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적의 현성 공격에 관해 함경도 관찰사 이시발이 치계하다
함경도 관찰사 이시발(李時發)이 치계하기를,
"홀적(忽賊)이 와서 현성을 공략하다가 이튿날 물러갔는데, 너무나 무단한 짓 같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들 자체에서 사사로이 화친한 일이 있었는가 싶었고, 또 성안에 들어가 수비하고 있는 수가 몇 명이나 되며 서로 싸운 절차가 또 어떠하였는가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북병사 이시언(李時言)에게 통첩을 보내, 자세히 탐방하여 사실대로 빨리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시언이 회답한 내용에 의하면 ‘병사가 훈융 첨사(訓戎僉使) 원수신(元守身)으로 하여금 출신(出身) 이보인(李輔仁) 등을 염탐꾼으로 정하여 현성으로 들여보내 사정을 은밀히 살피게 하였다. 추호(酋胡)들이 모두 말하기를, 「23일 야간에 뜻밖에 습격해 왔다. 추호 소자로(小者老)가 밖에 나갔다가 붙잡혔는데, 홀적 등이 『구을이(仇乙伊)를 허락한다면 싸우지 않고 포위를 풀겠다. 』고 성안에 알려왔다. 이른바 구을이란 오랑캐의 말로서 싸우지 않고 서로가 화해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화해는 결코 허락할 수 없다. 꼭 서로 싸워서 승부를 가리자. 』고 회답하였더니, 홀적이 『소자로가 이미 붙잡혔으니 화해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좋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소자로가 소를 보내 그의 몸과 바꾸게 해달라고 애걸하였기 때문에 소자로의 사정을 가엾게 여겨 소 한 마리를 주고 교환해 왔을 뿐이고, 별로 군대를 물리라고 찾아가 부탁한 것은 없었다. 24일 먼동이 틀 무렵에 홀적이 긴 사닥다리 70여개를 만들어 두 곳으로 나누어 대고 침범하여 일시에 성으로 오르려고 하였다. 그때에 활을 쏘기도 하고 무기로 치기도 하면서 마음을 다해 힘껏 싸웠기 때문에 이기지 못하고 퇴군하였다. 서로 싸울 때에 화살을 맞은 홀적들은 모두 갑옷이 뚫리어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망자가 11명이나 되었는데, 2명은 실어 갔고 9명은 들판에 묻어 놓았다. 그런데 군사와 말들이 어지럽게 짓밟아버렸으므로 묻은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으며, 화살을 맞은 자도 그 수효를 알수 없다. 」고 하였다. 성을 지킨 오랑캐는 성에 원래 사는 오랑캐가 3백여명이고, 심처야인인 시자은다(時者隱多)·설리다(雪里多) 두 부락을 합해서 30명이고, 부여지(夫汝只)의 추호 양쌍아(楊雙阿) 부자(父子) 및 신소라(新所羅) 부락이 20여명이고, 서응구내(鋤應仇內)가 15명이고, 망견(望見) 부락이 10여명인데, 원래 사는 인원에다 더하면 합계가 375명이다. 화살을 맞은 31명에서 2명은 즉사하였고, 29명은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화살에 맞아 상처난 곳을 이보인에게 서로 앞을 다투어와 보였다.
성안에서 힘껏 싸울 것을 주창한 자는 추장 오을고대(吾乙古大), 대자로(大者老), 아상(阿尙), 아만(阿萬), 호대질(浩代叱), 이년로(耳年老) 등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참작하여 보건대, 서로 싸우다 이롭지 못하자 물러간 것은 헛말이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오래 포위하여 항복을 받지 아니하고 한 번 싸워보고 갑자기 물러간 까닭을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현성의 호인이 처음에 사채(沙砦)가 함락됨을 보고 겁을 먹어 모두 흩어지고 들어가 지킨 자는 장정과 노약자를 합해서 3백여 명이었습니다. 홀적이 불리하여 돌아간 뒤에야 뿔뿔이 떠났던 여러 호인들이 모두 현성이 믿을 만하다고 여기고 도로 모여들어 자리를 잡고 함께 지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호적이 오는 가을에 다시 공략하려고 은밀히 서로 상의하고 있다고 하니, 앞으로 사태의 기틀이 어떻게 돌아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홀적이 이미 건퇴(件退)로 소굴을 삼아 회령(會寧), 종성(鍾城)과 대치하고 있으며, 또 사채에 웅거하여 온성(穩城)을 견제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앞으로 현성을 빼앗아 웅거하여 양경(兩慶)과 맞서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형세를 연결해 강 밖에서 웅거할 꾀를 꾸밀 것은 틀림없을 것이니 만일 현성이 다시 이 적들에게 점거된다면 국경에 인접하여 절박한 우환이 건퇴나 사채에서 와 같을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의 일이 참으로 우려스러운 점이 많으므로 현성을 보존할 계책이 시급하지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이 바야흐로 병사 이시언에게 은밀히 통지하여 수하(水下)의 여러 부락으로 하여금 이번 승기를 타서 다시 굳게 지킬 계획을 세우라고 권유하라고 할까 합니다.
