은 누구와 비교가 되던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공용경(龔用卿)보다 나았습니다. 이 사람은 한림(翰林) 중에서 글에 능통한 자입니다. 명예가 재주보다 과하기 때문에 중국 사람에게 글을 잘하는 사람을 물으면 언필칭 주 한림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법(書法)은 어떠하던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마음 먹고 쓰면 좋습니다. 의주에 와서 ‘수복강녕(壽福康寧)’ 네 자를 써서 신의 행차에 보냈는데, 대체로 재주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또 상이 이르기를,

"화격(畫格)도 안다고 하던데 그러한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화격도 잘 안다고 하지만 그린 것을 보니, 꼭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사는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혹시 술 좋아하는 자를 만나면 서로 얼굴을 잊을 정도로 권하였지만, 부사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부사가 ‘통군정(統軍亭)의 이름이 온당치 못한 듯하다. 지난날에는 강 건너에 오랑캐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지만 지금은 천하가 한 집이니 통군이라고 할 것이 무엇인가? 공진정(控津亭)으로 이름을 짓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지만, 끝내 액자를 걸지 않고 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사도 시를 알던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부사가 상사에게 왕래하는데 그의 가정(家丁)들이 ‘양야(梁爺)께서는 글을 몰라 차술(借述)하려고 이같이 왕래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사의 시는 염려(艶麗)하던가, 부섬(富贍)하던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부섬한 점은 있었지만 염려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가 쓰는 문자는 시가(詩家)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하지만 중국의 시는 우리 나라의 시와는 크게 다르다. 우리 나라는 문체만 숭상하고 중국의 시는 건실(健實)한 듯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행문(行文)으로 말하면 중국의 문장은 호한(浩汗)하고 우리 나라의 문장은 비졸(卑拙)하다."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행문은 중국의 장기(長技)로서 우리 나라는 많이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행문이 매우 옹졸한데 근래 시취(試取)한 문장은 더욱 좋지 않으니, 소지(所志)와 무엇이 다른가."

하니, 이형욱이 아뢰기를,

"난리 뒤에 여항간(閭巷間)에 책이 없어서 사람들이 고서를 읽지 못하기 때문에 글을 짓는 것도 부화하고 천박함을 면치 못합니다."

하고, 유근은 아뢰기를,

"지금 사람들은 다만 과거에서 시취하는 글만 읽기 때문에 세상에 따라 더욱 격하되어 떨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중국 사신에게 차운한 시는 모두 경이 지은 것인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모두 신이 지은 것입니다. 다만 회문시(回文詩)는 허균(許筠)을 시켜서 지었고 파자시(破字詩)는 이지완(李志完)을 시켜서 지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유람할 때 여러 재상들이 지은 것은 모두 스스로 지은 것인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문장에 능통한 재상은 각자 지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글씨 획이 매우 약하고 중국은 필력이 강하다. 우리 나라에서 글씨에 능통한 사람으로는 한호(韓濩)만한 사람이 없으나 그도 미진한 점이 많다. 주사(朱使)075) 가 작은 부채에 난정기(蘭亭記)를 썼는데 작은 글씨가 매우 정묘하였다. 우리 나라의 글씨에 능통한 자라도 어찌 그에 미치겠는가. 다만 큰 글씨는 작은 글씨처럼 정묘하지 않았다."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주사한호의 글씨를 보고, 이것은 난정기와 흡사하니 비록 옛날 글씨를 잘 쓴 자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열읍의 수령들로 조사가 내왕할 때 특별히 태만한 일은 없었는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수령들이 혹 잘하고 잘못함도 있었으나 태만한 과실은 없었습니다. 연로 천리에 교량과 도로를 새롭게 닦아놓고 접대하는 차비도 모두 갖추어 조사가 ‘귀국은 조사를 접대하는데 힘을 다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전에 고 사신(顧使臣)076) 가 ‘조선 사람들은 예의를 알아 중국 사람이라도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그전에 원접사 이호민(李好閔)이 지은 시를 조사가 혹 고치기도 하였는데, 지금 조사가 그말을 듣고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을 더욱 후하게 대한 것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사가 처음 올 때에 열읍의 시설을 모두 걷어갔다고 하는데 조사로서 천자의 명을 받들고 제후국에 나온 자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또 소경을 데리고 왔다 하는데 이것은 무슨 심산인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고천준이 돌아갈 때 그가 데리고 온 소경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는데 우리 나라 사람이 급히 구출하지 않았으니, 이는 사실 싫고 괴로와서 그랬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천준이 관반(館伴)에게 ‘그대 나라 임금은 성의를 다하여 나를 접대하는데 너희들은 그렇지 않다.’ 하였고, 심지어 가정들까지도 말채찍으로 우리 나라 사람을 때렸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였는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신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번 조사가 나올 때는 은이나 인삼 따위의 물건을 드리면 ‘어찌 이런 물건을 주는가.’ 하고 늘 치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사는 사람됨이 어떠하던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사람됨이 청렴하지만 국량은 적은 자입니다."