이번에 현성을 지켜낸 추호 등에게 포상의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런데 홀호가 이러한 사실을 듣게 되면 원망할 것도 같고, 만일 논상하지 않는다면 역시 뒷날의 일을 권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조치할 것인지 조정에서 헤아려 지휘하여 주십시오."
하니,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0책 20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233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咸鏡道觀察使李時發馳啓: "忽賊來攻縣城, 翌日退歸, 太似無端。 臣慮或有自中私和之事, 且未知城中入守者幾許, 相戰節次又復何如, 移文北兵使李時言處, 詳細探訪, 得實飛報矣。 今據李時言回報辭緣則 ‘兵使令訓戎僉使元守身, 定送出身李輔仁等, 入送縣城, 密察事情, 則酋胡等皆言: 「二十三日夜間, 不意來襲。 酋胡小者老出外被擄, 忽賊等送言城中曰: 『仇乙伊許給, 則不戰自解。』云云。 所謂仇乙伊, 胡語, 不戰相和之意。 答曰: 『仇乙伊決不可許給。 固爲相戰, 以決勝負。』云云, 則忽賊曰: 『者老, 旣爲被捉, 仇乙伊不給, 則不好。』云云者老哀乞給牛, 刷還其身, 故憐其者老之情, 牛一隻許給, 刷還而已, 別無謁攀退兵之理。 二十四日黎明, 忽賊長梯七十餘造作, 兩處分犯, 一時登城之際, 或射或擊, 盡心力戰, 故不勝退兵。 相戰時忽賊中箭者, 無不穿甲, 而墮落致死者十一名, 二名載去、九名野中埋置, 而軍馬亂踏, 不知埋處, 中箭者不知其數。」云。 守城胡則縣城元居胡三百餘名, 深處時者隱多、雪里多兩部合三十名, 夫汝只酋胡楊雙阿父子及新所羅部落二十餘名、鋤應仇乃十五名、望見部落十餘名, 疊入元居, 合計三百七十五名。 中箭者三十一名內, 二名卽死、二十八名不至死亡, 中箭傷處, 爭相來示於李輔仁處。 城中首倡力戰者, 則酋長吾乙古大、大者老、阿尙、阿萬、浩代叱、耳年老等。’ 云。 據此參詳則其相戰不利退歸, 似爲不虛, 而不爲久圍取服, 一戰遽退, 未曉其故。 聞, 縣城之胡, 初怯於沙砦之見陷, 盡皆散去, 入守者, 壯弱竝三百餘名。 及至忽賊不利而還然後, 散去諸胡, 皆以縣城爲可恃, 還聚入據, 以爲共守之計云。 忽賊密以秋來再攻相議, 前頭事機, 未知如何。 大槪忽賊, 旣以件退爲巢穴, 以對會、鍾, 又據沙砦, 以掣穩城, 必將取據縣城, 以敵兩慶。 其連絡形勢, 以爲雄置江外之計, 不容但已, 若縣城更爲此賊所據, 則其密邇, 切迫之患, 不但如件退、沙砦而已。 此後之事, 誠多可虞。 保全縣城之策, 在所汲汲, 而但在我無如之何也已。 臣方密通兵使李時言處, 使水下諸部, 乘此一勝, 更圖堅守事, 勸諭計料。 今此縣城守城酋胡等, 似不無奬賞之擧。 而忽胡聞之, 或以爲怨, 若不論賞, 則亦無以後事之勸, 何以處之? 朝廷籌度指揮事。" 啓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110책 20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233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