하였다. 유근이 이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한강에서 유람한 이튿날 신이 문안하고 들어가 절을 하였더니, 상사가 ‘어제 귀국 백관들의 정문(呈文)을 보았는데 별다른 사정은 없는가?’ 하고, 작은 종이 쪽지에 글씨를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이 함부로 전하는 말이 「광해군(光海君)의 장인이 상자(相者)와 함께 공모하여 적통(嫡統)을 빼앗으려고 한다. 」 하였는데, 이는 무슨 일인가?’ 하기에, 신이 곧바로 응답하기를 ‘우리 나라에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 하니, 상사가 ‘내가 전일 이런 말을 듣고 항상 의심하였는데 지금 국왕을 보니 권신에게 견제되지는 않겠다. 어찌 이같은 일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이 사실을 곧 아뢰려고 하였으나 그때 상께서 접대하는 일이 바빠 감히 아뢰지 못하고 다만 한두 대신들에게만 비밀히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처음 듣는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중국 사신이 중국에서 이런 말을 들었는가, 우리 나라에 와서 처음 들었는가? 또 상자(相者)란 관상을 보는 사람을 두고 한 말인가, 상신(相臣)을 두고 한 말인가?"

하자, 유근이 아뢰기를,

"신도 자세히 알 수 없어 신이 잠깐 삼공(三公)에게 말했더니,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이 ‘이것은 반드시 상신을 가리켜 한 말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나도 권신(權臣)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재상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였다. 유근이 아뢰기를,

"이 말을 한 사람은 필시 유자신(柳自新)을 미워하여 한 말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간신이 사설(邪說)을 날조하여 남의 귀를 의혹시킨 것이다."

하였다. 유근이 아뢰기를,

"옛날에 의봉(儀封) 사람이 처음 공자(孔子)를 보고 앞으로 하늘이 공자로서 목탁(木鐸)을 삼을 것이라고 칭찬하였으니, 보고 느낀 것으로 인하여 얻은 것이 깊은 것입니다. 지금 중국 사신이 주상을 한 번 보고서 마음으로 깨닫는 바가 있어 전에 들은 것으로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았으니, 중국 사신의 주상을 흠모하는 마음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사(朱使)는 사람됨이 관대하여 그와 같이 말했으나 부사는 무슨 뜻이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에 필시 이런 말이 있을 것이니, 매우 염려스럽다."

하였다. 유근이 아뢰기를,

"신도 생각해 보면 그 말의 출처를 헤아릴 수 없고 간인들이 북경에 갔을 때 괴상한 말을 만들어 냈는가 의혹이 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문(呈文)의 일도 온당치 못한 듯하다. 배신(陪臣)이 군부(君父)의 뜻도 모르고 먼저 주문을 올리는 것이 옳은가. 주사가 우리 나라의 민심이 이렇다는 것을 알더라도 일개 조사(詔使)가 과연 세자를 봉하는데 도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하여 명나라의 시를 보지 않았는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니 말을 하라."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명나라의 시는 우리 나라의 시와 다름이 없기 때문에 신이 보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시는 보지 않았지만 문(文)도 보지 않았는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문도 보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종사관 허균(許筠)조희일(趙希逸)은 그 재주가 필시 넉넉할 것이다."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허균은 시격(詩格)은 높지 않지만 총명하고 박식하여 중국 사신을 접대함에는 이 사람보다 나은 자가 없었습니다. 조희일은 재주가 많지만 제술(製述)이 미숙합니다. 이지완(李志完)도 재주가 있어 잘 합니다."

하였다. 미시(未時)에 파하고 나갔다.


  • 【태백산사고본】 110책 202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246면
  • 【분류】
    외교-명(明) / 어문학-문학(文學) / 변란-정변(政變) / 사법-치안(治安)

  • [註 075]
    주사(朱使) : 상사 주지번(朱之蕃).
  • [註 076]
    고 사신(顧使臣) : 고천준(顧天峻).

○引見大提學柳根 【右承旨李馨郁、假注書閔護、史官曺明勗ㆍ兪好曾。】 上曰: "卿以遠接使, 跋涉遠地, 不亦勞乎? 接待詔使, 專賴卿力, 予用嘉焉。" 柳根曰: "詔使抵義州, 得腹痛, 到中江, 病勢滋甚, 臣以此念之矣。 上使欲緩緩而去; 副使其父, 至中路, 故行色怱怱。 到車輦館, 雨下如注。 臣晨起, 問安于兩使曰: ‘上使欲留, 而副使先欲登途, 馳及良策, 期欲指日渡江, 仍越三站, 以此致傷。’ 云矣。" 上曰: "聞, 天使曉醫術云, 未知其術何如?" 曰: "以診脈命藥者, 示醫官則必以知醫術稱之。 大槪, 詔使知醫術者也。" 上曰: "詔使爲人, 未知何如也。" 曰: "詔使之性素寬, 所經一路, 別無苛察之弊矣。" 上曰: "副使壓倒上使乎?" 曰: "不然。 上使爲壯元; 副使居其下。 今此同來時, 至某事, 副使必致謝于上使, 則上使默然, 不爲回謝。 由是見之, 則上使之壓倒副使明矣。" 上曰: "予觀之, 上使不前, 而副使先之, 是何上副之間, 而如此者乎?" 李馨郁曰: "中原之人, 大凡如此, 此不可怪耳。" 曰: "上使待我國人, 有若親舊者然。 所經一路, 豈無慢忽之事, 而必致謝慇懃, 無一言呵罵。 見錦席布地, 則亦卷之不踏。 大槪爲人, 崇佛慈悲而然也。 如有家丁作挐者, 則必禁之不已。 渡江以後, 亦令率下, 皆自備而食之。" 上曰: "詔使待卿甚厚, 無乃得其歡心而然耶?" 曰: "初發義州時, 臣卽請行禮, 詔使曰: ‘如此雨中, 何敢行禮乎?’ 旋出所製二十首東八站五言律扇子詩示之。 翌日出來時, 臣卽次呈, 詔使覽而悅之。 卽令乘轎駕馬, 自此而待之頗厚焉。" 上曰: "文章可比何人歟?" 曰: "勝於龔用卿矣。 此, 翰林中能文者也。 名過於才, 故天朝之人問能文者, 則言必稱朱翰林。" 上曰: "書法亦何如?" 曰: "若致意書之, 則好矣。 至義州, 寫壽福康寧四字, 送于臣行, 大槪有才者也。" 上曰: "亦知畫格云然耶?" 曰: "畫格, 無不知之矣。 觀其所畫, 則未必好矣。 上使好飮酒, 若遇好飮者, 勸醉忘形; 副使則不好酒矣。 副使曰: ‘統軍亭之名, 似爲未穩也。 曩昔隔江有胡虜, 故以此名之, 今則天下一家, 何以謂統軍乎? 以控津名之何如?’ 終不揭額而去矣。 上曰: "副使亦知詩乎?" 曰: "副使常往來于上使, 其家丁曰: 梁爺不知文, 欲爲借述, 而往來如是耳。" 上曰: "上使之詩艶麗乎? 富贍乎?" 曰: "富贍則有之矣; 艶麗則不足矣。 其所用文字間, 亦非詩家語也。" 上曰: "詩則予未能知之。 然, 中國之詩, 與我國之詩, 大相不同。 我國則徒尙文彩, 而中國之作, 頗似健矣。" 上曰: "以行文言之: 中國之文, 浩汗; 我國之文卑拙矣。" 曰: "行文, 中國之長技, 而我國則多不及矣。" 上曰: "我國人行文甚拙, 而近來試取之文, 尤不好。 其何異所志乎?" 李馨郁曰: "亂離以後, 閭巷之間, 書籍絶乏, 人不得讀古書。 故, 其所製, 不免浮淺者也。" 曰: "今之人, 只讀科擧試取之文。 故, 與世愈下而不振也。" 上曰: "卿之次華使詩, 皆卿所製乎?" 曰: "皆臣所製也。 但回文詩, 令許筠製之; 破字詩, 令李志完製之。" 上曰: "天使遊觀時, 諸宰所製, 皆自作者乎?" 曰: "能文宰相, 則各自製之耳。" 上曰: "我國人書畫甚弱; 中國則多筆力矣。 我國能書者, 莫如韓濩, 然多有未盡之處。 朱使《蘭亭記》於小扇, 細字極妙。 我國能書者, 豈能及之? 但大字, 不如細字之精妙矣。" 曰: "朱使韓濩書, 嘆美曰: ‘此, 逼眞於《蘭亭》。 雖古之善寫者, 莫過於此也。’" 上曰: "列邑守令, 當詔使之來往, 別無怠慢之事乎?" 曰: "守令或有能不能, 然皆無怠慢之失。 沿路千里, 橋梁、道塗, 一新修治, 接待之具, 亦盡措辦。 詔使每稱: ‘爾國待詔使竭力。’ 云矣。" 上曰: "前者顧使曰: ‘朝鮮人知禮義, 雖中國之人, 莫能及之。’ 云。" 曰: "前遠接使李好閔所製之詩, 顧使或改之。 今此詔使聞其說, 以不快, 故待我國之人, 尤極款厚耳。" 上曰: "顧使當初出來時, 列邑鋪陳, 盡爲撤去云。 凡詔使奉天子之命, 出來侯邦者, 果有如此事乎? 且瞽者亦帶來云, 是誠何心哉?" 曰: "顧使還時, 其率來瞽者, 失足入水, 而我國之人不爲奔救, 此實厭苦而然也。" 上曰: "顧使謂館伴曰: ‘爾國王盡誠待俺, 而爾陪臣, 則不然矣。’ 至於其家丁等以馬鞭擊我國人云, 未知然耶?" 曰: "臣亦聞此矣。 今詔使出來之時, 以銀、蔘等物納之, 則必也, ‘是何以此物遺之乎?’ 每爲致謝矣。" 上曰: "副使爲人, 亦何如也?" 曰: "其爲人也, 廉介, 小量者也。" 仍曰: "天使遊觀於漢江翌日, 臣問安, 仍入拜則上使曰: ‘昨日見爾國百官呈文, 無他事情乎?’ 仍書小紙端以給曰: ‘有人妄傳, 光海妻父與相者, 共謀奪嫡, 是何故耶?’ 臣卽答曰: ‘我國安有如此事乎?’ 使曰: ‘俺前聞此言, 常以爲疑。 今見國王, 必不爲權臣所制。 安有如此事乎?’ 臣卽欲上達, 其時自上接待煩劇, 未敢卽啓, 只密言于一二大臣矣。" 上曰: "予今始聞之, 極爲驚怪。 華使在天朝, 得聞此言乎? 到我國, 始得聞之乎? 且所謂相者, 指相人者言乎? 指相臣而言乎?" 曰: "臣未能詳知。 臣暫言于三公, 則左議政奇自獻曰: ‘此必指相臣而言之。’ 云云。" 上曰: "然。 予亦意其指權臣而言矣。 但未知指某相也。" 曰: "爲此言者, 必惡柳自新而發也。" 上曰: "此亦必奸臣捏造邪說, 以惑人聽也。" 曰: "昔者儀封人, 一見夫子, 而稱之曰: ‘天將以夫子爲木鐸。’ 其得於觀感者深矣。 今者華使, 一見 主上, 而釋然於心, 遽以前所聞者, 少無疑慮, 華使之欽慕 主上之心, 於此可見矣。" 上曰: "朱使爲人寬仁, 雖如是言之, 副使復有何意耶。 中朝必有此言, 可慮也。" 曰: "臣亦思之, 未測其言之所自出。 而疑惑奸人赴京之時, 做出怪戾之言也。" 上曰: "呈文之事, 似爲未便。 陪臣未知君父之意, 先以文呈之, 可乎? 朱使雖知我國群情之如是, 一詔使, 果有助於封儲事乎?" 上又曰: "卿何不見詩乎? 必有所以, 卿其言之。" 曰: "詩, 無異於東人, 故臣不見之矣。" 上笑曰: "詩則不見, 文亦不見乎?" 曰: "文亦不見也。" 上曰: "卿之從事官許筠趙希逸, 其才必有餘矣。" 曰: "許筠詩, 格不高。 然, 聰敏博覽, 待華使, 無愈此人。 趙希逸亦多才氣, 而但製作, 未熟底耳。 李志完亦有才氣能。" 未時, 引見罷黜。


  • 【태백산사고본】 110책 202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246면
  • 【분류】
    외교-명(明) / 어문학-문학(文學) / 변란-정변(政變) / 사법-치안(治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